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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마협-293화 (292/569)

2부 22화

잔재주

돈이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고 했던가.

그 말이 사실인진 모르나 최소한 사람을 홀릴 수 있다는 건 확실했다.

그 증거로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정광이 꺼내놓은 전표 뭉치에 못 박혀 있었다.

모용중 역시 마찬가지.

그는 황당한 얼굴로 전표 뭉치와 정광을 번갈아 봤다.

“……자네 지금 뭐 하자는 겐가?”

“오. 통도 크셔라.”

정광의 시선이 자오를 향했다.

“각응(角鷹).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하시네요.”

“네, 단주.”

자오의 손이 창공을 나는 매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그 결과 탁자 위에 또 다른 전표 뭉치가 생겼다.

정광은 정중한 어조로 모용중에게 물었다.

“대협. 이제 흡족하십니까?”

“…….”

“죄송합니다. 대협의 그릇을 너무 작게 봤군요. 각응.”

“네, 단주.”

탁자 위에 전표 뭉치가 몇 개나 더 쌓이자 모용중이 고함을 질렀다.

“내가 전표를 더 꺼내라 했나? 지금 뭐 하는 짓이냐고 묻지 않았는가!”

“왜 갑자기 화를 내세요?”

정광이 두 팔을 벌리며 설명했다.

“저는 대공자가 이길 거라 믿어요. 그 믿음을 증명하는 거죠.”

“…….”

“이제 대협 차례네요. 모용진궁 소협을 얼마나 믿으시는지 증명해 주시죠.”

“…….”

“어서요. 설마 못 믿으시는 건 아니죠? 그럼 그분이 너무 불쌍한데.”

모용중이 정광을 쏘아보며 씹어뱉듯 말했다.

“진궁이 이긴다. 내 명예를 걸지.”

“그거, 얼마짜린데요?”

“……!”

“가늠이 안 되네. 너무 추상적이라서.”

정광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믿음을 표현하시려면 확실하게 하시죠. 사내답게, 무인답게요.”

잔말 말고 돈을 걸라는 얘기.

모용중의 눈에 맺혀 있던 한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치솟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을 쓰려는 순간!

차분한 음성이 그를 말렸다.

“그만. 개기(開基)를 치르는 중인데 피를 볼 생각인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개기’를 언급한 모용세가주 모용오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네. 자중하게나.”

모용중이 반발했다.

“가주. 개기를 모욕한 건 이자외다. 제(祭)를 지내는데 내기를 하자고 부추기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외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격검제(擊劍祭)도, 이어서 열릴 마상제(馬上祭)도 형태는 비무였으나 본질은 제사였다.

더없이 엄숙하게 진행되어야 하거늘, 노름을 하자니? 그것도 외부인이 말이다.

그 외부인이 항변했다.

“내기라뇨. 대공자의 승리를 확신하냐고 핍박하셔서 제 믿음을 증명했을 뿐인데. 그냥 모용진궁 소협이 이길 거라고 맞장구쳐야 하나요? 다들 그분 편만 드시는데 저까지요? 대공자가 너무 불쌍해지지 않습니까. 지금도 기가 죽어 있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모용상현에게 옮겨졌다.

정광의 말과 달리 쓴웃음을 짓고 있을 뿐, 기가 죽은 기색은 없었다.

하지만 정광은 꿋꿋했다.

“저라도 믿으니까 얼굴이 좀 피셨네. 힘내세요, 대공자. 제가 있잖아요.”

“……고맙소.”

“뭘요. 무인답게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대답해 주세요. 승리로요. 아셨죠?”

“하하하!”

모용상현은 쓴웃음을 지우고 대소를 터뜨렸다.

정광의 속셈이 빤히 보였으나 뿌듯하기도 했다.

상대를 편드는 이들 앞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 않은가.

“단주의 말이 맞소. 내 승리로 답하리다.”

“다들 들으셨죠? 대공자께서 제 믿음에 호응하시는 걸. 이게 신뢰요, 증명이죠.”

