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309화 (308/569)

2부 38화

흉흉한 얼굴

어느 집단이든 숙영을 하게 되면 번(番)을 서기 마련.

낭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조당(製造堂) 삼향(三香) 일조장(一組長)은 정광을 비롯한 조원들을 모아놓고 일조는 물론 다른 낭인들이 맡은 구역까지 조곤조곤 설명했다.

“오늘 밤은 번을 서는 범위가 넓으니 모두 잘 들어라. 우리 조는…….”

아무렴. 잘 들어야지.

“……이해했으리라 믿는다. 수상한 자가 나타나면 호각(號角)을 불어라. 그럴 틈이 없으면 소리라도 질러. 이상 상황 발생 시 다른 조와의 연계 방법은…….”

조장이 깐깐한 시어머니라 얼마나 다행인지.

고마워라.

덕분에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나쁘지 않아. 제법 체계적이네.’

조장이 오장(伍長)들에게 명했다.

“오(伍)마다 순번을 정해 보고해라. 나머지는 해산하고.”

“네. 조장.”

정광은 텁석부리와 함께 미리 쳐 놓은 작은 천막에 들어갔다.

텁석부리가 바닥에 드러누워 투덜댔다.

“빌어먹을. 번을 선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또 서게 됐네.”

정광은 처음이었다.

“인마. 맞장구 좀 쳐봐. 억울하지도 않냐? 아. 벙어리였지.”

텁석부리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 중얼거렸다.

“후우. 늦게 들어온 게 죄지. 빤히 보인다 보여.”

뭐가?

“초번(初番)이나 말번(末番)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지만 그래도 그렇지. 한참 자다가 깨서 번을 서고, 다시 한 시진밖에 못 자는 말번 바로 앞은 너무하잖아.”

그의 예상대로였다.

육오장(六伍長)이 나타나 다른 낭인들도 불러 모은 뒤 정광과 텁석부리를 번갈아 보며 느물거렸다.

“영내가 아니라 영외 경계다. 내가 말번초(末番初)고 너희는 그 앞 번이야. 낮에 말했었지? 교대 시간보다 일찍 가서 귀여워해 주마.”

텁석부리가 대경하며 정광을 가리켰다.

“오, 오장. 이 녀석만 귀여워해 주시지 저는 왜…….”

“이 새끼가 내 말에 토를 달아?”

짜악!

“큭!”

텁석부리가 한쪽 뺨을 감싸 쥐며 나동그라지자 육오장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네놈부터 조져야겠구나. 그때까지 푹 자라. 고영 저놈은 내가 내일 직접 손볼 테니 괜히 화풀이하지 말고.”

“아, 알겠습니다. 오장.”

그가 떠나자 다른 낭인들이 텁석부리를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쯧쯧. 잘 좀 하지. 하필이면 오장한테 밉보여?”

“도주하면 목이 달아나니 꾹 참고 버텨. 설마 죽이기야 하겠냐?”

낭인들도 사라지자 텁석부리는 눈물을 쏟았다.

“흑. 흑. 나, 나쁜 놈들…….”

정광이 보기엔 다 똑같은 놈들이었다.

먼저 천막으로 들어가 상황에 맞게 계획을 수정했다.

‘그럼 자볼까.’

정광이 푹 자는 동안 텁석부리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시간이 되자 영내를 경계하던 낭인이 와서 알렸고, 두 사람은 병기를 챙긴 뒤 번을 서는 장소로 이동했다.

“망할. 빌어먹을. 미친.”

텁석부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쉴 새 없이 중얼거렸다.

“얼마나 때리려고 영외 번으로 배치한 거야? 흉악한 새끼.”

남방장이 정광을 경계해 번을 서는 범위를 한참 넓혔기에 오랫동안 그런 소리를 들으며 걸어야 했다.

목적지에 도착해 교대하고 나서도 그랬다.

“미치겠네. 어떡하지? 젠장. 내 잘못이 아닌데 왜…… 쿠울.”

