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300화 (299/569)

2부 29화

신출귀몰(神出鬼沒)

화시(火矢)가 어두운 하늘을 가르며 올라갔다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내려앉는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허나 료양모가(遼陽毛家) 사람들에겐 초열지옥(焦熱地獄)의 겁화(劫火)와 다름없었다.

“불이야!”

난데없는 불벼락에 엄청난 소란이 일었다.

탐스러운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이 도를 찬 채 침소에서 뛰쳐나왔다.

상황을 파악한 그는 분노에 몸을 떨며 고함을 질렀다.

“일단 불부터 꺼라!”

한 중년인이 하늘을 가리키며 비통하게 외쳤다.

“백부! 화시가 계속 쏟아집니다!”

끝없이 쏟아져 내리는 불비를 본 노인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어떤 놈들이 이런 미친 짓을!’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화시가 쉼 없이 쏟아지는 데다, 가주가 많은 식솔을 이끌고 대계를 이루기 위해 떠난 터라 불을 끌 인원이 부족해서였다.

‘형님께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마적 놈들일 리는 없고. 여진이나 거란인가?’

흉포한 몇몇 부족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아니야. 근방을 약탈하며 간을 보다가 찌르면 찔렀지, 이렇게 대놓고 본가를 습격할 리는 없어.’

잠시 생각하는 동안에도 불비가 내리고 있었다.

적이 누구든 간에 일단 막아야 했다.

노인은 망루를 올려다보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놈들이 어느 정도 거리에서 쏘고 있느냐?”

망루에서 멍한 눈으로 장원 밖을 보고 있던 청년이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모, 모르겠습니다!”

“무어라? 네가 미쳤구나! 이 와중에 농을 해?”

화가 난 노인이 호통을 치자 청년이 억울한 얼굴로 항변했다.

“너무 먼 곳에서 날아와 거리를 가늠하기 힘듭니다! 제발 믿어주십시오!”

“……!”

노인의 신형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망루에 나타났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아!”

노인의 눈이 켜졌다.

청년의 말대로 화시는 엄청나게 먼 거리에서 날아와 장원을 태우고 있었다.

‘저기에서 화살이 날아와?’

북방 민족이 궁술에 능한 건 사실이지만 정도가 있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표적인 장원이 워낙 크니 맞추긴 어렵지 않겠지만, 천하에 어떤 궁사가 저런 먼 곳에서 쏠 수 있을까?

‘궁사가 문제가 아니라 그게 가능한 활이 있을 리 없어.’

설령 그런 강력한 탄성을 가진 활이 있다 해도 사람이 당길 순 없으리라.

결국, 사람도 활도 신궁이어야 한다는 얘기인데…….

‘설마?’

너무 과장됐다 여겨 흘려들었던 소문이 떠올랐다.

‘천하유람단주라고 했던가?’

노인은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 예상과는 달리 많은 궁사에게 포위당한 건 아니었으나 날아오는 화시의 양을 봤을 때 한 명이 쏘는 건 절대 아니었다.

더구나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소문을 훨씬 뛰어넘는 신기(神技)를 부리고 있지 않은가.

‘사술(邪術)이다! 사술임이 틀림없어!’

화시가 끝없이 날아와 화마(火魔)를 계속 키웠다.

노인의 가슴속에서도 화마가 치솟았다.

평소 고깝게 보던 금주호가(錦州扈家)에 불이 나 호광이 알거지가 됐다는 소식을 듣고 껄껄 웃었던 게 바로 어제 같거늘,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불도 제대로 관리 못 한다고 무시했었는데, 어쩌면 호광 역시 사술에 당한 것일지도 몰랐다.

‘본가가 그 음흉한 놈처럼 당할 것 같으냐?’

내공을 끌어 올려 외쳤다.

“어떻게든 불길을 잡아! 비마대(飛馬隊)는 흉갑(胸甲)을 입어라! 등패(籐牌)와 도를 챙기고 나를 따른다!”

