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302화 (301/569)

2부 31화

고원초(古原草)

얼굴의 반이 화상(火傷)으로 뒤틀린 중년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와 수하들이 탄 말들이 달리며 일으키는 흙먼지 때문이 아니라, 거리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마주 오는 자들의 행색이 더 제대로 보여서였다.

‘기묘한 일이군.’

단 세 명이 저렇게 많은 말과 큰 수레를 끌고 대평원을 활보하는 건 무모한 짓이었다.

‘그만큼 고수라는 뜻인가.’

잘생긴 청년은 달리는 수레 위에 편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고수라 불릴 만했다.

성깔 있어 보이는 젊은 여인과 평범한 외모의 중년 사내도 만만치 않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못 잡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여기는 대평원이었기에.

중년인은 마주 오는 자들을 사냥감으로 규정했다.

“잡는다!”

“우와아아!”

수하들이 거친 목소리로 환호했다.

중년인은 늦기 전에 주의를 줬다.

“쏘지 마!”

살육을 즐기려는 게 아니라 필요한 것들을 강탈하려는 참이다.

먼 거리에서 활을 쐈다가 아까운 말들이 죽어버리면 무슨 손해인가.

수하들도 당연히 이해했다.

그러겠다고 일제히 대답했으나.

“으흐흐.”

잔뜩 흥분한 한 마적이 벌써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말달리며 슬쩍 뒤를 둘러보던 중년인이 멀쩡한 한쪽 뺨을 씰룩거렸다.

동시에 허리춤에 꽂혀 있던 손도끼들 중 하나를 뽑아 그대로 던졌다.

휘리리릭-

맹렬히 회전하며 날아간 손도끼가 마적의 머리통을 쪼갰다.

콰직!

마적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낙마했다.

그의 뒤에서 달리던 동료들은 눈살을 찌푸릴 뿐, 그를 피하기 위해 말고삐를 움직이지 않았다.

두두두두-

그대로 짓뭉개며 지나갔다.

빠각! 빠드득!

뼈가 조각나 부스러졌다.

명을 어긴 대가였다.

‘멍청한 놈 같으니.’

더 이상 숨을 못 쉬는 가죽 포대가 되어버린 시신을 한 차례 더 쏘아본 중년인은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렸다가 이맛살을 모았다.

마주 말달려 오던 사냥감들이 속력을 줄이더니 멈춰 서는 것 아닌가?

‘무슨 의미지?’

수레 위에 선 미청년이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

이게 무슨 수작일까?

중년인은 한 손을 들어 올리며 말고삐를 당겼다.

히히힝!

그와 수하들을 태우고 질주하던 말들이 일제히 멈췄다.

미청년은 십여 장 떨어진 곳에 도열한 그들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일사불란하시네. 복색은 마적단 같으신데.”

“맞다.”

중년인의 냉정한 말에 미청년이 손뼉을 쳤다.

“훌륭한 마적단이시네요. 이름이 어떻게 되죠? 두령(頭領)님의 존성대명(尊姓大名)은요?”

중년인은 미청년을 응시하다가 젊은 여인과 중년 사내를 흘깃 봤다.

‘……좋지 않군.’

이렇게 많은 인마를 눈앞에 두고도 태연한 모습이라니.

풍기는 기도만 봐도 고수임이 틀림없었으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평원을 모르는 건가?’

이곳에서 무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마술과 숫자이거늘.

정말 모르는 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알아봐야 했기에 미청년의 물음에 순순히 대답했다.

“본단은 고원초(古原草). 나는 야율초(耶律草)다.”

“……!”

미청년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야율초는 확신하게 됐다.

‘본단을 알고 나를 아는군.’

고원초는 요녕에서 손꼽힐 만큼 악명을 떨치는 마적단이었다.

두령인 야율초의 명성은 고원초보다 오히려 더 높을 정도.

헌데 그걸 안다?

중원식의 고급스러운 의복을 걸친 놈들이었으나 요녕에 대해 무지하진 않다는 얘기였다.

