소설리스트

곤륜마협-322화 (321/569)

2부 51화

누가 누굴 걱정해요?

‘밀약(密約)이라.’

정광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구린 냄새가 풀풀 나지 않는가?

과거 가균에게 들었을 땐 어떤 비밀스러운 약조를 의미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모용회가 토설하는 걸 보니 조직 이름인 게 분명했다.

‘얼마나 뒤가 구린 애들이길래 이름이 그따위일까.’

들어봐야 귀가 더러워질 것 같았지만 그래도 알아야 했다.

-밀약과 손을 잡은 거야, 아니면 거기에 속한 거야?

“……밀약은 각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힘을 합친 연맹입니다. 저는 그중 한 축을 맡고 있습니다.”

-영감처럼 허황된 꿈을 꾸는 모임이구나. 나머지는 어디의 누군데?

“……끄윽.”

모용회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혼이 제압당한 상태인데도 절대로 말해선 안 된다는 의지가 아직 남아 있다는 얘기였다.

정광의 미간에 골이 생겼다.

‘대가 세네. 천천히 해야겠어.’

강하게 몰아붙였다간 언제 뇌가 녹아버릴지 몰랐다.

이럴 땐 살살 달래야 하는 법.

-그래.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가자고. 손자 이름이 뭐였지?

모용회는 즉시 답했다.

“모용중입니다.”

-나 마음에 안 들지?

“증오합니다. 천하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고 싶습니다.”

-좋아, 아주 잘하고 있어. 그렇게만 계속 가자고. 항마주(降魔珠)가 뭔지 알아?

“모릅니다.”

정광은 자신의 소매를 걷어 올려 항마주를 직접 보여줬으나 모용회는 여전히 모른다고 했다.

-망했네. 조양사(朝陽寺) 있잖아. 정말 다 태워 버린 거야? 아무것도 안 남기고?

이어지는 모용회의 대답에 정광의 안색이 밝아졌다.

“전부 태운 건 아닙니다.”

-뭘 챙겼지? 어디 있어?

“제가 갔을 때 중놈들 중 일부가 불경들을 지하 비밀 서고로 옮기고 있었습니다. 어차피 파묻힐 터라 손대지 않았으니 남아 있을 겁니다.”

정광의 표정이 애매하게 변했다.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단서가 있으려나.’

그야 가보면 알게 될 일.

막혔던 질문으로 다시 넘어갔다.

-살살 갈 테니까 마음 편히 들어. 밀약에 몽고도 포함돼 있지?

“……끄르륵. 그렇습니다.”

-아직 정체 안 물었잖아. 조금만 더 힘내자. 걔들은 언제 남하하기로 했어?

모용회는 시간은 조금 걸렸으나 약조한 시기를 토설했다.

-음. 얼마 안 남았네. 몽고에서 밀약의 한 축을 맡은 자에 대해 말해봐.

“……끄으윽.”

모용회가 또 괴로워하자 정광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이렇게 생각하자고. 영감은 내게 잡혔지?

“……그, 그렇습니다.”

-개천(開天)도 실패한 거지. 그런데 밀약의 다른 애들은 성공한다? 배 아프지 않아?

“……마, 맞습니다.”

-역시 좋은 사이는 아니구나. 내가 걔들도 망하게 해줄게. 어때?

모용회가 힘을 냈다.

“오이라트의 태사(太師) 토곤입니다.”

-응? 몽고의 황제라 할 수 있는 대칸(大汗)이 아니라? 대칸과 반목하는 오이라트의 수장이라고?

“그렇습니다.”

-흠. 의외네.

몽고는 북으로 쫓겨난 뒤 북원(北元)이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했으나 명(明) 황제의 북벌로 결국 무너졌다.

그 후 여러 부족으로 갈라졌는데, 구심점이 필요했는지라 칭기즈 칸의 피를 이은 황금 씨족을 대칸으로 추대해 하나로 뭉쳤다.

허나 그에 반하는 세력이 있었으니, 오이라트족과 그를 따르는 부족들이었다.

명 황궁을 치려면 몽고의 세력권에서 동쪽을 다스리는 대칸이 움직여야 하는데, 서쪽에 있는 오이라트 수장이 밀약의 일원이라니?

-아. 차도살인(借刀殺人).

