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43화
첫눈
무공을 수련하는 건 지난한 고행길을 걷는 것과 같다.
원한다고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에 맞는 자질이 필요하고 연(緣)도 닿아야 한다.
헌데 그런 무공을 기껏 익혀놓고 보수만 받으면 어떤 일이라도 하는 걸 업(業)으로 삼는 이들이 있다?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겠지만 좋은 평판을 받을 리 있나.
낭인(浪人)은 여러모로 무시받는 존재였다.
하지만 낭왕 휘하에 들면 얘기가 달라졌다.
함부로 취급받지 않았다.
더 많은 보수를 받고 큰 싸움을 즐길 수 있었다.
자연히 수많은 낭인이 낭왕 밑에서 싸우길 원했다.
그러기 위해선 두 가지가 필요했다.
실력과 신용.
특히 신용이 중요했는데, 항복 따위를 했다간 다시는 함께 싸울 수 없었다.
소문이 금방 퍼져 다른 쓸 만한 일거리도 끊겼다.
그렇기에 낭왕의 휘하에 모인 낭인은 어떤 일이 있어도 신용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그 어떤 것보다 목숨이 중요한 위인도 있지 않겠는가?
텁석부리처럼.
‘망할. 왜 그런 눈빛으로 보는 건데?’
텁석부리는 낭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사는 게 뭐가 나빠서. 살길이 있으면 살아야지. 가식 따위 벗어던지고 이쪽으로 와! 어서!’
정광의 지론도 그랬다.
다 죽여도 상관없지만 살리면 부릴 수 있지 않은가.
낭인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아직도 고민 중이세요?”
“…….”
낭인들이 입을 못 열자 어깨를 으쓱했다.
“신용 따위 좀 잃으면 어때요. 죽으면 어차피 없어질 것인데. 산 사람은 살아야죠.”
“…….”
누가 그걸 몰라서 그러나.
투항하면 다시는 낭왕과 함께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푼돈을 받고 작은 마을의 집안싸움에 끼어들어 투덕거리게 되리라.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고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정광에겐 그게 그거였지만.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닌데 왜 고민하실까. 여기 산증인이 계시는데.”
한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낭인들도 그곳을 봤다.
동방장이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한 낭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부정했다.
“동방장님과 우리는 다르오. 낭왕께 미리 확답을 받으신 게 있는 분과 우리를 어찌 비교하겠소?”
“얼마 후면 비슷한 처지가 되실 건데요 뭐.”
“그게 무슨 의미요?”
“제가 낭왕 그분을 귀천시켜 드릴 테니까요. 낭왕께서 돌아가시면 신용이고 뭐고 다 필요 없는 거 아닌가요?”
“……!”
낭인들뿐만 아니라 동방장도 눈을 크게 떴다.
“어? 그러게?”
“네? 동방장님. 모르셨어요?”
“당연하지. 주군이 전(前) 주군을 죽일 수 있을 거라곤 믿지 않았거든.”
“그렇게 안 봤는데 속이 시커머시네. 다른 분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하세요?”
아까의 낭인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물론이오. 그대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그분을 이길 거라 믿기진 않소이다.”
다른 낭인들도 눈빛으로 동의를 표했다.
정광의 놀라운 신위와 악랄한 심계를 직접 경험하고, 말도 안 되는 역용술과 변성술까지 보고 들은 상황이었지만…….
낭왕은 그들의 왕과 같은 존재였다.
왕을 꺾을 거라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정광의 정체를 알았다면 조금은 생각을 달리했을지도 모르나 그걸 아는 수뇌부는 모두 죽은 상태.
모용강이 정광을 쫓으며 진옥룡이라고 불렀었지만, 낭인들은 숙영지에 있었기에 들을 수가 없었다.
정광은 그런 그들을 둘러보며 씩 웃었다.
“제가 이길 거예요.”
“……!”
“궁금하시면 직접 보시고요. 낭인의 왕이라 불리는 분과의 싸움이라. 재밌겠네요. 이런 싸움이 또 있을까.”
낭인들의 눈이 흔들렸다.
정말 그런 싸움은 영원히 없을 것 같았다.
“저만 좋은 게 아니죠. 모시던 왕과 싸우실 기회이기도 해요. 여기에서 포위당하신 채 화살 밥이 되어 죽느니 무림사(武林史)에 남을 싸움을 경험해 보시는 게 어때요?”
