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298화 (297/569)

2부 27화

그럼 가보죠

위에 선 자와 아래 있는 자의 차이는 무엇일까?

가장 큰 점은 감정을 조절할 줄 아는 것이다.

모용회가 그랬다.

금세 분노를 가라앉히고 담담히 물었다.

“이대로 떠나겠다는 말이냐?”

크지 않은 목소리였으나 정광은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말을 멈춰 세우며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요녕이 생각보다 더 황량하고 볼 게 없어서요. 다른 성들이나 둘러보려고요.”

“…….”

“눈빛이 왜 그러세요? 설마 살인멸구(殺人滅口)를 하실 생각은 아니시죠?”

“왜 아닐 거라 생각하지?”

“분명히 말씀드렸는데. 살다 보면 그런 마음을 품으실 수도 있다고요. 입도 무거우니 걱정 붙들어 매시고 보내주시죠.”

“못 믿겠다면?”

정광이 난처한 얼굴로 두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아직 죽기는 싫으니 싸워야죠. 지금 시작하시려고요?”

어느새 그의 양손엔 비룡(飛龍)과 화살이 들려 있었다.

모용회는 정광과 비룡을 번갈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 치면 성안으로 도망가 화살을 쏴대겠지. 좋지 않아.’

아니, 아주 좋지 않았다.

공성전을 벌일 때, 높은 성벽 위에서 날아오는 화살만큼 까다로운 병기는 없다.

게다가 정광이 보통 궁사인가?

사람도 활도 신궁(神弓)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아끼던 매를 단번에 꿰어 죽이는 걸 봤기에 그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는 상황 아닌가.

‘골치 아픈 놈을 굳이 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지만…….’

개천(開天)을 알고 있는 놈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죽여야 했다.

“……네 입이 무겁다는 걸 무엇으로 증명할 것이냐?”

“손바닥이라도 부딪히면서 약조할까요?”

“장난질 그만하고 확실히 말해라.”

고심하던 정광이 비장한 얼굴로 제안했다.

“제 명예를 걸죠.”

“……그게 얼마짜리냐고 묻던 놈이?”

정광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전음을 보냈다.

-저 누군지 대충 아시죠?

알다마다.

천하에 이렇게 젊고 강한 데다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이 또 있을까.

-제가 좀 자유분방하긴 해도, 지금까지 약조를 어긴 적은 없어요. 들어보셨을 텐데요?

확실히 그렇긴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럴 거란 보장은 없지.’

자그마한 실수가 대업을 그르칠 수도 있는 법.

모용의 영광에 티끌만 한 위협이라도 되는 건 필히 제거해야 했다.

‘예비마(豫備馬)도 있어. 요녕에서 빨리 벗어나려는 속셈인가.’

그렇다면?

‘보는 눈이 많으니 일단 보낸 뒤에 죽인다. 모용의 터전인 대평원에서.’

아무리 대단한 고수라도 대평원에서 모용을 이길 순 없었다.

“네 약조를 믿고 보내주마.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야.”

“네. 네. 그러고 보니 저도 다짐 좀 받아야겠네요.”

“다짐이라니?”

“이렇게요.”

정광은 반란 세력과 성벽을 번갈아 보며 크게 외쳤다.

“대흥장주님께서 저희를 얌전히 보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맞죠, 장주님?”

“……그렇다.”

“너무 작게 말씀하셔서 못 들으시는 분들이 많네요! 내공을 끌어 올려서 크게 부탁드려요! 완전한 문장으로요! 자, 갑니다!”

뭐를?

“하나, 둘, 셋!”

“…….”

박자를 놓친 모용회가 정광을 노려보며 씹어뱉듯 외쳤다.

“나 모용회는 천하유람단을 얌전히 보낼 것을 약조한다! 이제 됐느냐?”

덜컹덜컹.

정광은 이미 말과 수레를 몰고 있었다.

“그럼요. 수고하셨습니다.”

모용회가 정광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실례합니다. 잠시 지나갈게요.”

사람들이 갈라서며 정광을 분노에 찬 눈초리로 난도질했다.

“아. 따끔따끔해.”

정광은 양팔을 슬슬 긁으며 멀어져갔다.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한동안 바쁘겠네. 가볼까.’

* * *

천천히 일행을 인도하던 정광은 모용세가의 성과 반란 세력이 보이지 않는 곳에 이르자 바로 말했다.

“모용 소저. 답답하셨죠? 그만 나오세요.”

