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295화 (294/569)

2부 24화

용맹(勇猛)

정광은 마상제(馬上祭)에서 모용수수가 우승할 거라 믿었다.

격검제(擊劍祭)에서 그랬듯이 그 믿음을 증명하길 원했으나…….

“대협? 왜 말씀이 없으시죠?”

“…….”

모용중은 분노가 치솟아 부들부들 떨면서도 입을 열지 않았다.

“믿을 만한 인재가 없으신가. 다른 분들은요?”

“…….”

좌중을 간절한 눈으로 쓸어봐도 시선을 마주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정광은 내심 탄식했다.

‘왜 이렇게 몸을 사려? 잃어봐야 얼마나 잃었다고.’

얼마나 잃긴.

아주 많이 잃은 상태였다.

본거지로 돌아갈 여비조차 없을 정도로 탈탈.

분위기가 침울하다 못해 암울할 정도였으니 말 다 한 것 아닌가!

아무리 정광이어도 파장이 났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적당히 먹고 끝내자. 내기도 없는데 마상제는 그냥 건너뛰면 안 되나?’

그럴 수는 없었다.

격검제를 주관했던 중년인이 단상에 올라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시간이 됐으니 장내를 정돈하겠소이다!”

시비들이 탁자마다 쌓인 빈 그릇과 술병을 치웠다.

사람들이 자세를 고쳐 앉자 중년인이 출전자들을 호명했다.

“모용수수, 북산장(北山莊) 모용진오, 본계마가(本溪馬家) 마성호, 호리개로(胡里改路) 류천(劉闡)…….”

준비하고 있던 본가, 방계, 호족, 여진족 청년들이 말을 한 필씩 끌고 나왔다.

총 예순다섯 명이 출전했던 격검제보다 하나 적은 예순넷의 인마(人馬)가 큰 원을 그리며 섰다.

중년인이 손을 들어 올렸다가 내리며 선언했다.

“개전(開戰)!”

“하아!”

말들이 동시에 지면을 박차자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인마와 인마가 격돌했다.

말이 울부짖는 소리, 사람이 외치는 기합, 병장기 부딪히는 소음이 대광장을 울렸다.

지켜보던 사람들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마상비무(馬上比武)는 그만큼 거칠고 위험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엉켜 싸울 땐 더더욱 그랬고.

혜진이 감탄했다.

“마치 전장(戰場) 같습니다. 단주께서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정광은 시큰둥했다.

“전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네? 혹시 경험해 보셨는지요?”

했다마다.

전생에.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해줄 순 없는 일. 정광은 말머리를 돌렸다.

“혼잡해 보이지만 일대일로 싸우고 있잖아요.”

“그렇긴 합니다.”

“마상이라 중심을 잡기 힘들고 낙마했다간 말에 차일 수도 있지만 그야 제 복이죠. 무엇보다 기마전(騎馬戰)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돌격, 기사(騎射), 집단 운용이 없으니 편하게 보세요.”

“말씀은 이해했으나 긴장이 풀리지 않습니다.”

“목이 타셔서 계속 술을 드시는 거예요? 아닌 것 같은데.”

“아미타불…….”

마상비무에서 이기기 위해선 무공과 기마술은 물론이요, 말의 기량까지 필요했다.

셋을 모두 갖추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셋, 둘, 하나. 또는 무(無).

각자 갖춘 것이 다른 만큼 출전자 간의 격차는 컸다.

자연히 마상제는 격검제보다 빨리 진행됐다.

힘에서 밀려 낙마하거나 중심을 잃고 칼을 맞는 이가 속출했다.

정광은 출전자들을 둘러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적아(敵我)를 확실히 인지하고 싸우는구나. 격검제가 너무 노골적이긴 했지.’

본가는 방계, 호족, 이민족과 싸웠다.

그들은 본가보다 수가 많아 본가와 싸우는 자들은 최선을 다하고 자신들끼리 겨룰 땐 되도록 피를 안 보려 했다.

‘그래 봐야 들러리인 녀석들이고. 진짜는 저 둘인데…….’

일찌감치 일차 비무를 끝낸 뒤 쉬고 있는 두 사람을 돌아봤다.

한 명은 모용수수, 다른 한 명은 건주여진(建洲女眞) 호리개로 부족의 류천이라는 청년이었다.

정광은 류천을 주목했다.

‘모용수수의 상대라 할 만한 놈은 역시 저놈밖에 없어.’

개기(開基)가 시작되기 전날, 모용진궁과 함께 눈에 띄었던 단단한 기운을 품은 자였다.

‘무공이야 별것 없지만 말깨나 타던데 괜찮으려나.’

정광의 기준이 높아서 그렇지, 참가자들은 기마민족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기마술에 능했다.

허나 류천은 그들 중에서도 특출 난 자질이 엿보였다.

‘상황을 보고 어찌할지 정하자.’

일단 얌전히 지켜보기로 했다.

격검제에서 있었던 불의의 사고를 정광 탓이라 의심하며 눈을 번뜩이는 자들이 있는데 뭐 하러 귀찮은 짓을 벌이겠는가.