낭인들의 얼굴에 여러 감정이 떠올랐다.
“구미가 당기는 분 계시죠? 일이 제대로 끝나면 모용세가 본가도 지난 일은 잊을 거예요. 섭섭지 않게 성의 표시도 할 거고요. 그렇죠, 모용 소저?”
모용수수는 복잡한 눈빛으로 낭인들을 쏘아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를 위해 그러는 게 좋겠지. 모용의 공녀로서 약조하겠소. 우리를 도와 요녕을 전처럼 되돌리면 단주의 말대로 행하리다.”
정광이 덧붙였다.
“마음이 불편할 것도 없죠. 서로 다른 계약을 맺은 낭인분들끼리 싸우는 건 흔한 일이니까요.”
그렇긴 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군이 되고, 내일이 오면 또 어찌 변할지 모르는 게 낭인 세계였다.
낭인들의 눈이 빛났다.
‘무림사에 남을 싸움이라.’
‘정말 거기까지 갈지는 모르나 낭인사(浪人史)엔 남을 만하지.’
‘싸워서 져도 지금 개죽음당하는 것보단 훨씬 낫고.’
‘천하유람단주도 대단한 괴물이니 잘만 풀리면…….’
‘다시 경험하지 못할 싸움을 마지막으로 큰돈을 벌 수 있다.’
‘낭왕…… 그와 싸운다고? 낭인 대 낭인으로?’
낭인치고 사연 없는 자는 없다.
출신 배경이 어떻든, 그 사연 때문에 삶이 뒤틀려 낭인짓을 하는 이가 대부분이었다.
낭인은 군(軍)과 달랐기에 마음에 드는 수장을 고를 수 있었다.
자연히 비슷한 성향을 가진 수장을 선호할 수밖에.
포악한 서방장의 수하들은 큰 싸움을 즐겼다.
영악한 남방장의 수하들은 계산이 빨랐다.
정광이 말한 내용은 양측을 다 만족시키는 것들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낭인이 발걸음을 옮겨 텁석부리 옆에 섰다.
온몸이 피투성이였지만 어쨌든 살아남은 시어머니, 일조장이었다.
처음이 어렵지 다음은 쉬웠다.
낭인들이 텁석부리 쪽으로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텁석부리의 안색이 밝아졌다.
홀로 항복하면 없는 놈 취급을 받을 가능성이 크지만 무리를 이루면 훨씬 나은 대우를 받지 않겠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낭인이 마음을 정했다.
정광은 휘하에 들어온 낭인들에게 포권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하오, 단주!”
그리고 죽음을 택한 낭인들에게도 예를 표했다.
“변함없는 마음, 존중해 드리죠. 시작할까요?”
그들은 병기를 쥔 손으로 포권하며 화답했다.
“와라!”
시신이 늘어나고.
산 사람은 모두 정광의 수하가 됐다.
이제 조직 체계를 개편할 차례였는데…….
비초회(飛草會)와 낭인들은 좀 전까지만 해도 서로 죽고 죽이던 관계.
더구나 요녕에 계속 있을 비초회와 달리 낭인들은 일이 끝나면 바로 떠날 터.
하나로 묶어봐야 좋을 게 없었다.
비초회는 그대로 두고 낭인들의 수장부터 뽑았다.
“강하고 똑똑하시며 신의가 있으신 데다 인망까지 고루 갖추신 분이 누구시죠?”
그런 인재가 낭인 짓을 할 리 있나.
아니, 천하를 뒤져도 몇 명이나 나올까.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멍하니 있자 정광은 방법을 바꿨다.
“음. 그럼 직급이 제일 높으신 분은 누구세요?”
두 장군의 심복들과 당주들은 모두 죽었으나 향주 몇 명은 살아 있었다.
그들 중 아까 대화를 나눴던 자가 있었고, 정광은 그를 낭인들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이제 조직 이름을 정해야죠. 뭐가 좋으려나.”
정광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손뼉을 쳤다.
“마침 운치 있는 이름이 떠오르네요. 낭인향(浪人香). 어때요?”
나쁘지 않았기에 낭인들은 동의했다.
나쁘지 않아서 정광의 작명 감각을 잘 아는 천하유람단과 비초회는 경악했고.