‘설마 하는 마음에 별생각 없이 길을 가던 중이었나?’

아니었다.

미청년이 일그러진 얼굴을 억지로 펴며 사과했다.

“이런. 무례를 범해서 죄송합니다.”

“……?”

“마적단에도 두령님 존함에도 풀이 들어가서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네요. 이해해 주실 거죠?”

“…….”

누가 이해할까.

말도 안 되는 변명에 야율초가 눈썹을 꿈틀거리는데, 미청년은 자기 할 말만 했다.

“어쩐지 발음이 안 좋으시더라니. 성이 ‘야율’이시니 거란족이시겠네. 수하분들은 여러 민족이 뒤섞여 있고.”

미청년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모용 소저. 이분들, 유명한 분들이세요?”

“……!”

마적들이 눈을 크게 뜨고 야율초는 한쪽 뺨을 씰룩거렸다.

모용이라니!

수레 뒤에 누가 있는 건 알았지만, 다른 곳도 아닌 모용세가라고?

맞았다.

모용세가 특유의 흑의를 입은 건장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헉. 헉. 헉.”

잠시 숨을 헐떡이던 그녀는 야율초와 수하들의 손등에 있는 잡초 문신을 확인한 뒤 설명했다.

“맞소. 동남부에서 활동하는 악명 높은 자들인데 여기까지 올라왔구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겠죠. 안 좋은 소문이 많은 분들이에요?”

마적들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인연 어쩌고야 둘째 치고. 마적단이면 안 좋은 소문이 나야 정상이지, 설마 협명(俠名)을 떨칠까?

‘미친놈인가?’

하지만 모용세가 여인은 당황하지 않았다.

“잘 싸우고 잘 도주한다 하오. 거침없이 약탈하나 무공을 모르는 이들은 죽이지 않는다 들었소.”

“오오. 역시 훌륭하시네요.”

미청년이 새삼스럽게 쳐다보자 야율초가 차갑게 부정했다.

“웃기는 소리. 선의로 그러는 게 아니다.”

미청년이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물론이죠. 그래야 나중에 또 뜯어내실 수 있으니까요. 그게 훌륭하시다는 건데요.”

“…….”

“인사는 대충했으니 일 얘기를 하죠.”

“…….”

야율초는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상대의 정체도 모른 채 끌려가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일 얘기를 하자니?

‘뭐 하는 놈이지?’

모용세가의 여인에게 모용 소저라 했으니 모용 씨는 아닐 터.

가만히 쏘아보는데 모용세가 여인이 미청년에게 물었다.

“혹시 오라버니와 다니시며 그랬던 것처럼 저들을 털려는 것이오?”

“설마요. 그래 봐야 가지고 다닐 형편이 아닌데요.”

“그럼 아까 말했던 외부 세력이라는 게 저들…….”

“소저. 잠깐만요. 확인부터 좀 하고요.”

미청년이 야율초에게 시선을 돌렸다.

“동남부에서 영업하시는 분들이 여기까지 올라오신 걸 보면 쫓겨나신 것 같은데. 맞죠?”

“……!”

맞았다.

“어떤 분들이셨어요? 낭인(浪人) 무리였나요?”

“……!”

역시 맞았다.

야율초의 눈이 조금 커지자 미청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외부 세력이 낭인 맞구나. 실력 있는 분들로 많이 모셔왔나 보네.”

“…….”

“다른 마적단과 이민족도 사정이 많이 안 좋아요?”

야율초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지? 넌 누구냐?”

미청년의 말에 그의 눈이 더 커졌다.

“천하유람단주요.”

“…….”

“못 들어보셨어요? 하긴. 변두리까진 소문이 아직 안 퍼졌겠죠.”

야율초는 마음을 정했다.

‘이놈을 잡아서 문초해야겠군.’

난데없이 나타난 낭인들 때문에 영문도 모른 채 막대한 피해를 입고 도주하던 참이었다.

어찌 된 연유인지 알아볼 기회가 온 것이다.

‘말들이 아깝지만 일제사격으로 기선을 제압한다!’

