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304화 (303/569)

2부 33화

재주꾼

정광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정면을 주시했다.

‘만만치 않네.’

그렇다고 피할 생각은 없었다.

처음으로 맞닥뜨린 낭인(浪人) 무리 아닌가.

마적과 이민족에게 큰 그림을 제시하고 하나로 묶은 상황.

약간의 폭력을 가미해서 이룬 일인지라 결속이 단단한 편은 아니었다.

‘빨리 전과를 올리지 않으면 딴생각을 품을 게 뻔해.’

상대의 힘도 견식 할 겸, 싸워야 했다.

고개를 돌려 옆에서 말달리는 야율초를 바라봤다.

“초주(草主)님.”

“말해라.”

“적이 나타났네요. 여기서 멈추죠.”

“……!”

야율초의 눈이 살짝 커졌다.

거리가 너무 멀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아무런 의심 없이 큰 목소리로 명했다.

“정지!”

이히히힝!

마적단들과 이민족들이 멈춰 섰다.

정광이 그들을 둘러보며 손을 흔들었다.

“수장들께선 이쪽으로 와주시겠어요?”

마적단의 두령들과 이민족의 족장들이 정광 주위에 모였다.

“적이 오고 있어요.”

“……!”

“아직 안 보이시겠지만 적지 않은 숫자예요.”

“…….”

모두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었다.

정광만 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냉정히 보면 우리는 오합지졸(烏合之卒)이나 마찬가지죠. 한 번이라도 상대의 기세에 눌리면 사분오열(四分五裂)될 거예요. 그리고 각개격파 당하다가 끝. 그럴 바엔 싸우는 게 낫겠죠? 우리가 각개격파하는 거예요. 이의 있으신 분?”

“…….”

몇 명이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끝내 아무 말도 못 했다.

정광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그럼 동의하신 것으로 알고 진행할게요. 초주님. 다른 분들을 이끌어주세요.”

“알겠다.”

“초주님이 지휘하시는 게 마음에 안 드시는 분? 계시면 지금 말씀해 주시겠어요?”

광풍단주(狂風團主) 우번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대협을 믿고 여기까지 왔지, 저자를 따라온 게 아닙니다.”

“지금부터 따르시면 되겠네요.”

“대, 대협. 허나…….”

야율초가 우번을 차갑게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불만이 있으면 내게 말해라.”

우번도 야율초를 응시하며 이를 드러냈다.

“크크. 네가 감당할 수 있을까?”

“물론.”

“이 새끼가!”

정광이 손뼉을 치며 정리했다.

“자. 자. 우리는 한 식구잖아요. 별것 아닌 일로 다투지 마시고 무공으로 빨리 결론을 내시죠.”

“…….”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십초 안에 끝내셔야 해요. 뭐 하세요? 빨리 안 하시고.”

“…….”

반드시 하고 싶던 것도 막상 멍석을 깔아주면 못하곤 하는 게 사람이다.

더구나 십초 안에 승부를 내라니?

생사결을 벌이라는 말 아닌가?

야율초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으나 우번의 눈은 흔들렸다.

‘빌어먹을. 이 오랑캐 새끼, 꽤 강한데 괜히 나섰잖아.’

그때, 정광이 정면을 주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 저쪽도 멈췄네?”

“……!”

모두의 시선이 정광이 보고 있는 쪽으로 향했다.

“바로 진형(陣形)을 바꾸네요. 마치 군(軍) 같은데요?”

“망할!”

한 마적단 두령이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새끼들. 우리를 칠 때도 그랬소.”

족장 한 명이 이를 갈았다.

“관군과 비슷한 전술을 운용하더군. 군부 출신이 많은 것 같더이다.”

낭인이라고 다 같은 낭인이 아니었다.

출신만 해도 천차만별이었는데, 그중 상당수를 차지하는 게 병졸이었다.

정광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연. 진형을 빠르게 가다듬네요. 병졸뿐만 아니라 무관(武官) 출신인 분도 꽤 계시다는 얘기겠죠.”

야율초와 싸울지 말지 난감해하고 있던 우번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무관씩이나 했던 새끼들이 낭인질이라니. 상종 못 할 후레자식들 같으니.”

