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296화 (295/569)

2부 25화

둘이 아닌 하나

마상제(馬上祭)가 끝나고 저녁 연회가 시작됐다.

요리도 술도 나쁘지 않았으나 분위기는 엉망이었다.

웃고 떠들긴커녕 묵묵히 밥만 먹다가 각자의 숙소로 사라지는 연회가 어디 있는가?

‘차라리 상갓집이 화기애애하겠네.’

정광은 내심 혀를 차면서도 꿋꿋이 자리를 지켰다.

제대로 먹을 수 있을 때 든든히 먹어둬야 했다.

“자오. 더 드세요. 혜진 소저도요.”

“네, 단주.”

“알겠습니다.”

그간 정광을 따르며 많은 일을 겪은 그들은 명을 충실히 따랐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심력을 많이 소모한 상태였기에 입맛이 없어도 꾸준히 배를 채웠다.

“계속 드시면서 들으세요.”

정광은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내공을 운용한 뒤 말을 이었다.

“아마 내일이 되면 귀찮은 일이 생길 거예요. 귀찮다 못해 피곤한 일일 수도 있죠.”

자오의 눈이 빛났다.

“모용회와 그를 따르는 무리가 반기를 들 거란 말씀입니까?”

“그럴 가능성이 커요.”

“모용세가주도 심상치 않은 기류를 진작 느꼈을 텐데, 일이 터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으니 정말 답답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죠. 개기(開基)의 예(禮)를 어기면 모용세가는 이 꼴이 될 텐데요.”

정광은 술이 가득 찬 술잔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 움직임에 맞춰 술잔이 술을 토해냈다.

마침내 술잔이 텅 비자 자오가 술을 다시 채우며 입을 열었다.

“말씀대로 모용세가주가 지금 손을 쓰면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이들을 결집시켜 왔던 신뢰가 무너지겠지요. 요녕성은 조각조각 갈라져 이전투구를 벌일 게 뻔합니다.”

혜진이 탁자에 쏟아진 술을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며 뒤를 이었다.

“그렇게 되면 길림성(吉林省)이나 흑룡강성(黑龍江省) 쪽의 이민족들이 요녕성을 노릴 테고, 많은 피를 흘리게 될 겁니다.”

정광이 혜진에게 술병을 하나 건네주며 덧붙였다.

“너무 아까워하지 마세요. 이민족들에게 먹히기 전에 황상께서 손을 대시겠죠. 요녕 전체가 전장으로 변할 거예요.”

모용세가주는 정말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걸 알기에 모용회와 그를 따르는 세력은 성안에서 먹고 자는 것이고.

혜진이 술을 한 모금 삼킨 뒤 나직이 물었다.

“단주께서 모용세가주면 어떡하실 겁니까?”

“애초에 이런 상황까지 안 왔죠.”

“…….”

혜진과 자오는 정광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웃었다.

“그럴 것 같습니다.”

“하하. 이런 고민을 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해야 했다.

혜진의 눈에 어려 있던 호기심이 더 짙어졌다.

“만약 여기까지 왔다면 어떡하실지 궁금합니다.”

정광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히 답했다.

“당장 손을 써야죠.”

“네? 단주. 그랬다간 요녕이 산산이 조각나 전화(戰火)에 휩싸일 텐데 어찌…….”

놀란 혜진이 말끝을 흐리고, 정광은 전생을 떠올리며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썩은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는 집을 수리하느니 싹 밀어버리고 다시 짓는 게 나으니까.”

* * *

별다른 일 없이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개기(開基)의 마지막 날이요, 마지막 제(祭)였다.

대광장(大廣場)이 좁아 보일 만큼 수많은 사람이 모여 엄숙한 표정으로 제를 치렀다.

격검제(擊劍祭)나 마상제(馬上祭)와 달리 일반적인 제였다.

모든 게 끝나자 모용세가주 모용오가 외쳤다.

“고생하셨소이다! 다시 모일 때까지 건승하시길 빌겠소!”

“건승하시길 빕니다!”

시비들이 요리와 술을 내왔다.

