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42화
신용이 좋은 분들
모용강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멀리에서 뿌연 먼지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기마대군. 결국 오는 건가.’
수가 상당히 많았다.
수하들에게 상마(上馬)할 것을 지시하려고 하는데, 먼지구름 속에서 한줄기 빛살이 쏘아졌다.
‘저건!’
화살이었다.
엄청난 거리를 무(無)로 만들며 날아온 화살이 모용강의 머리보다 한참 높은 허공을 지나 무언가를 꿰뚫었다.
푸슉-
모용강은 천천히 신형을 돌려 고개를 치켜들었다.
장대 위에서 펄럭이던 회천회(回天會) 깃발에 구멍이 나 있었다.
헌데 그 구멍이 뚫린 위치가 실로 절묘했다.
깃발 한가운데에 자리한 천(天).
하필이면 천을 이루는 일(一)과 대(大) 사이라니.
‘……견(犬)?’
하늘을 되돌리는 모임인 회천회가 개로 돌아가는 모임으로 바뀐 것 아닌가!
‘절대 우연이 아니야.’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도 뻔했다.
‘진옥룡. 이놈이 감히!’
바로 명을 내렸다.
“상마하라!”
“존명!”
회천회 무인들이 일제히 말에 올라탔다.
모용강도 상마한 뒤 낭인들의 수장인 냉혼도(冷魂刀)에게 크게 물었다.
“그쪽은 준비됐는가?”
“물론이오!”
활을 든 낭인들이 먼지구름을 노려보며 길게 늘어서 있었다.
“좋아! 해보세!”
냉혼도가 주의를 줬다.
“모용 대협! 무리하지 말고 약조한 대로 하셔야 하오!”
“당연한 소리! 자네야말로 잊지 말게나!”
첫째. 적이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낭인이 화살을 쏜다.
둘째. 적이 물러나면 회천회가 기사(騎射)하며 추격한다.
셋째. 따라잡으면 병기로 찌르고 벤다.
무공이 약한 마적과 이민족을 상대하기 적합한 전술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추격을 시작할 시 낭인들도 최대한 빨리 따라가 회천회가 퇴각할 경우 활로 엄호사격을 해야 한다는 것.
그 중책을 맡은 냉혼도가 가슴을 두드리며 외쳤다.
“제대로 해낼 것이니 믿으시오!”
모용강의 이마에 밭고랑 같은 주름이 깊게 파였다.
‘낭인 따위를 믿으라고?’
평소라면 어림도 없는 소리였지만 진옥룡이라는 공동의 대적을 눈앞에 둔 상황 아닌가?
죽기 싫어서라도 최선을 다할 터.
믿어야 했다.
모용강은 가까워지는 먼지구름을 주시하며 다짐했다.
‘놈! 어서 와라! 내가 직접 목을 베어주마!’
그때, 멀리서 피어오르던 흙먼지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갑자기 속도를 늦춰?’
얼마 안 가 완전히 사라졌다.
‘……아예 멈추다니. 왜?’
낭인들도 그렇지만 회천회의 화살도 닿지 않을 거리였다.
그들이 전투 전에 맺은 약조는 그 대전제부터 잘못돼 있었다.
수많은 인마의 중앙에 있는 수레에서 빛살이 쏘아졌다.
깃발이 꿰뚫렸을 때보다 훨씬 더 가까이서 쏘아진 화살들이 회천회 무인들의 이마에 박혔다.
“크악!”
“어억!”
그들은 채 달려보지도 못하고 줄줄이 낙마했다.
모용강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뭣들 하느냐? 병기로 막지 않고!”
소용없었다.
화살은 빠르기만 한 게 아니라 놀라운 힘을 품고 있었다.
병기를 뚫거나 깨뜨리며 무인들의 얼굴과 가죽 흉갑(胸甲)에 꽂혔다.
‘이럴 수가!’
모용강의 눈이 흔들렸다.
정광에게 전멸당한 적혼표풍대(赤魂飇風隊)의 시신과 반쯤 망하다시피 한 여러 호족 가문을 보며 대단한 신궁이라 감탄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연사(連射)가 어찌나 빠른지, 화살이 쉼 없이 날아오고 있었다.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다!’