“네! 알겠습니다!”

비마대가 재빨리 준비를 마치고 모였다.

노인은 망루에서 훌쩍 뛰어 땅에 내려서자마자 신법을 펼쳤다.

료양모가의 자랑인 비마대가 그를 따라 달렸다.

밤이라 기마(騎馬)할 순 없었지만 비마대는 말이 없어도 고수였다.

노인의 뒤를 이어 높은 담벼락을 훨훨 넘었다.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을 향해 무섭게 달렸다.

그들의 눈 역시 노인처럼 분노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무슨 수법으로 화살을 날리는지는 모르나 상관없다!’

‘접근하기만 하면 돼! 어떤 놈들이든 간에 반드시 죽여주마!’

그리고 다짐과 달리 죽어갔다.

쉬이이익- 퍽!

슈우우욱- 콰직!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화시가 아닌 보통 화살이 유성처럼 날아와 얼굴에 꽂혔다.

비마대가 동요했다.

‘횃불을 들고 뛰는 것도 아닌데 얼굴만 노리고 맞춰?’

‘흉갑을 입은 의미가 없잖아! 이런 사술이 있다니!’

어느새 도를 뽑은 노인이 신법을 계속 펼치며 나무랐다.

“뭣들 하느냐? 등패로 막아! 거리를 좁혀야 한다!”

소용없었다.

화살은 등패를 관통하며 사람에게 박혔다.

비마대가 하나둘 연이어 쓰러져 갔다.

이대로 가다간 엄청난 피해를 볼 게 뻔한 상황!

“갈!”

노인이 사자후를 터뜨리며 도를 휘둘렀다.

그를 향해 날아오던 화살이 도에 베여 방향을 틀었다.

그 파편에 뒤쪽에서 달리던 중년인이 생을 마감했다.

노인의 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분노해서가 아니라 경악해서였다.

‘엄청난 신력이구나!’

화살의 위력이 어찌나 강한지 도를 쥔 손이 찌르르 울렸다.

‘그래도 많이 가까워졌다! 희생이야 크겠지만 접근만 하면 어떻게든 할 수…….’

오산이었다.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이 바뀌었다.

“왼쪽이다!”

급히 주의를 줬으나 세 명이 화살에 꿰여 죽었다.

“이런! 뒤를 조심해!”

목이 터져라 외쳐도 소용없었다.

뒤에서 달리던 이들이 뒤통수가 뚫려 쓰러졌다.

비마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은신하고 있다가 포위한 건가?’

‘우린 끝났어! 이걸 어떻게 피해!’

그들과 달리 노인은 눈을 번뜩였다.

‘저건!’

안력을 키우자 누군가 자신들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질주하는 게 보였다.

“포위당한 게 아니다! 한 놈이 신법을 펼치며 쏘고 있다!”

“……!”

여럿이 아니라 하나라니.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으나 절망적인 말이기도 했다.

적이 경공술의 달인이자 신궁이라는 의미 아닌가!

노인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차라리 사술인 게 낫지, 이런 무위라니…….’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화살이 계속 날아왔다.

비마대는 비명조차 남기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두려움에 매몰된 그들은 달리던 걸 멈추고 우왕좌왕했다.

시간이 갈수록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비통한 음성으로 독려하던 노인이 결단을 내렸다.

“퇴각한다! 어서 퇴각해!”

비마대는 비마(飛馬)처럼 달렸다.

당장에라도 뒤통수에 화살이 박힐 것 같아 두려움에 떨면서도 미친 듯이 달렸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피이잉- 피이잉-

뒤에서 파공음이 연달아 들렸다.

화시가 그들의 머리 위를 줄줄이 넘어 장원에 내리꽂혔다.

화아아아-

조금이나마 잡혔던 불길이 다시 커졌다.

‘……!’

싸우면 죽고, 도주하면 장원이 불타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처지.