정광은 모용중과 그 주변에 있는 자들을 천천히 둘러봤다.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그쪽은 믿는다고는 하시는데 증명을 못 하시네요.”

“…….”

“아. 명예라는 눈에 안 보이는 것으로 하셔서 제가 몰라보는 건가.”

참다못한 호광이 나섰다.

“무슨 시정잡배도 아니고. 혀를 요사스럽게 굴리는구나.”

정광이 바로 받아쳤다.

“저 귀빈인데. 그것도 가주님께서 직접 초청하신 귀빈 중의 귀빈.”

“…….”

“그런데 시정잡배라뇨. 그럼 가주님의 수준도 그렇다는 말씀이죠? 가주님을 모욕하신 거네. 가주라고 같은 가주가 아닐 텐데요.”

“……!”

호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모용오를 힐끔 보니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호광은 얼굴을 억지로 펴며 정중히 포권했다.

“가주. 오해하지 말아주시오. 그런 뜻이 아니었소이다.”

“그렇게 들렸소만.”

모용오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허나 목소리에는 강한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개기를 믿고 이러는 것이오?”

“아, 아니외다.”

“개기를 치르는 중이니 나를 모욕하고도 괜찮을 거라 믿으신 거요?”

“아니오! 절대 아니오!”

호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다른 이들의 표정도 볼만했다.

개기는 모용세가의 선조들을 기리는 행사.

그 행사에서 현 가주를 모욕한다?

바로 칼을 맞아도 할 말이 없는 행위 아닌가!

다행히 모용오는 일을 키우지 않고 주의만 줬다.

“천하유람단주는 나의 손님이자 본가의 손님이오. 함부로 대하지 마시오.”

“아, 알겠소이다.”

“그리고…….”

모용오는 모용중을 물끄러미 봤다.

“아우, 귀빈을 도발해 놓고 손을 놔서야 쓰나.”

“…….”

“귀빈이 증명한 만큼 자네도 증명하게. 이대로 물러나면 본가의 체면이 손상되지 않겠나?”

모용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祭)를 지내는 중에 내기를 하는 건 잘못된 것 같소이다.”

모용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귀빈이 먼저 그랬으면 막았을 것이나 자네가 먼저 도발했으니 공평하게 대할 수밖에 없네. 내기가 아니라 믿음을 증명하는 것이 된 걸세. 종조부(從祖父)께선 어찌 생각하시오?”

이제껏 가만히 지켜보던 모용회가 자신의 손자를 노려봤다.

모용중이 어쩔 줄 몰라 하자 그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못난 놈. 진궁이를 칭찬해 기운을 북돋으라 했더니 쓸데없이 일을 키우고 수습도 못 해?

-죄, 죄송합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그 한 번이 대체 몇 번이더냐!

모용회는 손자를 질타한 뒤 고개를 돌려 모용오와 시선을 맞췄다.

“가주의 말이 옳소.”

모용오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좀 더 짙어졌다.

“아우. 종조부께서 인정하셨네. 비무가 시작되기 전에 빨리하게나.”

“……알겠소이다, 가주.”

모용중은 이를 악물고 일행의 돈을 거뒀다.

그리고 그것을 정광의 탁자에 올려놨다.

턱.

“이제 됐는가?”

정광의 눈이 커졌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

“제 믿음의 십분지 일도 안 되잖아요. 모용진궁 소협을 그것밖에 못 믿으세요?”

“……그게 아니라…….”

모용중은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당장 가진 돈이 그것밖에 안 된다고 어찌 말하겠는가.

“와. 차라리 명예를…… 아니지. 그래도 이게 더 많은 건가.”

정광의 조롱에 대흥장을 따르는 방계, 호족, 이민족이 분노했다.

하지만 이성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은 모용상현의 기도를 한 번 더 살폈다.

‘확실히 비룡이라 불릴 만큼 강하긴 한데…….’

‘으음. 아무리 봐도 모용진궁이 더 강해.’

‘질 리 없다. 가자!’

거대한 해일이 일었다.

“내가 보태겠소!”

“나도 있소이다!”

“얼마면 되겠소?”

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달려들었다.

