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47화
네 상대
모용회는 주름이 가득한 얼굴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의 탐스러운 수염보다 희디흰 순백(純白)의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눈이라. 겨울이군.’
너무 하얘서 눈이 부신 걸까.
두 눈에서 진물이 천천히 흘러나왔다.
소맷자락으로 진물을 닦았다.
깨끗해진 눈에 혼탁한 빛이 맺혔다.
‘예상보다 빨리 내리는구나. 마음에 안 들어.’
눈이 내리면 녹아도 문제고 얼어도 문제다.
땅이 진창이 되든 얼든 간에, 말이 달리기 힘들어지는 건 마찬가지니까.
‘허나 그건 나중 일. 지금 중요한 건 진옥룡 그놈이다.’
요녕 곳곳에서 전령이 말달려 와 비보를 전했다.
대업에 동참한 호족들의 본거지가 하나씩 하나씩 엉망이 되어가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호족들은 물론 방계 가문과 협력하는 이민족들까지 동요했다.
당장에라도 돌아가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지 못하도록 힘으로 찍어누르고 있었으나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눈에 띄게 사기가 떨어지고 있어.’
하지만 한때이리라.
‘슬슬 연락이 올 때가 됐는데.’
척사당(斥邪堂)도 있고 낭왕(浪王) 패거리도 있다.
그들이 진옥룡의 목을 베고야 말리라.
손바닥을 들어 올리자 눈송이가 내려앉았다가 금세 녹아버렸다.
‘진옥룡. 네 목숨도 이것과 다를 바 없다.’
허나 며칠을 더 기다려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아직은. 아직은 괜찮아.’
초조해야 하는 건 그가 아니라 적이었다.
시선을 돌려 높은 성벽 위를 바라봤다.
모용세가주 모용오가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너를 칠 힘이 없어서 칼바람을 맞으며 올려다보고 있는 줄 아느냐?’
저 건방진 눈을 당장 뽑아버리고 싶었다.
모용이라는 위대한 가문의 정점에 선 주제에, 그 힘을 옳은 길로 쓸 줄 모르는 모용오를 징치하고 싶었다.
‘대업을 위해 훗날로 미루려고 했거늘. 생각을 달리해야 할지도.’
갈등을 느끼는 그때, 기다리던 이들 중 일부가 왔다.
정광을 척살하러 떠났던 모용강이 척사당을 이끌고 돌아온 것이다.
헌데 그 꼴이 가관이었다.
누가 봐도 패잔병 같은 몰골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낭패한 모습으로 달려온 척사당을 보자 대업에 동참한 이들은 물론 성벽 위의 본가 사람들까지 술렁였다.
모용회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이런 한심한 놈들을 봤나. 믿고 보냈더니 이 꼴로 돌아와?’
분노가 치밀어 올랐으나 표출할 순 없었다.
사람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억지로 삭이며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맞이했다.
“수고했다. 다들 들어라! 척사당은 푹 쉬어야 하니 귀찮게 굴지 말도록! 척사당주는 잠시 들어오고.”
모용회는 천막에 들어가자마자 모용강을 노려봤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모용강이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백부.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죽여주십시오.”
모용회는 살심을 잠시 억눌렀다.
“듣고 나서 판단하마. 어찌 된 일이냐?”
모용강은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가감 없이 얘기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모용회의 얼굴을 덮은 주름살이 더 깊어졌다.
마침내 자초지종을 모두 듣게 되자 모용회가 나직이 명했다.
“고개를 들어라.”
“네, 백부. 컥!”
모용회는 앙상한 손으로 모용강의 목을 움켜잡고 속삭였다.
“단매에 쳐 죽이고 싶으나 참는 거다. 이해했느냐?”
“끄륵…….”
모용강은 극심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최대한 정확히 말하려 애썼다.
“이, 이해했습니다. 죽을 각오로 싸워 대업을 이루는 데 자그마한 공이라도 세우겠습니다.”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이야.”
모용회가 손을 풀자 모용강이 기침을 토했다.
“쿨럭쿨럭.”
“시끄럽다.”
모용강은 간신히 기침을 참았다.
“크윽. 백부. 진옥룡은 소문보다 더 대단한 놈입니다.”
“그렇겠지. 너는 거짓으로 나를 속일 녀석은 아니니까.”
“소문은 잊으셔야 합니다. 새롭게 보셔야 합니다.”
“호들갑 떨지 말아라. 사방장(四方將) 중 셋이 당했다 해도 그 녀석들의 주인인 낭왕이 있어.”
“…….”
“설마 낭왕도 진옥룡 그놈에게 당할 거라 생각하는 것이냐?”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네가 그놈을 높이 보긴 높이 보는구나.”
모용회는 혀를 차면서도 가슴이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내가 대면했던 낭왕은 진정한 강자였다. 헌데 그를 이길지도 모르겠다고?’
다른 이가 이런 말을 했으면 코웃음 쳤겠지만, 모용강은 무공은 물론 판단력도 뛰어난 무인이었다.
그래서 척사당을 맡긴 것 아닌가.
