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37화
동행
정광의 이름은 ‘고영’이었다.
원래는 몰랐으나, 바로 앞에서 말달리던 텁석부리가 그를 돌아보며 부르고 나서야 알게 됐다.
“고영. 뭐 하냐?”
“…….”
뭐 하긴.
말달리고 있지.
“너무 뒤처지지 마. 장군(將軍)의 심기가 매우 불편하시다.”
“…….”
난 또 뭐라고.
윗분의 기분이 안 좋으니, 재깍재깍 움직이라는 말 아닌가?
말의 속도를 높여 텁석부리와 말머리를 나란히 했다.
그런데 이놈도 윗분이었나 보다.
눈을 부라리며 불쾌한 어조로 나무랐다.
“대답 안 해? 미쳤냐? 네가 감히 나 오상록 어르신을 무시해?”
“…….”
이미 죽은 고영에게 물을 수도 없고. 그의 목소리를 알아야 대답을 하지.
그렇다고 계속 침묵했다간 괜한 의심을 살 터.
정광은 쉬운 길을 택했다.
‘이 시끄러운 놈을 죽이고 역용하는 게 낫겠네.’
목소리와 말투는 물론 이름까지 알게 됐다.
이렇게 한 사람의 운명이 또 정해지는가 싶었으나.
문제가 있었다.
‘좀 깔끔하게 하고 다니지. 하필이면 텁석부리라니.’
천변만화역용축골마공(千變萬化易容縮骨魔功)이 아무리 신묘해도 없던 털까지 자라나게 하는 효능이 있을 리 있나.
이것을 창안했던 마인(魔人)도 반평생을 대머리로 살다가 죽지 않았던가.
‘수염을 잘라서 붙일 시간이 없는데. 일단 죽이고 볼까.’
마침 텁석부리 앞에서 달리는 낭인은 얼굴이 매끈했다.
갈아타기로 마음을 굳히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는데.
텁석부리가 찔끔했다.
“잠깐. 잠깐만. 또 조장(組長)한테 일러바치려고? 하지 마. 농담도 못 하냐?”
자오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이었으나 말이 무척 많은 놈이었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 벙어리한테 자꾸 말하라고 하고. 긴장돼서 그랬어, 인마. 대충 흘려들어.”
아. 그런 거였구나.
편하게 됐네.
하지만 이놈은 불편했다.
“아 좀. 고개라도 끄덕여 봐라. 좋게좋게 가면 서로 좋잖아. 응?”
귀찮아서 끄덕여 주자 텁석부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직이 경고했다.
“후우우. 그래. 이 건은 이렇게 끝내고. 조장도 기분이 안 좋은 상태니까 조심해. 너나 나나 갓 들어왔는데 쓸데없는 일로 밉보이면 되겠냐?”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텁석부리는 이미 밉보여 찍힌 상태였다.
조장이 뒤를 돌아보며 날카롭게 주의를 줬다.
“상록.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입 다물고 달려.”
“네! 조장!”
혼난 건 텁석부리만이 아니었다.
“고영. 너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천하유람단주라고 칭하는 그 미친놈은 엄청난 고수야. 죽기 싫으면 정신 똑바로 차려라.”
“…….”
이미 죽었는데.
그보다 뭐? 내가 미친놈이라고?
‘그게 정상이잖아.’
아니, 무림인이라는 종자치고 안 미친놈이 어디 있다고 나한테만 이런 망발을.
어쨌든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줬건만.
조장이 또 쏘아붙였다.
“몸 관리 잘하고.”
끄덕끄덕.
“상록을 무시하지 말고 잘 따라. 너보단 경험이 훨씬 많은 선배다.”
끄덕끄덕.
“그리고…….”
조장 이놈은 시어머니였다.
몇 번이나 더 주의를 받고서야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그때까지 묵묵히 말달리던 텁석부리가 전음으로 놀렸다.
-녀석. 꼴좋다. 크하하하. 이 어르신께서 많이 가르쳐 줄 테니 받들어 모시렴. 알았냐? 내가 소싯적에만 해도 말이야,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죽일까?
처음에는 살짝 고민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굳어졌다.
‘무조건 죽여야겠는데.’
텁석부리가 지껄여 대는 무용담 중에서 정상적인 것은 없다시피 했다.
