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292화 (291/569)

2부 21화

그깟 명예 따위

모용상현이 봤을 때 정광은 제멋대로인 위인이었으나, 중요한 일에 한해서만큼은 절대로 허튼소리를 하는 이가 아니…….

‘……었나?’

최소한 지금은 아닌 것 같았다.

아비 모용오에게 그 말을 전했더니 그도 그렇게 받아들였다.

“다녀오너라. 수아와 함께.”

모용오는 허락으로 끝내는 게 아니라 단단히 당부했다.

“그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네, 가주.”

“그가 그리하자 한 건 그만한 자신이 있어서일 터. 주는 건 모두 받거라. 훗날 제대로 갚으면 돼. 장백삼으로 그랬듯이.”

“명심하겠습니다.”

“고생해라. 어떤 방법인지는 모르나 쉽진 않을 게야.”

“…….”

모용상현은 불안한 얼굴로 아비를 봤다.

자신이 아니라 곧 모용회와 독대할 아비가 걱정스러워서였다.

그 기색을 눈치챈 모용오가 희미하게 웃었다.

“종조부(從祖父)가 어떤 마음을 먹었든 간에 개기(開基) 동안에는 나를 해칠 수 없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순순히 당할 내가 아니고.”

“진옥…… 천하유람단주의 비책으로도 그분의 마음을 돌릴 순 없으리라 보십니까?”

“아까의 얘기들을 되짚어보면 그 이상을 원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모용상현의 눈꺼풀이 떨렸다.

모용오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사라졌다.

“그가 근래 들어 많은 이들과 접촉한다는 얘기를 듣고도 제지하지 않은 게 후회되는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해마다 개기가 시작되기 전에 마음이 흐트러진 이들을 따로 불러 단속하시던 분 아닙니까.”

“이번에도 그런 것일 거라 믿은 게 후회된다는 게다.”

“아직도 이해가 안 갑니다. 누구보다 본가를 위하셨던 분이 왜…….”

“그래서 이런 것이겠지. 헛된 꿈을 이루려 할 줄이야…….”

모용오는 혼란스러워하는 아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또 다른 후회를 할 순 없다.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야 해. 다녀오거라.”

잠시 뒤.

모용수수를 데리고 원래는 자신의 방이었으나 정광의 것이 되다시피 한 곳에 간 모용상현은 바로 후회하게 됐다.

“어? 진짜 오셨네.”

“…….”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칭찬해 드린 거니까요.”

정광은 두 사람의 어깨를 다독이며 채근했다.

“자. 시간 없으니 빨리 가죠. 운기조식부터 해보세요.”

“……운기조식을 말이오?”

“네. 문제 있나요?”

있다마다.

친인 앞에서도 삼가야 할 일을 외인 앞에서 어찌?

놀랍게도 정광은 한술 더 떴다.

“두 분의 명문혈(命門穴)에 손을 대고 진기 운용을 살필 테니 거부하지 마시고요.”

“……!”

두 사람의 눈이 커졌다.

모용세가의 무공을 파악하겠다는 말 아닌가!

오누이 중 더 직설적인 모용수수가 거부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있어요. 지금껏 많이 해왔거든요.”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받아들였단 말이오?”

“소저의 부군이 될…… 너무 나갔나. 소저께서 곧 만나보시게 될 하북팽가의 이공자만 해도 그러셨는걸요.”

모용수수가 또 반문하려 하자 정광이 품속에 손을 넣었다가 꺼냈다.

그 손 위에는 검은 단환 두 알이 놓여있었다.

“이거, 나름 영약이라 할 만한 거예요. 만드느라 고생깨나 했죠. 약효를 내일 아침까지 녹이려면 제가 두 분의 운기법을 알고 도와야 해요. 그래도 싫으세요? 그럼 말고요.”

모용 남매는 정광의 눈을 빤히 주시하다가 옆에 있는 자오와 혜진을 봤다.

두 사람이 단환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자 모용 남매의 마음이 흔들렸다.