모용강은 검으로 정광을 가리키며 외쳤다.
“돌격하라!”
“존명!”
모용강은 선두에서 말달리며 이를 갈았다.
‘피해를 입어도 좋다. 거리를 좁혀 사정거리 안에 들기만 하면 바로 일제사(一齊射)로 제압해 주마!’
쏘고 쏘고 또 쏘면 그 어떤 고수라도 잡을 수 있다.
정광이 견디다 못해 근접전으로 싸우려고 들면, 말머리를 돌려 거리를 벌리며 화살을 계속 쏘아내면 된다.
‘반드시 잡는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욕설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간교한 놈을 봤나!”
* * *
‘모용강 저놈. 모용수수가 말하길 꽤 오만한 놈이라 했지. 약 좀 올려볼까.’
정광은 모용강이 기마대를 이끌고 달려오자 고개를 돌려 야율초에게 말했다.
“회주님. 잘 따라오셔야 해요.”
“알겠다. 비초회(飛草會)! 지금부터 수레를 따라 달린다!”
“하아!”
마적과 이민족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답했다.
“동방장님. 열심히 미시고요.”
“망할!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동방장은 짜증을 내면서도 시키는 대로 했다.
정광은 혜진과 모용수수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왼팔을 움직여 고삐를 당겼다.
히히힝!
진흑풍과 황금풍이 지면을 박찼다.
회천회를 향해서가 아니라 적의 숙영지를 중심으로 크게 원을 그리며 달렸다.
“각응. 화살요.”
“네! 단주!”
자오가 눈부신 속도로 화살을 연이어 건넸다.
정광은 그것을 받는 족족 숙영지를 향해 쐈다.
“커헉!”
낭인들이 화살에 꿰여 쓰러졌다.
뒤늦게 방향을 튼 모용강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이런 간교한 놈을 봤나!”
정광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전장에서 이것보다 큰 찬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의욕이 솟네. 제대로 해야겠어.’
부지런히 손을 놀릴 때마다 낭인들이 고꾸라졌다.
참다못한 낭인들이 응사했으나 거리가 너무 멀었기에 반도 날아오지 못하고 땅바닥에 박혔다.
‘얘들은 이렇게 요리하면 되고.’
뒤를 흘깃 보니 회천회가 무서운 속도로 쫓아오고 있었다.
‘노력하는 이들에겐 그만한 포상이 있어야지.’
야율초에게 명했다.
“회주님! 지금이에요!”
“알겠다! 비초회! 후열만 던져!”
“하아!”
뒷줄에서 달리던 마적과 이민족이 철질려(鐵蒺藜)를 꺼내 뒤로 던졌다.
그것을 본 모용강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외쳤다.
“놈들이 철질려를 던졌다! 방향을 돌려!”
“존명!”
두두두두-
최단 거리인 직선으로 쫓고 있던 회천회는 우회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거리가 벌어졌고 정광은 마음 편히 화살을 쏘았다.
모용강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더 빨리 달려라!”
“존명!”
정광의 입가엔 미소가 맺혔다.
“회주님. 철질려요. 좀 더 드리죠.”
“알겠다! 던져!”
발이 묶인 낭인들은 죽이고 발이 있는 회천회는 늦춘다.
이 단순하면서도 효율적인 전술에, 돕기 위해 나왔다가 헛물만 켠 낭인들과 죽어라 말달리던 회천회는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나가봐야 화살에 꿰일 뿐이었다.
인마를 나눠 길목을 차단하려고 하면, 정광은 귀신같이 알고 먼저 방향을 바꿨다.
‘이러다간 끝이 없어!’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낭인들도 회천회도 답이 안 나오는 고민을 할 때 정광이 변화를 줬다.
“한쪽만 드리면 불공평하죠.”
쉬이이익-
숙영지가 아니라 모용강을 향해 연달아 화살을 쐈다.
모용강은 검으로 계속 쳐내다가 이를 악물었다.
