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41화
회전(會戰)의 시작
모용강은 자신을 찾아온 낭인들을 훑어보다가 중앙의 중년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냉기가 줄줄 흐르는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서방장의 옆에 붙어 있던 놈이군. 부관 노릇을 한다는 냉혼도(冷魂刀)겠지.’
이놈이 왜 왔을까?
한동안 피어올랐던 거대한 연기 때문이리라.
‘변고가 생긴 것 같은데. 어떤 일이기에?’
궁금했으나 급한 건 자신이 아니었다.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자 중년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모용 대협. 냉혼도가 인사드리오. 중요한 일이 있어 왔소이다.”
모용강은 눈살을 찌푸리며 단호히 말했다.
“주인이 말이 짧은 건 이해한다 쳐도 그 수하까지 그러면 곤란하지. 너와 할 말은 없다. 돌아가서 주인을 보내라.”
“불가하오.”
“무어라?”
노성을 터뜨리려던 모용강은 냉혼도의 이어지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장군들께서 살해당하셨소.”
“……!”
“본인이 남은 이들을 이끌게 됐소이다. 그래서 말을 높이지 못하는 것이니 이해해 주시오.”
“…….”
모용강은 놀란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
장군도 아니고 장군들이란다.
낭왕의 사지(四肢)와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는 사방장(四方將) 중 최소 둘은 죽었다는 얘기.
모용강은 새로운 장(將)이 된 냉혼도에게 어느 정도 예를 갖춰 물었다.
“서방장과 누가 당했는가?”
“남방장이시오. 동방장께선 그 전에 생포되셨고.”
“……사방장 중 셋이나?”
“그렇소이다.”
“……흉수는?”
냉혼도의 눈이 더 차가워졌다.
“당연한 걸 물으시는구려. 마적과 이민족을 이끄는 진옥룡이 아니면 누구겠소?”
“…….”
사방장 중 둘이 살해되고 하나가 사로잡힌 건 놀라웠으나 흉수가 누군지 알게 되자 이해가 갔다.
‘진옥룡, 진옥룡 하더니 명불허전이군. 대평원에서 낭인들을 뚫고 그놈들을 죽이거나 잡다니. 대체 무슨 수를 썼길래?’
모용강은 일부러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진옥룡이 요녕에 있을 줄이야.”
“천하유람단주가 그자잖소? 우리가 아는 걸 모용이 모를 리 있나. 심각한 상황이니 의뭉 떨지 마시오.”
모용강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러지. 그를 직접 봤나?”
“역용을 하고 있었으나 그놈이 틀림없소. 장군들을 홀로 살해할 수 있는 자가 요녕에 또 있으면 말해보시오.”
“없지는 않네만.”
“귀회(貴會)도 의심했었지만 곧 접었소. 그렇게 멍청한 짓을 할 리는 없으니까.”
마음에 안 드는 건 안 드는 거고 일은 일이다.
비싼 돈을 들여 고용해 놓고 일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뒤통수를 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냉혼도는 모용강을 응시하며 또박또박 요구했다.
“계약상 진옥룡은 우리 몫이 아니오. 책임을 지셔야 하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떤 식으로? 무엇을 원하는가?”
“그놈이 수작을 부려 말들이 배앓이를 하고 있소.”
냉혼도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상세히 설명했다.
무거운 표정으로 듣던 모용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악독한 놈이군. 안 됐네만 우리도 말이 많이 남지는 않네.”
“달라는 게 아니오. 사나흘만 힘을 합치자는 것이외다.”
“말들이 그 정도만 정양하면 나을 거란 뜻인가?”
“그렇소. 운이 좋으면 낭왕께서도 오실 것이오.”
“연기를 봤네. 그게 낭왕을 부르는 신호였군.”
“그분께는 다른 방식으로 소식을 전하오. 그 연기는 진옥룡 그놈이 한 짓이오.”
“마적과 이민족을 부른 건가.”
“그것밖에 떠오르지 않소. 별것 아닌 놈들이지만 기사(騎射)로 치고 빠지면 상대하기 까다롭지. 그래서 함께하자는 것이오.”
까다로운 정도가 아니라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게 뻔했다.