정광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우 두령님, 탈영병 출신이라도 되세요? 무관을 많이 싫어하시는 것 같네요.”

“뭐 그냥…….”

야율초가 끼어들어 설명했다.

“탈영한 건 맞지만 정육품(正六品)의 품계(品階)인 백호(百戶) 출신이다. 십여 년 전, 술에 취해 상관을 구타하고 도망쳤지. 제 놈은 마적질을 하면서 무관을 떠받드는…….”

우번이 대노했다.

“그 새끼는 맞아도 쌌어! 그보다 이 새끼가 진짜! 감히 나를 입에 올려?”

“못할 게 뭐지?”

“흐흐. 예전에 진작 죽일 것을. 지금이라도 죽여주랴?”

“군부에 있을 때도 나를 계속 못 잡았으면서 같은 마적이 된 지금?”

“그때는 불쌍해서 놔줬던 거다!”

“말이 길군. 와라.”

우번은 원래 말보다 행동이 빠른 사내였다.

오른손으로 허리춤에 찬 도를 뽑아 야율초를 베려는 그때!

턱.

정광이 그 손을 잡고 빙그레 미소지었다.

“쫓고 쫓기는 관계에서 동료가 되신 거네요. 아름다워라. 이게 강호의 낭만이죠.”

“……뭐? 아, 아니. 네?”

“우 두령님. 지난 과거는 추억의 강물에 흘려보내시고, 지금부턴 부관(副官) 노릇 좀 하시죠.”

“……무슨 말씀이신지?”

“초주님 부관하시라고요.”

우번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솟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나는 절대…….”

정광의 눈에서 살기가 솟았다.

우번은 몸을 부르르 떨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 절대 가능하지요.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군 경험을 살려 잘 보좌하실 거라 믿을게요. 괜히 흥분해서 초주님의 명을 어기면 귀천하실 거예요. 아니, 귀천당하시겠구나. 이해하셨죠?”

“……!”

이해하다마다.

이해한 건 우번만이 아니었다.

각 무리의 수장들은 정광의 시선을 받을 때마다 두려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광은 만족한 표정으로 전술을 설명했다.

“저희 일행은 따로 움직이며 저쪽의 수를 줄일 테니 알아서 잘 싸우세요.”

“……!”

“하나로 뭉치셔야 해요. 안 그러면 오늘은 살 수 있을지 몰라도 오래 버티진 못하실 거예요.”

“…….”

앞의 전술은 어이가 없었지만, 뒤의 충고는 가슴에 닿았다.

‘맞는 말이야. 우리끼리 반목하면 사냥당하다가 죽을 게 뻔해.’

‘나중에 서열을 정리하면 돼. 지금은 힘을 합쳐 싸워야 한다!’

모두 마음을 굳히자 정광이 씩 웃었다.

“딱 좋네요. 초주님, 준비하시죠. 적들이 속도를 높이고 있어요.”

“알겠다.”

야율초는 각 무리의 수장에게 명을 내려 진형을 짰다.

우번은 못마땅한 마음을 삭이며 그를 도왔다.

진형이 모양새를 갖췄을 때쯤, 적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람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수는 우리보다 적은데…….’

‘……질서정연하구나. 힘든 싸움이 될 것 같군.’

정광도 진지하게 전면을 살폈다.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네. 사정거리 안까지 들어오면 활을 쏠 셈인가?’

슬쩍 고개를 돌려 아군을 보니 마적과 이민족이 야율초의 지시에 따라 활을 준비하고 있었다.

‘싸움 경험이 많고 판단력도 있어. 어이없는 수를 둬서 판을 그르치진 않을 거야.’

야율초도, 다른 이들도 정광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피해를 줄이는 것보다 싸움을 빨리 끝내는 쪽을 택했고, 야율초에게 지휘권을 준 것이다.

‘뭐 이번에 이기면 대우를 다시 생각해 보고.’

슬슬 움직여야 할 때였다.

“각응. 준비됐죠?”

“다 됐습니다.”

“불취검과 모용 소저는요?”

두 사람도 그렇다고 대답했다.

“잠시만 더 기다렸다가 적들이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움직일게요.”

