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35화
이이제이(以夷制夷)
“정말 모른다니까! 진짜야! 정말 모른다고!”
동방장이 온몸을 웅크리고 양팔로 머리를 감싼 채 소리 질렀다.
두 손을 매만지던 정광이 어이없는 얼굴로 물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때릴 거잖아!”
“아직 안 때렸는데. 근데 정말 모르세요? 아시는 게 좋을 텐데 어쩌지?”
동방장도 제발 알고 싶었다.
“낭왕(浪王)이 북쪽을 맡은 것까진 알지만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내가 무슨 수로 알아? 개원(開原), 철법(鐵法), 철령(鐵嶺). 셋 중 어딘가에 있겠지.”
“사방장(四方將) 중 다른 세 분은요?”
“백정 놈은 서쪽, 사기꾼 새끼는 남쪽으로 갔는데 역시 정확히는 몰라.”
“그게 누구죠?”
“누구긴 누구야. 서방장(西方將)이랑 남방장(南方將)이지. 그리고 북방장(北方將)은…….”
동방장은 자신이 아는 대로 설명했다.
묵묵히 듣던 정광은 낭왕의 일 처리 방식에 혀를 내둘렀다.
“서방장이라 서쪽, 남방장이라 남쪽. 동방장이라 동쪽. 대단하군요.”
동방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사방에 한 명씩 보내야 하니까 크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
확실히 그렇긴 했다.
“아까 도주하신 분들요. 요녕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실까요?”
“내가 튀라고 했으니 그럴 놈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아닐걸? 요녕까지 와놓고 그런 식으로 가긴 아쉽지.”
“사방장 중 다른 분 밑으로 들어갈 거다, 이 말씀이네요.”
“아마. 고향으로 튄 놈들도 시간이 흘러 일거리가 또 생기면 신나서 달려올 거다.”
“이상한 쪽으로 성실하시네. 대충 사실 줄 알았는데.”
동방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한번 낭인은 영원한 낭인이야. 우리가 돈 때문에 싸우는 줄 알아? 그런 점도 있지만 싸우는 게 좋아서 낭인이 된 거지.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어.”
정광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편히 쉬시게 다 죽여 드려야겠네요.”
“……그건 좀…… 음?”
동쪽 하늘에 두 줄기의 붉은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동방장이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놈들. 그냥 튀지 쪽팔리게 뭐 하는 짓이야?”
“어떤 신호인데요?”
“수장을 잃고 퇴각한다는 뜻.”
“원군이 오겠네요. 멀리 있어서 못 보시려나?”
“낭인을 우습게 보는군. 타지에서 일을 벌이는데 곳곳에 정보원을 안 심었겠냐? 알아서 다 소식을 전할 거다. 새끼들, 나를 놀리려고 신나게 달려올걸?”
“서로 사이가 안 좋으시구나.”
“백정과 사기꾼은 좋은 편이지.”
“흐음. 일단 알겠어요. 다른 분들이 돌아오실 때까지 잠깐 쉬시죠. 상처도 치료하시고요. 쯧쯧. 많이도 다치셨네.”
“네가 때렸잖아!”
“내자가추(來者可追)라. 지난 일은 어쩔 수 없으니 앞으로 조심하면 되죠.”
정광은 동방장을 위로한 뒤 동쪽을 바라봤다.
퇴각한 낭인들을 추격했던 사람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얼마 안 가 모든 사람들이 도착했다.
정광은 그들에게 동방장을 소개했다.
“누군지 아시죠?”
“…….”
“한때 적이었으나 동료가 되신 동방장님이세요. 뜨거운 박수로 환영해 주세요.”
짝짝짝.
자오와 혜진만 손뼉을 쳤다.
“어? 반갑지 않으세요?”
“…….”
“반가운 척이라도 해주시죠.”
그게 될 리가 있나.
모용수수야 황당해서 가만히 있었지만, 마적과 이민족은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동방장을 노려봤다.
낭인들의 수괴 중 한 명이니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격전을 벌이지 않았는가?
여기에 모인 마적과 이민족은 낭인들에게 터전을 빼앗겼으나 어떻게든 도망쳐서 살아남은 강자들이었다.
