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320화 (319/569)

2부 49화

심마(心魔)

심한 내상을 입은 모용오는 식솔의 부축을 받으며 피신했다.

모용회로서는 다 잡았던 물고기를 놓친 셈이었지만 정광의 견제 때문에 손을 쓸 방도가 없어 그대로 보내야 했다.

모용회의 혼탁한 눈이 무서운 빛을 발했다.

‘모든 건 진옥룡 이놈 때문이다. 이 악적만 없애면 돼.’

그리고 가주인 모용오를 손에 넣으면 위대한 모용을 옳은 길로 이끌 수 있으리라.

‘그러기 위해선…….’

모용오에게 심한 내상을 입혔으나 그 대가로 그 역시 작지 않은 피해를 본 상태.

상처 부위의 혈도를 짚어 출혈은 멎었다 해도 이미 흘려 버린 피는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앞으로 이끌어갈 모용이 서로 죽고 죽여 세를 소진하고 있지 않은가.

본인을 위해, 모용을 위해. 최대한 빨리 정광을 죽여야 했다.

‘내공은 내가 확실히 위다.’

첫 격돌에서 똑같이 세 걸음씩 물러났던 건 전력을 다하지 않았기에 생긴 일.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속전속결을 택한 그는 모든 힘을 개방해 정광을 옥죄었다.

정광은 그 힘에 대항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급히 드시겠다? 사정은 이해하나, 그러다 체할 텐데.’

사방에서 조여오는 모용회의 강대한 내력을 굳이 정면으로 맞설 필요 있나.

오른발을 뒤로 반보 보내며 허리를 슬쩍 틀었다.

앞에서 밀려오던 기운이 뒤에서 압박하던 기운과 부딪혔다.

좌우에서 기회를 엿보던 힘들이 재빨리 몰려들었으나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라 가뿐히 벗어났다.

그 순간, 모용회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기운을 회수했다.

그 기운을 검신에 담아 강하게 떨쳤다.

허공으로 솟아오르다가 갑자기 멈춰 방향을 바꾸려는 정광을 향해 모용세가 비전절기 건곤파섬검해(乾坤破閃劍解)가 쏘아졌다.

이름처럼 천지를 깨뜨릴 만큼은 아니었으나 정광이 어디로 신형을 움직이든 간에 충분히 벨 수 있는 검식.

모용회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네놈이 즐겨 쓴다는 운룡대팔식을 지켜보고만 있을 줄 알았더냐? 힘으로 덤벼라!’

정광은 기꺼이 응했다.

조금 다른 방식으로.

운룡을 단단히 움켜쥐고 세차게 내려쳤다.

쩌엉!

“윽.”

엄청난 충격이 운룡을 타고 흘러들어 와 정광의 심신에 강한 충격을 줬다.

그 힘을 거스르지 않고 신법까지 더해 뒤로 훨훨 날아갔다.

그렇게 충격을 해소하며 떨어져 내려 동방장을 위협하던 회천회 무인의 머리를 두 발로 짓이겼다.

콰직!

정신없이 손발을 놀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동방장은 숨통이 트이자마자 고함을 질렀다.

“왜 이제야 와! 아니, 잠깐! 또 왜 가는데!”

정광은 회천회 무인의 머리를 부순 반탄력을 이용해 자신을 쫓아오던 모용회에게 쇄도했다.

모용회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런 간교한 놈을 봤나!’

소문을 떠올려 봐도 그렇고 직접 겪은 바도 그렇고. 정면으로 치면 다시 튕겨 나가 다른 아이들을 죽일 게 뻔하지 않은가?

‘또 당할 것 같으냐!’

직선으로 달리다가 순간적으로 방향을 틀어 정광의 측면을 점했다.

동시에 활짝 드러난 옆구리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아까처럼 충격을 이용해 밀려났다간 성 밖으로 떨어질 터.

잔재주 따위는 버리고 힘 대 힘으로 겨루길 강요한 것이다.

당연히 정광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언제 달려들었냐는 듯 뇌전보(雷電步)를 펼쳐 주르륵 물러났다.

이왕 간 김에 운룡을 역수(逆手)로 쥐어 동방장을 몰아치던 회천회 무인의 등을 꿰뚫었다.

“크헉!”

