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6화
실례합니다
“괜찮죠?”
정광이 원하는 걸 말한 뒤 묻자 모용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정광을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가볍지 않은 요구군. 정말 가볍지 않아.”
“꽤 싸게 해드리는 건데.”
“물질적인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닐세. 그게 어떤 의미인지 자네도 잘 알지 않나?”
정광도 인정했다.
“그렇긴 하죠. 그래도 그때가 되면 가주님 체면 안 깎이게 제가 잘 처신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것으론 부족하지. 자네가 설명했던 대로 상황이 심상찮아. 그 결과로 나온 것들을 내게도 알려줘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네만.”
“제가 설마 입 싹 닫을 것 같으세요? 나눌 건 나눠야죠.”
“…….”
모용오의 굳어 있던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쓴웃음이었다.
“내가 졌네. 줄 수 있는 건 꼭 주게나. 따로 사례하겠네.”
“적절하네요.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르지만 잘 부탁드려요.”
정광이 씩 웃으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
모용오는 그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손을 들어 가볍게 부딪혔다.
짝.
손을 마주 댄 상태로 정광이 강조했다.
“연(燕)의 국성(國姓)인 모용의 수장께서 하신 말씀이니 문서로 남기진 않을게요.”
“종조부처럼 헛된 꿈을 꾸진 않지만 내 몸속에 흐르는 피에 대한 자부심은 그 누구보다 강하니 믿게나. 헌데 자네 한족이 맞는가? 오랑캐라 치부하지 않고 본가를 높여 말하고 있어.”
정광이 어깨를 으쓱했다.
“고아라 핏줄 같은 건 몰라요. 오랑캐는 출신으로 따지는 게 아니라 제 마음에 안 들면 오랑캐죠.”
“흠. 흥미로운 기준이군.”
“그보다 손은 왜 잡으셨어요? 놓아주시죠. 약조 확인도 끝났는데.”
모용오는 정광의 손을 꽉 잡은 채 눈을 빛냈다.
“자네가 중원에서 이뤄온 위업에 감탄했네. 이번에도 그리될 것이라 믿고.”
“유람만 했었는데요.”
“……,”
잠시 뒤, 모용오가 손을 놓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이번 유람도 마음껏 즐기길. 내일 아침에 보세나.”
모용오가 사람들에게 번(番)을 서라고 지시한 건 마음을 다잡기 위함이었을 뿐, 적이 새벽을 틈타 습격해 올 거라곤 믿지 않았다.
제국의 재건을 명분으로 내걸고 혈족을 상대로 일으킨 싸움 아닌가?
개전(開戰)만큼은 당당하게 해야 했고, 피를 적게 흘려야 최종 목적을 달성할 가능성이 커졌다.
정광의 예상도 같았기에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가주님도 좋은 꿈 꾸세요.”
응원이 무색하게 모용오는 잠을 설쳤다.
다음 날 아침, 뽀송뽀송한 얼굴을 한 정광이 성벽에 올랐다.
“실례합니다. 잠시 지나갈게요.”
번(番)을 서던 무인들은 시선도 돌리지 않고 비켜줬다.
정광은 푸석푸석한 얼굴로 성 밖을 주시하는 모용오를 위로했다.
“악몽이라도 꾸신 것 같네요. 괜찮으시죠?”
“그건 아니네만. 자네처럼 신경이 굵진 못해서 말일세.”
담담한 목소리와 달리 모용오는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정광도 성 밖을 둘러보며 혀를 찼다.
“가까운 곳에 쳤던 천막들을 멀찌감치 물렸네요. 보급품을 실은 수레가 몰려오고 있고요.”
“포위해서 말려 죽일 셈인 것 같네.”
“공물로 받으신 것들은 확인해 보셨죠?”
“물론일세.”
“어땠나요?”
“이제까지와 달리 당장 먹고 입을 수 있는 건 전혀 없었어. 현 상황에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들뿐이더군.”
“장기전을 원하는 게 맞네요.”
모용오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정말 알 수가 없군. 본가가 성치고는 무척 작긴 하나, 높은 성벽과 충분한 물자를 비축하고 있네. 수가 적어도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다는 말일세. 겨울이 곧 시작될 게야. 천막을 치고 포위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 왜 그럴까?”
요녕의 겨울은 내공을 지닌 고수라 해도 야외에선 오래 버티기 힘들 만큼 혹독했다.
별다른 피해 없이 이길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라 할지라도 장기전으로 끌고 가려는 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단주. 자네의 고견을 듣고 싶네. 내가 무엇을 놓쳤지?”
정광이 입을 열려는 그때, 멀찍이 떨어진 상대 진영에서 익숙한 자가 앞으로 나왔다.
반란세력의 수장 모용회였다.
“가주!”
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대평원을 넘어 성까지 울렸다.
“혹시 간밤에 생각이 바뀌셨소이까? 그렇길 바라오!”
“하하.”
모용오가 희미하게 웃으며 단호히 응수했다.
