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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마협-311화 (310/569)

2부 40화

외통수

우아하게 나려타곤(懶驢打滾)을 펼치다가 남방장의 기이한 눈빛을 보자 지금도 자고 있을 텁석부리가 떠올랐다.

녀석은 생긴 것답지 않게 말이 꽤 많았다. 이 낭인대(浪人隊)의 장점이 무엇인지, 남방장이 어떤 인물인지도 떠들어댔었는데…….

‘독심술(讀心術)을 할 줄 안다는 소문이 있다고 했지. 그건가?’

마치 사실이라는 듯 남방장의 눈이 흔들렸다.

‘진짜? 수하들을 겁주려고 그런 척한 게 아니고?’

정광을 쫓으며 검을 내려치던 남방장이 이를 악물었다.

이 급박한 상황에 이딴 생각이나 하다니. 말이 되는 일인가?

‘계속 구를 것인지 일어나서 반격할 것인지 뭐가 됐든 어서 생각해!’

독심술은 막대한 심력을 소모하기에 오래 펼칠 수 없었다.

정광이 바닥을 구르자 절호의 기회라 여겨 꺼내 들었는데 이딴 생각이나 읽게 되니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이 망할 놈이 아직도…… 아!’

드디어 제대로 된 마음을 들여다봤다.

허초(虛招)처럼 거짓된 생각이 아니라 진정한 판단을!

‘이러다간 끝이 없으니 일어나서 승부를 보겠다?’

가만히 있을 수 있나.

검으로 환영해 줘야지.

내공을 모조리 끌어 올렸다.

내려찍던 검을 억지로 비틀어 횡으로 베었다.

신형을 일으키던 정광이 허벅지가 베여 비명을 지르며 나뒹구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죽어…… 억?’

정광은 계속 구르지도 않았고 일어서지도 않았다.

가만히 누워 있었다.

필살의 의지를 담았던 검이 허공을 휩쓸고 지나갔다.

‘어떻게?’

어떻게긴.

정광은 변덕이 심한 편이었다.

몸을 일으켜 적수공권으로 맞서려다 마음이 바뀌었다.

‘검을 내려치면 도마뱀 내의로 어떻게든 막은 뒤에 반격을…… 응? 뭐 하는 거야?’

검은 이미 정광의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지. 마음을 읽긴 개뿔. 사기꾼이잖아.’

어쨌든 퉁기듯 일어나 남방장의 등을 향해 손바닥을 뻗었다.

곤륜 비전 상청인(上淸印)이었다.

헛손질을 한 남방장은 놀란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그 짧은 순간에 생각을 바꾸다니. 아니, 이럴 때가 아니야.’

순간적으로 신형을 돌려 검으로 정면을 방어하며 눈을 빛냈다.

‘각법으로 내 다리를 차려고 하는구나!’

바로 검을 비스듬히 내렸으나 아니었다.

정광은 운룡각(雲龍脚)을 펼치려다 말고 상청인을 그대로 내질렀다.

이번엔 변덕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본능이 시켜서였다.

쿵!

남방장의 가슴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함몰됐다.

“쿨럭!”

입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눈에 맺힌 기이한 빛은 여전했다.

그 빛이 우아하면서도 장중한 태청신권(太淸神拳)을 펼치고 있는 정광의 머릿속을 또 보여줬다.

남방장의 눈이 커졌다.

‘암어(暗語)가 아니라 그냥 욕이었다고?’

정광의 주먹이 남방장의 단전을 부숴 버렸다.

퍼엉!

“크악!”

남방장은 훨훨 날아가 바닥에 처박힌 뒤 데굴데굴 굴렀다.

자신이 구른 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갚아준 정광은 마무리를 짓기 위해 남방장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쿨럭쿨럭. 흘흘.”

피를 또 토하던 남방장이 하도 어이가 없어 웃었다.

“괜찮아 보이느냐?”

“말씀은 하실 수 있으니까 아주 나쁜 건 아니죠.”

정광은 그의 머리맡에 쭈그리고 앉았다.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봐도 돼요?”

“암어 따위가 아니라 욕인 걸 몰랐냐고?”