나름 개과천선해서 수많은 협명을 쌓고 남방장(南方將) 밑으로 기어들어 왔다고 떠벌렸으나 타인이 듣기엔 말도 안 되는 개소리.
진천마 시절의 정광이었어도 눈살을 찌푸리며 쳐 죽였을 인간말종 아닌가?
그 쓰레기가 또 눈을 부라렸다.
-눈빛이 왜 이래? 너도 만만찮은 새끼면서.
이런. 얼굴의 원래 주인인 고영도 그런 놈이었나.
-처신 똑바로 해라. 사람 피곤하게 하지 말고.
그래야지. 피곤한 놈은 지워 버리는 게 나으니까.
‘그나저나 앞에선 뭐 하는 거야?’
선두가 느리게 가니 후미도 천천히 갈 수밖에 없었다.
‘조심성이 너무 많네. 좀 호쾌하게 달리지.’
그때, 앞에서 달리던 조장이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선두가 그랬기에 자연히 후미도 그렇게 된 것이었다.
마침내 낭인들이 완전히 멈추자 선두에서 분노로 가득 찬 고함이 터져 나왔다.
“망할! 늑대들이 지쳐서 쉬잖아! 확 다 죽여 버려?”
은신하고 있을 때 잠깐 들었던 서방장의 목소리였다.
‘제대로 들어볼까.’
청력을 키우자 남방장의 침착한 음성이 귀에 들어왔다.
“제발 흥분하지 말게. 아이들이 듣고 있어.”
“들으라지! 불만 있는 놈 있냐?”
있어도 누가 감히 말할까.
대평원이 적막에 잠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적막을 저 앞에 있는 늑대들이 깼다.
키잉. 캐갱.
“시끄럽다! 이 개새…… 늑대 새끼들아!”
서방장의 욕설에 놀란 늑대들이 더 시끄럽게 울어댔다.
“짜증 나네. 영감. 해결책을 내놔. 저것들, 다 죽여 버리기 전에.”
정광은 남방장이 어떻게 대응할지 예상해 봤다.
‘늑대들이 체력을 회복하고 다시 달릴 때까지 기다리긴 힘들겠지.’
신중한 건 신중한 거고, 시간을 그렇게 날렸다간 목표물이 더 멀어질 게 뻔했다.
‘늑대들이 가던 방향으로 말달리며 사방으로 척후를 보내려나.’
예상대로였다.
“그대로 가세. 단, 엉뚱한 곳으로 유인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 다른 방향으로도 척후를 보내야 해.”
정광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굳이 본대까지 움직일 필요는 없는데.’
아니나 다를까.
서방장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북쪽에 승냥이 떼가 나타났잖아! 황구(黃狗) 이 새끼! 감히 우리를 갖고 놀아?”
모든 낭인들의 고개가 북쪽을 향해 꺾였다.
그 살벌한 시선들 때문에 겁먹은 걸까?
승냥이들이 일사불란하게 북쪽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침착했던 남방장도 열이 뻗쳤는지 음산한 어조로 명을 내렸다.
“당주와 향주, 조장은 모두 집합!”
“존명!”
정광 앞에 있던 조장도 선두로 달려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제조당(製造堂) 삼향(三香) 일조(一組)! 모여라!”
“네! 조장!”
그의 주위로 낭인들이 재빨리 모였다.
당연히 그 속엔 텁석부리와 정광도 있었다.
‘내 소속이 제조당이었구나. 뭘 만드는 곳이지? 독? 병기?’
바로 알게 됐다.
“두 장군께서 팔방으로 척후조를 보내기로 하셨다. 그들이 돌아오거나 다른 명이 떨어질 때까지 우리는 식사를 준비한다.”
정광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밥 짓기였어?’
요리를 폄하하는 게 아니었다.
칼질과 물 높이를 가늠하는 거야 자신 있지만, 간은 대체 어떻게 맞추란 말인가!
다행히 정광은 그런 중차대한 임무를 맡을 만큼 경력 많은 낭인이 아니었다.
각자 할 일을 하기 위해 흩어지자 텁석부리가 재촉했다.
“뭐 해 인마? 빨리 와.”
두 사람은 땔감 담당이었다.
말이 땔감이지, 이 많은 인원이 먹을 요리를 만들려면 얼마나 많은 풀과 나무가 필요할까.