“날 죽이고 본가를 지우라 했었소만! 변한 건 없소이다!”
“안타깝구려!”
모용회는 이제까지보다 더 강한 목소리로 외쳤다.
“모용을 위해, 요녕을 위해 그만 내려와 주셔야겠소!”
“내가 할 말이오! 어디 한번 해봅시다!”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동시에 양측 진영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거대한 투기가 서로를 향해 쏘아졌다.
모용오는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린 뒤, 정광에게 못 다한 질문을 이었다.
“종조부가 뭘 노리고 이러는 거라 생각하나?”
“자리를 옮겨서 얘기하죠. 모양새를 보니 바로 치진 않을 것 같네요.”
정광의 말대로였다.
적들은 목책을 세우는 등 노골적으로 방비를 굳히고 있었다.
“그러세나.”
“대공자와 공녀도 같이 가시죠. 각응과 불취검도요.”
모두 모용오의 집무실에 들어가 자리를 잡자 정광이 그들을 둘러보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피를 적게 흘리고 이겨야 황궁까지 말달려 가 싸울 전력이 남죠. 나라를 세우고자 벌인 짓인데 소모전을 피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하지만 가주님 말씀처럼 겨울이 코앞인데 이러는 건 무리가 있고요.”
모용상현이 맞장구쳤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다른 뜻이 있을 거란 의미 같소만.”
정광은 모용오에게 시선을 돌렸다.
“가주님. 배신한 분들이 전력을 끌고 오신 건 아니죠?”
“바로 보았네. 마적단은 물론이요, 틈만 보이면 약탈을 일삼는 이민족들이 있기에 어느 정도의 수는 본거지에 남아야 해.”
“더 쥐어짜면 이쪽으로 응원군을 보낼 수 있을까요?”
“힘들 걸세. 요녕은 그만큼 만만찮은 곳이야.”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모용오의 눈이 커졌다.
“그분들이 마적단과 말 안 듣는 이민족들을 처단하면요?”
“……!”
“그리고 가주님을 지지하는 방계 가문과 호족들의 본거지까지 정리해서 일부라도 흡수한 채 달려오면 어떻게 될까요?”
“……!”
정광이 최악 중에서도 최악인 경우를 계속 찌르자 침묵하던 모용오가 한숨 쉬듯 답했다.
“그리되면 지금도 수성하기 녹록지 않지만 더 힘들어질 걸세. 아니, 이길 가능성이 아예 없어지겠지.”
“결국 굶주리다 죽거나 검에 꿰여 죽겠죠. 그래도 싸우실 거예요?”
“…….”
모용오는 정광이 말한 상황을 가정해봤다.
‘그때나 지금이나 묵혈철기대(墨血鐵騎隊)를 비롯한 무력부대를 이끌고 나가 봐야 개죽음이다. 시간문제일 뿐 전멸이야.’
그래도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목숨을 구걸해 노예가 되느니 싸우다 죽겠네.”
“어? 이공자께서 모용세가는 우애가 좋다고 하셨는데.”
“정도가 있지. 이 와중에 그런 걸 어찌 기대하겠나?”
“만약 멀리 떠나라고 하면요? 그래도 싸우실 건가요?”
모용오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아니. 안전만 보장되면 먼 곳으로 떠나 힘을 기를 걸세.”
“합리적이네요.”
“허나 자네의 추론은 합리적이지 않아. 그 가정들이 현실로 될 수만 있다면 겨울을 앞두고 이런 일을 벌이는 게 이해가 가네. 하지만 아니질 않나? 저들에겐 그럴 여력이 없어.”
좌중에 있던 모두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정광만 빼고.
“여력이 없으면 그만한 대가를 치르고 남에게 빌리면 되죠.”
“……!”
“돈이야 많이 들겠지만 기호지세(騎虎之勢)라. 어차피 황궁을 치기로 마음먹은 상태 아닌가요? 거사가 성공하기만 하면 쓴 것 이상으로 벌게 될 테니 별문제 없을 것 같은데요.”
“…….”
모용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비약이 심하군. 자네가 총명한 건 잘 알지만 너무 심해.”
정광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 게 아니고서야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없는데. 대흥장주 그분, 꿈이 커서 그렇지 노망이 드시거나 미치신 건 아니잖아요.”
“……종조부가 외부에 손을 벌렸으리라 보는가? 모용의 피를 이은 걸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그가?”
“모양새가 좀 안 나긴 하죠. 그래도 모용 본가가 아니라 항상 행패를 부리던 자들을 쓸어버리는 거니 평판엔 큰 문제가 없을걸요.”
모용오의 눈이 흔들렸다.
정광은 그 눈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몇몇 방계와 호족쯤은 그럴듯한 구실을 붙이면 되니 나쁘지 않은 장사 아닐까요?”
모용오의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누구일 것 같나?”
“음. 모용 소저.”
정광이 갑자기 부르자 모용수수가 무겁게 답했다.
“말하시오.”
“전에 대흥장에 가던 도중에요. 장원에서 나온 중년인을 만났죠? 백마를 탄 정신 이상하신 분.”
