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32화
적 또는 동료
“안녕하세요!”
나름 정중하게 인사했건만.
정광은 환영받지 못했다.
수많은 무인들이 뛰쳐나와 둘러싸며 살기를 쏘아냈다.
“웬 놈이 행패냐!”
“감히 이런 짓을 하다니! 얌전히 목을 내밀어라!”
정광은 목을 내밀긴커녕 빳빳이 세웠다.
그보다 더 빳빳한 창을 꼬나쥐고 크게 휘두르며 충고했다.
“살짝 아플지도 몰라요.”
부와와아앙-
곧게 뻗어 있던 창대가 급격히 휘어지며 허공을 갈랐다.
그 반경 안에 있던 본계마가(本溪馬家) 무인들이 창대에 얻어맞고 허공을 날았다.
빠바바박!
“끄아아악!”
최소 한두 군데씩은 부러진 무인들이 바닥에 처박히며 나뒹굴었다.
포위한 무인들이 눈을 부릅떴다.
포위된 정광은 눈살을 찌푸렸다.
“조금 많이 아팠나?”
“…….”
쓰러진 자들이 간헐적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뭐 이 정도는 괜찮겠지.”
“…….”
전혀 안 괜찮았다.
언뜻 봐도 몇 달은 족히 침상에 누워 정양해야 할 것 같은데 무슨!
“자. 다음 분들 오시죠.”
정광이 창대를 고쳐 쥐며 청하자 무인들의 눈이 뒤집혔다.
“죽어라!”
갖가지 병기가 흉악한 기세로 쏟아졌다.
정광은 피하지 않았다.
휘이이잉-
대신 창이 빠르게 휘돌며 단단한 장벽을 만들었다.
따다다당!
병기를 모두 튕겨낸 뒤 다시 원을 그렸다.
부와와아앙-
창이 허공을 찢어발기며 예의 무시무시한 소리를 냈다.
그만큼 끔찍한 소리가 또 터졌다.
뼈가 부러지거나 조각나는 소음이었다.
빠가가각!
“아아악!”
극심한 고통에 정신을 잃은 무인들이 정광을 중심으로 원을 그린 채 쓰러졌다.
“……!”
무인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들이 포위한 적은 무시무시한 고수였다.
‘포, 포위한 게 맞긴 한가?’
‘가만. 일부러 뛰어들었잖아!’
정광은 그들이 더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안 오세요?”
“…….”
“그럼 제가 가죠.”
“……!”
본계마가 무인들의 눈에 두려움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 빈자리를 투지가 채웠다.
대평원의 전사다운 모습이었다.
‘악독한 대마두 같으니!’
‘네놈이 아무리 강해봤자 숫자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걸 알려주마!’
대평원에서 기마전(騎馬戰)이라도 벌였으면 모를까.
안타깝지만 정광은 그들의 생각보다 강했다.
부와아아앙-
창이 굉음을 내며 움직일 때마다 사람들이 쓰러졌다.
그들의 눈에 가득했던 투지가 공포심에 밀려 사그라들었다.
이대로 가다간 언제 마음이 꺾일지 모를 상황!
“멈춰라!”
뒤늦게 나타난 노인들이 노한 음성을 토하며 달려들었다.
“모두 물러서!”
“우리가 상대한다!”
정광이 그들을 반겼다.
“오셨어요?”
창도 반갑게 맞이했다.
수십 개로 불어나 그들의 요혈(要穴)을 찔러갔다.
슈슈슈슉-
“……!”
노인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직접 대해 보니 멀리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창술 아닌가!
‘물러나면 안 돼!’
‘사기가 완전히 꺾인다!’
어차피 피할 틈도 없었다.
내공을 끌어 올려 저마다의 병기에 담았다.
그것으로 독사처럼 파고드는 창을 후려쳤다.
콰창창!
“크흑!”
노인들이 신음을 삼키며 몇 걸음씩 물러났다.
정광은 창을 어깨에 척 걸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진짜가 나왔네.’
아무도 쓰러지지 않았다.
병기가 조금씩 손상됐을 뿐, 부러지거나 놓친 자는 없었다.
물론 무사한 건 아니었다.
병기를 쥔 손이 격돌의 충격 때문에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호리호리한 체구의 노인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뭐 하는 놈이냐? 본가에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유람을 즐기는 사람이요. 부탁드릴 게 하나 있어서요.”
“유람 같은 소리! 천하의 누가 이딴 식으로 부탁을 해?”
“성의가 부족했나? 잠시만요.”
정광은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이익-
“네 이놈!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음?”
노성을 터뜨리던 노인이 흠칫하더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수많은 화시(火矢)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화공(火攻)!”
곡사(曲射)로 쏘아낸 것들이라 대단한 위력이 담겨 있진 않았다.
그래도 전각이나 창고에 박혀 불을 지르기엔 충분했다.
화아아악-
“불이야!”
“밖에도 적이 있다!”
본계마가 무인들이 당황했다.
