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45화
의지와 선택
대치하고 있던 정광과 낭왕이 동시에 움직였다.
서로를 향해서가 아니라 각각 다른 이에게!
그 대상인 북방장과 동방장의 눈동자가 커졌다.
운룡과 곡도(曲刀)가 섬전보다 빠르게 허공을 갈랐다.
서걱-
핏물이 튀어 올라 떨어지는 눈송이를 붉게 물들였다.
느닷없는 기습에 어깨가 베이고 물러난 북방장이 정광을 주시하며 무겁게 중얼거렸다.
“듣던 대로 간교하군. 대비 안 했으면 크게 당할 뻔했어.”
정광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워라. 이상한 소문이 퍼졌나 보네요. 왜들 그렇게 말이 많을까?”
동방장도 피가 흐르는 가슴을 부여잡고 낭왕에게 따졌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게 되면 투항하라더니 이게 뭐야!”
낭왕이 혀를 찼다.
“얕았네. 동구(東狗)야. 내가 투항한 뒤 기간만 채우고 돌아오라 했지, 그렇게 열심히 따르라 했냐?”
동방장이 화를 내려고 했으나 낭왕의 시선은 정광에게 고정돼 있었다.
정광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며 비난했다.
“당장에라도 덤빌 것처럼 하시더니. 왜 엉뚱한 분을 치세요?”
“그러는 너는? 북호(北虎)와 초면일 텐데 무슨 원한이 있다고 막무가내로 죽이려고 들어?”
그들은 말싸움을 계속 이어가며 상대를 살폈다.
누가 됐든 조금의 틈만 보여도 바로 격돌이 시작됐겠지만, 고수 중의 고수들인지라 팽팽한 대치가 이어졌다.
대신 다른 이가 움직였다.
북방장의 머리 위 허공이 찢어지며 자오가 떨어져 내렸다.
그의 손에 들린 유엽도(柳葉刀)가 북방장의 머리를 쪼개려 했다.
‘그 주인에 그 수하인가.’
북방장은 암습을 감지하자마자 대응했다.
쥐고 있던 철곤(鐵棍)을 위로 올려쳤다.
철곤이 유엽도를 후려치는 순간, 자오의 신형이 사라졌다.
사람은 놓치고 유엽도만 박살 내버린 북방장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때, 혜진이 측면에서 쇄도하며 검끝으로 찔러왔다.
아미파 특유의 나는 살고 너는 죽이겠다는 의지가 실린 강맹한 일격이었다.
‘손속이 제법이군.’
북방장은 치켜들고 있던 철곤을 힘차게 내려쳤다.
철곤의 긴 길이를 이용해 혜진의 검은 신경 쓰지 않고 머리를 부수려 했다.
혜진은 금정신보(金頂神步)를 펼쳐 간신히 피했다.
그녀를 스쳐 지나간 철곤이 땅바닥을 강타했다.
콰앙!
구덩이가 파이고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북방장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무공은 별것 아니지만 실전경험이 풍부한 녀석들이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모용수수의 참마도가 자욱한 흙먼지를 가르며 날아왔다.
사라졌던 자오가 뒤에서 나타나 쌍단봉(雙短棒)을 꺼내 휘둘렀다.
‘보자 보자 하니까 감히!’
북방장은 철곤을 횡으로 크게 휘둘렀다.
철곤이 허공을 찢어발기며 무시무시한 소리를 냈다.
부아아아앙-
모용수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미 지척까지 다가온 철곤을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였다.
다행히 재빨리 다가온 혜진이 그녀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간발의 차이로 그녀를 지나친 철곤이 큰 원을 그리며 반대편에 있던 자오에게 향했다.
허나 자오는 이미 옆으로 구르며 동방장에게 항의하고 있었다.
“구경만 하실 겁니까? 이러다 다 죽습니다!”
동방장이 발끈했다.
“나는 계속 수레를 밀면서 뛰었잖아! 숨 좀 돌려야지!”
말과 달리 그는 양손에 쌍조갑(雙爪甲)을 낀 채 북방장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뒤져라! 곰탱아!”