발이 묶인 낭인들을 지키려면 척사당(斥邪堂)이 대신 피를 흘려야 할 것이고.
“으음.”
모용강이 미간을 모으자 냉혼도가 덧붙였다.
“양패구상을 노릴 생각은 마시오. 우리는 일방적으로 당했소.”
“…….”
“그대들이 계속 우리를 따라온 걸 놈이 모를 것 같소? 우리가 모두 죽으면 다음은 그대들이외다.”
“…….”
“피를 보더라도 힘을 합쳐야 하오. 놈을 잡아야 그대들의 대업을 이룰 수 있다는 걸 명심하시오.”
다소 강압적인 말이었으나 모용강은 신경 쓰지 않았다.
맞는 말인 데다 더 큰 문제가 있어서였다.
“피해를 입는 것 때문에 고민하는 게 아닐세.”
모용강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진옥룡, 그놈. 아직도 그대들 틈에 숨어 있는 것 같나?”
“반반일 것 같소.”
“어떻게 할 셈인가?”
“영내에만 번초(番哨)를 세우고 영외는 포기하려 하오. 헛된 희생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것이오. 식량과 식수, 말도 철저히 확인할 것이고.”
“놈을 잡을 방법은?”
냉혼도가 굳은 얼굴로 답했다.
“그런 방도가 있으면 찾아오지도 않았겠지. 놈은 진옥룡이외다.”
* * *
불안해하던 낭인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이었거늘, 이렇게 반가울 수가 있나.
“원군이 왔다!”
제조당(製造堂) 삼향(三香) 일조(一組) 육오(六伍)는 천막 밖으로 나가 그들을 구경했다.
새로 오장(伍長)이 된 낭인이 한시름 놓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냉혼도께서 회천회(回天會) 놈들을 데려오셨구나. 최소한 저놈들이 흉수는 아니라는 얘기지. 정말 다행이야.”
옆에 있던 텁석부리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저 잘난 척하는 놈들에게 신세를 져야 한다니. 부끄러워 죽겠는데 뭐가 다행이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너밖에 없어.”
“오장이 잘못 생각한 거요. 막내야, 너도 부끄럽지?”
텁석부리는 정광이 자신을 부축한 채 회천회 무인들만 바라보자 인상을 썼다.
“인마. 형님이 말하면 고개라도 좀 끄덕여 줘라. 섭섭하게 왜 이래?”
정광은 그제야 텁석부리가 자신에게 말한 거라는 걸 깨달았다.
‘막내? 형님? 섭섭? 이게 왜 갑자기 친한척하지?’
오장이 두 사람을 보며 웃었다.
“하하. 사이가 좋아져서 다행이군.”
하지만 그 웃음은 짧았다.
“농은 여기까지 하자. 원군이 온 건 온 거고. 흉수는 흉수야.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긴장을 풀면 안 돼.”
텁석부리는 받아치려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회천회 무인들도, 낭인들도 모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서였다.
정광 역시 방심하지 않았다.
‘올까 싶었는데 왔네. 아주 바보들은 아니구나. 잘됐어.’
낭인들이 당하면 다음은 회천회 차례니 올 수밖에 없었으리라.
정광은 바보보다 똑똑하다고 평가받는 놈들을 상대하는 게 더 쉬웠다.
‘보나마나 밤이 되면 영외 경계는 안 하겠지. 영내는 철저히 살필 테고. 지휘 체계가 다르니 진영을 합치되 섞지는 않을 거야.’
생각대로였다.
회천회는 낭인들 바로 옆에 숙영지를 세우고 있었다.
‘말들을 한가운데에 모으네. 높은 놈들이 지키려는 것 같은데.’
말은 물론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도 꼼꼼하게 검사하리라.
정광이 역용하고 스며드는 걸 막기 위해 암구호(暗口號) 같은 것도 만들었을 테고.
이는 낭인들 쪽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들어와 있어 암구호는 의미 없었지만 고수들이 말을 보호하기 시작했고 식사 체계까지 바뀌었다.
“뭐? 이제부턴 각자 소지하고 있는 건량과 육포만 먹으라고?”
“물까지? 이래서 어떻게 싸워?”
낭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나직이 불만을 토로했다.