“……!”

남방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몰랐다. 천하에 그런 악필이 있을 줄이야. 가히 천하제일이라 할 만하구나.”

“집중해서 자세히 보시면 충분히 알아보실 수 있는 수준인데요.”

불쾌한 건 불쾌한 거고.

정광은 정말 놀랐다.

“그나저나 사기꾼이신 줄 알았는데. 대단하시네요.”

남방장은 할 수만 있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싶었다.

칭찬 같지도 않은 칭찬 때문이 아니었다.

진짜 대단한 건 정광 아닌가?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속여 나를 이 꼴로 만들다니…….’

독심술은 잠깐밖에 쓰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나 순식간에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는 대단한 능력이었다.

‘무공으로만 따지면 동수라 할 수 있는 핏덩이가 은근히 내 말을 들은 게 그래서인데…….’

정광에게는 구멍투성이인 잔재주였다.

‘주군은 이놈을 이길 수 있을까?’

남방장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낭왕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지만 확신이 들지 않았다.

‘나는 할 만큼 했다. 갈 사람은 가고 남은 이가 알아서 할 일이지.’

시야가 점점 흐려졌다.

그와 반대로 꺼져 가던 그의 눈빛은 조금씩 짙어지고 있었다.

내려다보고 있던 정광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회광반조(回光返照)는 아닌 것 같은데. 뭐 하시는 거죠?”

남방장의 의지로 일어난 현상이 아니었다.

모든 미련을 버려서 그런 걸까.

죽음을 목전에 두고 독심술이 활짝 꽃을 피웠다.

‘이, 이건…….’

정광의 마음을 엿보던 남방장이 몸을 가늘게 떨었다.

환하게 빛나는 선기(仙氣)를 뚫고 들어가자 그 속에 묻혀 있던 한없이 짙고 깊은 어둠이 드러났다.

남방장은 공포에 질려 두 눈을 부릅떴다.

‘마, 마혼(魔魂)!’

그게 마지막 생각이었다.

미약하게 뛰던 심장이 멈추고 혼까지 흩어졌다.

남방장은 눈도 감지 못한 채 그렇게 죽었다.

“이런.”

왠지 가슴이 간지러워 벅벅 긁던 정광이 혀를 찼다.

‘가버렸네. 어떻게 마음을 읽는 건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대충 짐작은 갔다.

동방장 때도 그랬듯이, 역천경이 반응하지 않았으니 사술은 아니었다.

‘타고난 거겠지. 후천적으로 되는 게 아니야.’

배워서 되는 거면 세상은 벌써 엉망진창이 되었을 터.

그만큼 남방장이 보여준 능력은 대단했다.

마도칠대가문(魔道七大家門) 중 오로나가(烏魯羅家)의 그놈처럼 특이한 능력을 타고난 자들을 가끔 봤었으나 마음을 들여다보는 놈이 있을 줄이야.

‘어쨌든 죽였으니 됐고. 꽤 소란스럽게 싸웠으니 낭인들이 몰려올지도 몰라.’

운룡구금진(雲龍拘禁陣)은 그 힘이 다해 사라지고 있었다.

내공부터 회복해야 했기에 가부좌를 틀었다.

짧게나마 운기조식하고 일어나 옷에 내공을 주입했다.

퍼엉-

옷에 묻어있던 흙먼지가 한 번에 날아갔다.

말끔해진 정광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피로감을 풀었다.

‘아. 병기를 챙겨야지.’

남방장의 검이 쓸 만해 보였다.

‘아니야. 이건 안 돼.’

서방장의 가슴에 박힌 박도를 뽑아 한차례 휘둘렀다.

핏물은 물론 말똥 냄새까지 싹 날아갔다.

‘어디 보자.’

박도를 허리춤에 찬 뒤 기감을 확장하자 낭인들의 기운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슬금슬금 다가오네. 빨리 움직여야겠어.’

원래의 계획에서 많이 벗어난 상태였으나 큰 줄기는 비슷했다.

‘말이 배앓이를 하게 하는 건 성공했고. 전력은 조금밖에 못 깎았지만 낭왕의 수족 둘을 죽였으니까 오히려 나아. 그렇지. 뒤따라오던 반란 세력을 끌어들이면…….’