자오에게 털려 이미 개털이 된 호광만 빼고.

탁자에 수많은 전표와 금원보가 쌓였다.

오히려 정광이 올린 것보다 더 많을 정도!

잔뜩 일그러져 있던 모용중의 얼굴이 빳빳하게 펴졌다.

“자네의 믿음이 너무 적군.”

“…….”

“대공자가 서운해하겠어. 하하.”

정광은 고개를 푹 숙이고 모용중은 빳빳이 세웠다.

그 꼴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잠자코 지켜보던 모용세가 본가 사람들이 나섰다.

“단주! 내가 돕겠네!”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다들 뭐 하는가? 단주를 돕지 않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오려는 그때.

정광이 고개를 숙인 채 외쳤다.

“뜻은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아니, 왜…….”

“이건 제 싸움이니까요!”

정광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제 믿음이 적다고 하셨죠?”

모용중의 얼굴이 불안감으로 물들었다.

“……그랬네만.”

“믿음이야 또 쌓아 올리면 되죠. 불취검.”

“알겠습니다, 단주.”

혜진이 술잔을 놓고 일어나 봇짐을 끌렀다.

봇짐에서 전표 뭉치가 나와 탁자에 쌓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사람들의 입이 점점 크게 벌어졌다.

전표로 만든 탑이 하늘을 향해 치솟다가 멈추자 정광이 손바닥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그래. 믿으려면 이 정도는 믿어야지.”

“…….”

“혼을 불사르진 못하더라도 전 재산은 태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 재산은 태워야 한다?

호광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전표 탑에 그의 재산이 섞여 있다는 걸 알았으면 바로 쓰러졌을지도.

정광은 입을 떡 벌린 사람들을 보며 씩 웃었다.

“자. 이제 모용세가의 믿음을 볼까요? 그 저력을요.”

“……!”

모용세가의 저력은 강했으나 난잡했다.

그들이 아무리 부자라 해도 정광처럼 많은 재물을 짊어지고 다닐 리 있나.

전표, 보석, 금원보, 은자, 철전은 물론이요, 별의별 장신구에 선물을 실어왔던 수레까지 나왔다.

정광은 모용세가주에게 물건값을 감정해 주길 요청했고, 상인 차림의 사내들이 달라붙어 감정이 진행되는 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탈탈 털어내면서 병기는 하나도 안 내?’

주병기야 그렇다 쳐도 흔한 비수 하나 없다니.

‘개기가 끝나면 성을 나갔다가 바로 공격할 속셈이네.’

그 전에 대공자 모용상현과 공녀 모용수수를 율법에 어긋나지 않게 죽여 사기를 꺾는다.

싸움에서 이긴 뒤, 모용 씨의 큰 어른인 노물(老物)이 아직 어린 이공자나 삼공자를 소가주로 삼고 섭정(攝政) 짓거리를 한다.

꽤 깔끔한 수였다.

‘기를 꺾어놓길 잘했어.’

아직 완전한 건 아니었다.

전표를 질러 기를 꺾으면 뭐 하는가?

고스란히 돌려받고 상대 것도 따야 제대로 꺾는 거지.

정광은 정신을 가다듬고 있는 모용상현을 흘깃 봤다.

‘알아서 잘하겠지.’

잘 안 돼도 회수할 방법은 있었다.

-자오. 대공자가 지면 판돈 전부 들고 튀세요. 너무 많나? 값나가는 것들만이라도요.

-어, 어디로 말입니까?

-하북성 쪽요. 제가 ‘나, 나를 배반하고 이런 만행을 저지르다니! 직접 추적해서 잡겠습니다!’ 이렇게 외쳐도 놀라지 마시고요.

-……이미 놀랐습니다만.

-뭘 그런 걸 가지고. 믿을게요.

-……감사합니다.

그때, 정광의 또 다른 믿음을 받는 모용상현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단상에서 비무를 주관하던 중년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대공자. 휴식 시간이 거의 끝나가네. 이제 와서 뭐 하는 겐가?”

“금방 끝납니다, 숙부.”