총 다섯 명이 말에 올라탔다.
근육질 거한이 저 멀리 있는 큰 나무를 가리켰다.
“저걸 자른다. 가자.”
“네! 오장(伍長)!”
텁석부리는 꽤 열심이었다.
선배들 눈에 들고 싶은지 혼자 달라붙어 쉼 없이 도끼질을 했다.
콰직! 콰직!
지루하게 지켜보던 오장이 짜증을 냈다.
“이러다 날 새겠군. 상록, 이 새꺄. 신나서 나서더니 뭐 하냐? 그냥 내가 할까?”
텁석부리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아닙니다! 곧 끝내겠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참 어리숙할 정도로 순한 녀석인데.
선배들에게만 그랬을 뿐, 후배인 정광에겐 무자비했다.
-눈 안 깔아? 금방 끝내고 너도 조져주마!
텁석부리는 약조를 반만 지켰다.
단전을 박박 긁어 내공을 끌어 올렸다. 거기에 젖 먹던 힘까지 더하자 나무를 자를 순 있었으나 정광을 팰 기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 그를 오장이 칭찬했다.
“새끼. 진작 그럴 것이지. 하면 되잖아.”
“헉. 헉. 오장 덕분입니다.”
“알면 됐고. 빨리 묶어. 그만 가야지.”
“네! 오장!”
그를 제외한 모든 인원이 쓰러진 나무를 줄로 묶어 말들과 연결했다.
정광이 곁눈질로 훔쳐보며 그럴듯하게 따라 하자 오장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영. 너도 사람 구실 좀 하게 됐구나. 역시 굴려야 된다니까.”
정광은 고개를 끄덕일까 하다가 말았다.
저 성질 더러운 놈이 시비를 걸 게 뻔해서였다.
허나 어차피 결과는 같았다.
“이 새끼가. 어르신이 말씀하시는데 대꾸를 안 해? 밤이 깊으면 보자.”
그야 환영이었다.
꼭 죽여야 할 놈이 하나 더 추가됐다.
그들은 나무를 끌고 본대로 돌아가 땔감 크기로 쪼갰다.
지금까지 펑펑 놀던 오장은 그 누구보다 열심히 도끼질했다.
수하들을 감독하던 조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나무랐다.
“육오장(六伍長). 적당히 해라. 네 임무는 오를 관리하는 것이지, 직접 하는 게 아니야.”
오장 중에서 여섯 번째 오장이었던가.
근육질 거한이 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조장. 워낙 습관이 돼 놔서…… 관리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조장의 잔소리가 쏟아졌다.
허나 날이 안 선 들을 만한 것들이었다.
정광은 육오장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꼭 죽이는 게 아니라 반드시 고통스럽게 죽여야 하는 놈이었구나.’
정광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고칠 줄 아는 사내였다.
‘밤이 기대되네.’
생각해 보니 밥 짓는 조에 들어온 것도 잘된 일이었다.
‘내일도 재밌겠어.’
뭐 그건 그때 일이고.
지금은 나무를 잘라야 했다.
텁석부리보다 조금 약하게 살살 도끼질했다.
원래 딱 이 정도 수준이었던 걸까.
힐끔거리며 조소를 짓던 텁석부리가 보란 듯이 힘을 쓰기 시작했다.
“합! 흐압!”
그러다 조장에게 잔소리를 들었다.
“시끄럽다. 조용히 해.”
“죄, 죄송합니다, 조장.”
“죄송하면 끝이냐?”
“그, 그게…….”
식사 준비는 빠르게 끝났다.
대단한 요리들은 아니었으나 죽도 있고 고기구이도 있었다.
‘모양새도 향도 나쁘진 않은걸.’
수숫대도 아래위 마디가 있듯이, 제일 그럴듯한 것들은 장군을 비롯한 높은 분들의 것이었다.
그리고 아래로 아래로 계속 내려와 정광의 차례가 되자 남은 것은 적당한 양의 죽과 몇 안 되는 고기 조각뿐이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한입씩 맛본 정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형편없어서가 아니었다.
‘……이놈들. 나보다 잘 먹고 있었어?’
이렇게 억울할 수가 있나.
질과 양은 물론이요, 맛도 그랬다.