정광은 얼마 안 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칸이 명을 공격하게 하고 뒤를 쳐서 자기가 대칸이 된다. 이런 건가?

“맞습니다.”

-어떻게 부추긴 건데?

“오이라트는 몇 년 전부터 대칸을 압박하지 않고 감숙성(甘肅省)을 두들기고 있습니다.”

정광은 과거 자신이 감숙성주에게 팔아넘겼던 황웅과 무림의용군(武林義勇軍)을 떠올렸다가 지웠다.

-일부러 대칸에게 여유를 줬구나.

“그렇습니다. 그는 능력은 없으나 야망이 큰 자입니다. 자신이 저와 손을 잡은 것으로 알고 있고요.”

-와. 진짜 나빴다. 영감도 대칸의 뒤통수를 치기로 돼 있지?

“……저보다 더 나쁜 건…….”

-그만. 그리고 또 누가 있는데? 밀약의 축들 말이야.

모용회가 입을 열려는 그때.

우우우우웅-

역천경이 울었다.

정광 역시 느꼈고.

망설임 없이 운룡을 뽑았다.

화아아악-

눈부신 금빛 광채가 일어나 벽을 투과하고 들어오는 짙은 어둠을 베었다.

화르르륵-

끄아악!

빛에 베인 어둠이 하얗게 불타며 몸부림쳤다.

그걸 본 정광의 눈이 살짝 커졌다.

‘천리마령(千里魔霊)? 아니야. 기록과는 다른데?’

순간 착각할 만큼 닮았으나 확실히 아니었다.

‘뭐야? 마기(魔氣)와 사기(邪氣)가 섞인 이 불순한 덩어리는.’

그때, 사방의 벽을 뚫고 같은 기운이 쏟아져 들어왔다.

모용회뿐만 아니라 정광까지 노리는 공격!

‘웃기네.’

정광은 한쪽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감히 누구 앞에서 마공에 사공을 끼얹은듯한 잡기를 쓴단 말인가?

‘나와!’

모용상현의 방에서 황금빛이 폭발했다.

콰아아앙!

꺄아아악!

더러운 기운뿐만이 아니었다.

그간 정들었던 방은 물론 전각까지 터져 나갔다.

정광은 모용회의 뒷덜미를 쥔 채 밖으로 빠져나왔다.

‘어디냐?’

방에 들어왔던 것들은 모두 없앴으니 그걸 보낸 놈을 잡아야 했다.

‘저긴가? 꽤 타격받았을 텐데 멀리도 갔네.’

벌써 성벽을 넘어 멀어져 가는 혼탁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것을 쫓아가려고 하는데 모용회가 피를 토했다.

“쿨럭. 쿨럭.”

‘어?’

돌아보니 모용회의 안색이 검게 죽어가고 있었다.

정광의 눈에 어이없는 빛이 떠올랐다.

‘아까 그 기운을 접하면 심맥이 끊어지게 무언가를 심어놨던 건가?’

자신의 몸을 향해 오는 건 남김없이 해치웠지만, 손이 모자라 하나는 살짝 흘렸는데 그거 살짝 스쳤다고 이 모양이 되다니.

맥을 짚어보니 가망이 없는 상태.

정광은 해야 할 일을 했다.

-영감. 어떤 놈이 손을 쓴 거지? 어서 말해. 내가 죽여줄 테니까.

모용회는 피를 토하면서도 쥐어짜듯 말했다.

“크헉. 며, 명교(明敎)…….”

-뭐? 그놈들도 밀약의 한 축이야?

“그, 그렇습니…… 끄륵.”

모용회의 몸이 축 늘어졌다.

정광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오래전에 떨어져 나간 찌꺼기가 재밌는 짓을 벌이는구나.’

명교는 과거 태조(太祖)가 명을 건국하는 데 있어 적지 않은 도움을 줬다가 토사구팽(兎死狗烹)당했던 사교(邪敎).

또한 아득한 옛날 천마신교에서 갈라져 나간 지파, 쉽게 말해 배교자(背敎者)들이었다.

* * *

모용세가주 모용오는 정성을 쏟은 만큼 성과를 거뒀다.

방계, 호족, 이민족으로 이루어진 회천회 잔당은 시간이 지날수록 모용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터무니없는 감언이설 따위 집어치우고 싸우자 하는 이도 있었으나 그야말로 일부일 뿐, 그들은 다른 이들에게 곧 제압됐다.