더구나 류천이 속한 호리개로는 대대로 모용세가에 호의적인 부족이었다.

그런 부족을 대표해 나온 전사를 수작을 부려 죽인다?

여진족 전부를 적으로 삼을 일 있나. 들통이 나든 말든, 어마어마한 후폭풍이 몰아칠 게 분명했다.

‘다들 힘내라. 류천 저놈에게 한 칼이라도 먹여.’

이차 비무가 시작됐다.

류천은 손쉬운 승리를 거뒀다.

삼차 비무가 시작됐다.

류천은 여전히 쉽게 이겼다.

‘뭐 하냐? 힘 좀 내라 했지! 새색시를 위험하게 하지 마!’

사차 비무에 나선 본가 청년이 한칼 먹였으나 옷깃만 잘랐을 뿐.

류천은 건재했다.

‘무량수불…… 아미타불…… 또 누가 있더라?’

원시천존도 부처도 정광의 청을 귓등으로 흘렸다.

류천은 오차 비무에서 승리하고 마지막 결전을 준비했다.

상대는 역시 쉽게 이기며 올라온 모용수수였다.

단상에 선 중년인이 크게 외쳤다.

“최후의 비무를 치르기 전에 한 식경 동안 휴식을 취하겠소! 그때까지 각자의 볼일을 보기 바라오!”

격검제를 했을 때와 달리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모두 긴장한 얼굴로 자리를 지켰다.

정광도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지는 않았으나 손을 들고 흔들었다.

“모용 소저! 불취검 소저가 술 한 잔 따라드리며 무운을 빌고 싶다고 하는데요!”

“…….”

모용수수가 무뚝뚝한 얼굴로 탁자 앞에 와서 섰다.

혜진에게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크기의 손을 내밀며 무겁게 말했다.

“주시오.”

정광을 흘깃 보며 어이없어하던 혜진이 술을 한 잔 따라줬다.

모용수수는 술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용모와 무공처럼 호쾌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얼굴이 빨개졌다.

정광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술 못 하세요?”

“한 잔까지는 괜찮소.”

“전혀 안 괜찮으신 것 같은데.”

“얼굴이 붉어졌을 뿐이외다. 선천적인 것이니 신경 쓰지 마시오.”

“아. 어쩐지. 발음은 아주 또렷하시네요.”

“잘 마셨소. 그럼.”

“잠깐만요.”

정광이 전음으로 물었다.

-이기실 수 있죠?

-당연한 말을. 그만 가서 운기조식하겠소.

-모용진궁이 그랬듯 류천도 숨겼던 내공을 다 드러낼 거예요.

-나도 그럴 테니 상관없소이다. 헌데 왜 부른 것이오?

정광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격검제에서처럼 또 이상한 일이 일어날 순 없어서요. 우연이 연달아 겹친다? 증거고 뭐고 간에 난리가 나겠죠.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소.

-뭔데요?

모용수수의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딴소리 안 나오게 압도적으로 이기겠소이다. 모용다운 방식으로.

정광이 어깨를 으쓱했다.

-괜히 오시라 했네. 하다못해 긴장이라도 풀어드리려고 했는데.

-덕분에 마음을 더 굳히게 됐소. 괜한 짓은 아니었다는 말이외다.

모용수수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무시하고 자신의 자리로 갔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조식했다.

그녀의 전신에서 폭발적인 기운이 솟아났다.

하지만 이는 류천도 마찬가지.

정말 놀라운 일이었으나 이미 한 번 경험한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는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긴장감이 풀린 건 아니었다.

손에 땀을 쥐고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비무를 주관하는 중년인도 얼굴을 굳힌 채 단상에 올랐다.

“시간이 됐소!”

사람들의 긴장감이 깊어지며 장내 부위기가 더 무거워졌다.

“두 출전자는 마지막 마상제를 올리시오!”

두 쌍의 사람과 말이 서로를 향해 달렸다.

먼저 손을 쓴 건 류천이었다.

창자루를 겨드랑이에 끼어 수평으로 세운 채 모용수수에게 쇄도했다.

노리는 건 그녀의 목!

모용수수도 류천을 향히 말을 몰며 병기를 휘둘렀다.

거대한 참마도(斬馬刀)가 바람을 찢어발기며 창도 함께 쪼개려 했다.

두 인마가 스쳐 지나가며 병기가 부딪히려는 순간!

휘릭-

류천의 신형이 희끗거리더니 말 옆구리에 매달렸다.

그 와중에도 한 손으로는 창을 굳게 잡고 있었다.

놀라운 묘기였지만 모용수수는 당황하지 않았다.

어깨를 순간적으로 움츠렸다가 펴며 창대를 튕겨냈다.

텅!

별 소득을 거두지 못한 그들은 조금 더 나아간 뒤 말머리를 돌려세웠다.

류천의 눈매가 가늘어져 있었다.

모용수수는 그의 눈을 보며 이를 지그시 물었다.

‘역시 지금까지 보여줬던 게 다가 아니군.’

실력을 숨겼던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기에 두 사람은 서로를 더 경계하게 됐다.

