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44화
낭왕(浪王)
낭왕이 한 손을 들어 올리며 말고삐를 당기자 허연 입김을 거칠게 뿜어내며 눈이 쏟아지는 대평원을 질주하던 백마(白馬)와 인마(人馬)들이 멈췄다.
낭왕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정광 일행의 숙영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외쳤다.
꽤 잘생긴 얼굴은 가죽 투구로 가려져 안 보였으나 경박한 말투는 여전했다.
“남노(南老)! 서도(西刀)! 거기 있어?”
그를 주시하고 있던 정광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누구를 말하는 거야? 남방장과 서방장인가?’
죽은 듯 자고 있다가 천막에서 뛰쳐나온 동방장이 확인해 줬다.
“사기꾼과 백정을 말하는 거다.”
“호칭하고는. 동방장님은 어떻게 불리세요?”
“망할. 졸려 죽겠네. 왜 이렇게 빨리 온 거야? 이럴 때만 부지런하다니까.”
말을 돌려봐야 소용없었다.
낭왕이 알려줬다.
“설마 다 죽었어? 동구(東狗)! 너 혼자 살아 있는 거야?”
동방장이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정광이 다독였다.
“뭘 이런 걸 가지고. 너무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그래도 황구(黃狗)보다는 낫잖아요.”
“그걸 위로라고 하냐!”
동방장은 길길이 날뛰면서도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낭왕이 두려워서였다.
“미치겠네. 기분이 영 안 좋은 것 같은데.”
“어떻게 아세요?”
“바로 안 달려오고 멈췄잖아. 말을 쉬게 하면서 전열을 재정비한 뒤 아주 작살을 내버리겠다는 의미지.”
마치 그 말을 들은 것처럼 낭왕이 소리쳤다.
“어쭈. 대답 안 해? 동구야! 꼼짝하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라! 완전히 박살을 내주마!”
분노한 동방장이 받아쳤다.
“전(前) 주군! 왜 나한테 화풀이야? 얘한테 그래야지!”
낭왕은 동방장과 정광을 번갈아 보며 이죽거렸다.
“걔는 당연하고! 그다음은 너라는 말이지! 왜? 쫄리냐?”
동방장이 또 울컥해서 쏘아붙이려고 했으나 정광이 더 빨랐다.
“귀 따가워 죽겠네. 괜히 힘 빼지 말고 이따 봬요!”
낭왕이 손을 높이 들어 좌우로 흔들며 화답했다.
“오냐! 그때까지 푹 쉬고!”
쉬란다고 쉴 수 있나.
정광은 신형을 돌려 낭인향과 비초회를 둘러봤다.
모두 긴장한 얼굴로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광의 명은 간단했다.
“준비되셨죠? 가죠.”
“존명!”
모든 이들이 말에 올라탔다.
정광도 수레 위에 올라섰다.
애초에 기다릴 마음 따윈 없었다.
이쪽 말들도 완전한 몸 상태는 아니었으나 먼 길을 달려온 저쪽보다는 나을 터.
“너희도 그렇게 생각하지?”
오늘도 수레를 끌게 된 진흑풍과 황금풍이 작게 투레질했다.
말을 알아듣고 대답하는 게 아니라 다소 지쳐서였다.
동방장이 수레 뒤로 가며 투덜거렸다.
“아직도 삭신이 쑤시는데 또 뛰어야 한다니.”
“오늘은 다른 일 하셔도 되는데.”
“뭐? 진짜? 뭔데?”
“저쪽에 북방장(北方將)님 계시잖아요. 그분을 맡아주세요.”
반색하던 동방장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수레에 손을 올렸다.
“됐다. 그럴 바엔 차라리 이게 낫지.”
“자신 없으세요?”
“어허. 날 뭘로 보고.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그게 그거죠.”
동방장이 또 말을 돌렸다.
“그보다 진짜 가려고? 저 양반, 빤히 예상하고 있을 텐데. 먼 길을 달려온 적을 치는 건 기본이잖아.”