“네! 단주!”

그 순간.

적들이 속도를 더 높였다.

동시에 그들의 뒤에 가려져 있던 작은 것들이 빙 돌아 나와 질주하기 시작했다.

우번이 크게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느, 늑대? 늑대가 왜 여기에?”

한두 마리가 아니라 수없이 많은 늑대떼 아닌가!

마적과 이민족이 혼란에 빠졌다.

“말들이 놀랄 거다! 저놈들을 막아야 해!”

“늑대들에게 활을 쏘자고? 그럼 뒤에서 오는 낭인들은?”

“늑대들을 다 죽이기도 전에 우리가 놈들의 화살에 꿰여 죽을 게 뻔하잖아!”

“그럼 어쩌자는 거냐!”

사람들이 갑론을박을 벌이는 사이, 정광은 야율초와 현 상황에 대해 논의했다.

“늑대가 홀로 움직이지 않고 무리를 짓는 건 알지만 식구가 무척 많네요. 요녕 늑대들은 사람들이 싸울 때 끼어드는 걸 좋아하나요?”

“절대 아니다.”

“그럼 저쪽에서 누군가 늑대들을 부리고 있다는 얘기네요.”

“믿기 힘들지만 그렇겠지.”

“와. 쟤들을 다 먹이려면 돈이 얼마야.”

“…….”

어깨높이가 이척(二尺)에서 삼척(三尺)에 이르는 회색 늑대들이었다.

그리 큰 편은 아니었으나 말들을 놀라게 하기에는 차고 넘쳤다.

하지만 정광 일행이 탄 말들은 심혈을 기울여 키운 전마(戰馬).

볼썽사납게 도망가거나 과도하게 흥분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가까워지면 분명 영향을 받겠지.’

그 전에 제거해야 했다.

정광은 등에 메고 있던 비룡을 잡았다.

늑대들을 둘러보다가 화살을 시위에 메겼다.

목표는 덩치와 기세가 남다른 놈이었다.

야율초가 눈을 빛냈다.

“우두머리 늑대를 쏠 셈이군.”

맞았다.

화살이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쏘아졌다.

쉬이이익-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날아가 늑대의 미간을 꿰뚫었다.

퍼억!

캐앵!

화살의 위력이 어찌나 강한지, 달리던 늑대가 뒤로 밀려나 바닥에 나뒹굴었다.

다른 늑대들이 동요했다.

아우우우!

그때, 괴이한 휘파람이 울려 퍼졌다.

휘이이이익-

흩어지려던 늑대들이 다시 그대로 달렸다.

정광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짐승을 이런 식으로 부려? 재밌는 재주네.’

전생에 천마신교에도 비슷한 짓거리를 하는 놈이 있었다.

허나 마기(魔氣)로 제압해서 몇 놈을 부리는 것이지, 이렇게 많은 녀석들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건 아니었다.

‘그때처럼 가야겠네.’

생각하는 중에도 회색 물결이 밀려오고 있었다.

야율초가 결단을 촉구했다.

“우두머리 몇 놈 잡는다고 될 일이 아니군. 어찌할 것이냐? 더 가까워지면 위험하다. 늑대는 사람처럼 차륜전을 쓸 줄 알뿐더러…….”

“아까도 그렇고. 은근히 말씀 많으시네요. 마음이 급하셔서 그런가.”

“……솔직히 그렇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우두머리를 잡을 테니까.”

야율초가 인상을 찌푸렸다.

“우두머리 몇 놈 잡아서 될 일이 아니라고 말했을 텐데.”

“늑대가 아니라 휘파람으로 늑대를 부리는 사람요.”

“……저놈들과 낭인들을 뚫고 들어가서?”

“네. 문제 있나요?”

“…….”

야율초의 눈이 흔들리다가 빛났다.

“네가 없으면 없겠지. 그때까지 회피, 기동으로 대응하마. 놈을 잡으면 포위, 섬멸로 전환하고.”

“말이 통해서 좋네요. 이따 봬요.”

“무운을 비마. 아미타불.”

야율초가 불호를 중얼거리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따라 했다.

정광이 황당해하며 물었다.