호리호리한 노인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그들에게 명했다.
“이놈은 우리가 상대한다! 너희는 불을 꺼! 밖에서 활을 쏘는 놈들을 확인하고 막을 수 있으면 막아라! 안 되겠다 싶으면 바로 말해야 한다!”
꽤 적절한 판단이었지만, 식솔들이 명을 받들기도 전에 정광이 먼저 움직였다.
“그건 곤란하죠.”
정면의 노인들에게 달려들지는 않았다.
이형환위(移形換位).
사라졌던 그의 신형이 뒤쪽에서 나타났다.
그의 손에 들린 창이 살벌한 원을 그리며 울부짖었다.
창에 격타당한 무인들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갔다.
“끄아악!”
양떼 속에 뛰어든 호랑이가 이럴까.
정광은 본계마가 무인들을 처참하게 유린했다.
분노한 노고수(老高手)들이 쫓았으나 정광은 계속 한발 빠르게 움직였다.
얼마 안 가 노인들의 얼굴이 허망함으로 물들었다.
‘신법조차 이렇게 빠르다니!’
‘이래서야 어찌 잡는단 말인가!’
잡긴커녕 시간을 벌기조차 힘든 고수!
그때, 장원 밖으로 나갔던 식솔들 중 한 중년인이 돌아와 비통하게 외쳤다.
“마적단입니다! 적은 수가 아닙니다!”
호리호리한 노인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마적 따위를 가지고 웬 호들갑이냐!”
“하, 하오나…….”
“시끄럽다! 당장 나가서 쓸어버려!”
억울한 얼굴로 변명하려는 중년인을 정광이 도왔다.
“그냥 마적이 아니라 고원초(古原草)인데요.”
“……!”
“악명 높은 고원초요. 저도 있고, 불도 끄셔야 하고. 쓸어버리실 여력이 없으실 텐데요.”
“…….”
정광의 말대로였다.
바닥에 쓰러진 채 꿈틀거리는 식솔들이 적지 않았다.
불도 점점 크게 번지고 있었다.
호리호리한 노인의 눈도 분노로 붉게 타올랐다.
하지만 마음만큼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놈의 말이 옳다. 시간이 지날수록 손해만 커질 게 뻔해.’
대업을 이루기 위해 정예가 떠나고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의 임무는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가문을 지키는 것.
개천(開天)에 성공한다 해도 가문의 힘이 약해지면 무슨 소용이랴?
그랬다간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도 밀려날 터.
공을 세우는 만큼,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힘을 유지해야 했다.
“……하나만 물으마. 네놈은 누구고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이냐?”
“하나가 아니라 둘이네요.”
“…….”
“어쨌든, 이제 부탁드려도 되죠?”
“…….”
분노할 때가 아니었다.
장원 밖은 비명으로, 안은 불길로 가득했다.
무엇보다 눈앞의 미청년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어디에서 이런 괴물이…….’
알면 뭐 할까.
그래 봐야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을.
노인은 눈을 질끈 감으며 입을 간신히 열었다.
“……말해보거라.”
* * *
정광은 수레 위에 드러누운 채 하늘을 바라봤다.
칙칙한 회색 구름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하늘도 바쁘고 나도 바쁘네.’
그래도 첫걸음을 제대로 뗐으니 나쁘지 않은 하루였다.
그만한 보답도 받았고.
‘이쯤이면 되겠지.’
상체를 일으켜 앉아, 옆에서 말달리던 기수에게 제안했다.
“초주(草主)님. 잠깐 쉬었다 가죠.”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야율초가 외쳤다.
“정지!”
히히힝!
수많은 인마가 멈춰 섰다.
정광은 수레에서 내려와 길게 기지개를 켰다.
‘뿌드득’ 하는 소리가 몇 차례 나며 몸이 편해졌다.
“응?”
나른한 표정을 짓던 정광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세요?”
경외의 눈빛으로 정광을 보던 마적들이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왜냐니?’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지.’
감히 입 밖으로 내진 못했으나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그만큼 정광이 선보인 신위는 경악스러웠다.
‘그 독하다는 본계마가 놈들이 순순히 재물과 말을 내줬어.’
‘혼자서 그렇게 많은 놈들을 반병신으로 만들 줄이야.’
황당하다 못해 허탈할 지경이었다.
화시 좀 쐈을 뿐인데 이렇게 엄청난 것들을 얻어?
약탈이 이렇게 쉬우면 누가 마적질을 할까?
‘타고난 마적이다. 아니, 이건 사람이 아니라 악귀…… 흡!’
몸을 부르르 떨며 정광을 훔쳐보던 마적이, 시선이 마주치자 다급히 변명했다.
“오, 오해입니다!”
“뭐가요? 나쁜 생각하셨죠?”
“아닙니다!”
“그럼요?”
“그, 그게…… 아! 한 명도 죽이지 않으신 대자대비함에 감탄하고 있었습니다!”