검을 쥔 손이 저렸다.
몇 번만 더 쳐냈다간 검을 놓칠 것 같았다.
머릿속에 죽음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이러다 죽으면 개죽음이다!’
결단은 빨랐다.
“모두 선회해라!”
정광도 빨랐다.
“우리도 선회해서 회천회를 쫓아요!”
“……!”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시작됐다.
정광이 활시위를 당겼다 놓을 때마다 기수가 낙마했다.
“으아악!”
아무리 달려도 정광을 뿌리칠 수 없자 모용강의 눈에 핏줄이 섰다.
“다시 선회해! 우리가 죽더라도 놈을 죽인다!”
정광은 조금 달랐다.
“선회하세요! 우리는 살고 적만 죽이는 겁니다!”
“……!”
일행의 후미에서 도주하며 계속 화살을 쐈다.
모용강은 그답지 않게 욕설을 연이어 뱉으며 말의 배를 찼다.
“달려라! 더 빨리!”
말이 용을 쓰며 달렸다.
정광의 수레가 점점 가까워졌다.
‘좋아! 이제 됐어! 이 정도 거리면 화살을 날리고도 남는…….’
그때, 정광이 수레에 실린 자루를 하나 들더니 회천회를 향해 털었다.
하얀 가루가 쏟아져나와 허공을 덮었다.
“……!”
대경한 모용강이 급히 말고삐를 당기며 외쳤다.
“독이다! 피해!”
말들이 일제히 방향을 틀었다.
하얀 가루를 간신히 피하고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후우우. 큰일 날 뻔했군.’
다시 정광을 쫓았다.
정광이 자루를 하나 더 털었다.
“이런! 피해라!”
급격히 말머리를 돌렸다.
이렇게 또 간발의 차이로 피하자 정광이 곤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회천회 무인들에게 충분히 들릴 만큼 큰 목소리로.
“큰일이네. 밀가루도 쌀가루도 없어졌어.”
“……!”
“앞으로 뭘 먹지?”
“……!”
울화통이 터졌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지친 말들이 입에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발을 헛디뎌 쓰러지거나 멈춰서는 녀석들도 나왔다.
히히히힝!
“크악!”
모용강은 그제야 인정하게 됐다.
‘못 잡는다. 저놈은 절대 잡을 수 없어.’
준마 두 필이 앞에서 끌고 정체불명의 고수가 뒤에서 밀어 나는 것처럼 빠르게 달리는 수레.
그 위에 우뚝 서서 끝없이 화살을 날리는 신궁을 어찌 잡겠는가?
‘말들이 너무 지쳤다. 이대로 가면 전멸이야.’
철질려와 곡식 가루를 급히 피해가며 쫓느라 회천회 말들이 훨씬 더 지친 상황.
대평원에서 말을 잃으면 죽는다.
숙영지로 돌아가도 시간 차이만 있을 뿐 결국엔 죽는다.
퇴각해야 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많은 이들의 뒤통수에 화살이 또 꽂히겠지만 다 죽는 것보단 나으리라.
‘그래도 일단 던져는 봐야겠지.’
모용강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진옥룡! 할 말이 있다!”
정광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누군데요?”
“……이익. 천하유람단주!”
“네. 무슨 일이시죠?”
“그만 싸움을 끝내는 게 어떻겠느냐?”
“말을 놓고 걸어서 떠나시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정광이 화사하게 웃었다.
“그럼 싸워야죠.”
“…….”
모용강은 떨리는 눈으로 정광을 바라보다가 명했다.
“퇴각하라!”
회천회는 도주하고 정광 무리는 그들을 쫓았다.
말이 지쳐 쓰러지며 낙마하는 이가 속출했다.
화살이 끝없이 날았다.
대평원이 수많은 사람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 * *
“아. 팔 아파.”
정광이 오른팔을 빙빙 돌리며 인상을 쓰자 자오가 급히 물었다.
“단주. 추궁과혈(推宮過穴)이라도 해드릴까요?”
정광이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차피 할 거, 제가 직접 하는 게 낫죠.”