아니, 낭인이면 낭인답게 풀 쪼가리나 씹으며 배고픈 정신으로 싸워야지.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곧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옆에서 게걸스럽게 먹던 텁석부리가 물을 한 모금 들이켜고 씩 웃었다.
“흐흐. 괜찮군. 이렇게 먹으면서 싸울 수 있으니 이 촌구석까지 왔지.”
정광이 항상 그랬듯이, 잘 먹여서 사기를 유지하는 것이리라.
“고영.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오길 잘했다니까.”
한 번 고개를 저어주자 텁석부리가 발끈했다.
“이게 배가 처불렀나. 낭왕 어르신 만큼 돈을 많이 주고 음식마저 챙겨주는 수장이 어딨어? 게다가 그 어떤 곳에서보다 큰 싸움을 할 수 있는데 죽을 위험도 적잖아.”
주위에서 먹고 있던 몇몇 낭인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상록이 말이 맞아.”
“이만한 곳이 없다니까.”
“실력과 신용이 있어야 들어올 수 있지만.”
사람들의 반응에 의기양양해진 텁석부리는 낭왕에 이어 남방장이 어떤 인물인지, 이 조직에 어떤 장점이 있는지 끝없이 나불댔다.
덕분에 정광은 많은 것을 알게 됐고, 그것들을 활용해 손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해가 많이 내려왔네. 슬슬 돌아올 때가 됐는데.’
잠시 후, 팔방으로 흩어졌던 척후대의 일부 인원이 돌아왔다.
청력을 키워 서방장과 남방장에게 보고하는 내용을 들어보니 예상대로였다.
“무어라? 그림자도 안 보여?”
남방장의 말에 낭인이 긴장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 그렇습니다.”
“짐승들은 보았느냐?”
“늑대, 승냥이, 여우 떼가 눈에 띄었는데 여러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일일이 사람을 붙이긴 했으나 그 결과가 어찌 나올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다른 조는?”
모두 그런 상황이었고 그렇게 조치했다고 보고했다.
서방장이 대노했다.
“황구 이 새끼! 눈에 띄기만 해봐라! 오체분시를 해주마!”
정광은 내심 웃었다.
죽어라 대평원을 돌아다니며 짐승을 모은 뒤 다시 뿌리고 있을 동방장이 생각나서였다.
‘잘하고 있네. 생각보다 쓸모가 많아. 계약을 연장할까?’
동방장이 들었으면 피를 토했겠지만 정광으로선 당연한 일이었다.
자고로 인재는 아껴야 하는 법, 쾌히 거둬서 가치 있게 쓰는 게 군자 아닌가.
하지만 서방장의 생각은 달랐다.
“영감. 그 간교한 개새끼가 우릴 교란하고 있다. 애들을 풀어 놈부터 잡아야 해.”
“그건 안 되네.”
“왜!”
“우리의 이점은 숫자야. 그걸 버리고 수를 나눠 각개격파 당할 셈인가?”
“그럼 어쩌자고! 이대로 눈 뜨고 당해? 난 그렇게 못 한다!”
남방장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건 황구의 계략이 아니야. ‘그놈’의 것이지. 소문보다 간교한 놈일세. 머리가 뛰어난 놈이란 걸 인정해야 해.”
“후우우. 빌어먹을 대마두 새끼.”
“최소한으로 대응하면서 주군을 기다리세. 놈들이 호족을 치든 방계 가문을 무너뜨리든 우리 전력을 최대한 유지해야 해. 그게 결국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줄 거야.”
“회천회(回天會)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본가가 빠졌어도 모용은 약하지 않아.”
“알게 뭔가? 시간이 좀 걸릴 뿐, 우리가 계약을 안 지키는 것도 아닌데.”
“하긴. 사실 그 대마두는 회천회가 책임져야 할 몫이지.”
“그렇다고 손 놓고 있자는 건 아니네. 상황이 어찌 변할지 모르니 어느 정도의 손실은 각오하고 척후를 계속 보내세나.”
결국 그들은 이곳에서 숙영을 하게 됐다.
해가 떨어지고 밤이 깊었다.
정광은 얼굴의 원주인이 남긴 박도(朴刀)를 쓰다듬으며 눈을 빛냈다.
‘한번 같이 놀아보자.’
사람 목을 베는 건 신검 운룡이 아니라 무딘 박도로도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