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8화
붉은 꽃
정광이 무신 같은 신위를 보였으나, 적혼표풍대(赤魂飇風隊)도 마냥 당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후열조는 퇴각해라! 장주께 저놈의 진정한 실력을 전해!”
“나머진 그대로 달려! 놈이 코앞에 있다! 그대로 돌격해 창으로 꿰어버리는 거다!”
정광은 내심 감탄했다.
‘이 와중에도 호승심으로 일을 그르쳤다고 반성하는 놈이 하나도 없네.’
이해는 한다.
나라를 세우겠답시고 벌인 첫 번째 싸움에서 공을 세우고 싶었겠지.
그래서 죽는 거다.
정광은 적혼표풍대가 십장 안으로 들어오자 비룡을 등에 메고 두 손을 매만졌다.
“각응, 가죠.”
“네! 단주!”
“불취검과 모용 소저도요.”
“네! 단주!”
“알겠소!”
정광의 신형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도주하려는 후열조의 뒤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이 일그러지기도 전에 움직였다.
살짝 몸을 띄워 말 위에 탄 기수의 흉갑에 손바닥을 댔다.
펑!
“쿨럭.”
기수가 피를 토하며 낙마했다.
정광은 그가 쥐고 있던 창을 낚아채 좌우로 크게 돌렸다.
휘잉- 휘잉-
창이 허공을 가르며 무시무시한 소리를 냈다.
그렇게 창의 길이, 무게, 탄력 등을 파악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하네. 기마전(騎馬戰)에서 쓰기 딱 좋아.’
기마전 하면 창이란 말이 있다.
적혼표풍대의 창은 명기(名器)는 아니지만 괜찮은 편인 데다, 기마전에 유용한 형태였다.
‘오랜만이라 어색한 감이 있어. 감각을 올려두자.’
대평원에서 펼쳐 나갈 싸움에서 창이 빠질 수 있나.
미리 해놔야 나중에 편하지.
마침 한 쌍의 인마가 정광을 도우러 달려왔다.
기수가 살기를 폭발적으로 터뜨리며 창을 내질렀다.
“죽어!”
정광은 행동으로 대답했다.
란(攔). 창을 밖으로 돌려 기수의 창을 밀어냈다.
나(拿). 당황한 기수가 창을 휘두르려 하자 다시 안으로 돌리며 눌렀다.
찰(扎). 두 눈을 부릅뜬 기수의 미간에 창끝을 박아 넣었다.
콰직!
말은 창에 머리가 꿰인 주인을 싣고 계속 달렸다.
그가 들고 있던 창을 어느새 빼앗은 정광은 신형을 돌리며 그대로 던졌다.
쐐애액-
십장은 되는 거리를 순식간에 지워버린 창이 도주하던 기수의 등을 잔인하게 꿰뚫었다.
퍼걱!
“끄아악!”
그의 처절한 비명에 적혼표풍대가 몸을 떨었다.
활뿐만 아니라 창까지 자유자재로 다루는 정광의 신위가 그들의 투지를 사그라뜨려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런 그들을 이끌어야 할 대주(隊主)는 정광이 쏘아낸 첫 화살에 시신이 되어버린 지 오래.
그 뒤로도 지시를 내리는 자는 정광이 우선순위로 두고 척살했기에 구심점이 없는 상태였다.
사기가 떨어지다 못해 바닥까지 칠 정도가 된 그 순간.
덜덜 떨던 한 기수가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피를 토하듯 부르짖었다.
“우리는 모용이다!”
“……!”
이 짧은 말에 적혼표풍대가 깨어났다.
전열을 정비하고 정광을 향해 말달렸다.
‘…….’
정광은 땅바닥에 널린 창들 중 하나를 들어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적혼표풍대의 용기에 걸맞게 진지하게 맞이했다.
그렇게.
대평원에 붉은 시신이 쌓여갔다.
* * *
“단주. 철질려를 전부 회수했습니다.”
“수고하셨어요, 각응. 운기조식하세요.”
“단주. 고통스러워하는 말들은 모두 쉬게 해줬습니다.”
“고생하셨어요, 불취검. 부처께서도 이해하실 거예요. 운기조식하세요.”
자오와 혜진은 바로 운공을 시작했다.
정광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우두커니 서 있는 모용수수를 발견했다.
“소저. 뭐 하세요?”
“……마음이 편치 않아 그러오.”
“하긴. 일족끼리 죽고 죽이는 건 편한 일이 아니죠.”
모용수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흔들릴 거라 다짐했건만. 뜻대로 안 돼서 답답하외다.”
“정파무림의 후기지수께서 그게 뜻대로 되면 쓰나요. 잘하고 계신 거예요.”
모용수수가 또렷해진 눈으로 정광을 직시했다.
“이해해 줘서 고맙소. 그리고 큰 고통 없이 저들을 한 번에 보내주신 점, 잊지 않으리다.”
“네. 그러시길 빌게요. 곧 떠나야 하니까 소저도 운기조식하시죠.”
“도를 제대로 휘둘러 보지도 못했는데 운기조식을 왜 하겠소? 천하유람단의 무위에 탄복했소이다.”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이었다.