모두 묵묵히 먹으며 배를 채웠다.

모용오는 그들을 둘러보다가 모용회에게 시선을 맞추며 당부했다.

“차린 건 없으나 든든히 드시고 무탈히 가시길 바라오.”

“…….”

모용회는 모용오를 직시하며 천천히 일어섰다.

“가주. 올해는 전과 다르구려.”

“무슨 말씀이오?”

“떠나기 전, 논의할 안건이 있으면 말하라 하셔야지 않소이까?”

“없으신 줄 알았소.”

“있소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음이 놓이질 않소.”

“또 모용이 약해지고 있다고 말씀하시려는 게요? 독대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분명히 말씀드렸소만.”

“가주의 기책(奇策)은 훌륭하나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외다. 첫날 말씀드렸듯이 몽고의 움직임도 그렇고 천하 정세가 심상치 않소. 이러고 있다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오.”

모용오가 희미하게 웃었다.

“종조부(從祖父)의 고견을 들어봅시다.”

모용회의 전신에서 무거운 기세가 피어올랐다.

“본가와 뜻을 함께하지 않는 이민족들도 문제지만 가장 큰 병폐는 탐욕스러운 황제요.”

“……!”

본가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모용회가 말한 ‘탐욕스러운 황제’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모용오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말씀을 좀 가리시는 게 좋겠소.”

“할 말을 했을 뿐이오만.”

“역심을 품은 것이오?”

“역심이라니!”

모용회가 노성을 터뜨렸다.

“가주가 이러셔서 내가 나선 것이오! 본가가 어떤 가문인지 잊으셨소이까?”

“과거의 일이외다.”

“과거가 쌓여 현재가 되는 것이오! 연(燕)을 건국해 중원을 질타한 선조들의 기상을 잊으셨소이까? 그분들의 후손인 우리가 계속 다른 나라의 뒤치다꺼리나 하며 오랑캐라 멸시받는 게 당연한 일이오? 우리는 위대한 모용이외다!”

모용오의 눈에 살기가 맺혔다.

“종조부는 지금 내게 역모를 일으키라 강요하고 있소.”

“강요하는 게 아니오. 그게 옳은 길이라고 말씀드렸을 뿐이외다. 개기의 진짜 의미를 생각해 주시오.”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선조들께서 척박한 요녕에 축성(築城)하시며 굳이 개기(開基)라는 이름을 붙이신 이유를 곱씹어달라는 말이외다. 요녕에 만족하지 말고 외곽에서 힘을 키워 개천(開天)을 하라는 뜻 아니겠소이까?”

“하하. 그게 가능하리라 보는 게요?”

모용오는 어이없어하며 웃었으나 모용회는 진지하게 설명했다.

“때마침 몽고가 준동하며 천시(天時)가 갖춰졌소. 황궁이 있는 하북은 요녕에서 지근거리 아니오? 몽고가 남하할 때를 노려 말달리면 손쉽게 칠 수 있소. 이렇게 지리(地理)까지 맞으니 가주만 마음을 돌려 인화(人和)를 이루면 필히 해낼 수 있소이다.”

모용오의 눈에 맺혀 있던 살기가 전신으로 퍼졌다.

“노망이 드셨나 했더니 미치셨구려.”

점점 커진 살기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향했다.

“그대들도 마찬가지다. 나라를 세우면 잡게 될 권력과 재물에 취해 이런 미친 짓을 따르는가? 정녕 제정신이냔 말이다!”

모용회가 내공을 일으켜 살기를 밀어냈다.

“가주. 말씀이 심하시오.”

“닥치시오! 아직 개기가 끝나지 않았기에 참는 것이외다!”

“가주를 모욕하지도 위력을 쓰지도 않았소. 안건을 제시했을 뿐이니 가주는 우리를 해칠 수 없소이다.”

모용오는 모용회를 노려보다가 살기를 갈무리했다.

“잘 가시오. 배웅은 안 하리다.”

“재고해 주시오, 가주.”

“불가(不可).”

“재고해…….”