정광은 텁석부리의 수혈(睡穴)을 짚어 재우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조식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어쭈.”

한 낭인과 함께 교대 시간보다 한참 일찍 나타난 육오장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으르렁거렸다.

“이것들이 돌았나. 당장 안 일어나?”

정광은 바로 일어나 육오장과 낭인의 혈도를 짚었다.

육오장은 아혈(啞穴)과 마혈(痲穴).

낭인은 사혈(死穴)이었다.

정광은 죽은 낭인을 한쪽으로 치운 뒤 벙어리가 되어 굳어버린 육오장의 머리를 슬슬 쓰다듬었다.

“기특해라. 생각보다 더 일찍 오셨네요. 손이 근질근질하셨나 봐요.”

“……!”

육오장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자신을 순식간에 제압한 무공도 놀랍지만 벙어리가 말을 하다니!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마침 저도 근질근질했는데.”

“……!”

“아. 걱정하지 마세요. 때리진 않을 테니까.”

대신 중부혈(中府穴)을 찔러 내공을 밀어 넣었다.

과거 자오를 개과천선시켰던 그 수법이었다.

“……!”

육오장의 눈이 툭 불거졌다.

“아파요?”

아프다마다!

분근착골(分筋錯骨)이 간지럽게 느껴질 만큼 엄청난 고통 아닌가!

아혈을 짚여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니 더 아팠다!

“왜 대꾸를 안 하세요? 견딜 만하신가 보네.”

“……!”

정광은 고개를 갸웃하며 다른 혈도도 짚었다.

육오장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

“이래도? 의외로 과묵하시구나. 그럼…….”

연이어 다른 혈도들을 짚었다.

육오장은 지옥의 고통을 느끼며 눈물 콧물을 줄줄 흘렸다.

정광은 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혈을 제압당하셔서 가만히 계셨던 거구나. 말씀하시지 그랬어요.”

“……!”

“쯧쯧. 괜한 헛고생을 하셨네. 풀어드릴게요.”

육오장은 점혈이 풀리자마자 바닥에 엎어졌다.

“헉. 헉. 대, 대인! 제발 살려주십시오!”

“소리치셔도 소용없어요. 멀리 새어나가지 않게 내공으로 막고 있거든요.”

“……!”

육오장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정광의 얼굴엔 미소가 걸렸다.

“음흉하셔라. 조금 더 수고하셔야겠네.”

육오장은 아까의 고통을 또 일각 동안 느낀 뒤 다시 풀려났다.

“으흑. 으흐흑. 자,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대인.”

그도 텁석부리처럼 눈물이 무척 많았다.

“시, 시키시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정광은 쾌히 승낙했다.

“그래요 그럼.”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다 하시고 감사하셔야죠. 일단 이분부터 패세요.”

“……네?”

정광은 잠들어 있는 텁석부리를 일으켜 세우며 설명했다.

“원래 그러려고 하셨잖아요. 마음껏 패세요. 아. 얼굴은 빼고요. 많이 다쳐도 안 돼요.”

“아, 알겠습니다.”

육오장의 눈에 결연한 의지가 담겼다.

‘이 악귀가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인지는 모르나 선택의 여지가 없어.’

정광의 놀라운 무공과 악독한 고문에 굴복한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텁석부리를 팼다.

퍽! 빠악!

정광은 텁석부리를 뒤에서 부축한 채 이런저런 조언을 했다.

“왼쪽 옆구리! 배! 오른쪽 가슴! 좋아요!”

가죽 부대를 치는 듯한 찰진 소리가 터져 나왔다.

수혈을 짚였다 하나 텁석부리도 고통을 느낄 수밖에.

눈을 번쩍 떴다.

“컥! 뭐, 뭐야? 헉! 오, 오장!”

정광이 다시 그의 수혈을 짚었다.

“오장님. 뭐 하세요? 계속 치셔야죠.”

“아, 알겠습니다.”

다시 매타작이 시작됐다.

패다가 깨면 재우고.

또 패다가 깨면 다시 재우고.