“……그렇소.”
“모용중 대협…… 아. 호칭이 난감하네. 어쨌든 그분께서 말씀하시길, 일거리를 찾아 흘러들어온 낭인(浪人)이라 하셨죠.”
“맞소이다.”
“진짜 고수라 불릴만한 분이셨는데 낭인이라. 말도 안 되는 얘기인데…….”
정광이 말끝을 흐렸다가 이었다.
“보통 낭인이 아니라 낭왕(浪王)이면 가능한 일이죠. 대흥장주께서 손을 벌리실 만한 세력을 가진 분이니까요. 아니, 모을 수 있는 분이구나.”
“……!”
모두 입을 떡 벌렸다.
낭왕이 누구던가?
정사(正邪) 중간의 무림인 중 최고수이자 평소 어디에 머무는지 알려지지도 않을 만큼 신비스러운 오왕(五王)!
그 다섯 명 중 낭인의 왕 아닌가!
경악한 사람들을 정광이 따뜻하게 위로했다.
“만에 하나, 아닐 수도 있으니 너무 인상 쓰지 마세요.”
“…….”
“그나저나 대흥장주님 곁에 항상 붙어 계시던 그분이 안 보이시던데. 외부인들을 안내하고 제어하기 위해 보내신 건가.”
모용중을 말하는 것이었고, 모두가 알아들었다.
모용오가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능력은 없지만 종조부가 제일 신뢰하는 녀석이지. 그런 놈이 자리를 비웠다?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군.”
“안 보이시니까 짜증은 안 나서 좋던데요.”
자오와 혜진은 웃음을 억지로 참았으나 모용 씨들은 진지했다.
특히 모용오는 더더욱 그랬다.
“낭왕은 아니더라도 외부의 힘을 빌렸을 거라는 자네의 주장에 설득됐네. 어찌하는 게 좋을 것 같나?”
정광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죠.”
* * *
모용회는 성벽을 노려보다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조금 전에 덥힌 차였으나 차가운 냉기가 목을 타고 내려갔다.
모용회의 눈도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눈이 내리기 전에 정리를 끝내야 할 텐데…….’
믿을 만한 자에게 의뢰했으나 안심할 순 없었다.
자신의 목숨이면 모를까, 모용 전체를 걸고 벌인 일인데 어찌 그러겠는가?
‘그렇게 마음을 먹었는데도 흔들릴 줄이야.’
파스스-
손에 힘이 들어가자 찻잔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잡념 따윈 지우고 반드시 해낸다. 그 길밖에 없어.’
길고 긴 길이었다.
공자가 그랬듯이 이립(而立)에 뜻을 세운 뒤 와신상담(臥薪嘗膽)해 온 세월이 얼마던가.
이제 한고비만 넘기면 백 년 동안 목표했던 곳을 향해 말달릴 수 있었다.
‘거기까지만 가면, 그 누구도 모용을 막을 수는…… 음?’
그 순간, 거대한 성문이 천천히 열렸다.
모용회의 눈썹이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이런 미련한 놈을 봤나! 묵혈철기대 같은 아해들로 뚫어보려는 건가!’
그런 게 아니면 성문이 열릴 일이 없었다.
대의를 보는 시각은 달라도 능력 있는 가주라 생각했거늘, 이런 패착을 두다니!
‘아까운 아이들이 죽겠구나. 이 또한 하늘이 내게 내린 업보겠지.’
명(明) 황실을 치기 위해 말달려 갈 때 선봉에 서야 할 인재들을 직접 죽여야 했다.
모용회는 그럴 수 있는 자였다.
‘개천(開天)을 막는 건 그 무엇이든 지운다.’
의자에서 일어나 좌중을 둘러보며 무겁게 외쳤다.
“모두 똑똑히 들어라! 누가 나와도 말살한다! 그게 피를 적게 흘리는 길이니 모용답게 해내라!”
“네! 어르신!”
다들 애증이 뒤섞인 얼굴로 이를 악물며 병기를 꼬나쥐는 그때!
성문에서 세 명의 기수(騎手)가 수레를 끌며 나왔다.
수레에는 큰 궤짝들이 실려 있었다.
긴장하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저, 저건!’
‘천하유람단이라는 놈들 아닌가?’
‘궤짝 속에 뭘 넣었길래 수레바퀴가 저렇게 깊게 파이는 거지?’
‘설마 우리에게서 빼앗은 전표?’
‘이제 와서 돌려주려는 건가? 그래도 목숨이 귀한 줄은 아는구나.’
아니었다.
자오와 혜진보다 앞에서 말을 몰던 정광이 그들을 둘러보며 당당히 포권했다.
“실례합니다! 잠시 지나갈게요!”
“…….”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입은 무거우니까 안심하십시오!”
“…….”
“외부인은 빠져 드리겠습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
좋은 시간?
골육상쟁을 벌일 판에 뭐가 어째?
사람들의 눈에서 분노의 불길이 치솟았다.
모용회도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