그렇기에 조금 전에 있었던 추격전에서도 어느 정도의 전과를 올렸지만, 그에 못지않은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저 새끼 때문에 몇 명이나 죽었는지…….’
‘이제는 동료라고? 말이 돼?’
‘내 저놈을 당장!’
정광이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따끔히 충고했다.
“낭인분들은 강해요. 같은 숫자로 붙으면 필패죠.”
“……!”
“동방장님은 훨씬 더 강하시고요. 마음먹고 손을 쓰시면 다들 십초도 못 버티실걸요.”
동방장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아무리 좋게 봐줘도 삼초지적(三招之敵)도 안 되는데 무슨.”
“아. 제 단원들도 포함해서요.”
“저 둘? 음. 그렇긴 하겠네.”
지목받은 자오와 혜진이 가슴을 펴고 모용수수는 이를 지그시 물었다.
그나마 모용수수는 분한 마음이라도 품었지, 마적과 이민족은 내심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동방장이 말발굽에서 떨어져 나간 편자를 주워 두 손가락으로 잡고 비벼서였다.
파스스스-
슬슬 비비는데도 조금씩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마침내 두 손가락 사이에 아무것도 안 남게 되자 사람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펴, 편자를 저렇게?’
‘이, 이런 괴물이 있나!’
모두 말을 다루는 이들이었기에 편자가 얼마나 단단한 것인지 잘 알았다.
‘낭왕의 사방장이 대단하다더니 명불허전이군!’
‘저런 고수를 대체 어떻게 잡은 거야?’
사람들의 시선이 정광에게 향했다.
잠시 뒤, 모두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잡고도 남지.’
‘진짜 괴물은 이놈이니까.’
진짜 괴물 정광이 그들을 둘러보며 확언했다.
“이런 고수께서 동료가 된 거죠. 절대 배반하지 않으실 테니 믿으세요.”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도 정광의 손속을 경험해 보지 않았던가.
“자. 환영의 박수!”
환호성은 없었으나 박수는 나왔다.
마적과 이민족은 이번 싸움을 통해 더 확실히 알게 됐다.
‘천하유람단주가 없으면 우린 끝이야.’
‘이렇게 많이 모였지만 반나절도 안 돼서 전멸하겠지.’
‘살기 위해선 저자 밑에서 똘똘 뭉쳐야 한다!’
전에 없던 강한 결속력이 생겼다.
생존을 위해, 복수를 위해 자연스레 만들어진 유대감이었다.
그 기류를 느낀 정광은 때가 됐음을 알고 힘 있게 선언했다.
“조직의 이름을 정하고 편제를 짜야 할 때입니다! 좋은 생각이 있으신 분은 주저하지 말고 말씀해 주세요!”
수많은 제안이 쏟아졌다.
그리고 정광의 독단으로 모든 게 정해졌다.
“어때요? 괜찮죠?”
“…….”
안 괜찮다고 반박할 만큼 간이 큰 사람은 없었다.
정광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야율초의 어깨를 토닥였다.
“회주(會主)님. 특별히 회주님을 생각해서 지었어요.”
“……고맙다.”
“이제 다 됐으니 명을 내리시죠.”
야율초가 작은 한숨을 내쉰 뒤 우렁차게 외쳤다.
“비초회(飛草會)! 출발!”
하늘을 나는 풀들이 모인 집단이라니.
다들 힘 빠진 음성으로 외쳤다.
“하아!”
비초회가 말달렸다.
방향은 남쪽이었다.
남쪽에 있는 호족들의 본거지에 평지풍파(平地風波)가 나기 시작했다.
하나씩 하나씩 남김없이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났다.
비초회는 재물과 말을 약탈하고 장원에 불을 질렀다.
마적과 이민족 몇 무리를 더 거둬 덩치를 불렸다.
정광은 지금까지 달려온 길을 돌아봤다.
아주 먼 곳에서부터 지금 서 있는 곳까지, 화재로 인한 연기가 줄을 지어 피어올라 하늘을 까맣게 수놓고 있었다.
“이쯤이면 행적은 충분히 보여줬고. 하나씩 쳐볼까요.”
동방장이 충고했다.