뜻밖의 암습을 당한 무인이 비명을 토하며 쓰러졌다.

덕분에 동방장은 한결 여유가 생겼으나 입을 꾹 다물고 싸우는 데만 집중했다.

‘망할 주군 같으니. 괜히 뭐라 했다가 또 가버리면 무슨 손해야.’

꽤 현명한 판단이었으나.

어차피 결과는 같았다.

정광은 운룡을 반 바퀴 회전시켜 바로 잡고 모용회에게 돌진했다.

분노한 모용회가 검을 내려치며 외쳤다.

“비겁한 놈! 언제까지 피할 셈이냐?”

정광은 필요에 따라 그러는 것일 뿐, 본성 자체는 비겁하지 않았다.

아니, 용맹했다.

고수 둘을 거꾸러뜨려 동방장에게 승기를 실어줬는데 더 피해서 뭐 할까.

떨어져 내리는 모용회의 검을 횡으로 후려쳤다.

카앙!

부딪힌 충격 때문에 튕겨 나가는 운룡에 힘을 실었다.

운룡이 조금 전의 일격과 반대 방향으로 우아한 원을 그렸다.

그 끝에는 모용회의 주름진 목이 있었다.

“얕은수를!”

모용회는 밀려났던 검을 끌어당겨 운룡을 맞이했다.

검과 검이 충돌하려는 순간!

변화가 생겼다.

정광이 일으킨 변화였다.

여타 검보다 긴 운룡의 검파(劍把)에 왼손을 더했다.

검파를 움켜쥔 두 손에 힘줄이 솟았다.

그 힘을 오롯이 받은 운룡이 모용회의 검과 충돌했다.

쩌엉!

“큭.”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극심한 충격에 모용회가 한 걸음 물러났다.

정광 역시 그랬으나 억지로 힘을 쥐어짜 바로 걸음을 내디뎠다.

쿠웅!

강한 진각(震脚)에 성벽이 울렸다.

그 울림을 끌어올려 하체, 허리, 등, 어깨, 팔로 보낸 뒤 양손에 머금었다.

거기에 단전에서 솟구친 내공을 보탰다.

운룡이 병기와 사람은 물론 성벽 바닥까지 쪼갤 기세로 내려꽂혔다.

하지만 아쉽게도 모용회는 고수였고 검 또한 명검이었다.

콰앙!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아니라 폭음이 터졌다.

“크흑.”

검을 올려쳐 막은 모용회가 신음을 터뜨렸다.

정광은 입을 꾹 다문 채 두 손으로 운룡을 계속 내려쳤다.

쾅! 콰앙! 쿠웅!

폭음이 연이어 터졌다.

모용회는 신음을 토하면서도 전부 막아냈으나 무릎이 점점 꺾이는 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마음도 자연히 위축됐다.

‘갑자기 강맹(强猛) 일변도(一邊倒)로 나오다니. 원래 이쪽이 장기였는가? 나는 그것도 모르고 이런 싸움을 원한 것이고?’

정광이 수많은 강자들을 꺾은 건 본신(本身) 무공이 강해서이기도 하나 신검 운룡의 덕을 본 게 크다고 여겼다.

정광의 명성을 올려주고 죽어간 자들과 달리 자신은 훌륭한 명검을 가졌기에 힘으로 승부를 걸었거늘, 이 꼴이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이렇게 무너질 줄이야.’

허나 오른쪽 무릎이 바닥에 닿을 지경에 이르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최소 왕이 될 존재다!’

아무리 강하다 해도 일개 무부(武夫)에게 무릎을 꿇을 수야 있나.

내공을 쏟아냈다.

쉼 없이 쏟아져 내리는 검격을 억지로 받아내며 신형을 일으켰다.

그리고 완전히 일어서자마자 강한 일격을 날려 정광을 밀어냈다.

쾅!

훌쩍 뛰어 물러난 정광은 모용회를 응시하다가 피를 토했다.

“쿨럭쿨럭. 아까워라. 조금만 더 했으면 됐는데.”

모용회의 눈이 바닥에 떨어진 핏덩이를 보고 얼어붙었다.

그냥 핏물이 아니라 내장 조각이 섞여 있는 것 아닌가.

“……허세였군.”

“그런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한 거죠. 어떻게 다시 일어나신 거예요?”

