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34화
신용
쉬이이이익-
정광이 쏜 화살이 눈부신 속도로 날아갔다.
신법을 펼쳐 피할지, 병기로 쳐낼지 궁금한 마음을 담아 쏘아낸 것이었건만.
빼빼 마른 사내는 범상치 않게 반응했다.
고개를 옆으로 눕히는가 싶더니, 홱 돌리며 이를 악물었다.
이빨로 화살을 받아낸 것이다!
콰직!
‘……!’
정광의 눈이 커졌다.
‘미친 거 아니야? 저러다간 늙어서 고생할 텐데.’
타인에게 무관심한 정광이 염려할 만큼 무모한 짓!
그 미친 짓거리에 낭인들이 열광했다.
“우와아아아!”
그게 끝이 아니었다.
사내는 그 상태로 정광을 주시하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명백한 비웃음!
그 작은 행동에 진영(陣營)이 폭발했다.
사기충천한 낭인들이 똑같은 별호를 연호하며 미친 듯이 함성을 질렀다.
“동방장(東方將)! 동방장!”
“저런 무용(武勇)이라니! 이번 건에 낀 보람이 있구나!”
“으하하! 역시 동방장이로다!”
“어서 명을 내리시오! 다 쓸어버립시다!”
신궁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만큼 대단한 정광의 신위에 위축되었던 게 바로 조금 전이거늘.
낭인들은 병기를 고쳐 잡으며 기세를 끌어 올렸다.
동방장이라 불린 빼빼 마른 사내가 화살을 퉤 뱉어내고 음산하게 웃었다.
“으흐흐. 음?”
입을 몇 차례 우물거리고 침을 뱉자, 붉은 핏물과 함께 어금니 두 개가 튀어나왔다.
동방장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미친. 죽을 뻔했잖아.’
화살이 너무 빨라 막을 엄두가 안 났었다.
억지로 피했으나 그것도 늦었다.
고육지책으로 입으로 받아냈거늘, 이렇게 강한 힘이 실려 있었을 줄이야!
‘사기는?’
수하들을 슬쩍 둘러봤다.
어금니를 뱉은 걸 봤는지 하늘을 찌를 기세로 솟구치던 사기가 바닥을 기고 있었다.
낭인들은 다시 정광 일행에게 집중하며 투덜거렸다.
“젠장. 어째 너무 잘한다 했다.”
“그냥 피하지 왜 물은 거야? 짐승 좀 다룬다고 자기도 잘 물 줄 안 건가?”
“내가 미쳤지. 서방장(西方將)이나 남방장(南方將) 쪽에 지원했어야 했는데.”
동방장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질렀다.
“이것들아! 조용히 해! 그놈들이었으면 이렇게 받지도 못하고 죽었어!”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린 낭인이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그렇다 치고! 어서 지시나 내리시오! 놈들이 계속 오고 있소! 좀 있으면 코앞이외다!”
“준비는 됐냐?”
낭인들은 수장이 헛짓거리를 하는 와중에도 진형을 단단히 굳히고 있었다.
얼핏 보면 군(軍)과 착각할 정도로 정연한 모습이었지만 역시 낭인은 낭인인 걸까.
늙은 낭인이 경박하게 답했다.
“동방장만 빼고 다 됐소이다!”
“거참 노인네 하곤. 목소리 한번 우렁차네.”
긴장감 때문에 등이 축축이 젖었던 낭인들이 왁자하게 웃었다.
동방장은 쌍조갑(雙爪甲)을 양손에 끼며 날카롭게 외쳤다.
“내 말을 듣는 놈들은 거의 안 죽는다! 그걸 알고 내 밑에 들어왔지?”
사실이었다.
동방장은 짐승을 다루는 재주만 있는 게 아니었다.
본신 무공도 대단했고 어떤 강적과 만나도 피해를 극소화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나를 믿고 싸워라! 웬만하면 고향 땅을 밟을 수 있게 해줄 테니 닥치고 따르란 말이다!”
고향 땅!
막상 돌아가게 되면 다시 박차고 나와 낭인질을 하지만 누가 그걸 거부하랴!
“우와아아!”
다시 사기가 오르자 동방장이 정광을 가리키며 명했다.
“조준!”
활을 든 낭인들이 정광을 노려보며 시위를 당겼다.