“백정과 사기꾼이 각각 서쪽과 남쪽에서 시작했지만, 내가 사로잡힌 걸 알고 합세할지도 몰라.”
“그럼 둘을 한꺼번에 치면 되죠. 편해서 좋네.”
“……미친놈. 네 마음대로 해라.”
정광은 사양하지 않았다.
“회주님. 이 근방에서 며칠 쉬죠.”
“그리고?”
야율초의 물음에 정광이 두 방향을 가리켰다.
“남쪽과 서쪽으로 척후대를 보내주세요. 가까운 분들부터 치게요.”
* * *
모용강과 척사당(斥邪堂)은 분노했다.
척후조가 이끄는 대로 정광을 쫓아 달렸더니, 본계마가(本溪馬家)가 엉망진창이 되어 있는 것 아닌가?
게다가 유명한 마적단인 고원초(古原草)와 함께 와서 털었단다.
분노가 너무 솟구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반드시 잡는다!’
척후조가 피운 말똥 연기를 따라 달리고 또 달렸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마다 불타는 장원을 보고, 마적에 이민족까지 더해졌다는 증언을 들어야 했다.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별것 아닌 놈들이긴 한데. 수가 꽤 많아.’
질 거라는 생각은 안 했다.
적게나마 피해를 볼 게 뻔해서 마음이 불편할 뿐이었다.
‘더 덩치를 키우기 전에 잡는 게 낫겠군.’
계속 달렸다.
죽어라 말달렸건만 정광의 그림자도 보지 못한 채 계속 쫓아야 했다.
척사당원들의 얼굴에 짜증이 맺혔다.
‘뭐가 이렇게 빨라?’
‘마치 대평원에서 나고 자란 기마민족 같잖아.’
‘그래도 조금만 더 가면…….’
조금 더 가자 호족들의 장원이 또 불타오르는 걸 보게 됐다.
‘…….’
한두 가문이 아니었다.
남쪽을 바라보자 검은 연기가 줄을 지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것들을 주시하던 모용강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남서쪽으로 가서 배를 타는 척해놓고 동쪽으로 갔다가 다시 남쪽을 쳐? 무슨 속셈이지?’
남쪽에도 바다가 있긴 했다.
허나 바다까지 달려가 배를 타고 도주할 것 같진 않았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그랬겠지. 왜 사방을 휘저으며 싸우는 걸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답은 하나였다.
호족들의 본거지를 들쑤셔서 성을 포위하고 있는 호족들을 돌아가게 하려는 것이리라.
‘미친. 그게 될 것 같으냐?’
내심 코웃음 쳤으나 혹시나 하는 생각을 떨쳐낼 순 없었다.
마음이 초조해지자 분노가 다른 곳을 향했다.
‘낭인 놈들은 대체 뭘 하고 있길래 일이 이 모양이 된 게야!’
그들이 마적과 이민족을 없애야 했건만, 그 마적과 이민족을 정광이 꿀꺽꿀꺽 삼키고 있었다.
‘설마…….’
낭인들이 배반한 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낭왕의 명성이 드높고 휘하의 사방장도 대단하다지만, 낭인은 어차피 낭인 아닌가.
하지만 모용강은 얼마 안 가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니. 낭왕은 낭왕이다.’
그에 대해 제대로 알려진 건 많지 않으나 그 신용만큼은 확실하기로 유명했다.
‘요녕이 워낙 넓어, 아직도 외곽 쪽에 있는 걸까?’
그때, 서쪽에서 거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모용강은 말머리를 돌리며 안력을 돋웠다.
먼지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기마대!’
조금 더 가까워지자 확실해졌다.
‘저 복색은…….’
모용강은 기마대를 주시하며 무겁게 명했다.
“서쪽에서 낭인들이 온다! 맞이할 준비를 해라!”
“존명!”
척사당원들은 병장기를 뽑아 들고 서쪽을 응시했다.
한 당원이 장창에 커다란 천을 매단 뒤 높이 들어 올렸다.
때마침 바람이 세차게 불며 천이 펄럭였다.
천에 새겨진 세 글자가 또렷이 드러났다.
[회천회(回天會)]
두두두두-
수많은 인마가 똑바로 달려왔다.