“어떻게 나올 것 같으세요?”
“말들이 지쳤으니 일단 퇴각하며 간을 볼걸? 싸울 때 체면 같은 걸 따지는 위인이 아니거든.”
아니나 다를까.
낭인향과 비초회가 상마(上馬)하자 수하들과 함께 슬금슬금 물러나고 있었다.
정광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쪽 말들의 상태도 안 좋은 걸 알게 되면요?”
“얼씨구나 하며 바로 반전해서 달려들겠지.”
정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돼요.”
“뭐?”
“그땐 우리가 퇴각하면 되니까요. 각응.”
“네, 단주.”
옆에 있던 자오가 화살을 건넸다.
어느새 비룡을 쥐고 있던 정광이 활시위를 당겼다가 놨다.
쉬이이이익-
화살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 낭인 한 명을 낙마시켰다.
낭왕이 황당해하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이 거리에서? 소문보다 더하잖아!”
정광은 말 대신 활로 대꾸했다.
연달아 쏘아내자 낭인들이 계속 죽어갔다.
멍하니 지켜보던 동방장이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도발해서 어쩌려고? 그런다고 덤빌 것 같아?”
그의 말대로였다.
낭왕 무리가 뒤로 멀찍이 물러나고 있었다.
정광이 명했다.
“미세요. 다들 가죠!”
“존명!”
동방장은 얼결에 수레를 밀며 달렸다.
낭인향과 비초회가 그 뒤를 따랐다.
정광은 연달아 화살을 쐈다.
낭인들이 또 낙마했다.
거리를 벌려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낭왕이 선회할 것을 명했다.
“돌아라! 친다!”
“하아!”
수많은 인마가 크게 반원을 그리며 달렸다.
그리고 정광 무리를 향해 질주하려고 하는데.
그들도 선회하고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던 낭왕이 유쾌하게 웃었다.
정광 측의 말들도 상태가 안 좋다는 걸 알아챈 것이다.
“와하하하. 그래도 우리보단 낫다 이거냐?”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건지 이해가 갔다.
자신이어도 이랬을 테니까.
‘저놈 같은 궁술이 있었으면 말이지.’
말도 안 되는 거리에서 화살이 계속 날아와 일방적으로 피해를 보고 있었다.
이러다간 끝이 없을 터.
‘나를 부르는 거냐.’
그렇다면 가주면 되는 일.
무리를 이끄는 낭왕과 무인인 낭왕은 달랐다.
“북호(北虎)! 애들을 이끌어라!”
“존명!”
북방장에게 지휘권을 넘긴 뒤 애마 백광(白光)의 말갈기를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녀석. 답답했지? 슬슬 달려보자!”
히히히힝!
백마가 크게 울며 지면을 박찼다.
두두두두-
백광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무서운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광이 눈을 가늘게 떴다.
‘빠르긴 정말 빠르네.’
일전에 황금풍을 타고 낭왕과 기마술을 겨뤘을 때도 느꼈지만 백광은 대단한 명마였다.
네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눈에 띄게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정광은 당황하지 않고 낭왕을 향해 화살들을 쏘아냈다.
낭왕의 허리춤에서 빛이 솟구쳤다.
곡도(曲刀)가 빠져나와 화살들을 쪼갰다.
“젠장. 아프잖아.”
낭왕이 곡도를 쥔 손을 다른 손으로 주무르며 엄살을 부렸다.
정광이 충고했다.
“너무 가까이서 쳐내셔서 그러신 것 같은데 좀 천천히 오시죠.”
“일단 너부터 죽이고.”
“그건 곤란한데.”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화살을 쏘고 곡도를 휘둘렀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정광은 죽어라 수레를 밀며 뛰고 있는 동방장을 나무랐다.
“뭐 하세요? 힘 좀 제대로 쓰세요.”
동방장은 평소와 달랐다.
“헉. 헉. 말 시키지 마. 말은커녕 화낼 힘도 없으니까.”