정광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순간적으로 판단을 내렸다.
‘안 어울리게 수하들을 아끼나 보네.’
수하들도 나쁘지 않았다.
군의 조직력에 낭인의 자유분방함이 더해졌다. 두 가지가 엮이면 상당한 위력을 낼 터.
‘동방장인지 뭔지 저놈부터 쳐야 해.’
뜻이 서자 몸이 움직였다.
진흑풍과 황금풍의 고삐를 자오에게 건넸다.
비룡을 등에 메고 양손으로 창을 한 자루씩 쥐었다.
그때, 동방장이 고함을 질렀다.
“일제사(一齊射)!”
활시위를 당기고 있던 낭인들이 일제히 시위를 놓았다.
수많은 화살이 허공을 빼곡히 채우며 정광에게 날아갔다.
정광도 움직였다.
어느새 진흑풍과 황금풍의 머리를 두 발로 딛고 선 그는, 양손의 창을 무섭게 회전시켰다.
부우우우웅-
정광 일행을 노리고 날아오던 화살들이 그 회전에 휘말려 어지럽게 튕겨 나갔다.
놀라운 신위였으나 그쯤은 할 줄 알았던 걸까? 동방장이 침착하게 명했다.
“시차를 두고 연사(連射)!”
일제사 때보다는 덜했지만, 상당히 많은 화살이 연이어 쏘아졌다.
격돌할 때까지 힘과 내공을 조금이라도 더 빼놓겠다는 의미!
허나 정광이 동방장보다 미세하게 빨랐다.
“이따 봬요! 선회(旋回)!”
일행에게 지시를 내림과 동시에 수레를 박찼다. 그의 신형이 낭인들을 향해 쏘아졌다.
“무운을 빕니다!”
자오가 진심을 담아 외치며 말고삐를 움직였다.
“불취검! 모용 소저! 우측으로!”
이히힝!
진흑풍과 황금풍이 오른쪽으로 급격히 방향을 틀었다.
혜진과 모용수수도 즉시 알아듣고 말머리를 돌렸다.
“단주! 무운을!”
“무리하지는 마시오!”
정광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모용수수의 걱정 가득한 외침 때문이 아니라 피가 끓어서였다.
일행을 보내고 홀몸이 된 그는 대평원을 질주하며 화살비를 맞이했다.
창을 폭풍처럼 돌려 튕겨냈다.
화살이 계속 집중되자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동방장이 눈을 번뜩이며 소리를 질렀다.
“기회다! 쏴! 저놈만 잡으면 돼!”
낭인들도 그렇게 생각하던 참이었다.
미친 듯이 손을 움직였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는 정광을 향해 수없이 많은 화살이 쉼 없이 쏘아졌다.
‘드디어 잡았다!’
‘이걸 다 막을 순 없어!’
‘피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제 놈이 허공에서 움직여봐야 얼마나…… 어억!’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 용행구천(龍行九天).
정광의 신형이 허공에서 아홉 번이나 방향을 바꿨다.
그리고 날아오는 화살 한 개를 밟는가 싶더니 비조처럼 도약했다.
‘저건 또 뭐야!’
‘천하에 저런 신법이!’
정광은 지면을 한 번 디딘 뒤 다시 신형을 날렸다.
활을 든 낭인들의 머리 위를 뛰어넘어 동방장을 향해 날아갔다.
동방장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외쳤다.
“장창수(長槍手)!”
장창을 든 낭인들이 바로 대응했다.
머리 위를 날아가는 정광에게 장창을 내질렀다.
정광도 화답했다.
왼손의 창을 내려 창날로 창날을 밀었다.
끼긱-
창대가 살짝 휘어졌다가 펴졌다.
정광은 그 탄력을 이용해 한 번 더 도약했고, 동방장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릴 수 있었다.
‘살릴까 죽일까.’
역시 살리는 게 나으리라.
양손의 창을 거꾸로 쥐었다.
창날이 아닌 자루 끝으로 동방장의 머리를 내려찍었다.
순간, 동방장이 뒤로 몸을 빼며 양손을 움직였다.
쌍조갑에 달린 칼날들이 창자루를 할퀴었다.
후두둑.
창자루가 조각조각 잘려 땅바닥에 떨어졌다.
뒤이어 착지한 정광이 짧아진 창자루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동방장이 쌍조갑을 까딱거리며 웃었다.