원군을 부르고 기다려야 할 때였다.

“워. 워어. 옳지.”

아직도 볼일을 보고 있는 말들을 살기로 살살 달래서 한곳으로 밀어냈다.

서방장의 거치도로 바닥에 널린 말똥 중에서 마른 것들만 골라 한데 모았다.

‘잘도 싸네. 뭐 이리 많아?’

풀을 뜯어 그 위에 덮고 화섭자를 꺼냈다.

불을 붙인 뒤 거치도로 부채질을 하자 불길이 커졌다.

거대한 검은 연기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이쯤이면 멀리 있어도 충분히 보이겠지. 남방장이나 서방장으로 역용할까?’

생각해 보니 그리 좋은 수가 아니었다.

‘고영처럼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하급 낭인과는 달라.’

어느 낭인 집단이나 하급 낭인은 소모품으로 취급했다.

죽기 쉬울뿐더러 살아남아도 떠나기 일쑤여서였다.

하급 낭인들도 서로에 대해 많은 걸 알려고 하지 않았다.

사연이 없는 이가 없기에 자연히 정해진 불문율이었다.

하지만 윗놈들은 달랐다.

‘남방장이나 서방장을 오래 따른 심복들은 금방 의심을 품게 될 게 뻔해.’

정광은 차선을 택했다.

‘이렇게 생겼었나?’

얼굴을 바꾸고 한쪽 울타리로 달려가 거치도 도면으로 후려쳤다.

콰지직!

울타리가 산산이 조각나 날아가며 바깥 모습이 드러났다.

멀리서 다가오던 낭인들이 정광을 보고 경악했다.

“뭐, 뭐야!”

“척후당(斥候堂) 이조장이잖아!”

“어제 남쪽을 살피러 나갔는데?”

정광은 자신이 남겼던 욕설을 발견하고 암어랍시고 종이에 베껴왔던 낭인의 얼굴로 역용한 상태였다.

그 얼굴을 확인한 낭인들이 병기를 치켜들며 따졌다.

“장군들께서는 어디 가셨느냐?”

“잠깐! 울타리가 전부 박살 나는 거 못 봤어? 게다가 놈이 쥐고 있는 건 서방장님의 애도(愛刀)야!”

“설마 저놈이 서방장님을! 지금껏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역용을 한 간자(間者)일지도!”

“네 이놈! 거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정광은 과거보다 현재를 중시하는 사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대답하는 대신, 무엇을 하려는지 보여줬다.

거치도를 팽개치고 몸을 돌려 말들에게 뛰어가 명했다.

척후당 이조장의 목소리로.

“발각됐구나! 가자! 얘들아!”

“…….”

말들이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정광은 녀석들의 뒤로 가 살기를 쏟아냈다.

“가기 싫어?”

히히히히힝!

말들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허나 얼마 못 가 주저앉거나 비실비실 걷는 녀석이 속출했다.

그래도 이미 울타리 밖으로 나온 상황.

근성 있게 계속 달리는 녀석도 있었다.

포위망을 조여오던 낭인들이 당황했다.

정광의 의도야 눈치챘지만 말들을 쏘아 죽이거나 잃을 순 없는 일 아닌가!

“어서 막아!”

“말들을 잃으면 대평원에서 살아남지 못해!”

장내는 순식간에 혼란에 휩싸였다.

정광은 그 틈을 이용해 은신술과 잠행술을 병행하여 빠져나갔다.

그리고 고영의 얼굴로 다시 바꾼 뒤 그들의 뒤에 나타났다.

‘돕는 척이라도 해야겠지.’

낭인들 틈바구니로 들어갔다.

무척 바쁜 날이었다.

* * *

텁석부리는 깊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전신에서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크으으…….”

신음을 애써 억누르며 상황을 살폈다.

‘내가 언제 잠든 거지? 왜 혼자 있고?’

그때, 그의 이마에 차가운 물수건이 올려졌다.

눈을 치켜뜨자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고영이 그의 머리맡에 앉아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쪽팔리게 무슨. 울면 안 돼.’