노인과 비마대는 비탄에 잠겨 탄식했다.

‘하늘이여! 어찌하여 이런 대마두를 내려보냈는가!’

* * *

대마두 일행은 무척 바빴다.

모용수수는 화살에 묶인 천을 기름 동이에 담갔다가 꺼내 혜진에게 건넸다.

혜진은 기름을 머금은 천에 불을 붙인 뒤 정광의 손에 화살을 쥐여줬다.

마지막으로 정광이 그것을 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엄청난 속도로 쉼 없이 반복됐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정광이 혜진을 향해 손을 저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니 잠깐 쉬죠.”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용수수와 혜진이 드러누웠다.

정광은 뻐근한 손과 팔을 주무르며 피식 웃었다.

“한 식경 정도 주무세요. 시간 되면 깨워드릴게요.”

두 사람은 바로 잠들었다.

근력과 체력도 많이 썼지만 과도할 만큼 많은 심력을 소모해서였다.

잠시 뒤, 자오의 신형이 나타났다.

“수고하셨어요. 어떻던가요?”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쪽으로 다시 올 여력이 있어 보였나요?”

자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긴 힘들어 보였습니다만, 확신할 순 없으니 화살통에 화살을 더 채우고 올까요?”

아까 정광이 비마대의 주위를 돌며 화살을 계속 쏠 수 있게 평원에 늘어놨던 화살통을 말하는 것이었다.

“한두 번은 더 상대할 양이 남았으니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다른 분들처럼 잠시나마 눈 좀 붙이세요.”

“알겠습니다.”

자오도 잠들었다.

정광은 육포를 씹으며 비마대를 지휘하던 노인을 떠올렸다.

‘쓸데없는 만용을 부리는 놈이 아니라 다행이네.’

덕분에 료양모가도 피를 덜 흘리게 됐지만 이쪽도 편해졌다.

‘안 죽이길 잘했어. 일단 배부터 든든히 채우자.’

육포를 배불리 먹은 뒤 세 사람을 깨웠다.

“운기조식하시고 육포 드세요.”

세 사람은 묵묵히 지시를 따랐다.

“불길이 약해지네. 다시 가죠.”

“네, 단주.”

화시가 날았다.

“저런. 힘에 부친가? 너무 커졌네요. 잠깐 쉬죠.”

“네, 단주.”

쪽잠을 자거나 운기조식했다.

이렇게 불길이 약해지면 쏘고 강해지면 쉬는 걸 반복했다.

료양모가가 화마와 계속 싸우도록 강요했다.

“이쯤이면 얼추 된 것 같은데. 몸 상태는 어떠세요?”

모두 좋다고 답했다.

“정리하고 그만 가죠.”

그들은 챙길 건 다 챙기고 출발했다.

한동안 말과 수레를 끌며 걷다 보니 동이 트기 시작했다.

이미 료양을 벗어난 위치.

자오와 혜진이 말에 올라타 달릴 준비를 마쳤다.

정광은 수레 위에 드러누우며 명했다.

“잠깐 잘게요. 안산채가(鞍山蔡家)에 도착하면 깨워주세요.”

“네! 단주!”

대답한 건 자오와 혜진만이 아니었다.

정광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모용수수도 함께 외치며 수레를 밀었다.

질주가 다시 시작됐다.

* * *

“정지!”

일사불란하게 질주하던 인마들이 일제히 멈췄다.

수장인 모용강은 침중한 얼굴로 정면을 주시했다.

붉은색 가죽 흉갑을 입은 시신들이 화살이나 창에 꿰인 채 널브러져 있었다.

‘적혼표풍대(赤魂飇風隊)가 전멸당하다니…….’

놀라운 일이었으나 있을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모용강은 신신당부하던 모용회의 얼굴을 떠올렸다.

‘절대 방심하지 말라 하셨지. 과연. 그러실 만했어.’