그는 정말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낭왕의 살기 때문에 뒤통수가 따끔따끔한데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낭왕도 그걸 알아봤다.
“동구야. 어째 내 밑에 있을 때보다 더 열심히 사는 것 같다. 마음이 영 불편하네.”
동방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라? 이게요? 원래는 얼마나 불성실하셨길래.”
정광이 의아해하자 동방장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섰다.
“헛소리 그만하고 제발 어떻게 좀 해 봐!”
마침 그러려던 참이었다.
정광이 크게 외쳤다.
“다들 쏘세요!”
낭왕이 아슬아슬하게 사정거리에 들어온 상황.
낭인향과 비초회 사람들 중 기마술이 출중한 자들이 일제히 몸을 돌려 화살을 쐈다.
낭왕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고마워라.”
뭐가?
곧 알 수 있었다.
곡도가 현란하게 움직였다.
정광이 쏜 화살은 그렇게 못했지만 하수들의 것쯤이야.
화살들을 일일이 쳐내 쏘아낸 자들에게 되돌려줬다.
“크악!”
“컥!”
화살에 맞은 자들이 낙마했다.
낭왕이 곡도를 빙빙 돌리며 도발했다.
“더 줘! 더!”
정광의 미간에 골이 생겼다.
‘괜한 짓을 했네.’
틈이 보이면 쏘려 했건만 아무런 틈도 보이지 않다니.
낭왕이 계속 가까워지고 있었다.
‘역시 활로는 안 되는 건가.’
그럼 다른 걸 쓸 수밖에.
“각응. 그거요.”
“네! 단주!”
자오가 큰 궤짝을 뒤로 던졌다.
궤짝이 땅바닥에 부딪혀 박살 나며 수많은 철질려들을 토했다.
허나 소용없었다.
낭왕은 신기와 같은 기마술로 명마 백광을 부렸다. 철질려들을 피해 달리며 정광이 쏘아낸 화살마저 쳐내는 기염을 토했다.
“다음은 뭐냐?”
“음…….”
정광은 밀가루를 뿌릴까 하다가 그만뒀다.
낭왕은 잔재주로 상대할 수 있는 무인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쏘아내는 화살을 끝없이 막아낼 순 없지만, 수레를 따라잡을 때까지는 충분히 해낼 수 있는 고수였다.
‘여기까지인가.’
힘 대 힘으로 싸울 수밖에.
비룡을 등에 메고 오랜만에 운룡을 뽑았다.
낭왕을 죽여야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
그도 정광을 죽여야 이길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이렇게 홀로 쫓아온 것이고.
운룡을 본 낭왕이 작게 감탄했다.
“오오. 소문이 맞네. 보통 검이 아니잖아.”
“부러우세요?”
“아니. 빼앗으면 되는데 뭐.”
“역시. 철혈장 소장주님 말씀대로네요.”
“처남이 뭐라 그랬길래?”
“착하디착한 누이를 사파의 불한당이 채갔다고 그러셨거든요. 옥기린의 성품이 그 모양인 것도 아비인 그 도적놈의 영향을 받아 그렇게 된 거라고요.”
“내 아내가 착하긴 하지. 집에 가끔 들러도 반겨주거든. 손바닥으로 등을 수도 없이 내려치지만. 참. 어찌나 손이 매운지…….”
낭왕의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하지만 뒷말은 틀렸어. 처남이 그새 노망났나?”
낭왕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도 좀 그래. 치병이라도 있냐? 유람하러 왔다더니 나를 물 먹이고 말이야.”
말투는 장난스러웠으나 눈에는 살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정광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게요. 앞날은 모르는 거라 하시더니 그렇게 됐네요.”
“역시 인연이란 참 묘하다니까. 그때 죽일걸.”
“못하시니까 그냥 가셨던 거 아니고요?”
“조금만 기다려 봐. 금방 죽여줄게.”
백광이 속도를 높였다.