“내 대답은 같소이다.”

모용오는 한 자씩 끊어 말했다.

“불. 가. 하. 오. 황제 놀이를 하고 싶으면 직접 하시오. 나를 죽이고 본가를 지운 뒤에.”

모용회와 그를 따르는 자들은 침묵했다.

허나 그렇지 않은 이들과 본가 사람들은 눈을 부릅떴다.

모용오의 말대로 역심을 드러낸 모용회가 벌일 짓은 뻔했다.

자신의 뜻을 따르는 이는 거두고 반(反)하는 자는 죽인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을 만큼 당연한 수순 아닌가?

‘골육상쟁을 벌이게 됐구나!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역모를 입에 담다니! 외부인이 없어 말이 새어나갈 일은 없으니 그나마 다행…… 아!’

사람들의 고개가 천천히 돌았다.

수많은 시선이 귀빈석에 앉아 있는 세 사람에게 꽂혔다.

세 사람 중 한 명인 정광이 손을 내저으며 안심시켰다.

“살다 보면 그런 마음을 품을 수도 있죠. 저희 셋 다 이해해요.”

“…….”

“입도 아주 무거우니까 신경 쓰지 마시고 편하게 말씀 나누시죠.”

“…….”

황당해하는 건 요녕성 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자오와 혜진 역시 입을 떡 벌린 채 정광을 바라봤다.

‘다, 단주! 설마…….’

‘……발설하지 않을 테니 우리를 건들지 말라는 뜻입니까?’

다른 이들도 모두 그렇게 받아들였다.

모두의 눈에 불신의 빛이 떠올랐다.

모용회도 그런 눈빛으로 정광을 쏘아보다가 모용오를 향해 신형을 돌렸다.

그리고 정중히 포권했다.

“그만 가겠소. 가주의 무운을 빌겠소이다.”

모용오는 인사를 받지 않았다.

모용회는 많은 이들을 이끌고 떠났다.

남은 무리는 모용세가 본가와 그들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일부 방계, 호족뿐이었다.

모용오는 그들을 뜨거운 눈으로 둘러보며 명했다.

“성 밖에 있는 식솔들을 모두 불러들이고 성을 폐쇄하시오. 배불리 드시고 편히 쉬셔야 하오. 오늘을 마지막으로 개기가 끝나니 새벽에는 번(番)을 서야 할 것이외다. 자세한 얘기는 안에 들어가서 합시다.”

“네! 가주!”

모두 굳은 얼굴로 명을 내리고 받으며 바삐 움직였다.

정광도 진지한 표정으로 자오와 혜진을 번갈아 봤다.

“가주님 말씀 들으셨죠?”

“네! 단주!”

정광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말씀대로 배불리 먹고 편히 쉬죠.”

“……알겠습니다.”

그들은 모용상현의 전각에서 편히 쉬다가 점심은 물론 저녁까지 배불리 먹었다.

그제야 때가 된 걸까?

정광이 입을 열었다.

“술은 그만하고 차 한 잔씩 하죠.”

자오와 혜진은 바짝 긴장했다.

‘이제 어떻게 할지 말씀하시려는 거구나.’

‘어떤 복안을 내놓으실까?’

정광의 복안은 시작부터 암초에 부딪혔다.

“그냥 떠나는 게 제일 나은데, 전표가 너무 많아 마차나 수레를 써야 해요.”

자오가 한숨을 쉬었다.

“후우. 모용회가 얌전히 보내주진 않을 것 같습니다만.”

같은 게 아니라 확실했다.

정광도 그 사실을 인정했다.

“맞아요. 가능했으면 아까 진작 떠났죠. 설마설마했는데 진짜 역모를 일으키네요.”

“이미 예상하고 계셨습니까?”

“금주(錦州)에서 호광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야 말겠다고 했었으니까요. 자오가 말했던 것처럼 호가가 모용세가 위에 섰던 적이 없는데 영광을 되찾겠다? 모용세가를 도와 옛날처럼 나라를 세워 같이 올라가겠다는 의미죠.”