눈을 부릅뜨자 고이려던 눈물이 다시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 났다.

허나 그것들은 눈 속이 아니라 눈 밖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망할. 이게 뭔 꼴이야.’

고영을 슬쩍 보니 천막 밖을 주시하고 있었다.

‘뭘 보는 거지?’

사람들이 들어왔다.

일조장에게 육오장의 악행을 고발했을 때 증언해 줬던 낭인들이었다.

‘다들 표정이 왜 이래? 무슨 일이 있었기에?’

억지로 몸을 일으켜 인사부터 했다.

“선배들. 증언해 줘서 고맙소. 잊지 않고 꼭 갚으리다.”

낭인 한 명이 딱딱한 표정을 풀고 피식 웃었다.

“힘들걸.”

“무슨 말이오? 나를 못 믿소?”

텁석부리가 발끈하자 낭인이 한숨을 쉬었다.

“후우우. 다 죽을지도 모를 판에 갚긴 뭘 갚는다고…….”

“다 죽다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러시오?”

낭인은 처연한 얼굴로 상황을 설명했다.

“장군들께서 살해당하셨다.”

“……!”

텁석부리는 너무 놀라 더듬더듬 물었다.

“어, 어떤 놈이 그런 짓을?”

“척후당 이조장이 거기에 있었지.”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는 그럴 실력이 없소! 크흑.”

버럭 소리를 질렀던 텁석부리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낭인이 그를 내려다보며 혀를 끌끌 찼다.

“몸도 성치 않으면서 왜 고함을 질러? 답답한 마음도 풀 겸 얘기해 주마. 얌전히 들어.”

“으으. 알겠으니 어서 말해보시오. 어서.”

다른 낭인이 끼어들었다.

“사실 말이 안 되는 얘기지. 이조장은 척후하러 나갔다가 아까 돌아왔거든. 같이 나갔던 이들도 계속 같이 있었다고 말했고.”

또 다른 낭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다들 흉수가 역용을 했을 거라 말하잖아. 윗분들이 직접 이조장을 문초했는데도 아무것도 못 얻으셨다는 소문이 파다해.”

처음에 말했던 낭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긁었다.

“나는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그 신호. 누구에게 보낸 걸까?”

말똥에 붙은 불은 진작 껐지만 거대한 연기가 하늘 높이 피어오른 후였다.

“누구에게 보낸 건지 모르니까 더 불안해. 빨리 피하고 싶은데 말 상태가 엉망이잖아. 사나흘은 정양해야 제대로 달릴 수 있게 될 것 같다던데. 어떡하지?”

낭인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도주할까?”

“멍청아. 말 없이 얼마나 갈 것 같냐?”

“그렇다고 이대로 기다리고 있을 순 없잖아.”

“혹시 그거 들었어? 오다가 봤던 모용 놈들 있지? 본가 말고 회천회(回天會) 놈들.”

“그놈들은 왜?”

“아까 다른 조 녀석한테 들었는데 향주들이 이런 얘기를 하더래. 그놈들이 우리를 멀리서 쫓아오고 있었고, 그걸 알고 있던 윗분들이 그놈들에게 도움을 청할까 고민 중이시라고.”

“허어. 그런 일이 있었나? 가만. 혹시 흉수가 그놈들 아니야? 장군들을 죽였으니 어서 오라고 신호를 보낸 거고.”

“그런 의심도 하시겠지. 그래서 망설이고 계신 걸 거고. 젠장. 목이 타네. 막내야, 물 좀 가져와라.”

정광은 조용히 일어나 천막 밖으로 나갔다.

물통을 가지러 가는데 말들이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힐끔 보니 세 쌍의 인마가 숙영지를 나가 질주하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은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항상 서방장 옆에 있던 놈이네. 결국 그러기로 한 건가.’

멀리서 따라오던 반란 세력.

즉, 회천회에 도움을 청하러 가는 것이리라.

‘외통수라 그러기라도 해야겠지만, 잘 될까?’

정광은 속으로 웃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근데 얘들은 어디까지 갔길래 아직도 안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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