“불자(佛子)셨어요?”

“필요할 때만.”

“그럼 더 열심히 비셔야죠. 너무 짧은데.”

“복잡한 건 모른다. 부탁하려면 이 네 글자로도 충분해.”

진심이 담겼으니 그렇다는 말.

다른 마적들도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녕이 생각보다 불교가 흥한 지역이었네요.”

“백 년 전만 해도 그랬다던데 지금은 아니지. 힘. 오직 그것만이 중요한 시대다.”

“…….”

백 년 전이라.

조양사(朝陽寺)가 불탔던 시점 아닌가.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정광이 외쳤다.

“천하유람단! 가죠!”

“네! 단주!”

히히히힝!

진흑풍(眞黑風)과 황금풍(黃金風)이 수레를 끌고 달렸다.

정광은 수레 위에 우뚝 서서 두 말의 말고삐를 왼팔에 감았다.

그리고 왼손으로 비룡을 잡았다.

자오가 그의 오른편에 앉아 화살을 건넬 준비를 했다.

“불취검! 좌익(左翼)으로! 모용 소저! 우익(右翼)요!”

“네! 단주!”

검을 쥔 혜진이 진흑풍 옆에서, 참마도를 뽑아 든 모용수수가 황금풍 우측에서 말달렸다.

“각응!”

“네! 단주!”

자오의 손이 눈부신 속도로 정광에게 화살을 건넸다.

정광은 그것들을 계속 받아 늑대들에게 쏘아댔다.

캐갱! 캥!

늑대들이 끝없이 거꾸러졌다.

수레 정면이 회색 사체들로 메워졌다.

옆에서 덮치는 놈들은 혜진과 모용수수가 처리했다.

검이 놈들의 머리를 베고 참마도가 놈들의 몸을 두 동강 냈다.

멍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마적과 이민족은 야율초의 외침에 정신을 차렸다.

“인원을 반으로 나눠 각각 좌측과 우측으로 움직인다! 늑대떼와 거리를 벌리며 기사(騎射)로 숫자를 줄인다!”

“……!”

“천하유람단주가 휘파람을 부는 자를 죽이면 늑대들은 자연히 도망갈 거다! 그때, 적들을 좌우에서 감싸 섬멸한다! 내가 좌익을 맡고 우번이 우익을 책임진다! 이해했는가?”

“……!”

앞엣것들은 모두 이해했으나 뒤엣것이 문제였다.

우번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야율초를 쏘아봤다.

“내게 절반을 맡기겠다고? 제정신이냐?”

야율초가 냉랭하게 되물었다.

“자신이 없나?”

“개소리!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럼 닥치고 해! 도주하면 얼마 못 가 사냥당한다! 명심해라!”

“너야말로 닥쳐! 나는 겁쟁이가 아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잠시 노려보다가 각자의 무리를 이끌고 좌우로 움직였다.

적진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리던 정광은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확인한 뒤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적들이 동요하고 있었다.

후방에 있는 한 사내가 분주히 지시를 내리더니 입술을 모아 휘파람을 불었다.

삐이이이익- 휘이익-

아까의 것과 비슷한 소리.

아니나 다를까.

늑대들이 정광 일행에게서 떨어져 좌우로 기동하는 마적과 이민족을 쫓았다.

정광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고수네.’

분위기도 익숙했다.

호남성에서 봤던 한 사내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모르잖아.’

현인(賢人) 후위진을 보필하던 두더지처럼 생긴 사내.

‘땅 하나는 기가 막히게 팠었지.’

후위진이 아니라 응담후가(鷹潭后家)의 가주에게만 충성한다고 했던가.

그 가주가 바로 낭왕(浪王)이리라.

‘좋은 취미네. 신묘한 재주를 가진 놈들을 거둬서 부리고.’

워낙 강호에 알려진 바가 적은 자라 그런지 알면 알수록 재밌었다.

정광은 휘파람을 분 빼빼 마른 사내를 노려보며 활시위를 당겼다 놨다.

‘다른 재주도 부려봐.’

쉬이이이익-

사내가 재주를 부렸다.

그는 기대를 뛰어넘는 재주꾼이었다.

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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