“백부. 놈은 무공만 강한 게 아닙니다. 간교한 머리와 악랄한 심성도 갖췄습니다.”
“…….”
“저로선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가르침을 주십시오.”
“…….”
모용강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낭왕의 생사가 궁금해졌다.
안내 겸 감시 역할로 붙인 손자 모용중보다 낭왕이 더 중요했다.
‘정말 그마저 당했다면…….’
또는 앞으로 당한다면.
아니, 그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더 늦기 전에 방법을 바꿔야 했다.
“……피를 흘려야겠군.”
모용강의 눈이 커졌다.
“성을 치실 생각이십니까?”
“그렇다.”
“피해가 클 겁니다.”
이제껏 성을 포위만 하고 있었던 건 가주인 모용오나 본가 사람들을 아껴서가 아니었다.
피를 적게 흘려야 황궁까지 말달려 가 싸울 전력이 남아서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성을 치겠다고?
모용회가 그 이유를 설명했다.
“모용의 자부심은 잠시 잊고 낭왕을 끌어들였건만. 제대로 흘러가고 있지 않아. 지금 어떻게 되고 있느냐?”
대업에 동참한 가문들은 전력을 끌고 온 게 아니었다.
틈만 나면 약탈을 일삼는 마적과 이민족을 막기 위해 어느 정도의 수는 본거지에 남아야 했다.
눈엣가시 같은 그놈들을 없애고 싶었으나 이 와중에 그럴 여력이 있을 리 있나.
그래서 낭왕에게 의뢰했다.
그가 마적과 이민족을 처리하면 본거지의 인원까지 성으로 달려와 압도적인 수로 압박한다.
모용세가주 모용오는 꿋꿋한 무인이었으나 시류를 읽지 못하는 아둔한 자는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멀리 떠날 것을 권하면 당연히 떠날 수밖에.
힘을 길러 훗날 싸움을 걸어오겠지만, 그때는 회천(回天)을 이루고 한참 지난 후일 터.
이렇게만 흘러갔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으나 정광이라는 변수가 모든 걸 뒤틀어 버린 상황이었다.
“황궁을 치면 손해를 메꾸고도 남기에 막대한 재물을 쏟아부어 낭왕을 고용했거늘. 일을 이따위로 처리하다니. 또 다른 변수가 생기기 전에 손을 써야 해.”
몽고와 약조한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들이 남하하여 천시(天時)를 만들고, 하북성 바로 옆이라는 지리(地理)를 갖춘 모용이 말달려 가 황궁을 덮치면 그깟 인화(人和) 따위 없어도 개천(開天)에 성공할 수 있었다.
“알아들었느냐?”
“네, 백부.”
“황제를 잡으면 최소한 왕위(王位)쯤은 받을 수 있다. 일을 진행할 테니 최선을 다하거라.”
모용강이 벌떡 일어나 비장한 목소리로 다짐했다.
“제게 선봉을 맡겨주십시오. 제일 먼저 성벽에 올라 사기를 끌어 올리겠습니다.”
“바보 같은 소리. 다른 방법이 있다.”
모용회는 손자인 모용중에게만 알려줬던 최후의 비책을 사용하기로 했다.
‘만에 하나. 그 녀석이 벌써 사로잡혀 토설했을 수도 있지. 되도록 빨리해야 해.’
천막 밖으로 나가 주위를 찬찬히 둘러봤다.
삼삼오오 모여 걱정스러운 어조로 대화를 나누던 이들이 슬그머니 흩어졌다.
‘갈수록 가관이군. 더 늦기 전에 결단을 내리길 잘했어.
모용회는 성벽 위를 슬쩍 확인한 뒤 고개를 돌려 회천회 무인들을 나무랐다.
“왜 이리 소란스럽느냐?”
“죄, 죄송합니다.”
“시끄럽다. 날이 추워지고 있으니 화톳불을 더 피워라. 내 천막 사방에도 하나씩 더 놓고.”
“존명!”
진영 곳곳에서 새로운 화톳불이 피워졌다.
모용회의 천막 사방에도 놓였음은 물론이었다.
성벽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많은 눈들 중 한 쌍의 눈이 묘하게 빛났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모용회는 성벽 위를 주시했다.
그곳에서 번을 서는 무인들 중 한 사내의 행동을 보고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왼손에 쥔 활은 미동도 안 한 채 오른쪽 손목을 두 번 돌렸다. 내일 새벽 사경(四更)에 일을 벌이겠다는 뜻이군.’
아무런 내색도 없이 진영을 둘러보며 걷다가 천막으로 돌아와 모용강을 불렀다.
“백부. 부르셨습니까?”
“사경쯤에 성문이 열릴 것이다.”
“……!”
“뭘 그리 놀라느냐? 성안에 호응할 아이들이 있다. 성문이 열리면 바로 치고 들어갈 것이니 적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채비해 두거라.”
모용강의 눈동자가 떨렸다.
다른 방법이 있다더니 간자(間者)를 심어놨을 줄이야.
“뭐 하는 게냐? 어서 나가서 준비하지 않고.”
모용강은 굳은 얼굴로 맹세했다.