“아! 그렇군요. 정말 미친 짓입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머릿수로 보면 이쪽이 형편없이 밀리고. 천상 같이 싸워야 하는데 싸우긴 또 귀찮고. 그게 싫어서 이제껏 애쓴 걸 버리고 떠날까 했는데 어차피 안 되니 싸워야겠죠.”

혜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싸워야 할 것 같다는 말씀을 왜 그리 길게 꼬아서 하십니까? 단주답지 않습니다.”

“자오 흉내 낸 건데요.”

자오가 펄쩍 뛰었다.

“다, 단주. 제가 언제…….”

“지금 또 하려고 하시면서.”

혜진이 작게 웃고 자오도 쓴웃음을 지었다.

웃음의 의미는 달랐으나 두 사람 모두 정광의 의도를 알아챘다.

‘이번 싸움이 매우 흉험할 거라 생각하시는구나.’

‘긴장 좀 풀라고 이러셨으니 그래야 해.’

그들이 마음을 가라앉히자 정광이 싱긋 웃었다.

“긴장은 딱 그 정도만 유지하셔야죠. 조금 더 생각해 볼 테니 운기조식 하시고 푹 주무세요. 혜진 소저는 술 드시지 마시고요.”

“……당연한 말씀을 하십니다. 적들이 새벽에 급습할 위험은 없는 것입니까?”

“네.”

정광의 단언에 자오와 혜진은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단주께서도 푹 주무십시오.”

“내일 뵙겠습니다, 단주.”

정광은 두 사람을 보낸 뒤 침상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방문이 열리고 모용오가 들어왔다.

“오셨어요?”

정광이 일어나 인사하자 모용오가 희미하게 웃었다.

“상현이 말대로 자네 방이 된 것 같군. 티끌만 한 위화감도 없어.”

“과찬의 말씀을. 앉으시죠.”

정광이 의자에 앉으며 권하자 모용오도 앉았다.

“바쁘실 텐데.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

“그만큼 어이가 없어 그러네. 설마설마했거늘, 가주 자리에 만족하는 게 아니라 황위에 오를 생각을 하다니…….”

“귀천(歸天)하실 때가 돼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시려나 보죠.”

“그 불꽃은 종조부뿐만 아니라 요녕 전체를 태울 걸세.”

“아주 터무니없는 계획은 아니던데. 해볼 만하지 않나요?”

“무슨 말인가?”

“운만 따르면 중원은 못 먹더라도 황제 폐하와 타협해서 왕위(王位)쯤은 받으실 수도 있을 텐데요.”

“……자네 말대로일세. 솔직히 솔깃했지.”

“그런데 왜 거절하셨어요?”

모용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 끝이 훤히 보이기 때문이네. 명(明) 황실과 중원은 강해. 요녕 전체가 피로 물들 걸세. 언제가 됐든 반드시.”

“맞아요. 결국엔 그렇게 되겠죠. 그런데 이런 말씀을 하려고 오신 건 아닌 것 같은데.”

작게 고개를 끄덕인 모용오가 정광에게 물었다.

“왜 남았나?”

“모용 소저가 혼인하시는 걸 보고 싶어서요. 전표가 너무 많아 전부 가져갈 수 있는 형편도 아니고요.”

“마침 잘됐군.”

모용오는 지체 없이 청했다.

“도와주게나. 섭섭지 않게 사례하겠네.”

“음. 많이 힘들 거예요.”

정광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설명했다.

“대흥장주께서는 몽고가 준동하니 역모를 일으키자 하셨으나 그 반대일 수도 있죠.”

모용오의 눈이 빛났다.

“요녕에서 역모가 일어나면 몽고가 남하할 수도 있다는 말이군.”

“장주님 생각처럼 둘 다일 수도 있고요. 둘이 아닌 하나라 할까. 꽤 오래전부터 사람들을 포섭했을 텐데 준비가 끝날 때쯤 몽고가 움직이는 것도 웃기잖아요.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

한참 침묵하던 모용오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이해했으니 말해보게. 뭘 원하는가?”

정광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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