“으흐흐. 이를 어쩌나. 단창(短槍)이 돼버렸네?”
“딱 좋은데요?”
“허세하곤. 단창 두 자루로 뭘 어쩌려고? 네가 사혼관천(邪魂毌天)이라도 돼?”
쌍단창을 잘 쓰는 것으로 유명했던 전 사마련주 사지환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건 아니죠.”
“그래도 양심은 있군.”
동방장이 피식 웃으며 칭찬했다.
“네가 난 놈이란 건 인정하마. 그 연배에 그런 무공이라니. 직접 보지 않았으면 누가 말해도 안 믿었을 거야.”
주위에서 숨죽이며 지켜보던 낭인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만큼 정광의 무위는 경악스러웠다.
“뭐 그래 봐야 딱 거기까지지. 주병기가 망가졌으니 얌전히 목을…… 음?”
정광을 으르던 동방장이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검을 찼네? 저게 주병기인가?’
활을 그렇게 잘 쏘는 놈이 검을 멋으로 차고 있을 리는 없었다.
‘가만. 아까 펼쳤던 그 요상한 신법도 그렇고…… 설마?’
주군인 낭왕(浪王)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진옥룡!’
정확히 풀면, 진옥룡인 것 같은 놈이 요녕에 있으니 만에 하나 마주치기라도 하면 쓸데없이 싸우다가 죽지 말고 튀라는 얘기였다.
‘망할. 이제야 알았는데 어쩌라고.’
솔직히 자신 없었다.
사마련주 사지환도 이놈에게 죽지 않았던가.
‘똥 밟았네. 손속이 독한 놈이라고 들었는데…….’
길은 하나였다.
정광을 살기로 옭아매며 크게 외쳤다.
“뭐 해? 빨리 튀어!”
“네?”
정광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낭인들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말에 올라타 달렸다.
“니미! 왜 튀라는 거야?”
“일단 달려! 언제 동방장 말 들어서 손해 본 적 있어?”
정광은 어이가 없어 동방장에게 물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아. 잠깐만.”
양해를 구한 동방장이 입술을 오므려 휘파람을 불었다.
삐이이이익-
야율초가 이끄는 좌익과 우번이 지휘하는 우익을 쫓던 늑대들이 귀를 쫑긋거렸다.
휘이익- 휘익-
늑대들이 순식간에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아까와 비교하면 수가 많이 줄어 있었다.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 달리며 활로 늑대들을 쏘아 죽였던 마적과 이민족이 멈칫했다.
자오 일행도 마찬가지.
정광도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홀로 시간을 끄시려고요?”
“쓸데없는 희생은 줄여야지.”
“흐음. 이렇게 항복하실 줄은 몰랐네요.”
동방장이 코웃음 쳤다.
“흥. 말도 안 되는 소리. 항복 따위를 했다간 일거리가 끊길 게 뻔한데 내가 미쳤냐?”
“의외네요. 신용을 중시하시고.”
동방장이 눈을 부릅떴다.
“당연하지! 낭인은 곧 신용이야!”
“정말요? 그다지 평판 좋은 직업이 아닌 것 같던데.”
“지금 나를 시장통에서 주먹이나 우두둑거리는 놈들과 비교하는 거냐? 실력이 있고 신용도 있는 자들만 낭왕과 함께 싸울 수 있다!”
정광으로선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항복해 놓고 뒤통수를 쳐서 아는 사람은 전부 살인멸구(殺人滅口) 하면 되잖아요.”
“…….”
“아. 내가 더 강하니까 안 되는구나. 이해했어요.”
“……미친 대마두 새끼. 악랄하기가 천하제일인 놈.”
전생에 자주 듣던 욕이라 욕 같지도 않았다.
“이제 어떡하시려고요?”
“뻔하지.”
동방장이 쌍조갑을 들어 올리며 스산하게 말했다.
“일대일로 겨루자. 어차피 그래야 끝이 나잖아.”
“그게 유언이에요?”
동방장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아니. 만에 하나. 정말 만에 하나 내가 지면 내 몸값을 내마.”
“돈 많은데.”
“돈이 아니야. 일 년 동안 네 명을 따르마. 어때. 군침이 돌지?”
“그렇게까진 아닌데 나쁘진 않네요. 지금까지 몇 번 그러셨어요?”