정광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향주님은 그대로 향주님 하시면 되니까 얼마나 편해요. 다른 향주님들은 부향주로 가시죠.”
그제야 천하유람단과 비초회는 납득했다.
‘그러면 그렇지.’
‘이래서 낭인향이라 지은 거구나.’
어쨌든 그럴듯한 이름이었다.
“그럼 낭인향은 원래 쓰던 숙영지를, 비초회는 회천회의 숙영지를 사용하는 것으로 하죠.”
정광은 당장 해야 할 일을 알려줬다.
“향주님. 배앓이 하는 말들요. 이거, 해독약이니까 물에 타서 먹이세요. 조금이나마 빨리 회복하게 될 거예요.”
비율까지 설명해 주자 향주가 놀란 얼굴로 대답했다.
“알겠소.”
“초주님. 말들이 많이 지쳤으니까 배불리 먹이고 푹 쉬게 해주세요. 말은 많을수록 좋으니 대충 하시면 안 돼요.”
야율초가 무겁게 답했다.
“알겠다.”
정광은 두 사람에게 당부했다.
“부상을 입으신 분들은 꼭 치료하시고요. 운기조식도 제대로 하세요. 끝나면 다 같이 식사라도 하죠.”
마적이나 낭인이나 몸이 곧 재산인 자들.
정광의 명을 충실히 따랐고 해가 지기 전에 밥을 먹게 되었다.
건량과 육포가 아니라 제대로 된 밥을.
번초(番哨)도 영내에만, 최소 인원으로 세웠다.
몸 상태를 회복하는 걸 최우선으로 했다.
동방장만 빼고.
“……뭐?”
“이해 못 하셨어요?”
정광의 물음에 동방장이 두 눈을 부릅떴다.
“이해해서 이러는 거다. 그게 말이 돼?”
“되니까 말했죠.”
동방장이 폭발했다.
“왜 나만 영외로 돌리는데! 그것도 해가 뜰 때까지! 게다가 늑대와 승냥이를 있는 대로 다 부려서 주변을 샅샅이 살피라고? 그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알기나 하고 그러냐?”
정광이 황당해했다.
“아뇨. 부려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아요.”
“……아. 그래서 그랬구나.”
동방장은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으르렁거렸다.
“이렇게 이해해 줄 줄 알았냐? 수레 밀면서 뛰어봤어? 피곤해 죽겠는데 왜 자꾸 나를 시키려고 해?”
정광이 정색했다.
“그럼 가만히 있어요? 낭왕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는데?”
“다른 놈들을 시키라니까!”
“돌아와서 소식을 전하기도 전에 발각돼서 죽을 건데 그런 쓸데없는 짓을 왜 해요.”
“내가 죽는 건 쓸데 있고?”
“동방장님이 왜 죽어요? 저 다음가는 고수신데.”
“……그렇긴 하지. 진짜 미치겠네! 내가 이러면서 좋아할 줄…….”
정광의 눈과 목소리가 깊게 가라앉았다.
“싫으셔도 하셔야 해요. 저는 푹 자야 하니까요.”
“나도 자고 싶…….”
“해가 뜨면 푹 주무시게 해드릴게요. 이제 만족하시죠?”
동방장은 정광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후우우우. 전 주군이 오면 깨워서 또 수레 밀게 할 거잖아.”
“혹시 알아요? 늦게 오실지.”
“…….”
동방장은 기가 막혔으나 명을 받들 수밖에 없었다.
정광이 슬며시 두 손을 매만져서가 아니라 현 상황에 제일 맞는 방도여서였다.
“젠장. 빨리 오기만 해봐. 그땐 안 참는다.”
“어?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는데. 불길하게 진짜.”
다행히 이번엔 아니었다.
동방장은 동이 틀 때까지 생고생한 뒤 돌아와 푹 자고 있던 정광을 깨웠다.
“잠이 오냐? 앙?”
“네. 은근히 졸리네요.”
“하아아. 됐다. 하여간 능구렁이 같기는. 제멋대로인 건 또 어떻고. 어째 주군을 바꿔도 똑같은 위인이 걸리냐.”
“무슨 그런 실례되는 말씀을. 제가 훨씬 낫죠.”
동방장이 콧방귀를 뀌었다.