입을 열진 않았으나 정광 역시 불만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아니. 먹을 건 제대로 줘야지.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독을 타지 못하는 건 둘째고 먹는 즐거움이 사라지지 않았는가?
허나 정광과 달리 낭인들은 투덜대면서도 받아들였다.
“제기랄, 어쩔 수 없지. 사는 게 우선인데 어쩌겠어.”
“휴우. 그래. 독을 먹고 죽는 것보단 나아. 참아보자고.”
번을 서는 인원도 많아지고 배치 또한 촘촘해졌다.
당연히 모든 일의 원흉인 정광도 이런 불편들을 감수해야 했다.
물론 회천회나 낭인들만큼은 아니었지만.
‘고생 좀 해라.’
번을 설 때도 쉴 때도 잘 때도 마음이 편한 정광과 달리, 회천회와 낭인들은 신경이 곤두선 채로 하루를 보내야 했다.
이제 겨우 첫날인데 극도의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몸과 마음이 무뎌지는 이들이 늘어났다.
양측 수뇌부는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 예상했었으나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야 있나.
야심한 시각에도 회의가 열렸다.
팽팽한 긴장감 때문에 의심도 커져만 갔다.
“놈이 여기에 있긴 있는 건가?”
“모르겠소. 번초가 죽진 않을 것 같아 다행이긴 한데…….”
“그래서 더 불안하네.”
“마찬가지요. 놈이 무엇을 꾸미고 있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소.”
정광은 아무 생각 없이 번을 서고 있었다.
조금이나마 거동을 할 수 있게 되어 같이 번을 서게 된 텁석부리가 피곤한 눈으로 밤하늘의 별을 세다 무심코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죽기 싫은데.”
정광이 빤히 바라보자 텁석부리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오, 오해하지 마. 이렇게 번을 서다가 뒤통수 맞고 죽는 건 싫다는 말이다. 무인이면 무인답게 통쾌하게 싸우다가 죽어야지. 안 그래?”
안 그랬다.
어찌 죽든지 간에 죽는 건 어차피 마찬가지.
통쾌하려면 살아야 했다.
정광의 입을 한동안 주시하던 텁석부리가 쓴웃음을 흘렸다.
“망할. 네가 말 못 하는 걸 깜빡하고 뭐라 말할지 기다렸잖아. 못 들은 걸로 해라.”
“…….”
“이 녀석이. 고개 좀 끄덕여라. 응? 내가 좀 괴롭혔던 것 때문에 그래? 아니면 내가 늘어놨던 무용담 때문에 거리를 두려는 거냐?”
아픈 몸과 극심한 긴장감 때문에 정신이 무너진 것인지, 텁석부리는 지난 삶에 대해 주절주절 떠들었다.
“이해했어? 내 탓이 아니라니까. 어쩔 수 없었던 거야. 나라고 좋아서 그랬겠냐?”
“…….”
“미친. 너도 갖은 패악질을 다 부렸던 놈이잖아. 뭐가 그리 도도해? 네가 곧 정의야?”
정광은 정의도 아니었고 도도하지도 않았다.
쓸데없이 스스로를 변호하지 않고 자신이 저지른 일은 자신이 책임질 뿐이었다.
정광이 묵묵히 영외만 바라보자 텁석부리가 한숨을 쉬었다.
“후우. 됐다. 내가 너하고 무슨 말을 하겠냐. 어쨌든 빚은 갚을 테니 필요한 게 있으면 말…… 젠장. 글이라도 써서…… 망할. 글은 내가 모르잖아.”
그때, 멀리서 늑대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아우우우우-
정광의 눈이 빛났다.
‘드디어 왔네.’
텁석부리가 놀라서 소리쳤다.
“느, 늑대! 동방장님인가!”
늑대 소리에 반응한 건 그들만이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화톳불이 더 켜지고 낭인들이 천막 밖으로 튀어나왔다.
회천회도 마찬가지였다.
모용강이 소리가 들려온 곳을 노려보고 있는데 냉혼도가 신법을 펼쳐 그의 옆에 내려섰다.
“모용 대협. 들으셨소?”
“들었네. 동방장의 짓인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늑대뿐만 아니라 승냥이도 울었다.