수레에 실린 궤짝 중 하나가 열리며 모용수수가 나왔다.

웅크렸던 몸을 펴고 관절들을 움직이자 우드득 우드득 하는 소리가 울렸다.

“많이 불편하세요?”

“괜찮아졌소.”

“그래 보이시네요.”

모용수수의 뼈는 굵고 튼튼했다.

마상제에서 다쳤던 손바닥은 정광이 깨끗이 치료해 준 상태.

참마도를 챙긴 뒤 예비마 한 필을 골라 올라타며 물었다.

“단주. 어디부터 가길 원하오?”

정광은 지체 없이 답했다.

“배신한 호족들의 본거지 중 여기에서 가까운 곳이요.”

“방계가 아니라 호족부터 치는 것이오? 이민족도 아니고?”

“방계인데도 반란에 가담했으면 마음을 독하게 먹은 거겠죠. 이민족은 쳐봐야 본진에서 크게 신경 안 쓸 거고요.”

“어중간한 호족들부터 흔드는 게 낫다는 얘기군. 이해했소이다.”

“어디가 좋을까요?”

모용수수가 잠시 계산을 한 뒤 입을 열었다.

“남서쪽으로 이백리(二百里)쯤 가면 료양모가(遼陽毛家)가 있소. 그곳이 적당할 것 같소이다.”

“평소 마음에 안 드시던 일족인가 보네요.”

모용수수는 부정하지 않고 솔직히 설명했다.

“그렇긴 하오. 성에서 거리가 가까운 만큼 장원에 남은 이가 적을 테니 안성맞춤이라 할 수 있소.”

“좋아요. 거기로 하죠. 벌써 기대되네요.”

정광이 동의하자 모용수수는 뒤를 슬쩍 돌아봤다.

‘흙먼지가 피어오르지 않는 걸 보면 아직 추적을 시작하지 않았다는 얘기인데…….’

그녀는 모용회를 믿지 않았다.

“단주. 놈들이 곧 추격해 올 것이오.”

“그렇겠죠.”

“이대로 가다간 앞뒤로 협공당할 수도 있소만.”

“그건 곤란하니까 좀 쉴까요?”

“무슨 말이오?”

말 그대로였다.

정광은 말을 세우고 하마했다.

자오와 혜진도 군말 없이 따랐기에 모용수수도 그래야 했다.

‘대체 뭘 하려고?’

대단한 건 아니었다.

그들은 수레에서 땔감을 내려 불을 붙이고 솥을 걸었다.

자오가 그 솥에 건량과 육포를 넣고 물을 부었다.

솥에 차오르는 물의 높이를 날카로운 눈초리로 가늠하던 정광이 낮게 말했다.

“거기까지요.”

“네, 단주.”

“딱 좋네요.”

“훌륭한 판단이셨습니다.”

지켜보던 혜진이 나섰다.

“소금과 향료를 좀 뿌릴까요?”

“장 소협이 있다면 당연히 그러겠지만 지금은 위험해요.”

“그래도…….”

“우리 중 누가 간을 제대로 맞출 수 있죠?”

혜진은 바로 승복하고 나무 주걱으로 죽을 휘저었다.

그사이 자오는 궤짝 하나를 번쩍 들고 말발굽 자국이 난 땅만 디디며 성 쪽으로 달렸다.

모용수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놀라운 신법이구나. 뭘 하려는 거지?’

그때, 정광이 그녀를 불렀다.

“모용 소저. 활 쏘실 줄 알죠?”

“물론이오.”

“달려오는 말의 다리를 최대 몇 장 거리에서 맞출 수 있으세요?”

모용수수의 미간에 골이 생겼다.

“머리나 몸통도 아니고 다리라. 이십 장 안쪽으로 들어오면 할 수 있을 것 같소만. 왜 그러시오?”

“음. 애매하네.”

정광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자 모용수수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단주. 대체 무슨…….”

“잠시만요. 준비부터 하고요.”

정광은 수레에 실린 궤짝을 하나 열어 그 속에 가득한 화살들을 움켜쥐었다.

그것들을 수레 위에 가지런히 깐 뒤 황금풍(黃金風) 안장 좌우에 달린 화살통에도 가득 채웠다.

모용수수는 그제야 정광이 무엇을 하는 건지 깨달았다.

‘여기에서 추적대를 막으려는 거구나. 쏠 만큼 쏜 뒤 달릴 생각이야.’