“알겠습니다, 백부. 이번엔 기대에 부응할 것이니 믿어주십시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금세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그 어둠이 점점 짙어졌다.
모용회는 모용강과 함께 묵묵히 성을 바라보다가 눈을 빛냈다.
“시작했군.”
성에서 불길이 치솟는가 싶더니 분노에 가득 찬 고함이 들려왔다.
“주의를 돌리려고 불을 지른 것이다. 곧 성문이 열릴 것이니 준비해라.”
“네, 백부.”
모용강은 성문을 가만히 응시했다.
한동안 그러고 있다 보니 성문이 살짝 움직이는 게 보였다.
“다녀오겠습니다.”
모용회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신법을 펼쳐 달렸다.
그의 뒤를 수많은 이들이 따랐다.
지면을 박찰수록 성문이 더 크게 열렸다.
성안에서 변고를 눈치챈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성벽 위의 번초들이 죽어 있다!”
“어서 활과 화살을 들고 올라가!”
“이런! 성문이 열리고 있잖아!”
“네 이놈들! 당장 성문에서 손을 떼지 못할까!”
병장기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밤하늘을 울렸다.
열리던 성문이 어느새 멈췄다.
아니. 숫자에서 밀렸는지, 성문은 더 열리긴커녕 서서히 닫히고 있었다.
모용강은 그걸 두고 볼 마음 따윈 없었다.
성벽 위는 새로운 무인들로 채워지고 있는 상태.
애초에 목표는 성문이었다.
그곳을 향해 똑바로 달리다가 내공을 끌어 올려 지면을 박찼다.
모용세가가 자랑하는 절기, 비응신법(飛鷹身法).
매처럼 날아가 성문을 닫으려는 이를 덮쳤다.
발톱이 아닌 검으로.
촤아악-
“끄악!”
성문을 연 배신자를 처단하던 한 무인이 비명처럼 외쳤다.
“모, 모용강!”
그제야 모용강을 발견한 사람들이 경악했다.
“적이다! 적이 성문으로 들어오려 한다!”
“하나가 아니야! 잔뜩 몰려오고 있어!”
“뭣들 하느냐? 어서 와서 도와!”
모용강은 소리를 지른 자들을 향해 검을 움직였다.
같은 피가 흐르는 이들을 죽인다는 꺼림칙함은 없었다.
이번 계획은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그래서 실추된 명예를 올리고 옅어진 모용회의 신임을 다시 붙잡아야 했다.
찌르고 베고 후려칠 때마다 시신이 늘어났다.
다소 여유가 생기자 내부에서 호응한 이들을 재촉할 수 있었다.
“뭣들 하느냐? 마저 열어라!”
“존명!”
모용강이 적들을 상대하는 사이, 그들은 성문을 완전히 열 수 있었다.
마침 코앞까지 달려왔던 척사당 무인들이 성문 통로로 쏟아져 들어왔다.
죽음을 불사하고 모용강을 막던 본가 무인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럴 수가! 이렇게 뚫리다니!”
“아직 아니다! 물러서지 마! 놈들이 끝없이 몰려오고 있다! 성문 통로를 내주면 끝장이야!”
성벽 위에 올라가 자리 잡은 본가 무인들이 화살을 쏘아대고 있었으나 화살에 맞아 고꾸라지는 이들보다 성문으로 들어오는 자들이 많았다.
“막아! 무조건 막아!”
“내성(內城)에 계신 어르신들께서 곧 오실 거다! 그때까지만 버텨!”
허나 모용강의 검술은 대단했다.
성문 통로가 넓다 하나 얼마나 넓을까.
좁은 곳일수록 제대로 된 고수의 무위는 더 빛을 발하는 법.
하나씩 베고 찌르며 목숨을 앗아갔다.
성문 통로를 사수하던 본가 무인들은 속절없이 죽어갔다.
마침내 성안으로까지 밀려나자 그들의 눈에 암울한 빛이 떠올랐다.
‘이대로 끝인가.’
‘한 번 밀려나면 되찾기 힘들거늘. 하늘의 뜻이 정녕 여기까지란 말이냐!’
반면 모용강의 눈은 희열로 빛났다.
‘됐다! 이제부턴 숫자로 밀어붙이면 돼! 우리의 승리다!’
입을 크게 열어 진격하라는 명을 내리려는 그때!
“억!”
“뭐, 뭐야?”
뒤에서 소란이 일었다.
급히 돌아보니 웬 괴인이 수하들의 머리나 병기를 밟으며 성문 통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저건!’
얼굴이 하도 일그러져 있어 순간 못 알아봤지만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모용강의 입에서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동방장! 네 이놈!”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궁금했으나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모용강은 자신마저 뛰어넘으려는 동방장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죽어라!”
“망할! 왜 다들 나한테만 그래!”
동방장은 허공에서 신형을 반 바퀴 돌리며 힐난했다.
“주군! 네 상대잖아!”
그가 업고 있던 정광이 드러났다.
“그러게요.”
정광은 피식 웃으며 운룡을 뽑았다.
눈부신 황금빛 광채가 모용강의 부릅뜬 두 눈을 뒤덮었다.
화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