왼손의 검지를 꼿꼿이 펴서 높이 들어 올리려는 그때!

정광의 신형이 흔들리더니 그의 옆에 나타나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손가락질하시면 기분 나쁘죠.”

“……!”

“움직이시면 부러뜨릴 거예요. 활을 못 쏘시게 될 텐데 곤란해지시겠죠?”

“…….”

야율초는 정광을 무섭게 노려볼 뿐, 아무 말도 못 했다.

‘진짜 고수구나!’

단 한 수였지만 격차를 알아보기엔 충분했다.

경지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고수 아닌가!

허나 수하들은 아니었다.

너무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멈칫했으나, 곧 욕설을 내뱉으며 병기를 꺼내 들었다.

“두령에게서 당장 떨어져라!”

“말 안 들으면 죽여 버린다!”

정광이 감탄했다.

“과연. 가슴이 따뜻한 분들이시네요. 저는 말 안 들으면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드릴 건데.”

“……!”

마적들이 두 눈을 부릅뜨며 고함치려고 하는데.

정광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허억!”

“크흑!”

살기가 마적들 전체를 짓눌렀다.

그들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오줌을 지렸다.

정광이 싱긋 웃었다.

“말로 하죠. 말로.”

말과 달리 살기가 더 짙어졌다.

살기가 짓누르는 걸 넘어 몸 전체를 단단히 옭아매자 마적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으아악!”

“제, 제발 살려주십시오!”

정광이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항변했다.

“제가 언제 죽인다고 했어요?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해드릴 거라고 그랬지.”

“차, 차라리 죽여주십…….”

“안 죽여 드린다니까요.”

정광의 시선이 야율초에게 향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일 하나 함께하시죠.”

“…….”

야율초는 정광의 살기 때문에 숨조차 쉬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를 악물고 억지로 버티고 있었으나 마음이 점점 꺾여가고 있었다.

그는 그걸 용납할 수 없었다.

‘이대로 꺾일 것 같으냐!’

내공으로 어찌할 일이 아니었다.

온 정신을 모아 투지를 끌어 올렸다.

가슴속에서 작은 불꽃이 피어났다.

그 불꽃은 조금씩 크기를 키워 오른쪽 어깨를 거쳐 팔을 내달렸다.

그리고 오른손에 맺혔다.

‘하압!’

오른손이 부들거리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굼벵이보다 느린 속도였으나 착실히 나아가 허리에 찬 도의 도파(刀把)를 움켜쥐었다.

손에 힘줄과 핏줄이 불끈불끈 솟으며 잡초 문신이 불거졌다.

‘벤다!’

혼신의 힘을 다해 도를 뽑으려는 순간!

“좋네요. 생각보다 강하세요.”

정광이 그를 칭찬하며 살기를 거둬들였다.

동시에 자유를 찾은 야율초의 오른손이 도를 눈부신 속도로 뽑았으나.

“크흑!”

다시 전력을 다해 발도(拔刀)를 억눌렀다.

도신(刀身)이 도갑(刀甲)에서 뛰쳐나와 반쯤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졌다.

“판단력도 좋으시고요.”

야율초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수하들에게 명했다.

“그만!”

뒤늦게 정광에게 달려들어 병기를 휘두르려던 수하들이 굳어버렸다.

“싸우지 않는다! 몸 상태나 점검해!”

대부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 자도 있었으나 야율초의 명을 감히 거역하지는 못했다.

“네! 초주(草主)!”

마적들은 자신들의 몸을 돌봤다.

야율초는 그들을 한 번 쓸어 본 뒤 정광을 주시했다.

“우리를 무엇에 쓸 셈이냐?”

“쓰다뇨. 동업하려는 건데.”

“네 무공은 인정한다만. 내가 응할 것 같나?”

“어차피 좋은 형편이 아니시잖아요. 하실 수 있는 건 다 해보셔야죠.”

정광이 모든 사정을 아는 것처럼 말하자 야율초는 눈을 매섭게 떴다.