일이 거기까지 이르자 모용오가 위엄 있게 물었다.

“다들 마음을 정했느냐?”

망설이던 사람들 중 한 노인이 대표로 물었다.

“가주. 우리의 죄가 깊고도 깊어 당장 죽어도 할 말이 없긴 하나, 가주의 약조를 확실히 믿을 수 있도록 해주셨으면 하오.”

모용오가 웃었다.

평소의 희미한 미소가 아닌, 자신과 다른 이들의 처지를 비웃는 조소였다.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너희 때문에 본가까지 역도로 몰려 죽을 판 아니더냐. 의심 따위 벗어던지고 힘을 모아 하북성으로 달려가야 해. 몽고와 싸워 공을 올려 황상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말이다. 성의를 보이기 위해 나 역시 가야 할 상황인데 그따위 한가한 생각이나 하다니.”

“…….”

“명심해라. 믿음은 그 후에 논해야 한다는 것을. 모용만이 아니다. 요녕을 터전으로 삼는 이들이 하나라도 더 살려면 반드시 하나로 뭉쳐서 싸워야 해! 이제 상황이 이해되느냐?”

구구절절이 맞는 말이라 아무도 반박할 수 없었다.

다들 비장한 얼굴로 외쳤다.

“네! 가주!”

모용오는 모든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들 하나하나에게서 충성맹세를 받았다.

싸울 것을 주장하며 제압당했던 자들은 그 자리에서 목을 쳤다.

그들의 가문 또한 마찬가지였다.

모용오는 대평원에서 펼쳐지는 살육을 지켜보다가 신형을 돌렸다.

내상을 입은 몸으로 무리해서 그런 것인지, 그래도 한 식구였던 이들이 죽어가는 모습 때문에 그런 것인지 깊은 피로감이 엄습했다.

‘내가 설득했지만, 다시 돌아선 놈들이 너무 많아서 그런지도 모르겠구나.’

사람의 본성이야 익히 안다고 생각했거늘, 실제로 이런 일을 겪어보니 허탈하기만 했다.

이제껏 살아오며 항상 단단했던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듯한 기분이었다.

모용오는 이를 지그시 물었다.

‘이럴 때가 아니다. 모용을 살려야 해. 내 대에서 끝낼 수는 없어.’

그때, 정광이 옆에 나타났다.

“가주님. 잘 끝나신 것 같네요.”

“……그렇게 됐네.”

“그런데 왜 그렇게 힘이 없으세요? 웃으세요. 저까지 힘 빠지잖아요.”

모용오는 정광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네는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그런 편이긴 하죠.”

“어째서? 종조부…… 아니, 반란을 일으킨 수괴가 제대로 토설해서 그러나?”

정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조금 말씀하시다가 귀천하셨어요.”

“음? 자네가 그런 실수를 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정광이 어깨를 으쓱했다.

“당했어요. 한 패거리한테.”

“……!”

“그것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거든요. 가주님 집무실로 같이 좀 가시죠. 그분 시신도 거기에 모셔놨어요.”

모용오는 냉정을 회복하고 낮게 답했다.

“그러세나. 아직 보는 눈이 있으니 천천히 걸어가세.”

두 사람은 성문을 향해 걸었다.

모용오는 한동안 발걸음을 옮기다가 담담하게 물었다.

“의아해서 묻는 것이니 곡해하지 말게나. 자네는 대흥장 그 자체를 요구했고 나는 응했네. 자네가 아무리 큰 공을 세웠다 해도 역도들의 수괴이자 본가의 큰 어른이었던 그자를 외인에게 내어준다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야.”

“네. 그래서 제가 가주님 체면이 깎이지 않게 잘 처신하겠다고 했죠.”

“그런데 죽어버렸지. 자네를 탓하는 게 아닐세. 자네가 못 막는 일은 그 누구도 못 막았을 테니까. 그래서 더 궁금하네.”

“뭐가요?”

“자네의 자존심이 강한 건 천하가 다 아는데 왜 이러나? 소위 말해 물을 먹은 상황 아닌가? 분노해서 길길이 날뛰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거늘, 기분이 좋은 편이라 하니 이해가 안 가서 그러네.”