모용회는 지친 심신을 다잡기 위해 힘의 원천을 끌어올렸다.

이립(而立)에 뜻을 세워 백 년 동안 와신상담(臥薪嘗膽)해 온 의지였다.

“요녕은 본래 불교가 흥한 지역이었지. 척박하고 삶이 고달프다 보니 의지할 대상이 있어야 했다.”

“야율초라는 분한테 들었어요. 장주님도 그러셨나요?”

“백 년 전까지는 그랬지.”

오래전 일이었으나 아직도 손에 잡힐 듯 생생했다.

“그래. 백 년 전이었어. 여진족이 습격해 왔을 때 나는 조양사(朝陽寺)를 구하기 위해 혈로(血路)를 뚫고 달려갔다. 수많은 대가를 치르고 도착한 그곳에서 무엇을 봤는지 아느냐?”

정광이 알 리 있나.

되는 대로 뱉었다.

“혹시 조양사에도 춘화(春畵)를 잘 그리시는 분이 계셨나요?”

모용회도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건 아니었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자신에게 던진 것이었다.

“중놈들이 불경을 읽으며 부처를 찾고 있었지. 사람을 구하지는 못할망정 피할 생각조차 안 하고 실체도 없는 헛된 것에게 목숨을 구걸하다니. 이립에 이를 때까지 품고 있었던 불심이 산산이 흩어져 사라졌다.”

그때 깨달았다.

부처 따위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그때 뜻을 세웠다.

요녕을 제대로 다스리는 데 필요한 것은 힘! 그것을 손에 넣고야 말겠다고!

“힘. 절대적인 힘만이 절대선(絶對善)이야. 무력과 금력을 키워 민초들이 본가에 기대게 했다. 그들도 본가도 한결 윤택해졌지.”

그것만으론 모자랐다.

“권력 또한 반드시 가져야 했다. 선조들께서 그리하셨듯 나라를 건국해 요녕을 넘어 중원까지 질주하길 바랐다. 그 정점에 서서 가문과 세상을 옳은 방향으로 이끌리라 다짐했다.”

흥미진진하게 듣던 정광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기요.”

“왜 그러느냐?”

“그러니까, 안 좋은 기억 때문에 삐뚤어지셨고 나름 좋은 뜻을 품고 시작했으나 욕심에 매몰돼 헛된 꿈을 이루려고 수많은 피를 흘리고 계신 거네요.”

“네 뜻이 너무 좁아 이해를 못 하는구나.”

“넓은데. 조양사에 불을 지른 것도 장주님이세요?”

“그렇다.”

“전에 뵀을 땐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정말 사실이냐고 여쭈니까 ‘나 모용회,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부끄럼도 없는 삶을 살아왔다’라고 말씀하셨으면서.”

“옳은 길을 걷기 위해 방해되는 것을 없애고 선의의 거짓을 말했을 뿐이다. 나는 여전히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어.”

“우러러봐야 하늘이 고개를 돌리겠구만 무슨.”

“무어라?”

“손자분 생사는 안 궁금하세요?”

“너를 죽이고 알아보면 된다.”

“가만. 손자분은 계신데 아드님은 없으시네. 설마 개천(開天)인지 뭔지 하는 걸 아드님이 반대해서 직접 죽이신 건 아니죠?”

“잘도 넘겨짚는구나. 못난 놈이었지. 그렇게 공을 들여 설명해도 아비의 높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다니.”

“와아.”

정광은 나직이 감탄하며 왼손으로 귀를 후볐다.

“설마설마했는데 진짜네. 더 들어봐야 귀 썩겠네요. 넋두리 그만하고 오시죠.”

“네놈이 감히! 헉!”

정광의 왼손이 감추고 있던 철전들을 뿌렸다.

모용회는 재빨리 검을 움직여 남김없이 쳐냈다.

그사이 정광은 빠르게 전진하며 두 손으로 운룡을 내려쳤다.

모용회가 검으로 쳐내며 반격하려 했으나 정광이 허락하지 않았다.

검들이 부딪히는 순간 모든 힘을 집중해 내리눌렀다.

콰앙! 끼기긱-

운룡이 모용회의 검을 누르며 조금씩 내려갔다.

그 밑에 있는 주름 가득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 이런 힘이! 분명 내상을 입고 핏덩이를 토했었는데!’