“……아. 그러게 말입니다.”
“싱거우시긴.”
정광은 왼손으로 오른팔을 주물렀다.
수레를 밀며 죽어라 뛰던 동방장이 비명을 지르며 수레 위에 올라와 쓰러졌다.
“더는 못해! 아니, 안 해!”
“힘드세요?”
“당연하지!”
정광은 해결책이 있었다.
“운기조식하시고 직접 추궁과혈하세요.”
“……내가 미쳤지. 이런 녀석을 주군으로 삼고.”
마차 옆에서 말달리던 모용수수가 꺼림칙한 얼굴로 정광을 바라봤다.
“단주. 대승을 거뒀으나 모용강과 적지 않은 놈들이 도주했소. 뿌리를 뽑는 게 나았을 텐데 왜 그만둔 것이오?”
“우리 말도 지쳤으니까요.”
“지치긴 진작에 지쳤소만. 얼마 못 달릴 것이오. 최소 사나흘은 못 쓰게 될 것이고.”
“그거면 돼요.”
“무슨 의미요?”
정광은 저 멀리 보이는 낭인들의 숙영지를 가리켰다.
“저기 계신 분들을 끝낼 때까지만 버텨주면 된다는 얘기죠.”
“그럼 그 후에는 어쩌려고…….”
“낭인분들 말을 빌려 쓰면 되잖아요. 하루 이틀만 지나면 달릴 수 있게 될 테니까요.”
의외의 수에 감탄하던 모용수수가 얼굴을 굳혔다.
“그때까지 낭왕이 안 오면 다행이지만 정말 그럴지 모르겠소.”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저기 있을 때 운이 좋으면 사나흘 안에 올 거라고 다들 수군대는 걸 들었거든요.”
“아!”
“혹시라도 미친 듯이 달려오면 시간은 줄일 수 있겠지만 그쪽 말들도 지친 상태겠죠. 숙영지로 가서 정리를 끝낸 뒤 하루 정도 푹 쉬고 생각하면 될 거예요. 그보다…….”
정광은 주변의 마적과 이민족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말들이 지쳤으니 낭인분들과 싸울 땐 기동력을 살리기 힘들 거예요. 다들 각오되셨죠?”
야율초는 바로 알아들었다.
비장한 목소리로 다른 이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순 없다! 놈들을 죽여야 우리가 산다! 그래야 권리도 생긴다! 싸우다가 죽더라도 놈들을 죽이고 죽자!”
“와아아아아!”
악에 받친 마적과 이민족이 함성을 질렀다.
일방적으로 사냥당하며 터전에서 쫓겨난 원한이 살의로 변했다.
“우리는 할 수 있다!”
“깡그리 죽여 버려!”
정광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숙영지를 가리켰다.
“가죠!”
“하아!”
그들은 하나가 되어 숙영지를 덮쳤다.
그제야 정광의 얼굴을 알아본 낭인들이 경악했다.
“저, 저건!”
“제조당(製造堂)의 고영이잖아!”
제조당 삼향(三香) 일조(一組)의 막내 고영.
그의 창에 냉혼도가 쓰러졌다.
“음. 이 얼굴로 할까?”
정광은 보란 듯이 자신의 얼굴을 냉혼도로 바꿔 보였다.
낭인들이 혼란에 빠져 절규했다.
“이 악귀야! 하늘이 너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정광은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건 하늘과 제가 상의해야 할 일이죠.”
“……!”
“이제 우리 간의 일에 대해 말해볼까요? 항복하실 분은 이쪽으로 오세요.”
정광이 한쪽을 가리키자 땅바닥에 쓰러져 죽은 척하고 있던 텁석부리가 잽싸게 굴러갔다.
그가 살아 있는 걸 알고 있던 정광을 제외하고, 장내에 있던 모두가 당황할 만큼 민첩한 나려타곤이었다.
“오오. 좋은데요. 부단히 연마하셨나 봐요.”
“……가, 감사합니다. 대협.”
정광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는 다른 낭인들을 둘러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신용이 좋은 분들이시네요. 모두 귀천시켜 드리면 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