정광은 사람이 아니라고 치는 게 맞았고 다른 두 사람의 무공도 대단했다.
모용수수는 눈을 감고 조금 전의 혈투를 떠올렸다.
‘정말 각응이라 불릴 만해.’
말이 많은 것답게 병기도 많았다.
갖가지 암기와 기문병기(奇門兵器)를 쏟아내며, 놀라운 신법으로 신출귀몰하던 모습이라니.
‘그저 할 일을 한다는 듯한 얼굴이었지.’
각응만은 못했지만 불취검도 대단했다.
‘피를 아무리 많이 봐도 흔들리지 않아 붙은 별호일까.’
나는 살고 너는 죽이겠다는 의지가 실린 강맹한 검격을 뿌리면서도 틈틈이 정교한 초식을 풀어내 적들을 당황하게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한 표정으로.
‘나와 비슷한 연배인 것 같은데. 이런 자가 있었다니…….’
정광이라는 신궁 때문에 적혼표풍대가 기마(騎馬)한 장점을 거의 살리지 못했으나 놀라운 실력이었다.
‘역시 중원은 넓은 건가. 저런 고수들이 또 얼마나 있을까.’
드넓기만 하던 요녕이 갑자기 작게 느껴졌다.
동시에 강렬한 충동이 솟았다.
중원에 나가 고수들과 겨뤄보고 싶었다.
모용수수는 눈을 번쩍 뜨며 무겁게 청했다.
“단주. 부탁 하나 해도 되겠…….”
정광은 주변을 돌며 적혼표풍대의 화살통을 챙기고 있었다.
“모용 소저. 저야말로 부탁 좀 드릴게요. 화살은 제가 맡을 테니 창을 모아주실래요?”
“……알겠소.”
두 사람은 쓸 만한 것들만 골라 수레에 실었다.
자오와 혜진도 운기조식을 마치고 일어나 주인 잃은 말들 중 준마(駿馬)를 골라냈다.
정광이 계속 화살통만 줍자 자오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단주. 품속은 안 뒤지십니까?”
정광이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자 자오의 얼굴이 붉어졌다.
“죄, 죄송합니다. 모용 소저의 마음이 편치 않을 텐데 실언을 했습니다.”
정광이 황당해한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반란에 가담하신 분들, 격검제(擊劍祭)에서 내기로 탈탈 털었잖아요. 철전 한 푼 없으실 텐데 뭐 하러 그런 쓸데없는 수고를 해요?”
“아! 제가 괜한 오해를 했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혜진도 깨달음을 얻은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수수는 어이가 없어 그들을 번갈아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어쨌든 얼마 안 가 챙길 만한 것들은 다 챙기게 됐다.
정광은 세 사람을 둘러보며 현 상황을 되짚어줬다.
“대흥장주님은 우리를 곱게 보내주겠다고 외치셨어요. 성벽 위에서 빤히 보고 있는데 우리를 추적할 대규모 기마대를 보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얘기죠.”
개천(開天)을 천명한 뒤, 만인 앞에서 맺은 약조를 어찌 어기겠는가.
못할 건 없으나 수많은 비난을 감수해야 할 터. 개천에 성공해도 오욕으로 얼룩진 나라가 되리라.
혜진이 주위에 널린 시신들을 담담히 보며 말했다.
“그래서 저들만 보낸 것이군요. 주변 정찰 같은 핑계를 댔을까요?”
“뭐 알아서 둘러댔겠죠. 적혼표풍대는 우리를 쫓으며 발걸음을 늦추게 하는 역할이었을 거예요.”
자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선공을 당하자 당황한 것 같습니다. 거기에 공을 세우고 싶은 마음이 합쳐져 무모한 짓을 했겠지요. 대흥장주가 어떻게 나올까요?”
정광이 하늘에 떠 있는 해를 가리켰다.
“저게 저물어 어두워지면 기마대를 맘껏 보낼걸요. 하지만 밤에 말달리는 건 어려운 일이니, 이른 아침이나 돼야 제대로 된 추격을 시작할 수 있을 거예요.”
정광의 시선이 모용수수에게 향했다.
“소저. 우리가 그때까지 얼마나 갈 수 있을까요?”
모용수수가 해의 높이를 가늠한 뒤 입을 열었다.
“밤에 말달리기 힘든 건 우리도 마찬가지요. 수레를 포기하면 모를까, 해가 떨어질 때까지 부지런히 가봐야 목적지인 료양모가(遼陽毛家)에 닿을 수는 없소.”
정광이 고개를 저었다.
“제 예상이 틀릴 수도 있으니 수레는 가져가야 해요. 여기에 실은 병기나 물자 없이 대평원에서 기마대들을 만나면 저 빼고 다 죽을걸요.”
대평원에서 기마대들을 상대로 살아남을 수 있는 고수는 없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모용수수로서는 코웃음 칠 만큼 광오한 말이었지만, 정광이 그랬기에 납득했다.
“그럼 어떡하려고 그러오? 이대로 가다간 료양모가를 치기도 전에 기마대들에게 덜미를 잡힐지도 모르오.”