다른 이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자오는 후면에서, 혜진과 모용수수는 양 측면에서 북방장을 노렸다.
사방에서 공격이 날아오자 북방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모두 죽여주마!”
격전이 시작됐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시끄러운 고함과 고통스러운 신음이 난무했다.
그걸 고스란히 듣고 있던 정광은 내심 고개를 가로저었다.
‘동방장이 조금 지쳐서 이기긴 힘들겠는데.’
그렇다고 질 것 같지도 않았다.
모용수수는 큰 도움이 안 됐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자오와 혜진은 빈약한 무공을 경험으로 메꾸며 제 몫을 하고 있었고.
정광을 따르며 부쩍 강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머지 녀석들은…….’
도주하던 비초회와 낭인향은 좌우로 반전해 낭왕의 수하들에게 화살을 쐈다.
낭왕의 수하들이 응사하면 다시 선회해서 하나로 합치고, 그들이 쫓아오면 또 두 갈래로 반전해 화살을 쏘는 걸 반복했다.
낭왕이 직접 이끄는 낭인들은 사방장 휘하의 낭인들보다 고수여서 피해를 주는 것 이상으로 받고 있었지만, 말의 상태가 더 양호하고 사람 머릿수도 많았기에 그리 나쁜 형국은 아니었다.
‘시킨 대로 잘하네.’
정광은 야율초와 낭인향주에게 싸움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라 명했었고, 그들은 그 명을 충실히 지키고 있었다.
‘급한 건 이쪽이 아니야. 저쪽이지.’
정광이 낭왕을 경계하면서도 주변을 살피는 걸 소홀히 하지 않는 것처럼, 낭왕 역시 정광의 빈틈을 노리는 한편 전황도 신경 쓰고 있었다.
가죽 투구 틈으로 보이는 그의 두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목소리도 그랬다.
“질질 끄네. 시간은 네 편이다, 이거냐?”
시간이 지날수록 말들의 피로가 누적될 터. 그 영향은 먼 길을 달려온 낭왕 무리에게 더 크게 적용될 게 분명했다.
더구나 눈이 내리는 상황.
말들의 체력이 급속도로 소진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얼마 못 가 발이 묶이게 될지도 몰랐다.
정광은 그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부정했다.
“시간을 끌다뇨. 약하니까 어쩔 수 없이 피하면서 싸우는 거죠.”
“그럼 이놈들은? 북호보다 약한데 왜 이리 날뛰어?”
동방장과 자오 일행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낭왕의 표현처럼 북방장에게 미친 듯이 공세를 퍼붓고 있었다.
정광이 씩 웃었다.
“발을 땅에 디디고 싸울 때,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니까요.”
“뭐 그렇긴 하지. 그럼 너는 어쩔 셈이냐?”
정광은 왼손을 우아하게 들어 올린 뒤 검지를 펴 까딱거렸다.
“질질 끄시네요. 하수님, 빨리 오시죠.”
그리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운룡을 내질렀다.
금빛 광채가 낭왕의 심장을 향해 쏘아졌다.
낭왕도 동시에 움직였다.
곡도를 세차게 휘둘러 정광의 목을 베어갔다.
아직 목에 닿지도 않았는데 따끔거릴 만큼 날카로운 일격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동귀어진할 형세.
두 사람의 눈이 빛났다.
정광은 운룡을 그대로 찌르며 머리를 숙였다.
낭왕은 곡도를 계속 휘두르며 허리를 틀었다.
사악-
정광의 머리칼이 잘려 허공에 흩날렸다.
지익-
낭왕의 흉갑이 얕게 베이며 불쾌한 소음을 냈다.
정광은 왼손바닥을 내밀고 낭왕은 왼 주먹을 찔렀다.
두 기세가 충돌했다.
콰앙!
정광은 충격을 거스르지 않고 뒤로 훌쩍 뛰었다.
낭왕 또한 신형을 가볍게 하여 주르륵 물러났다.
정광은 낭왕의 흉갑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거, 뭐로 만들었기에 그렇게 질겨요?”
낭왕은 운룡을 흘깃거리며 투덜댔다.
