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301화 (300/569)

2부 30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호족(豪族)은 혈연을 바탕으로 한 끈끈한 결집력과 그들이 보유한 막대한 토지를 기반으로 그 지역에서만큼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곤 한다.

변방으로 가면 갈수록 이런 경향이 더 강해졌는데 요녕성이 바로 그랬다.

요녕성의 호족들 중 하나인 안산채가(鞍山蔡家)는 우수한 종마(種馬)를 많이 길렀는데, 해마다 상당한 수의 양마(良馬)를 생산하여 전마(戰馬)로 키우는 것을 주된 업으로 삼았다.

그런 가문이다 보니, 말에게 쏟는 애정과 노력이 대단할 수밖에.

마적단이나 이민족이 말을 약탈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 마구간(馬廐間)을 장원밖에 두지 않고 안에 뒀다.

마구간의 규모도 대단했고 청결함은 기본이었다.

당연히 말을 관리하는 이들도 많았는데…….

대낮인 지금, 모두 자고 있었다.

정광이 잠입해 수혈(睡穴)을 짚어서였다.

낯선 사람을 본 말들이 머리와 꼬리를 높이 들며 크게 울려고 했으나.

정광이 정제된 살기를 뿜어내자 귀를 뒤로 눕힌 채 시선을 피하며 안절부절못했다.

“옳지. 그래야 착하지.”

“…….”

정광은 녀석들을 묶어놓은 줄을 풀며 부드럽게 다독였다.

“도망가면 착하지 않은 거야. 이해했지?”

“……!”

“했구나. 그래, 조금만 기다려.”

한 놈도 빠짐없이 모두 풀어줬다.

튼튼한 녀석들에겐 수레나 마차를 연결해 줬다.

그중 몇 개엔 이런저런 것들을 추가했고.

“얼추 됐네. 답답하게 갇혀 사느라 힘들었겠다.”

“…….”

말이 말을 할 줄 안다면 네가 너무 무서워 힘들다고 말했으리라.

“넓은 곳으로 보내줄게. 너희가 태어났던 대평원으로.”

“…….”

전부 이곳에서 태어난 녀석들이었지만 정광이 알 바는 아니었다.

“어디 보자. 네가 우두머리구나.”

정광은 마구간에서 제일 큰 흑마(黑馬)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놈은 귀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부르르 떨었다.

그 귀에 정광이 속삭였다.

“마구(馬具) 좀 씌울 테니까 가만히 있어. 말 잘 들어야 해.”

“…….”

말은 말을 잘 들었다.

정광은 흑마에게 마구를 씌우고 안장에 올라타 마구간 문을 주시했다.

“슬슬 시작하려나.”

중얼거리자마자 밖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불이야!”

“저쪽에도 났다!”

“어서 물을 가져와! 흙을 뿌려라!”

정광이 씩 웃으며 발뒤꿈치로 흑마의 배를 찼다.

“가자!”

히히히힝!

흑마는 한차례 크게 울은 뒤,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정면에 크고 두꺼운 문이 있었으나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

정광은 흡족한 얼굴로 오른손을 들어 앞으로 밀었다.

“여차.”

곤륜비전 장법 선운비뢰장(仙雲飛雷掌).

그 장력에 맞은 거대한 문이 산산이 조각났다.

콰앙!

흑마가 그 파편들을 튕겨내며 달렸다.

정광은 고개를 돌려 다른 말들에게 살기를 쏘아냈다.

“뭐 해? 따라와야지.”

히히히힝!

말들이 마구간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장원 여기저기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거기에 지면을 박차는 말발굽 소리, 수레와 마차의 바퀴가 구르는 소음이 더해졌다.

불길을 잡느라 정신없던 사람들이 경악했다.

“뭐야 저건!”

“말들이 어떻게!”

“누군가 흑풍(黑風) 위에 타고 있다! 막아!”

정광은 눈살을 찌푸렸다.

‘흑풍? 이름을 그렇게 성의 없게 지어서야 쓰나.’

말이 불쌍했다.