“백번 양보해도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야. 어제 애들을 설득할 때도 그랬지. 전 주군이 세를 키울 때와 어쩜 그리 비슷한지.”
“어땠는데 그러세요?”
“그 양반. 비록 사파무림 쪽이지만 명가의 자손이야.”
아는 얘기였다.
“그런 인간이 왜 낭인질을 하겠냐?”
이건 몰랐고.
“제멋대로여서지. 집 안에 박혀 있자니 심심했다더라. 틈만 나면 뛰쳐나와 놀았는데 우연히 낭인들과 엮였대. 해보니 적성에 맞았다나? 다시 생각해도 웃기네. 적성은 무슨.”
“그래서 가출하신 거예요?”
“본인은 출가라고 우기는데 누가 봐도 가출이지.”
“배가 부르셨네요.”
“내 말이. 그런데 강호에서 구르다 보니 배가 고프더래. 보수가 아주 짰거든.”
“그래서 판을 키우셨다?”
“그래. 그때부터 쓸 만한 놈들을 모았지. 중원 전역을 돌아다니며 주먹과 감언이설로 설득했어. 내가 그 피해자 중 한 명이다.”
“다른 사방장님들은요?”
“걔들은 가문에서 따라온 가신(家臣)들이고. 빌어먹을 놈들. 항상 눈꼴 시렸었는데 둘은 죽었으니 그나마 낫네.”
동방장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광은 피식 웃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낭왕께서 건진 인재는 동방장님밖에 없는 거예요? 많이 모으신 것처럼 말씀하시더니.”
“당주나 향주. 이런 애들쯤 되면 어디 가도 그렇게 꿀리지 않는데 무슨. 그리고 모은 게 낭인뿐이겠냐?”
“하긴. 의뢰를 줄 능력이 있는 분들도 모으고 협력할 만한 가치가 있는 분들도 모으셨겠죠.”
“……무서운 놈. 아주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는구나. 어라? 설마 남방장 그놈처럼 그게 되는 거야?”
“아뇨. 그나저나 낭왕 그분. 능력 있는 분이시네요.”
동방장은 정광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주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해. 가신 셋이 따르긴 했지만 홀로 그 모든 일을 이룬 것과 진배없지. 낭인으로 이만한 세력을 이룬 건 전무후무할걸?”
정광도 동의했다.
“그런데 안 피곤하세요? 그러시면 북쪽으로 좀 가셔서…….”
동방장은 시체처럼 쓰러져 잠들었다.
정광은 낭인향과 비초회의 상황을 점검했다.
낭인향주가 먼저 보고했다.
“말들에게 해약을 먹였더니 한결 나아졌소. 여물도 양껏 먹고 있으니 오후쯤 되면 예전처럼 달릴 수 있을 것 같소이다.”
“다행이네요. 부상 치료는요?”
“할 만큼 했소. 다들 운기조식도 제대로 하고 푹 잤으니 나쁜 상태는 아니오.”
정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으론 부족해요. 최대한 좋게 맞춰보세요.”
“…….”
어떻게?
정광도 답이 없었기에 야율초에게 시선을 돌렸다.
“비초회는요?”
“말들이 회복하려면 최소 이틀은 더 필요하다. 사람은 괜찮은 편이고. 헌데…….”
야율초는 낭인향주와 달리 직설적이었다.
“어떻게 하면 몸 상태를 더 끌어 올릴 수 있지?”
“글쎄요. 잘 드시면 좀 나아질지도.”
아침을 배불리 먹었다.
점심 또한 마찬가지.
해가 조금씩 내려가며 기온도 내려갔다.
칙칙한 먹구름이 하얀 가루를 뿌리기 시작했다.
‘요녕에서 겨울을 나게 될 줄이야.’
정광은 하늘과 북쪽을 번갈아 보며 혀를 찼다.
하늘에선 눈이 내리고.
북쪽 지평선에선 먼지구름이 일었다.
‘좀 천천히 오지. 뭐가 저리 급해?’
수많은 인마가 몰려오고 있었다.
그 선두에는 가죽 흉갑으로 상체를 보호하고 가죽 투구로 얼굴을 가린 낯선 무인이 있었다.
허나 그가 타고 있는 말은 초면이 아니었다.
‘눈처럼 하얀 백마(白馬)라…….’
응담후가(鷹潭后家)의 가주이자 후위진의 아비.
낭왕의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