뒤통수가 서늘해진 동방장이 땀을 뻘뻘 흘리며 울부짖었다.
“소름 끼쳐 미치겠네! 어떻게 좀 해보라니까!”
정광이 씩 웃으며 옆에서 말달리던 모용수수에게 말했다.
“모용 소저. 교대요.”
“알겠소!”
모용수수가 신형을 날려 수레로 옮겨탔다.
정광은 그녀가 타고 있던 말안장에 앉아 말갈기를 쓰다듬었다.
“잘 달릴 수 있지?”
그나마 제일 상태가 좋은 준마가 울었다.
히히히힝!
“좋아. 가보자.”
정광은 말을 옆으로 몰았다.
낭왕이 눈을 빛내며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수레에 남은 자오와 모용수수, 옆에서 말달리는 혜진이 일제히 외쳤다.
“단주! 무운을 빕니다!”
동방장은 수레를 밀며 뛰느라 아무 말도 못 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정광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달려오는 낭왕에게 운룡을 휘둘렀다.
쉬이이익-
눈부신 금빛 광채가 일어나 낭왕을 덮쳤다.
“정말 금빛이네?”
낭왕이 감탄하며 곡도를 움직였다.
곡도가 기이한 곡선을 그리며 금광(金光)을 밀어냈다.
도면으로 검신을 후려친 것이다.
채앵!
양쪽 모두 작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을 일부 나눠 받은 말들도 몸을 휘청였다.
그 순간, 정광과 낭왕은 말이 쓰러지려는 방향의 반대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간신히 무게중심을 되찾은 말들이 평행선을 그리며 달렸다.
정광이 낭왕에게 제안했다.
“이러다 말만 다치겠네. 내려서 싸우죠.”
낭왕이 받아들였다.
“그게 낫겠어. 백광은 섬세하거든.”
그들은 서서히 속도를 줄이다가 완전히 멈췄다.
땅에 내려선 뒤 말들을 먼 곳으로 보냈다.
낭왕은 운룡을 노려보다가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이거 아무리 봐도 불리한데. 북호!”
수하들을 이끌고 낭인향과 비초회를 쫓던 북방장이 한 낭인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말달려왔다.
정광도 지지 않았다.
“비겁하게! 각응! 이쪽으로 오세요!”
자오가 오면 수레도 오는 것.
수레에 함께 탄 모용수수와 뒤에서 밀던 동방장. 옆에서 말달리던 혜진까지 한꺼번에 왔다.
낭왕이 황당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가 더 비겁하잖아.”
“무슨 말씀. 이래야 겨우 짝이 맞을 것 같은데요.”
북방장이 동방장보다 고수라는 얘기.
“그렇긴 하지. 그런데 내가 북호를 부른 건 그런 이유가 아니야. 뭐 해? 빨리 주지 않고.”
북방장이 등에 지고 있던 광주리를 던졌다.
낭왕은 그것을 가볍게 받아 바닥에 내려놨다.
쿵!
철사를 엮어 만든 광주리에는 수많은 종류의 병기들이 들어 있었다.
정광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걸 다 쓰시게요?”
“내 또 다른 별호가 만병지왕(萬兵之王)이라는 소문 못 들었어?”
만병지왕이란 검을 말하는 것.
하지만 낭왕은 모든 병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왕이라 불리고 있었다.
“허세인 줄 알았죠.”
낭왕이 껄껄 웃으며 광주리에 들어있는 병기들을 꺼내 바닥에 줄줄이 박았다.
“네가 신검을 쓰니 이렇게라도 해야지. 북호. 그만 가 봐.”
북호는 움직이지 못했다.
대치하고 있는 동방장 무리 때문이었다.
정광도 동방장에게 명했다.
“가시지 말고 꼭 잡으세요.”
“힘들어 죽겠는데 어떻게…….”
그 순간.
쏟아지는 하얀 눈을 운룡과 곡도가 갈랐다.
눈송이가 붉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