“음. 넌 유난히 까만 털을 가졌으니까 이제부터 진흑풍(眞黑風)이다. 가자, 진흑풍!”

“…….”

진흑풍은 묵묵히 달렸다.

말들을 막으려고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정광이 던진 철전에 모두 쓰러졌다.

마구간은 장원 남쪽에 있었기에 남문(南門)과 가까웠고, 그 근처에 이르자 정광이 외쳤다.

“타세요!”

허공이 열리며 자오가 떨어져 내렸다.

그는 정광의 등 뒤에 안착하며 보고했다.

“단주. 생각보다 경계가 삼엄해 불을 많이 지르진 못했습니다.”

“아뇨. 수고하셨어요. 이 정도면 충분해요.”

장원 곳곳에서 화광이 충천하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갑니다.”

곤륜비전 장법 선운비뢰장이 한 번 더 펼쳐졌다.

콰아앙!

남문이 부서지고 두 사람을 태운 진흑풍이 대평원으로 나갔다.

낯선 고양감에 녀석이 크게 울부짖으려는 순간!

정광이 고삐를 잡아당겼다.

“워. 워. 잠깐 멈춰. 다른 애들도 기다려야지.”

“…….”

정광은 쏟아져 나오는 말들을 여러 방향으로 분산시켰다.

“너희는 이쪽, 너희는 저쪽. 잠깐. 너는 꼭 이쪽으로 가야 하거든.”

히히힝!

말들이 안산채가의 장원에서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달렸다.

‘좋아. 제대로 됐어.’

정광이 고개를 끄덕거리는데, 장원 안에서 무인들이 달려왔다.

“네 이놈! 이게 무슨 짓이냐!”

“사내답게 덤벼! 내가 죽여주마!”

진정한 사내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

“안녕히 계세요.”

정광은 말머리를 돌려 남서쪽으로 달렸다.

진흑풍은 두 사람을 태우고도 웬만한 준마만큼 빨리 달렸다.

안산채가 사람들은 신법을 펼쳐 쫓다가 정광이 던진 철전을 맞고 고꾸라졌다.

“비켜라! 내가 상대한다!”

몇몇 고수가 철전을 쳐내며 저항했지만, 정광이 비룡을 잡고 화살을 쏘아내자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크헉! 이, 이런 고수가 있다니!”

결국 그들은 추적을 포기하고 장원으로 돌아갔다.

자오가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계획대로 됐군요. 불을 꺼야 하고 말도 없으니 따라오지 못할 겁니다. 말들이 여러 방향으로 달리며 말발굽 자국과 바퀴 자국을 남길 테니 대흥장주가 보냈을 추적대가 우리를 쫓기도 힘들 테고 말입니다. 단주의 신기묘산(神機妙算)은 정말…….”

“칭찬 고마워요.”

정광은 미리 감사를 표하고 진흑풍을 몰았다.

한동안 말달리자 모용수수와 혜진이 기다리고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혜진이 담담히 맞이했다.

“단주. 각응 대협. 두 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모용수수는 기대 어린 눈빛으로 정광을 바라봤다.

“어떻게 되었소?”

정광은 몸을 돌려 뒤를 가리켰다.

시꺼먼 연기가 하늘 높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각응이 일을 잘해주셨어요. 연기가 더 짙어질걸요. 불길을 잡으려면 애 좀 먹겠죠.”

자오가 뿌듯한 얼굴로 덧붙였다.

“단주께서 말을 전부 풀어놓으셨으니 안심하셔도 좋소이다, 모용 소저.”

모용수수가 두 사람에게 정중히 포권했다.

“고생하셨소이다.”

“뭘요. 여기에서 할 일은 다 했으니 그만 가죠.”

“네! 단주!”

정광 일행은 남서쪽을 향해 말달렸다.

장원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짙어졌다.

모용강은 그 연기를 올려다보며 말달리다가 혀를 찼다.

‘불길이 더 거세지나 보군. 대낮에 이렇게 당하다니. 채가(蔡家)가 이 정도로 약했나?’