‘뭘 얼마나 알고 있는 거지?’

얼마 전부터 호족들이 거세게 압박하더니, 낭인들까지 몰려와 마적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여느 낭인들이면 말달리며 기사(騎射)로 요리할 수 있었으나, 이번 놈들은 전장에서 구르고 구른 노련한 전사들이었다.

뿐이랴. 무시무시한 고수들도 있었다.

가까스로 몸을 피해 여기까지 왔거늘, 이런 괴물을 만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냥 고수가 아니다. 살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놈이야.’

그 증거로 수하들은 모두 괴로워했으나 말들은 아무 타격도 안 받은 상태였다.

혹시라도 틈이 생겨 말달릴 수 있으면 모를까, 이런 고수에게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여기서 개죽음당할 바에야…….’

정광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목적을 말해라.”

“천하의 평안요.”

“…….”

“지금은 요녕의 평화라 할 수 있죠.”

정광은 모용세가에서 일어난 반란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했다.

경악하는 야율초에게 힘주어 청했다.

“그들과 낭인들을 물리칠 거예요. 두령께선 그들의 부를 거둬 세력을 키우세요. 쫓기는 마적단이나 이민족이 또 있을 텐데, 그분들과 동업하게 되면 이끌어주시고요.”

“…….”

“어차피 다른 길이 없으시잖아요. 몰이사냥을 당하다가 귀천하시느니 뭐라도 해보셔야죠. 응해주시기만 하면 잘 마무리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

모용세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면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이 모두 설명됐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 조상의 얼이 깃든 이곳을 떠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리고 토사구팽(兎死狗烹)을 할 셈이냐?”

정광이 어깨를 으쓱했다.

“사냥이 끝나도 두령께서 하실 역할이 있음을 증명하시면 그럴 일이 있겠어요?”

“틈을 봐서 널 칠 수도 있다.”

정광이 기대하던 바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량이 되시면 그러시든지요.”

“……대단한 자신감이구나.”

야율초는 대평원을 천천히 둘러본 뒤 정광을 직시했다.

“평원의 풀은 날이 추워지면 말라 죽지. 기껏 살아나면 사람이 들불을 놓아 다 타버리고. 그래도 곧 다시 살아나 평원을 가득 덮는다.”

“그래서 마적단과 두령님의 이름에 풀이 들어가는구나.”

야율초의 눈이 파랗게 빛났다.

“지금은 굴복하마. 허나 나를 우습게 보진 마라. 야율이라는 성은 가볍지 않다.”

“성씨 내세우지 마세요. 왕년에 황족 아니었던 가문이 어딨다고.”

정광이 웃으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제가 우습게 봤으면 같이 일하자고 했겠어요?”

야율초는 지체 없이 손을 내밀었다.

두 손바닥이 부딪혔다.

짝!

그리고.

질주가 시작됐다.

첫 번째 목표는 본계마가(本溪馬家)였다.

* * *

콰직! 콰쾅!

모용강이 휘두른 장력에 수레에 가득 실려 있던 여물통과 물통이 박살 났다.

화가 가라앉지 않은 그는 수레까지 산산이 조각내 버린 뒤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이 떠올랐다.

제일 깊게 파인 수레바퀴 자국을 따라 얼마나 달렸던가.

그런데 이따위 얄팍한 수에 당했을 줄이야.

‘생각보다 더 교활하군.’

한 방 먹었으나 아직 늦은 건 아니었다.

때맞춰 먼 곳에서 말린 말똥을 태운 연기가 솟구쳤다.

혹시 몰라 사방으로 보냈던 척후들 중 한 조가 피운 것이었다.

‘북동쪽이라. 저쪽이면…….’

모용강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눈을 떴다.

말에 올라 북동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척사당(斥邪堂), 전속 전진!”

“하아!”

기마대가 살기를 흩날리며 질주했다.

목적지는 정광이 향한 본계마가였다.

그 시각.

정광은 본계마가의 대문을 부수고 있었다.

발길질 한 번으로.

콰아앙!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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