그것도 내장 조각이 섞인 핏덩이였다.

그만한 내상이면 자신이 유리하다고 판단해 다시 정면으로 붙었거늘, 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마치 그의 속내를 읽은 것처럼 정광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아까 뱉었던 거, 내장 조각이 아니라 입안의 살점이에요. 으으. 아파 죽겠네.”

“……!”

“설마 속으실까 했는데 정말 속으셨네요. 은근히 순진한 구석이 있으시다니까. 망상을 많이 하셔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

“이런. 너무 많이 깨물었나? 아직도 남았네.”

입을 오물거린 뒤 퉤 뱉자 살점 조각이 튀어나와 모용회의 이마에 철썩 달라붙었다.

모용회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천하에 이런 놈이 있나! 이따위 저급한 함정을 파?’

그 와중에도 검은 점점 내려오고 있었다.

어찌나 분노가 치솟는지 심마(心魔)에 든 기분!

몇 걸음만 더 나아가면 되거늘, 단 한 명 때문에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판이라니!

극심한 분노로 마음이 흔들린 순간, 그의 집중력이 흐려졌음을 눈치챈 정광이 운룡을 치켜세우며 뒤로 넘어졌다.

자연히 안간힘을 다해 검을 밀어 올리던 모용회의 팔은 하늘을 향해 솟았다.

‘이건 또 무슨 수작…… 헉!’

정광은 그냥 넘어진 게 아니었다.

상체는 넘어지며 한 발은 올렸다.

그 발이 곤륜 비전 운룡각(雲龍脚)의 묘리를 담아 모용회의 낭심을 올려쳤다.

빠앙!

“크하악!”

정광은 재빨리 상체를 일으켜 모용회의 혈도를 짚었다.

아혈이고 마혈이고 간에 사혈만 빼고 닥치는 대로 다 찔렀다.

모용회는 눈동자가 뒤집혀 흰자위를 드러낸 채 두 다리를 오므린 엉거주춤한 자세로 굳어버렸다.

정광은 깊은 한숨을 토한 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소매로 훔쳤다.

“하아아. 힘드네. 수고하셨어요.”

“…….”

“저런. 칠칠맞지 못하게 게거품을 흘리시네. 닦아드리려니 좀 더럽고. 조금만 참으세요. 언젠간 말라붙겠죠.”

“…….”

아혈을 짚여서가 아니었다.

모용회는 낭심을 걷어차인 고통에 혼절해 버려 아무런 대꾸도 못 했다.

정광은 그런 그를 보며 내심 혀를 찼다.

‘절대적인 힘만이 절대선이라니. 이렇게 적절한 순간 적당하게 쓰면 그걸로 충분한 것을.’

어쨌든 큰 산은 넘었겠다, 시선을 돌려 전황을 확인했다.

“음. 동방장님. 힘드세요?”

“……!”

동방장은 생사를 넘나들며 싸우는 중이라 정광을 욕하긴커녕 노려볼 시간도 없었다.

“아닌가. 할 만하신 것 같기도 하고.”

동방장은 순간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울상을 지었다.

‘미친! 할 만하다 하면 계속하라 할 거고. 아니라 하면 힘내라 할 텐데. 어떡해야 하지?’

정광은 그렇게 악한 사람이 아니었다.

“조금만 더 참으세요. 곧 끝내 드릴게요.”

어떻게?

정광은 화섭자를 꺼내 근처에 있던 화로에 불을 붙였다.

밝은 불길이 일어나자 모용회의 뒷덜미를 잡고 질질 끌고 갔다.

그러고는 주변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장창 하나를 주워 들고 그 끝에 모용회를 매달아 높이 들어 올렸다.

“잠깐 쉬면서 여기 좀 봐주시겠어요?”

유혈이 낭자하는 와중에도 정광의 목소리는 성 모두의 귀를 꿰뚫듯 박혀 들었다.

“뭐, 뭐야?”

“이 목소리는…….”

정광 쪽으로 향한 시선들은 곧 그가 붙잡은 창대로 옮겨졌다.

적아 구분 없이 모두 눈을 부릅떴다.

그 끝에 마치 축 처진 깃발처럼 매달려 있는 육신 하나.

대흥장주였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