적혼표풍대의 시신을 보자 분노가 치솟았지만, 맡은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그들에게 더 화가 났다.

‘쓸데없는 호승심을 부린 건가.’

그리고 적의 무위와 심계를 제대로 확인하게 되니 머리가 차가워졌다.

‘용이군. 소문대로 진짜 용이야.’

모용회는 모용강에게만 정광의 정체를 알려줬다.

수하들이 정광의 명성에 짓눌려 일을 그르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검술은 명불허전일 게 뻔하고. 신궁이라는 것 역시 들었지만 창술까지도 고수일 줄이야.’

죽은 말들을 살펴보니 발굽에 상처가 난 녀석들이 있었다.

모용강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철질려를 이용해 돌격을 막았구나.’

적은 기마전(騎馬戰)에 대해 잘 알고 있을뿐더러 그에 맞는 준비를 한 상태였다.

거기에 철질려를 모두 회수하는 치밀함과 여유까지.

평생 만나보지 못한 강적이라 할 만했다.

‘암기와 기문병기도 썼군. 검을 쓴 흔적까지. 함께 있던 두 연놈의 짓이겠지.’

상당한 실력이었지만 거기까지였다.

‘진짜 모용을 보여주마.’

모용강은 마음속으로 다짐한 뒤 명을 내렸다.

“적혼표풍대의 시신은 흉수의 목을 치고 수습한다! 가자!”

“하아!”

기마대가 달렸다.

목적지는 료양(遼陽)이었다.

모용강은 멀리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며 이를 지그시 물었다.

‘밤새 화공을 써서 모가(毛家)를 공격했겠다? 그걸 보고 가만히 있을 줄 알았느냐?’

밤이라 말달릴 순 없었지만 하마해서 말을 끌며 걷는 건 가능했다.

그만큼 거리를 많이 줄였기에 지금부터 말달리면 금세 도착할 자신이 있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얼마 안 가 거대한 장원에 도착했다.

모용강은 아직도 불타고 있는 장원을 가리키며 외쳤다.

“불을 끄려 하지 말고 놈의 행방부터 찾아라!”

“존명!”

주변을 수색했다.

일부는 모용강과 함께 장원에 들어가 내부를 확인했다.

모가 사람들은 불을 끄느라 여념이 없었다.

탐스러웠던 수염이 몽땅 불타 버린 노인이 지친 얼굴로 모용강을 맞이했다.

“모용 대협. 와주셔서 고맙소.”

모용강은 그를 위해 온 게 아니었다.

“놈들은 어디 있소?”

“나도 모르오.”

“어디로 갔는지도 못 봤소이까?”

계속되는 딱딱한 질문에 노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불을 끌 시간도 없었소이다. 지금 나를 힐난하는 것이오?”

모용강은 내심 혀를 찼다.

‘그릇이 작은 건 알았지만 너무 작아. 이 판국에 자존심을 세워?’

그렇다고 맞받아칠 생각은 없었다.

모용강이 입을 열려는 그때.

남서쪽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개천(開天)에 동참한 안산채가가 있는 방향이었다.

‘벌써 저기까지!’

‘또 불을 질렀구나! 이런 악귀보다 사악한 놈을 봤나!’

모용강과 노인의 마음속에서 살기가 치솟았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노인의 심경에선 변화가 생겼다.

짙은 두려움이 일어나 살기를 사그라뜨렸다.

남은 건 공포심뿐.

간밤에 정광의 신위를 목도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원한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다시금 마주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그에게 모용강이 양해를 구했다.

“귀가(貴家)를 돕지 못해 미안하오. 놈을 잡으러 가겠소.”

정광을 직접 겪은 자와 안 겪은 자의 차이였다.

“……무운을 비오.”

모용강은 기마대를 이끌고 떠났다.

쉬지 않고 백리(百里)를 달려 안산(鞍山)에 이르렀다.

그리고 분노로 몸을 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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