“음. 더하다간 삼도천을 건너시겠네. 여기까지만 하죠.”

“헉. 헉. 알겠습니다, 대인.”

육오장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치를 보다가 간절히 애원했다.

“시, 시키시는 대로 했으니 제발 살려주십시오.”

“하나만 더 하시면 그럴게요.”

“무엇입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자진하세요.”

“……!”

“시키는 대로 다 하신다면서요. 못하시겠어요?”

“……야 이 악랄한!”

정광은 손가락을 내밀어 육오장의 사혈을 짚었다.

“그럼 귀천하셔야죠.”

“커헉.”

시체가 늘었다.

‘여기까진 됐고.’

밤하늘의 별을 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다른 곳에서도 말번초가 교대해서 번을 서고 있겠네. 빨리 끝내자.’

박도(朴刀)를 뽑아 육오장과 낭인의 목을 벤 뒤 잠행술을 펼쳐 달리기 시작했다.

목표는 숙영지 외곽에서 번을 서고 있는 낭인들이었다.

* * *

텁석부리는 꿈을 꿨다.

거대한 악귀에게 칭칭 감긴 채 서서히 고통스럽게 말라 죽어가는 꿈이었다.

“아, 안 돼!”

눈을 번쩍 뜨며 상체를 일으키다가 다시 쓰러졌다.

온몸이 아파 신음이 절로 나왔다.

“크윽. 뭐, 뭐야? 으으. 왜 이렇게 아프지?”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같은 오에 속한 낭인이었다.

“왜 아프긴. 오장에게 얻어터졌으니까 아프지.”

“……아!”

악귀처럼 흉악한 얼굴로 주먹질하던 육오장이 언뜻언뜻 기억났다.

낭인이 알겠다는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찼다.

“그래도 머리는 안 다쳤나 보군. 얼굴을 안 맞아서 그런가? 오장이 신경 좀 썼네.”

다른 낭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구타한 걸 숨기려고 그런 거지. 이 녀석이 예뻐서 그랬겠냐?”

“내 말이 그 말이야.”

가만히 듣고 있던 텁석부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응? 기억 안 나?”

“중간중간 끊겨서 납니다.”

낭인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거야 원. 죽다 살았네.”

“막내에게 고마워해라. 반 시체나 다름없는 너를 업고 왔어.”

“……!”

텁석부리의 눈이 커졌다.

‘고영 그놈이 나를?’

그때, 그의 이마 위에 차가운 물수건이 올려졌다.

눈을 치켜뜨자 머리맡에 앉아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는 고영의 얼굴이 보였다.

‘…….’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유는 몰랐다.

서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평생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 그의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이 새끼. 내 잊지 않으마.’

그때, 일조장이 불쑥 나타났다.

“안 자고 무슨 소란이냐?”

“헉! 조, 조장님.”

텁석부리가 일어나지 못하고 끙끙대자 일조장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상히 말해. 한 푼의 거짓이라도 섞으면 죽는다.”

“…….”

텁석부리가 비장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크흑.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니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크아아악.”

억지로 상의를 벗자 상체 전체를 뒤덮은 멍 자국이 드러났다.

“육오장이 저를 구타했습니다. 그것도 번을 서는데 교대 시간보다 일찍 와서 말입니다.”

오늘처럼 한 번만 더 맞았다간 정말 어찌 될지 몰랐다. 악에 받친 텁석부리는 그간 있었던 육오장의 악행을 모조리 고발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일조장의 눈에 냉기가 서렸다.

‘멍청한 놈. 적당히 좀 할 것이지.’

큼직큼직한 멍 자국을 보자 육오장의 큰 주먹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오냐오냐했더니 선을 넘어?’

일조장은 육오장이 자신 앞에서만 열심히 일한다는 걸 모를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부리기 편해서 눈감아줬으면 알아서 눈치채야지. 가만두면 안 되겠구나.’

그래도 혹시 몰라 다른 놈들에게 물었다.

“이게 다 사실이냐?”