그 선두에 한 중늙은이가 있었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피칠갑이었다.
중늙은이는 깃발과 척사당을 한 번 쓸어본 뒤 손을 들어 올렸다.
“서라!”
“하아!”
낭인들이 일제히 말을 멈춰 세우더니 병기를 든 척사당원들을 노려보며 입맛을 다셨다.
중늙은이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나무랐다.
“한 식구인데 뭐 하는 거야? 예를 갖춰, 이 새끼들아!”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낭인들이 자세를 바로 했다.
지켜보던 모용강의 눈에 이채가 맺혔다.
‘규율이 제법이군. 생김새로 봐선 서방장인데…….’
‘한 식구’라는 말이 거슬렸으나 그 정도는 넘어가 줄 아량이 있었다.
“서방장 되시오?”
“그런데. 너는?”
모용강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투를 바꿨다.
“소문대로 무례하군. 모용강이다.”
“오호. 요녕을 떨어 울린다는 양각풍(羊角風)이셨군. 만나 뵈게 되어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모용강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다. 서쪽은 정리가 끝났나?”
“그럴 리가. 요녕은 넓고 강해. 그리 빨리할 수 있는 곳이 아니지. 그렇고말고.”
모용강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여우 같은 백정 놈. 요녕을 높이며 일을 똑바로 안 하는 건가.’
대놓고 경고했다.
“약조를 지킬 거라 믿는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 일을 허투루 처리하진 않으니까 안심하고. 꽤 많은 무리를 잡았지만, 더 급한 일이 있어 가는 길이다. 잘 봐. 내가 놀고 있었던 것 같냐?”
모용강은 서방장의 붉게 물든 옷을 보며 낮게 말했다.
“거기에 양민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였으면, 넌 내게 죽는다.”
서방장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뭐가 어째? 나를 뭐로 보고! 양민은 안 건드려! 너는 나를 못 죽이고! 아오. 이걸 그냥 확!”
서방장이 허리에 찬 거치도(鋸齒刀)를 움켜잡았다가 가까스로 놓았다.
“하아. 네놈을 죽였다간 주군께 혼날 게 뻔하니 참아야지. 운 좋은 줄 알아라. 간다.”
“잠깐.”
“이게 진짜. 그냥 죽을래?”
모용강이 힘주어 물었다.
“너희들에게서 도주한 마적과 이민족이 한데 뭉쳐 행패를 부리고 있다. 이를 어찌 책임질 것이냐?”
서방장이 혀를 내밀며 웃었다.
“흐흐. 모조리 죽이면 되지. 나도 하나 묻자. 그놈들을 이끄는 건 누구지? 우리가 맡기로 한 마적과 이민족은 아닌 것 같은데.”
“…….”
“켕기냐? 뭐 내가 잡아줄게. 대신 그놈 값은 따로 쳐줘야 할 거야.”
서방장은 모용강이 대꾸하기도 전에 말고삐를 챘다.
“달려, 새끼들아!”
“하아!”
낭인들이 척사당 무인들을 향해 그대로 달렸다.
모용강과 척사당 무인들은 낭인들을 노려볼 뿐, 흔들리지 않았다.
“오오. 역시 모용인가.”
서방장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걸걸하게 말했다.
“주인이 안 비켜주면 객이 돌아가야지. 선회(旋回)!”
낭인들이 크게 반원을 그려 척사당을 스쳐 지나갔다.
진한 비웃음을 남긴 채.
모용강은 그들의 뒷모습을 주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도면 쉽게 당하진 않겠지. 헛돈을 쓴 건 아니야.’
건방진 놈들이었으나 쓸 만하기도 했다.
모용강은 척사당을 둘러보며 나직이 명했다.
“놈들을 멀리서 쫓는다. 그리고 놈들이 천하유람단주 그놈과 만나서 싸우면…….”
뒷말은 필요 없었다.
척사당원들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 * *
정광은 눈을 비비며 하품했다.
“하아아암.”
척후대를 보내고 이틀을 기다렸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아직 덜 온 건가?’
그랬을 수도 있고 척후대가 당했을 수도 있었다.
‘그냥 내가 가버려?’
마침 좋은 방법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