정광이 아무리 강해도 그렇지, 경계를 얼마나 엉망으로 했으면 저런 꼴이 된단 말인가.

‘아니지.’

모용강은 시선을 내려 정면을 주시했다.

‘나도 모르게 방심할 뻔했어. 채가가 약한 게 아니라 그놈이 강한 거다.’

설령 아니더라도 그렇게 생각해야 했다.

그래야 확실하게 이길 수 있었다.

모용강은 마음을 다잡으며 말달렸으나, 얼마 안 가 눈살을 찌푸리게 되었다.

‘이 말들은 또 뭔가?’

안산채가 쪽에서 마구도 안 채운 말들이 달려왔다.

뒤로 눕힌 귀나 뿜어져 나오는 콧김의 양을 보면 무척이나 놀란 상태로 달리는 게 분명했다.

‘……설마?’

말들은 모용강이 이끄는 기마대를 보자 더 놀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모용강의 눈에 한기가 맺혔다.

‘놈의 짓이구나!’

불이 났으니 말들이 놀라 도망치려 하는 건 당연했다.

허나 말로 빌어먹는 채가가 이렇게 많은 녀석들을 순순히 내보낼 리 없지 않은가.

‘이놈들뿐만이 아니겠지. 다른 방향으로도 보냈을 거야.’

채가를 혼란하게 하고 추적을 막으려는 수작이리라.

‘우리가 쫓으리라는 것도 예상했기에 이런 짓을 벌였을 거다. 곤란하게 됐구나.’

일단 채가의 장원까지 가봐야 했다.

모용강은 기마대를 재촉하며 달리다가 채가의 장원 근처에 이르자 크게 명했다.

“정지!”

기마대가 일제히 멈췄다.

“주위를 돌며 놈들의 흔적을 찾아라!”

한 무리를 이끌던 노인이 걸걸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주(堂主)! 장원에는 안 들어가실 셈이오?”

모용강의 직책은 척사당주(斥邪堂主).

척사당은 모용회가 개천(開天)에 방해가 되는 악의 무리를 징벌하기 위해 여러 방계의 정예 기마대를 모아 만든 당(堂)이었다.

“들어갈 필요 없네.”

안 들어가도 알 수 있었다.

장원에서는 불을 끄라는 고함과 비통한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모용강은 솟구치는 불길과 연기를 흘깃 보며 덧붙였다.

“대낮에 저런 꼴을 당한 이들을 만나봐야 뭘 얻을 수 있을까. 놈들을 찾게. 그게 우리 임무일세.”

“존명!”

기마대가 사방으로 흩어져 바닥에 남은 흔적을 훑었다.

모용강의 예상대로 수많은 말발굽과 바퀴 자국이 사방팔방으로 나 있었다.

아까의 노인이 다른 대주(隊主)들과 함께 모용강에게 다가가 무거운 얼굴로 보고했다.

“당주. 흔적이 너무 많아 알아볼 수가 없소이다. 어찌하오리까?”

모용강은 주위를 둘러본 뒤 입을 열었다.

“적혼표풍대(赤魂飇風隊)를 상대했을 때도 그렇고, 료양모가(遼陽毛家)를 칠 때도 그랬지. 놈들은 많은 병기와 물자를 가지고 이동하고 있네.”

대주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모용강은 한 명, 한 명 시선을 맞추며 힘주어 말했다.

“성에서 끌고 나왔던 수레에 그것들을 실었을 터. 그만한 것들을 실었을 만큼 깊게 파인 수레바퀴 자국을 찾게나.”

대주들이 밝아진 얼굴로 명을 받들었다.

“존명!”

잠시 뒤.

기마대는 그들이 원하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남서쪽이라…….’

모용강은 그 방향을 응시하며 지금까지 봐왔던 정광의 행적을 떠올렸다.

‘심양(瀋陽)에서 출발해 료양(遼陽)을 거쳐 안산(鞍山)으로 왔다. 이번에도 그렇고, 계속 남서쪽으로 가고 있어.’