‘무공보다 기마술이 대단해. 잡으려면 애먹을 것 같은데.’

말의 목을 치고 두 다리로 서서 겨루면 쉽게 이길 자신이 있었지만, 마상제에서 사람이 말을 공격하는 건 금기(禁忌)였다.

전장에서야 당연한 일이었으나 기수를 낙마시켜 싸울 거면 일반 비무로 끝내지 뭐 하러 마상비무를 열겠는가.

‘어쨌든 이긴다. 압도적으로.’

오라비인 모용상현이 모용진궁이라는 대단한 고수와 싸워 이겼으나 찜찜한 감을 남겼다.

대흥장을 따르는 무리가 어떤 일을 벌일지 확신할 순 없었지만 이 싸움에서 확실히 이겨 사기를 낮춰야 했다.

‘본가 쪽은 올리고!’

발뒤꿈치로 말의 배를 쳤다.

지면을 박찬 말이 류천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렸다.

류천의 가늘어졌던 눈이 더 작아졌다.

마치 말과 말을 충돌시키려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럴 리가 없지. 허세야.’

허세에 밀려서야 쓰나.

기마전은 기세싸움.

원래는 말의 긴 목과 머리를 방패 삼아 요리조리 피하며 싸울 셈이었지만 마음을 고쳐먹었다.

류천도 모용수수를 향해 똑바로 말을 몰았다.

최소한 충돌 직전에는 방향을 틀 터. 그 틈을 노려 찌르면 됐다.

‘거리가 조금 벌어져도 상관없어.’

참마도가 아무리 길어봐야 창보다 길 리 있나.

그의 병기가 더 길었다.

류천은 그대로 말달리며 창자루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얼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곧 충돌할 상황인데도 모용수수는 불타는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미친!’

찌르고 자시고 할 판이 아니었다.

반사적으로 한쪽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말이 급격히 방향을 틀어 모용수수의 말을 가까스로 비껴갔다.

‘망할! 죽어!’

류천은 허리를 젖히며 상체를 돌렸다.

창도 따라 돌며 휘둘러졌다.

창은 닿으나 참마도는 닿지 않는 거리!

‘피하면 일단 달리다가 반전해서 다시…….’

빠각!

‘뭐?’

어느새 말고삐를 놓은 모용수수가 두 손으로 창대를 받아냈다.

그 충격에 손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나며 피도 튀었으나 모용수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하아!”

그대로 달리며 손에 힘을 줬다.

그녀의 피를 머금은 창대가 하늘을 향해 세워졌다.

너무나 황당한 대응에 놀란 류천은 창을 놓을 새도 없이 딸려 올라갔다.

말은 주인을 잃은 채 멀리 사라졌다.

허공에 뜬 주인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모용수수를 보며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천하에 이런 미친년이 또 있을까?’

모용수수는 그냥 미친년이 아니었다.

“하압!”

한쌍의 손에 굵은 힘줄이 솟으며 피가 튀었다.

그 손이 거대한 반원을 그리며 창대를 내려쳤다.

말달리는 기세에 신력까지 불어넣은 일격!

류천은 창대에 밀려 바닥에 쳐박혔다.

쿠웅!

“크헉!”

입에서 비명과 함께 핏줄기가 터져 나왔다.

그가 몇 장이나 데굴데굴 구르다가 뻗었을 때, 모용수수도 달리던 말을 멈춰세웠다.

그리고 무심한 눈으로 주위를 쓸어 봤다.

사람들은 놀란 얼굴로 그녀를 주시했다.

‘저렇게 담대할 수가 있나!’

‘그런 인재라 듣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모용수수는 시선을 돌려 단상의 중년인을 바라봤다.

중년인은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열었다.

“마지막 비무가 끝났소이다! 다행히 큰 사고는 없이 말이외다!”

류천이 땅바닥에 너부러진 채 간헐적으로 움찔거렸으나 아직 살아 있는 게 어딘가.

“정당한 비무 끝에 나온 결과요! 이 결과에 불복하는 이는 지금 말하시오!”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꼬투리를 잡으래야 잡을 수 없는 완벽한 승리였다.

중년인이 선언했다.

“올해의 마상제는 공녀 모용수수의 승리로 끝을 맺었소! 그녀의 용맹이 하늘에 닿기를!”

모두 일제히 따라 외쳤다.

기쁨과 실망이 뒤섞인 외침이었다.

“그녀의 용맹이 하늘에 닿기를!”

정광은 손뼉을 몇 번 친 뒤 모용수수를 가만히 뜯어봤다.

‘듬직한 안주인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팽강휘가 안주인 하고 모용수수가 바깥일을 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

크게 안 다친 것도 다행이었다.

얼굴에 긴 상처라도 생겼으면?

첫 만남에서 팽강휘가 얼마나 긴장하겠는가?

‘여기까진 잘됐고. 앞으로가 문제인데…….’

시선을 돌려 모용회를 봤다.

그는 굳은 얼굴로 여러 방계, 호족, 이민족 수장과 눈빛을 교환하고 있었다.

결심을 굳힌 눈빛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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