너무 위험한 전술이었으나 정광의 명을 따르기로 맹세하고 출발한 터라 반대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모용세가주인 아비도 정광을 믿으라고 신신당부하지 않았던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야 해.’

그녀도 수레에서 화살통을 꺼내 말안장에 걸었다. 활을 구부려 시위를 올리고 상태를 점검했다.

시험 삼아 먼 곳에 있는 나무를 향해 몇 발 쏘자 전부 노렸던 곳에 박혔다.

‘나쁘지 않군.’

활도 몸 상태도 그랬다.

정광이 준 영약 덕분에 늘어난 내공도 충만한 상태.

‘할 건 다 했다. 와라!’

그녀가 가야 했다.

“모용 소저. 죽 다 끓었어요. 어서 오세요.”

“……배고프진 않소.”

“언제 고파지실지 모르니 그때 후회하지 말고 드시죠.”

“음. 이해했소이다.”

언제 싸움이 일어날지 모르니 미리 먹어두란 말 아닌가.

틀린 말이 아닌지라 정광이 건넨 죽 그릇을 받았다.

“잘 먹겠소.”

죽은 맹숭맹숭했다.

한 그릇으로 끝내려 했으나 어느새 돌아온 자오가 벌써 두 그릇째 비우는 걸 보자 마음이 바뀌었다.

‘오라버니께서 경험이 많은 자들이니 배우라 하셨지. 따라야 해.’

억지로 네 그릇쯤 먹었을까.

진작에 식사를 끝낸 정광이 성 쪽을 바라보며 기지개를 켰다.

“생각보다 빨리 오네. 다들 맞이할 준비 하시죠.”

“네! 단주!”

자오와 혜진이 동시에 대답하며 솥과 그릇 등을 치웠다.

모용수수도 그들을 거든 뒤 활과 화살을 잡았다.

정광이 바라보는 곳을 응시하며 활시위에 화살을 메겼다.

‘아직 안 보이는데?’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먼지구름이 보였다.

경험을 토대로 추측하면 적은 인마(人馬)가 아니었다.

‘어떤 자들일까?’

예상대로 수많은 점이 나타났다.

정광이 그들을 주시하며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모용세가 특유의 흑의가 아니네. 붉은색 가죽 흉갑(胸甲)으로 복색을 통일한 기마대 아세요? 활과 창이 주병기인 것 같은데.”

“이 거리에서 그게 보이오?”

“보이니까 여쭙죠.”

“과연. 적혼표풍대(赤魂飇風隊)요. 대흥장의 기마대 중 하나로 기동성을 이용한 기사(騎射)에 능한 자들이오.”

“혹시 흉갑 안에 호심경(護心鏡)을 대고 있나요?”

“본가의 기마대는 모두 그렇소.”

“모용 소저와 비교하면 어때요? 무공이랑 기마술 둘 다요.”

모용수수가 이를 지그시 물었다.

“최소 이립은 넘은 고수들이지만, 무공도 기마술도 뒤질 거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소.”

“비슷하다는 말씀이구나. 그럼 이번엔 쉬세요.”

모용수수는 정광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렇게 많은 적이 몰려오는데 쉬라고?’

정광은 신형을 날려 수레 위에 섰다.

머릿속에 모용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노물이 저 정도 놈들로 나를 잡으려고 할 리는 없고. 꽁무니를 잡고 시간을 끄는 역할인가.’

그런 거추장스러운 놈들은 사양이었다.

‘달려오는 꼴을 보니 호승심이 솟은 것 같은데. 뭐 그럴 연배이긴 하지.’

그에 맞게 대접해 주면 되리라.

“각응. 제 옆에서 화살 좀 주세요.”

“알겠습니다, 단주.”

정광의 옆으로 간 자오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닥에 깔린 화살을 들어 건넸다.

정광은 그것을 받아 시위에 메기며 혜진에게 명했다.

“적들이 응사할지도 모르니 불취검은 말들을 노리고 날아오는 화살을 쳐내주시고요. 모용 소저도 심심하시면 같이해 주세요.”

“네, 단주.”

“……알겠소.”

혜진과 모용수수가 각각 검과 참마도를 쥐고 말 앞에 섰다.

정광이 낮게 중얼거렸다.

“각응. 제 손이 시위를 놓으면 바로 화살을 쥐여주셔야 해요.”

“이해했습니다.”

“그럼 가보죠.”