정광이 제일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낭인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일조장의 분노를 알아채고 경쟁하듯 입을 놀렸다.

“어젯밤에 순번을 알려주며 상록을 두들겨 패겠다고 말했었습니다. 고영은 내일 손보겠다고 했고요.”

“고영이 상록을 업고 돌아왔습니다. 이러려고 그런 것 같습니다.”

일조장은 분노를 가라앉히며 나직이 경고했다.

“육오장이 돌아오면 내가 처벌한다. 너희는 모두 입을 봉해라.”

“네. 조장.”

당연한 수순이었다.

수하의 잘못은 상관의 잘못인데 어느 상관이 자신의 실책이 윗사람 귀에 들어가는 걸 좋아하겠는가.

일조장이 날카롭게 덧붙였다.

“고영. 알아들었느냐?”

정광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이야.”

일조장은 천막에서 나와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가슴속이 차가워지며 분노도 어느 정도 식었다.

그렇다고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더 큰 사고를 치기 전에 처벌한다. 조용한 곳에서 하는 게 낫겠지.’

육오장이 번을 서고 있는 곳이 딱 적당한 장소였다.

‘이놈. 단단히 혼내주마.’

일조장은 신법을 펼쳐 질풍처럼 달렸다.

그리고 얼마 뒤, 갔을 때보다 빨리 돌아오며 혼신의 힘을 다해 외쳤다.

“적이다! 적이 습격했다!”

난리가 났다.

수많은 천막에서 낭인들이 쏟아져 나와 소리가 들려온 곳을 노려봤다.

그 속에는 남방장과 서방장도 있었다.

고함을 쳤던 일조장이 날듯이 달려와 그들 앞에 부복했다.

“적습입니다! 수하들을 위로할 겸 순찰을 나가봤더니 말번초가 목이 베여 죽어 있었습니다!”

남방장의 눈썹이 치솟았다.

“무어라? 네 조만 그렇느냐?”

“한 조 더 확인해 봤는데 이미 죽어 있어 즉시 달려왔습니다.”

“허어!”

“미친! 어떤 새끼가 감히!”

서방장은 말을 전부 내뱉기도 전에 거치도(鋸齒刀)를 움켜쥐고 숙영지 밖으로 달렸다.

남방장이 다급히 외쳤다.

“홀로 가면 안 되네!”

“영감도 따라오던가!”

그럴 수야 있나.

그렇다고 못 본 체할 수도 없었다.

‘밖의 상황을 제대로 확인하긴 해야 해.’

남방장은 고수들을 뽑아 서방장의 뒤를 따르게 했다.

당주, 향주, 조장들을 불러 모아 상황을 얘기하고 각자에게 맞는 임무를 내렸다.

쏟아져 나온 낭인들은 명이 떨어지길 기다리며 긴장감을 억눌렀다.

한편, 정광은 그 혼란을 틈타 텁석부리의 수혈을 짚어 또 재운 뒤 천막에서 빠져나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말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정광의 손가락에서 지풍이 쏘아져 번을 서고 있던 무인들을 쓰러뜨렸다.

정제된 살기를 뿜어내자 말들이 쥐죽은 듯 조용해지며 안절부절못했다.

“해치려고 온 게 아니니까 안심해.”

“…….”

“좋은 걸 줄게. 맛있게 먹어.”

“…….”

부드럽게 달래면 뭐 하나.

살기는 둘째요, 역용한 얼굴부터 흉흉한데.

그래서 더 효과가 좋았다.

말들은 더 열심히 먹었다.

허나 안타깝게도 정광의 품속에서 나온 것은 맛이 없을뿐더러 몸에도 안 좋았다.

꾸르륵-

먹자마자 말들의 배 속이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낭인들의 기동력을 떨어뜨린 정광은 희미하게 웃었다.

‘이제 돌아가서 기다리다가 아침밥에도 독을…… 응?’

돌아서자 날카로운 검기가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검 뒤에 보이는 흉흉한 얼굴 하나.

남방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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