“딱 한 번.”
“누구였죠?”
“당연히 내 주군인 낭왕이지. 빌어먹을. 괜히 덤볐다가 평생 매여서 이게 무슨 고생인지.”
호기 넘치던 시절, 평생을 걸었다가 매여 버린 동방장은 또 그런 일이 생기면 일 년으로 줄이겠다고 맹세했다.
낭왕도 그렇게라도 살아서 다시 돌아와 개처럼 일하라고 기꺼이 허락했고.
정광은 동방장의 파란만장한 삶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수하만 아끼는 게 아니라 제 몸도 아끼는 거네.’
끼리끼리 모인다는 말이 있듯이 그의 밑에 들어온 낭인들도 그런 부류일 게 뻔했다.
‘낭인들은 잡을 수 있으려나.’
슬쩍 고개를 돌려 보니 야율초와 우번이 놈들을 쫓고 있었다.
심지어 자오 일행까지.
‘목숨이 아까운 걸 알아서 그런가, 무리하지 않고 싸울 줄 알잖아.’
낭인들은 질서정연하게 도주하면서 추적하는 마적과 이민족을 화살로 거꾸러뜨리고 있었다.
‘어차피 잡기 힘들겠는데.’
정광도 짧은 시간에 내공을 많이 소비한 상황.
‘이놈이라도 잡자. 손해는 아니야.’
판단력이 있고 결단도 빠른 녀석이었다.
거기에 투지까지!
“안 오냐? 내가 가랴?”
정광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잡념을 끊고 눈앞의 상대에게 집중했다.
정광의 눈빛이 바뀌자 동방장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눈빛만으로 오금이 저리게 하다니.
정광이 쥐고 있던 단창들을 회전시켰다.
“그럼 시작하죠. 약조 어기시면 안 돼요.”
동방장이 쌍조갑의 날을 혀로 핥으며 이죽거렸다.
“제 놈이 정말 이길 거라 생각하는군. 오만한 녀석, 하늘 밖에 하늘이 있다는 걸 알려주마!”
“저기요. 혀에서 피나는데요.”
“닥쳐라!”
동방장은 사력을 다해 싸웠다.
그의 무공은 놀라웠다.
팔사 바로 아랫급 정도?
짐승을 부리는 재주에 놀라운 실전 감각까지 더하면 오히려 낫다 할까.
그래서 더 맞았다.
정광은 그를 패고 패고 또 팼다.
봐주면서 상대할 만큼 쉬운 상대가 아니었기에 최선을 다해 팼다.
“하압! 내가 질쏘냐!”
동방장은 굴하지 않고 투지를 발산했으나 오래가진 못했다.
버티고 버티고 또 버티다가 분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만! 제발 그만 때려! 아악! 어억! 주, 주군! 주군으로 일 년 동안 모셔주마!”
“삼 년은 안 될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래도요?”
“어억! 그, 그만! 때려도 안 돼! 절대 안 돼!”
“이상한 신념이 있으시네.”
결국, 일 년 반으로 타협을 봤다.
“믿어도 되죠?”
“낭인은 신용이라니까!”
“주군으로 모시겠다는 사람치곤 말이 너무 짧은데요.”
“이건 못 고친다. 낭왕도 포기한 일이야.”
정광은 감탄했다.
곤륜파 도사들에게 세뇌되어 항상 존대하는 자신과 달리 꿋꿋한 놈 아닌가!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지. 선을 넘으면 패면 되고.’
낭왕의 사지(四肢)와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는 사방장(四方將).
그중 하나인 동방장이 한시적이지만 정광의 수하가 됐다.
‘좀 부족한 감이 있는데. 아.’
일방적인 거래에서 말로 하는 약조처럼 덧없는 게 또 있을까.
정광은 품속에서 병을 하나 꺼냈다.
오래전 자오에게 먹였다가 회수한 만성독약(慢性毒藥)이었다.
동방장은 처절하게 저항하다가 억지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끄륵. 이, 이딴 걸 먹이다니!”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믿는 건 무리가 있죠. 확실히 해놔야 서로 마음이 편하지 않겠어요?”
동방장이 다시 뭐라 하려고 했으나.
정광이 얼굴을 들이밀며 낮게 물었다.
“그보다 낭왕 그분. 지금 어디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