“남 말 하네. 처남과 장인에게 뭘 해줬길래 그런 신검을 받은 거야? 빌어먹을. 나는 개처럼 쫓아내 놓고 외인에게 뭐 하는 짓인지.”
“그러게 처가에 잘 좀 하시지 그랬어요.”
“어떻게 더 잘해? 그 꼴을 당했는데도 아무도 안 죽였잖아. 잠깐. 너 옷 속에 보의(保衣) 입고 있지? 설마 그것도 철혈장에서 얻은 거냐?”
정광은 대꾸하지 않고 낭왕에게 쇄도했다.
낭왕은 그보다 빨리 바닥에 박아놨던 창을 뽑아 던졌다.
정광이 고개를 꺾어 피했을 때, 낭왕은 구절편(九節鞭)을 휘둘러 옆구리를 후려치고 있었다.
정광은 운룡으로 베려다가 용형보(龍形步)를 어지러이 밟아 흘려냈다.
구절편의 특성상 베거나 쳐내봐야 그대로 몸에 감길 위험이 있어서였다.
낭왕은 그럴 거라 예상하고 있었는지, 오른손에 계속 쥐고 있던 곡도를 내려쳐 정광을 세로로 양단하려 했다.
정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운룡을 역으로 올려쳐 곡도를 베어갔다.
낭왕은 미간을 찡그리며 곡도를 회수했다.
동시에 왼손에 쥐고 있던 구절편을 놓고 대월(大鉞)을 뽑았다.
그것으로 전면을 보호하며 한 걸음 크게 내디뎠다.
정광은 대월 때문에 시야가 가려졌으나 당황하지 않았다.
오른쪽 손목을 빙글 돌렸다.
위로 올려쳤던 운룡이 급격하게 방향을 꺾어 내려오며 대월을 양단했다.
서걱-
대월에 가려져 있던 시야가 열렸다.
가죽 투구가 불쑥 나타나더니 급격하게 확대됐다.
낭왕이 박치기를 한 것이다!
허나 그건 정광도 마찬가지!
“……!”
두 사람의 눈이 커지며 두 이마가 맹렬하게 부딪쳤다.
쩌엉!
“크윽!”
마치 병장기가 깨지는 듯한 굉음이 터진 만큼 충격도 컸다.
정광은 네 걸음이나 뒷걸음질 치면서도 운룡을 똑바로 세워 전신을 엄밀히 보호했다.
그의 눈동자는 아직도 흔들리고 있었다.
맨 이마로 투구를 쓴 이마와 부딪혔으니 손해를 볼 수밖에.
허나 낭왕의 상세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
머리의 충격은 덜했으나 오른쪽 옆구리를 움켜쥔 채 멀찍이 물러나 있었다.
옆구리에서 손을 떼어 천천히 들어보니 피가 묻어있었다.
낭왕은 아까운 표정으로 그걸 핥아먹은 뒤 유쾌하게 웃었다.
“와하하하. 충격을 받고 물러나면 바로 따라붙어 죽이려고 했는데. 그새 비수를 꺼내서 찔러?”
흉갑 틈으로 손가락을 넣어 혈도를 짚자 출혈이 멎었다.
하지만 낭왕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너, 좀 하는구나. 그래. 이거지. 이런 재미 때문에 집에 박혀 있기 싫다니까.”
어느새 눈동자가 또렷해진 정광이 왼손의 소운룡을 부드럽게 회전시키며 미소 지었다.
“흉갑이 생각보다 더 질기네요. 그래도 꿰뚫을 수 있었는데. 잽싸게 몸을 빼시면 어떡해요? 헛고생이 되어버렸잖아요.”
낭왕이 코웃음 쳤다.
“네가 느린 걸 어쩌라고. 그나저나 이마가 부어오르니까 훨씬 더 보기 좋네. 고마운 줄 알아라.”
“오랜만에 피가 바깥세상을 구경하게 됐는데 어떠세요? 상쾌하시죠? 사례는 적당히 하셔도 돼요.”
양쪽 모두 여유 있게 떠들고 있었으나 속마음은 아니었다.
‘이마가 아직도 아프네. 균형감각도 조금 틀어진 것 같고.’