정광이 씩 웃었다.

“그런 짓을 한 놈들을 손봐줄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하니 그럴 수밖에요. 가주님은 안 그러세요?”

“……!”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고. 앞으로를 즐겨야죠. 가주님도 즐기세요.”

“…….”

두 사람은 묵묵히 걸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모용오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그리고 집무실에 도착했을 때, 모용오는 본래의 그로 돌아와 있었다.

“고맙네. 자네 덕분에 정신이 들었어. 모용회에게 무엇을 들었나?”

정광은 몇 가지만 빼고 있는 그대로 설명했다.

모용오의 표정이 점점 심각하게 굳었다.

“가관이군. 밀약? 오이라트가 대칸을 이용하는 것도 황당하건만 명교라니? 그자들이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을 줄이야.”

“재밌죠?”

“……아직 그런 경지까진 못 올랐네. 게다가 밀약을 이루는 축들이 더 있다는 것 아닌가? 우리만 알고 있을 일이 아니네. 모두에게 알려야 해. 황상은 물론 무림맹에도 말일세.”

정광도 인정했다.

조금 다르게.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마무리를 직접 지으려면 머릿수가 필요하니까요.”

모용오는 헛웃음을 흘렸다.

다른 이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말했던 건 힘을 합쳐 싸우기 위함이었건만, 정광은 자신이 직접 복수를 하기 위한 조력자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 아닌가.

“허허. 그런 이유로? 사고방식 자체가 다르군. 과연. 자네다워.”

“제 방식이 더 마음에 드시죠?”

모용오의 눈이 빛났다.

“물론. 아주 마음에 드네.”

두 사람은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그것을 행하기 위해 움직였다.

모용오는 모용세가를 정리했다.

몰살시킨 가문들의 본거지를 비초회에게 넘기기로 했다.

낭인향에게는 만족할 만한 재물을 보상으로 지급하기로 하고.

비초회도 낭인향도 그간 호족들의 본거지를 공격해서 얻은 재물에 모용오의 포상까지 더해지게 되자 더없이 만족했다.

허나 모든 이들이 좋아한 건 아니었다.

한곳에 진득하게 붙어 살 수 있는 이들이었다면 왜 마적질을 하고 유목을 할까.

그런 이들은 낭인향처럼 재물로 보상하기로 했다.

단, 확실하게 경고했다.

“한곳에 정착하면 편히 살 수 있는데 싫다 하니 어쩔 수 없지. 허나 똑똑히 듣게나. 예전처럼 약탈할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걸세. 본가를 비롯한 요녕은 큰 피해를 봤어. 그런데 또 피해를 본다? 모두 합심해서 흉수부터 없애려 할 걸세.”

잠시 쥐죽은 듯 지내다가 약탈을 행하려던 사람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 결과 거의 모든 이들이 마음을 바꿔 정착하기로 했다.

하지만 문제가 또 있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야율초가 대표로 요구했다.

“가주. 우리를 토사구팽하지 않을 거라 약조하시오. 문서로.”

이 문제는 정광이 간단하게 해결했다.

“제가 보증할게요. 쉽게 가시죠.”

“…….”

“저 못 믿으세요?”

야율초는 작게 한숨을 쉰 뒤 되물었다.

“너는 믿는다. 직접 보여줬으니까. 허나 네가 죽고 나면? 그때 우린 어떻게 해야 하느냐?”

정광이 황당해했다.

“저 백 년은 훌쩍 넘게 살아요. 회주님이 결혼하셔서 아드님을 낳고, 아드님이 손자를 보셔도 그 손자보다 오래 살 거란 얘기죠. 누가 누굴 걱정해요? 그때 일은 그분들이 알아서 하셔야지. 당대를 생각하세요.”

백 년은 훌쩍 넘게 뭐?

황당해서 입이 떡 벌어졌으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광이라면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됐죠?”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님. 이따 봬요.”

정광은 모용오에게 남은 일을 부탁한 뒤 수레에 올라탔다.

하루 이틀 안에 끝날 일들이 아닌지라 코를 꿰이기 싫었고 할 일도 있어서였다.

“가죠.”

“네! 단주!”

정광, 자오, 혜진, 모용수수, 동방장이 성을 나가 질주했다.

조양사가 있었던 밭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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