왜 하필 남서쪽일까?

잠시 고민하던 모용강이 주먹을 움켜쥐며 분노로 몸을 떨었다.

‘바다! 그 사악한 놈이 바다로 가려는 거구나!’

안산에서 해성(海城)을 지나면 바다와 인접한 영구(營口)에 이를 수 있었다.

‘영구에서 배를 타거나 더 남쪽으로 달려 개주(蓋州)를 택할 수도 있지. 바다를 건너 하북성이나 산동성으로 피하려는 거다!’

육로로 계속 도주해 봐야 개천에 동참한 이들과 끝없이 싸워야 한다.

천하제일고수라 해도 그들을 모두 물리치는 건 불가능한 일.

바다를 택하는 건 무척 현명한 판단이었다.

‘쉽게 보내줄 것 같으냐?’

모용강은 대주들에게 자신이 추측한 바를 설명했다.

그들은 모두 그 예상이 타당하다는 걸 인정했다.

즉시 기마대를 모아 추적을 시작할 준비를 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확신할 순 없지.’

모용강은 치밀한 사람이었다.

몇몇 기수들을 뽑아 다른 바퀴 자국들 중 제법 깊게 파인 흔적이 있는 방향으로 보냈다.

“당주! 준비가 끝났소이다!”

대주들이 보고하자 모용강이 외쳤다.

“척사당! 전력 질주!”

“하아!”

기마대가 달렸다.

방향은 정광 일행이 향한 남서쪽이었다.

* * *

모용강의 추측은 훌륭했으나 정광은 그의 머리 위에 있었다.

남서쪽으로 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동쪽으로 방향을 튼 뒤, 한동안 더 달리다가 말을 세웠다.

“이쯤에서 하는 게 좋겠네요.”

“네! 단주!”

그들은 많은 예비마에 나눠 실어놨던 병기와 물자를 내렸다.

그것들을 텅 비어 있던 수레에 싣자 정광이 그 위에 드러누우며 명했다.

“본계(本溪)로 출발하죠.”

“네! 단주!”

자오가 앞에서 말을 몰며 수레를 끄는 말을 인도했다.

혜진은 예비마들을 맡았다.

모용수수의 임무는 당연히 수레를 미는 것이었다.

“헉. 헉. 단주.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소?”

“물론이죠. 수레 속도만 안 늦어지면요.”

모용수수는 내공을 더 끌어 올려 수레를 밀며 달렸다.

“악적들의 본거지를 쳐서 성을 포위하고 있는 그들을 동요시키는 건 이해했소. 당장 돌아가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고 싶을 것이오. 허나 문제가 있는 게, 그것으론 부족하지 않소?”

“그렇긴 하죠.”

정광도 수긍했다.

“빠지자니 눈치가 보일 거고. 대흥장주님이 허락할 리도 없으니까요.”

“그들의 마음을 흔들고 본가에 증원군을 못 보내게 하는 것은 다행이오만, 언제까지 이렇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걱정이외다.”

“모용 소저. 뭔가 잘못 생각하고 계시네요.”

“……무슨 말이오?”

“계속 이럴 거라고 말씀드린 적은 없는데요.”

모용수수가 눈을 크게 뜨며 부탁했다.

“단주. 가르침을 주시오.”

정광이 상체를 일으켜 앉으며 답했다.

“대흥장주님이 외부 세력을 끌어들여 마적단과 이민족을 정리할 거라고 말씀드렸었죠?”

“그렇소.”

“수틀리면 체면은 좀 상하겠지만 그들을 불러 공성전에 합류시킬 수도 있겠죠. 정말 최악의 상황까지 가면요.”

“설마 그렇게까지!”

“설마여도 가정해야죠.”

“…….”

모용수수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정광을 주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오? 단주라면 복안이 있을 거라 믿소이다.”

정광이 수레에서 일어섰다.

정면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전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말씀드렸던 거 기억하시죠?”

멀리 있던 먼지구름이 점점 가까워졌다.

“우리도 외부 세력을 끌어들이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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