“아. 전 또 뭐라고.”
가만히 듣고 있던 야율초가 끼어들었다.
“왜 아무도 안 죽였지?”
“수하분께서 말씀하셨잖아요.”
“동업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그리했던 이유가 있을 터. 우리를 제대로 쓰려면 확실히 말해라.”
정광이 의외라는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방침을 아셔야 일을 제대로 하시겠죠.”
야율초와 마적들의 시선이 정광의 입에 집중됐다.
모용수수도 그랬는데, 자오와 혜진은 대충 짐작하는 얼굴이었다.
정광은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찬찬히 설명했다.
“호족들의 본거지를 치는 건 성을 포위하고 있는 반역자들을 끌어내기 위해서예요. 그런데 죽이면 뭐 해요? 원한만 사지. 중상자를 여럿 만들고 재물도 어느 정도 남겨놔야 그것들을 지키려고 돌아오죠.”
“……!”
“이해 안 가시는 분?”
“…….”
모두 거의 이해했다.
이해 못 하는 건, 천하에 이런 악랄한 놈이 어떻게 있냐는 것이었다.
마적들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이놈의 적이 되면 죽는다.’
‘아니,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준다고 했지. 분명히 그럴 거야.’
야율초의 안색도 어두워졌다.
무공은 물론이요, 심계 역시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숨이 붙어 있는 한, 이자와 끝까지 달려야 해.’
마지막 미련까지 잿더미가 되어버리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냐?”
“간단히 요기나 하면서 얘기하죠.”
야율초는 바로 명을 내렸다.
“식사를 준비해라!”
“네! 초주!”
사실 준비라 할 것도 없었다.
마적들이, 그것도 쫓기던 자들이 요리를 해봐야 얼마나 대단한 걸 할까.
건량과 육포를 넣고 끓인 죽이었다.
그것을 본 정광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하아. 잘 먹겠습니다.”
하지만 마적들은 정광 일행과 달리 간을 맞출 줄 알았다.
한입 맛을 본 정광의 얼굴이 환해졌다.
“오오. 진짜 잘 먹을게요.”
다들 정신없이 죽을 삼켰다.
쉬운 여정이 아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란 걸 알아서였다.
그렇게 배를 채우는데…….
정광이 고개를 돌려 동쪽을 유심히 바라봤다.
자오와 혜진이 죽 그릇을 내려놓고 병기를 들었다.
“단주. 적입니까?”
“싸울 준비를 할까요?”
야율초와 마적들도 그릇을 팽개치고 병기를 잡았다.
병기를 쥔 손에 땀방울이 점점 고였다.
‘반란을 일으킨 놈들인가?’
‘아니면…….’
정광이 씩 웃었다.
“다행히 적이 아니라 동료네요.”
“…….”
다른 이들은 웃지 않았다.
말이 동료지, 꺾어야 동료가 되는 자들이었기에.
“복색을 보아하니 동종업계 분들이에요. 서먹서먹할 일은 없어 좋네요.”
“…….”
마적단이라는 얘기였다.
동종업에 종사해 더 서먹서먹한 놈들 아닌가?
야율초와 수하들은 투지를 끌어 올렸다.
‘저놈들을 제대로 삼키려면…….’
‘……우리도 한몫 해야 한다!’
마적이니만큼, 한 치 앞을 못 내다보는 인생이었다.
지금도 보이지는 않았으나 정광이 제시했던 그림은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토사구팽 걱정은 나중에 해도 된다!’
‘지금보다 세력이 커지면 우리를 쉽게 버리진 못할 거야!’
정광의 심성을 신뢰하진 못했으나 능력만큼은 믿을 수 있었다.
그들의 수장인 야율초가 받아들였듯이 그 길을 따라 달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정광이 수레 위에 올라섰다.
다른 이들도 모두 말안장에 몸을 실었다.
정광이 동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가죠! 동료로 삼으러!”
“하아!”
말들이 지면을 박차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마주 달려오던 마적들 중 더러운 인상을 한 거한이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가진 건 다 내려놓고 꺼져라! 그럼 목숨만은 살려주마!”
요녕성 동부를 휩쓸던 광풍단(狂風團)의 단주 우번은, 풍이 들 정도로 정광에게 두들겨 맞다가 미치기 직전에서야 풀려났다.
“다, 다 가져가십시오! 제발 가져가 주십시오, 대협!”
“물론이죠. 가시죠.”
“……네?”
“다 가져가라면서요. 농이었어요?”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얘들아! 지금부터 대협을 따른다!”
만신창이가 된 수하들이 일제히 외쳤다.
“영광입니다, 대협!”
이렇게 동료가 생겼다.
정광은 그들과 함께 달리고 또 달렸다.
하루, 이틀, 사흘.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동료가 늘어났다.
그런 과정을 몇 번이나 더 거쳤을까?
드디어 동료가 아닌 자들이 나타났다.
적이 아니었으나 적이 된 무리.
낭인(浪人)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