냉혼도가 번뜩이는 눈으로 어둠 속을 응시하며 단언했다.
“확실하오.”
“그렇겠지. 늑대와 승냥이가 한 곳에서 울다니. 말이 안 되는 일이야.”
“밤이라 말달릴 순 없으니 날이 밝으면 놈들이 들이닥칠 것이오. 준비를 해야 하오.”
“날이 밝으면 이틀째일세. 말들은 어떤가?”
“최소 하루 이틀은 더 지나야 제대로 움직일 것 같소.”
“늦어. 오늘은 척사당만으로 버텨야겠군.”
“설마 놈들을 치러 갈 생각이오?”
“그럴 리 있나. 여기에서 진형을 갖추고 있다가 찔러 들어오는 놈들만 상대할 생각이네.”
“그게 맞을 것 같소. 활로 돕겠소이다.”
마적과 이민족을 상대하기에는 좋은 수였다.
한 사람을 간과한 게 문제였지만.
정광은 다음 번초들과 교대하여 천막에 돌아오자마자 텁석부리의 수혈을 짚었다.
그리고 잠행술을 펼쳐 숙영지 밖으로 나갔다.
짐승들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달렸다.
경신술로 반 시진쯤 슬슬 달리자 익숙한 수레가 보였다.
정광은 그 수레 위에 훌쩍 내려서며 인사했다.
“잘 계셨어요?”
낯선 얼굴에 당황하던 자오, 혜진, 모용수수가 정광의 목소리를 듣고 밝게 반겼다.
“단주. 오셨습니까.”
“고생 많으셨습니다.”
“별일 없으셨소?”
그런 그들과 달리 심드렁한 얼굴로 땅바닥에 주저앉아 늑대와 승냥이를 쓰다듬던 동방장이 불쑥 물었다.
“어이, 주군. 설마 죽였냐?”
“장군 두 분요?”
“그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하아. 뭐 이런 괴물이…… 말들은 어떻게 됐어?”
“하루 이틀은 지나야 뛸 수 있을걸요.”
동방장은 죽은 동료들과 사이가 얼마나 안 좋았는지, 말들이 배앓이를 한다는 얘기에 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회천회 애들은?”
“낭인분들과 모아놨어요.”
“뭐? 굳이 왜?”
정광이 씩 웃었다.
“지켜야 할 게 있으면 제대로 싸우기 힘드니까요.”
“……이런 사악한 주군을 봤나. 근데 그 얼굴은 누구 거야?”
“낭인분요.”
“이제 다 끝났잖아. 왜 안 풀어?”
“동료의 얼굴로 가면 꽤 많은 분이 동요하시지 않을까요?”
동방장은 질린 얼굴로 생각했다.
‘그런 것까지 계산을. 사마련은 도대체 무슨 싸움을 했던 거지?’
정광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조식했다.
다 마치고 눈을 뜨니 동이 트려 하고 있었다.
“각응.”
“여기 있습니다, 단주.”
“고마워요.”
정광은 자오에게서 운룡과 비룡을 건네받았다.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손에 다시 쥐니 느낌이 남달랐다.
“가죠.”
“네! 단주!”
진흑풍과 황금풍이 수레를 끌고 달렸다.
정광은 수레 위에 우뚝 서서 두 말의 말고삐를 왼팔에 감았다.
그리고 왼손으로 비룡을 잡자 자오가 오른편에 앉아 화살을 바닥에 늘어놨다.
혜진이 왼편에서, 모용수수가 오른편에서 말달렸다.
동방장은 애초의 계획대로 수레를 밀며 달렸다.
다른 이들이 밀 때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빠른 속도로.
“주군 하나 잘못 만나 이게 무슨 고생이야!”
고생하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뒤에 있던 마적과 이민족도 수레를 따라 열심히 말달렸다.
그렇게 달리고 쉬는 걸 반복하다가 회천회와 낭인들의 숙영지가 작은 점처럼 보이게 됐을 때.
정광은 회전(會戰)의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 화살을 쐈다.
쐐애애애액-
싸움을 오래 끌 마음은 없었기에 화살도 눈부신 속도로 날아갔다.
혹시라도 낭왕이 빨리 오면 그까지 연이어 죽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