중년인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을 뿐 더는 나무라지 않았다.

곧 끝난다는데 뭐라 할까?

‘대체 뭘 하려고?’

불쾌감이 사그라들고 호기심이 일어났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궁금한 눈빛으로 모용상현을 주시했다.

그리고 잠시 뒤.

그들의 눈이 커졌다.

‘저, 저건!’

‘어, 어떻게?’

모용상현의 전신에서 폭발적인 기운이 솟아나고 있었다.

‘내, 내공이…….’

‘……늘어나고 있어?’

정광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탁자에 쌓인 판돈을 쓸어봤다.

‘자오와 혜진이 고생깨나 하겠네. 이렇게 무겁고 커서야 원.’

애쓴 보람이 있었다.

모용상현의 주요 혈도에 녹여놓은 수은망극단(受恩罔極丹)의 효능이 운기조식 한 방에 내공으로 화해 단전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하잘것없는 잔재주에 불과했으나 적시 적소에 쓰면 천고의 비기가 되는 법!

‘맛이 어떠냐? 모용진궁인지 뭔지 안색이 하얗게…… 어?’

이번엔 정광의 눈이 커졌다.

모용진궁도 모용상현처럼 가부좌를 튼 채 운기조식하고 있는 것 아닌가!

‘……설마?’

모용상현이 그랬듯, 모용진궁의 전신에서도 폭발적인 기운이 솟아났다.

정광의 속도 폭발했다.

‘이런 비열한 놈들을 봤나!’

명문가의 자손이란 놈들이 이따위 잔재주를 부리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다른 사람들도 모두 놀랐다.

“헉! 뭐, 뭐야?”

“내공을 억누르고 있었구나!”

“대체 어떻게?”

어떻게긴!

잔재주지!

정광은 분노 어린 눈으로 모용회와 모용중을 번갈아 봤다.

모용회는 여전히 무게를 잡았으나 모용중은 조소 어린 눈길을 보내며 웃고 있었다.

정광의 입이 천천히 벌어지며 이가 드러났다.

‘웃어?’

그렇다면 울게 해줘야지.

-대공자!

정광의 전음에 이제 막 운기조식을 끝낸 모용상현이 대답했다.

-말씀하시오.

-상대분도 내공을 숨기고 있었어요. 그래 봐야 대공자와 비등한 정도니 걱정하지 마세요.

-정말 비등하오?

-살짝요.

-내가 모자란단 말이구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요.

모용상현이 가부좌를 풀고 일어나 몸을 곧게 세웠다.

그리고 단호한 표정으로 굳게 선언했다.

-단주는 할 만큼 했소. 이제부턴 내가 책임지리다.

빈말이 아니었다.

그의 전음, 표정, 자세에서 진한 의지가 물씬 배어 나왔다.

허나 정광에겐 결과만이 중요했다.

-자오! 혜진 소저!

-네, 단주!

-말씀하십시오!

정광의 전음에 무게가 실렸다.

-자오한테는 아까 말씀드렸고. 혜진 소저, 만약 대공자가 지면 그 즉시 판돈을 들고 튀세요. 방향은…….

그때, 모용진궁도 운공을 마치고 일어섰다.

모용진궁과 모용상현.

두 기재가 서로를 노려보며 마주 섰다.

대흥장 쪽 사람들은 기쁜 얼굴로 환호했고, 본가 사람들은 불안한 기색으로 웅성거렸다.

모용세가주 모용오의 눈도 살짝 흔들렸다.

본가 사람인 단상 위의 중년인도 표정이 좋지 않았으나 맡은바 일을 해야 했다.

“감정은 끝났는가?”

“네!”

정광보다 상대편 판돈이 더 많았으나 현물이 많은 걸 감안해 동등한 가치로 치기로 했다.

중년인이 무거운 얼굴로 외쳤다.

“시간이 됐소!”

장내가 적막에 잠겼다.

“두 출전자는 마지막 격검제를 올리시오!”

적막을 깨고 두 사람이 움직였다.

채앵!

노물 모용회의 주름이 펴지고.

젊은 정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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