정광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시위를 놨다.

자오가 재빨리 화살을 건넸고 정광이 그것을 잡아 시위에 메겼을 땐, 먼저 쏜 화살이 백장을 넘게 날아가 선두에서 달려오던 기수의 이마를 꿰뚫었다.

콰직!

기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뒤로 튕겼다.

뒤에서 말달리던 자는 갑자기 뒤통수에서 화살촉이 솟아난 동료가 덮치자 두 눈을 크게 떴다.

반사적으로 두 팔을 벌려 받았으나.

쿵!

“컥!”

화살에 실린 힘이 어찌나 강한지, 그까지 시신과 부딪힌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낙마했다.

콰드득!

뒤에서 달리던 말이 그를 짓밟고 지나갔다.

동시에 그 말에 탄 기수의 이마에도 화살이 꽂혔다.

콰작!

그 옆에서 달리는 기수 이마에 또 화살이 꽂혔다.

콰악!

화살이 쉴 새 없이 날아와 기수들의 이마에 박혔다.

‘저, 저 거리에서 쏘다니!’

‘소문대로 신궁이구나!’

경악하는 것도 잠시.

적혼표풍대는 정예 기마대답게 대응했다.

“창으로 막아!”

“안 되겠다 싶으면 자세를 바짝 낮춰라!”

하지만 상대는 정광이었다.

화살이 유성처럼 쏟아졌다.

“이익!”

창을 폭풍처럼 돌려 쳐내려 해도 소용없었다.

화살이 창대를 쪼개며 기수에게 박혔다.

“헉!”

자세를 낮춰봐도 의미 없었다.

화살이 말에 꽂히며 사람을 낙마시켰다.

그렇게 인마가 연이어 쓰러졌다.

적혼표풍대의 안색이 공포심으로 물들었다.

‘듣던 것 이상이잖아!’

‘피해가 너무 커!’

그래도 도주하는 이는 없었다.

반전하기 위해 속도를 늦췄다간 더 좋은 먹잇감이 될 터.

이를 악물며 발뒤꿈치로 말의 배를 찼다.

“거리를 줄여야 한다!”

“산개(散開)해서 더 빨리 달려!”

정광과의 거리는 이미 삼십 장도 안 되게 좁혀진 상태.

응사하다가 속도를 늦추느니 반 호흡이라도 빨리 달리는 게 나았다.

적혼표풍대가 넓게 퍼졌다.

그들의 눈에 짙은 살기가 어렸다.

‘몇 호흡이면 닿는다!’

‘곧 저놈을 죽일 수…… 헉!’

히히힝!

거품을 물며 질주하던 말들이 갑자기 고꾸라졌다.

“으아악!”

기수도 땅바닥에 처박혔다.

“뭐, 뭐야?”

“철질려(鐵蒺藜)다! 철질려를 묻어놨어!”

“속도를 줄여라!”

적혼표풍대는 하나같이 낭패한 얼굴로 말고삐를 당겼다.

덕분에 지면 위로 살짝 솟은 철질려를 확인하고 겨우 피할 수 있었지만…….

속도를 늦춘 대가는 참혹했다.

쉬이익- 콰콱!

쉬이잉- 콰직!

거리가 가까워진 만큼 화살의 위력이 강해졌다.

적혼표풍대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쓰러져 갔다.

‘귀, 귀신!’

‘악귀다! 이건 악귀야!’

그들이 달려온 길이 붉은 피로 물들었다.

붉은 길은 혼백을 잃은 인마를 삼키며 길이를 늘여갔다.

그 참상을 목도한 모용수수는 안 돌아가려는 목을 억지로 돌려 수레 위를 바라봤다.

자오가 눈부신 속도로 정광의 오른손에 화살을 쥐여주고 있었다.

‘각응 저자가 철질려가 든 궤짝을 들고 뛰어가 땅에 묻었구나!’

그 짧은 시간에 그 많은 철질려를 살짝만 드러나게 묻는 능력이라니.

정광이 했던 말도 이제야 이해가 갔다.

‘기수를 쏠 실력이 없으면 말이라도 쏘아야 하거늘. 기수가 병기로 막기 힘든 다리를 못 쏠 바엔 구경이나 하라는 것인가.’

모용수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눈동자에 말도 안 되는 속도로 화살을 쏘아내는 정광이 담겼다.

그 모습은 신궁이란 표현으론 부족했다.

무신(武神)이라 할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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