‘망할. 옆구리가 계속 쑤시잖아. 움직이는 데 지장이 있겠는걸.’
그건 그거고.
두 사람은 바로 격돌했다.
상대에게 절대 약한 티를 보이지 않았다.
전력을 다해 죽이려 했다.
정광은 운룡과 소운룡을 번갈아 써서 낭왕을 흉갑째로 베고 찔렀다.
낭왕은 갖가지 병기를 다 사용해 가며 정광을 베는 게 아니라 두들겨 팼다.
“보의를 입었으면 뼈를 부숴주마!”
“개가죽과 함께 썰어드리지요!”
멍이 들고 피가 튀었다.
살기와 함께 뜨거운 투기가 줄기줄기 일어났다.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 눈은 그들의 근처에 이르기도 전에 녹아 사라져 버렸다.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계속됐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은 급격히 지쳐갔다.
그리고 서로에게 감탄했다.
‘이놈. 전에 봤을 때는 이 정도가 아니었는데. 그새 늘었네. 몸보신이라도 거하게 한 건가?’
‘장백삼(長白蔘)을 먹었는데도 내공이 앞서지 못하잖아. 술을 담지 말고 잔뿌리도 그냥 먹어버릴걸 그랬나.’
‘소문처럼 진짜 고금제일천재인가? 내가 있는데?’
‘오만했던 사지환이 질투할 만하네. 놈보다 훨씬 죽이기 힘들어.’
팽팽한 싸움이었다.
아주 작은 실수에도 생사가 갈릴 상황.
그래도 그들은 나은 편이었다.
모용수수는 이미 탈진해서 쓰러져있었다.
혜진과 자오는 언제 고꾸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피투성이였다.
동방장이 악을 쓰며 분투하고 있었으나 한쪽 다리를 절룩거리는 꼴을 보니 북방장의 철곤에 제대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물론 북방장도 멀쩡하진 않았다.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악귀처럼 싸우고 있었다.
정광과 낭왕은 잠시 싸움을 멈추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드님이 대를 못 잇게 됐는데 괜찮으세요?”
“아하. 현인이 됐다더니 고자가 된 거였어? 불쌍한 녀석. 그 좋은 걸 못하다니. 그런데 너도 피차일반이잖아.”
“못하는 것과 안 하는 게 같나요. 응담후가(鷹潭后家)가 없어질 판인데 엉뚱한 소리를 하시네.”
“그런 걸 걱정했으면 내가 계속 밖에서 나돌겠냐? 안에 있는 놈들이 알아서 하라지.”
두 사람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떠들며 전황을 파악했다.
‘낭왕 쪽보단 낫지만 비초회도 낭인향도 숫자가 꽤 줄었어. 더 줄면 곤란한데.’
‘이거야 원. 애들이 계속 죽어나가잖아. 남노와 서도가 진작 죽은 걸 알았으면 천천히 와서 단번에 몰아쳤을 텐데.’
가죽 투구 속에 감춰진 낭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가문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 아니었기에 내팽개쳤지만, 반평생을 노력해 모은 낭인들은 달랐다.
남노와 서도가 죽은 건 분통이 터졌으나 칼을 쥔 자라면 언젠가는 그렇게 죽는 것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다른 낭인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아직 살릴 기회가 있다는 게 다르지.’
정광을 어떻게든 죽이면 모두를 살릴 수 있다.
다른 방법을 써도 그럴 수 있고.
지금은 후자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낭왕은 그 마음을 단단히 굳혔다.
“어이. 진옥룡.”
“천하유람단주라니까요.”
“뭐가 됐든 똑똑히 들어라.”
“투항하시게요?”
낭왕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가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내가 미쳤냐?”
“그럼요?”
한동안 웃던 낭왕이 허리를 곧게 세우고 가슴을 넓게 폈다.
하얀 눈을 배경으로 당당히 선 그는 전설에서나 나오는 대장군 같았다.
그의 입이 열리며 허연 입김이 흘러나왔다.
“이 싸움. 내가 이겼다. 너도 인정하지?”
“네?”
“아량을 베풀어 살려주마. 그만 애들 물리고 좀 쉬자.”
정광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짜 미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