정광이 수레를 가리키며 딴소리를 했다.
“제일 튼튼한 놈으로 준비해 달라고 부탁드렸는데. 그런 놈으로 고르신 거 맞죠?”
“그렇소만. 갑자기 왜…….”
“믿을게요.”
정광은 수레 위에 올라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만 출발하죠. 저는 운기조식 할 테니 수고하세요.”
“수고라니? 무슨 말이오?”
정광이 수레 바닥을 툭툭 치며 설명했다.
“말이 앞에서 끌고 모용 소저가 뒤에서 민다.”
“…….”
“그렇게 우리는 빨리 간다. 이거죠.”
“……나 홀로 밀란 말이오?”
순간, 자오가 신법을 펼쳐 말 위에 올랐다. 그의 손엔 수레를 끄는 말의 고삐까지 쥐어져 있었다.
“…….”
혜진은 예비마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무척 바쁜 모습이었다.
“…….”
정광은 눈을 감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제일 한가해 보였으나 꼭 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후우우.”
모용수수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수레 뒤에 섰다.
잠시 후, 질주가 시작됐다.
콰르르르-
수레바퀴가 미친 듯이 회전하며 삐걱거렸다.
그래도 정말 신경 써서 골랐다는 걸 증명하듯, 꽤 오랫동안 달렸는데도 부서지지 않고 계속 구르는 게 용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모용수수는 얼굴이 벌게지고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마치 그 순간을 기다렸던 것처럼, 정광이 운기조식을 멈추고 자오를 불렀다.
“각응. 교대해 주셔야 할 것 같아요.”
“네! 단주!”
자오와 모용수수가 자리를 바꿨다.
한동안 말을 몰며 숨을 고르던 모용수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정광을 돌아봤다.
무서울 정도로 덜컹거리는 수레 위에 내 집처럼 편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라니.
“……수레가 그렇게 심하게 흔들리는데 운기조식을 한 것이오?”
“네.”
“어떻게 그게 가능하오?”
“수레가 흔들려도 마음이 안 흔들리면 되죠.”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그보다 앞을 보셔야죠. 수레가 돌부리라도 밟고 전복되면 어쩌시려고.”
“……미안하오.”
모용수수는 고개를 돌려 정면을 봤다.
끝없이 펼쳐진 대평원이 빠른 속도로 물러났다.
‘마음이 안 흔들리면 된다? 대체 무슨 의미지?’
화두를 곱씹는 그녀의 귀에 정광의 목소리가 꽂혔다.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데 집중하세요. 시간 싸움이잖아요.”
“……!”
정광의 말대로 딴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명심하겠소.”
모용수수가 앞을 주시하며 대답하자 정광은 몸을 돌려 뒤를 살폈다.
땀방울 가득한 얼굴로 수레를 밀면서 달리던 자오가 반색했다.
“교대입니까?”
“아뇨. 힘내세요.”
“……감사합니다.”
정광은 고개를 들어 더 먼 곳을 봤다.
추적대가 쫓아오는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놈이 지휘할까?’
지휘자가 적혼표풍대의 시신을 발견하고 분노할지 신중해질지가 중요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둘 다겠지. 그래도 전자 쪽이 더 강하면 좋을 텐데.’
내친김에 모용수수에게 물어봤지만, 그녀도 확실한 대답을 줄 순 없었다.
그래도 모용회가 지휘권을 줄 만한 이들이 누군지 들을 수 있었고, 일차 목표인 료양모가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묻고 답을 받았다.
“모용 소저. 하나만 더 여쭐게요. 다음에 칠 만한 곳은 어디죠? 료양에서 남쪽이나 서쪽 방면에 있는 곳으로요.”
“음. 남서쪽으로 백리(百里)쯤 가면 안산채가(鞍山蔡家)가 있소.”
정광은 안산채가에 대해 물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그는 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불취검.”
“네, 단주. 물으실 게 있으십니까?”
정광은 공평무사(公平無私)한 사람이었다.
“아뇨. 각응과 교대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정광을 제외한 세 사람은 몇 번이나 교대를 반복하며 수레를 밀었다.
그 결과 해가 떨어지기 직전, 료양 에 이를 수 있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정광은 지칠 대로 지친 세 사람을 치하하고 수레까지 다독여줬다.
수레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
이 미친 질주를 버틴 게 어딘가.
“저게 료양모가인가요?”
정광이 멀리 있는 거대한 장원을 가리키며 묻자 모용수수가 확인해줬다.
“맞소. 바로 칠 것이오?”
“조금 쉬었다가 하죠. 기력부터 회복하세요.”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정광은 운기조식을 마친 세 사람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설명했다.
자오와 혜진은 담담한 얼굴로 야습에 필요한 것들을 챙겼다.
모용수수는 굳은 얼굴로 그들을 도왔다.
밤이 완전히 깊어지자.
정광 일행도 준비를 끝냈다.
“자. 시작할까요.”
“네, 단주.”
잠시 뒤.
수많은 불꽃이 장원을 향해 날았다.
장원 곳곳에 화시(火矢)가 내려앉으며 붉은 꽃이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