‘저 수다스러운 자가 놀라서 말도 못 하다니. 영약이 확실하구나.’

‘그간의 언행을 보면 불취검은 명문정파의 제자가 확실해. 그런 자가 놀랄 정도의 영약이란 말이겠지.’

사실 자오와 혜진이 놀란 이유는 정광이 ‘자기 사람’이 아닌 사람에게 영약을 주려 해서였다.

‘가만. 달리 생각하면 단주가 모용 남매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거구나.’

무혈단원들처럼 동료가 된다는 의미.

그들은 따뜻한 눈길로 모용 남매를 보며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정광에 대한 신뢰와 가주이자 아비인 모용오의 명에도 불구하고 망설이던 남매가 마음을 굳혔다.

‘어차피 다른 길은 없어.’

‘아버님과 오라버니가 그를 믿으니 나도 믿어본다.’

두 사람의 눈빛이 바뀌자 정광이 빙긋 웃었다.

“진작 이러시지. 비울 여건이 안 돼 채우기만 하는 게 아쉽지만 받으세요. 이 영약의 이름은…….”

생각해 보니 이름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시꺼메서 대충 흑단(黑丹)으로 지었는데 너무 없어 보이지 않는가.

“수은단(受恩丹)…… 아니지. 수은망극단(受恩罔極丹)입니다.”

“…….”

“역시 놀라시는구나. 이름만 들어도 대단한 영약인 걸 아시겠죠?”

대단하긴 했다.

‘은혜를 입는 단환’도 아니고 ‘입는 은혜가 끝도 없는 단환’이라니.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무거워지지 않는가.

황당한 이름에 어이없어하는 남매에게 정광이 엄숙한 목소리로 채근했다.

“시작하죠. 늦기 전에.”

모용세가의 내공심법은 끝없는 대평원을 말달리는 그들의 성정 그대로라 할까.

정교한 맛은 떨어지나 시원시원했다.

‘좋아. 시원시원하게 가자.’

정광은 모용 남매를 폭풍처럼 거세게 몰아붙였다.

시간이 흘러 동이 틀 무렵이 되자 목표로 했던 것들을 전부 이룰 수 있었다.

그들이 영약의 효능을 제대로 흡수하게 하는 것은 물론 무공까지 잠깐이나마 봐준 것이다.

‘이럴 수가…….’

‘사람이 어떻게…….’

정광은 경악과 감동이 뒤섞인 얼굴로 말조차 꺼내지 못하는 남매에게 신신당부했다.

“편법을 써서 아쉽지만 할 만큼 했어요. 제가 이렇게까지 해드렸는데도 죽으면 아시죠?”

알고 싶지 않았으나 알 수밖에.

정광의 눈에 맺혀 있는 의지는 너희가 죽으면 구천을 떠돌게 될 혼까지 죽여 버리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반드시 이기겠소.”

두 사람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정광이 크게 손뼉 치며 기뻐했다.

“패기 좋네요. 나아지시긴 했지만 살짝 힘들 것도 같은데.”

“…….”

“…….”

“농이에요, 농. 반은요.”

정광은 그들의 등을 두드리는 척하며 슬쩍 밀었다.

“그만 나가셔서 일보세요. 비무가 시작되기 전에 사람 좀 보내서 깨워주시고요.”

* * *

운기조식을 한 뒤 한 시진 넘게 잔 정광은 모용상현이 보낸 사람을 따라 대광장으로 향했다.

당연히 자오와 혜진도 함께였는데, 그들은 어제보다 더 무거워진 장내의 분위기를 느끼며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젠 아주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는구나.’

‘비무 중 사망자도 간혹 나온다 했지. 무사히 끝날 수 있을까?’

그런 그들과 달리 정광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귀빈석으로 가던 도중 근처에 있던 시비에게 술과 간단한 요깃거리를 부탁했다.

마침 아는 얼굴이라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어 편했다.

“우 소저. 저번에 가져다주신 양의 사분지 일이면 돼요.”

정광이 모용세가에 온 이래 계속 식사를 날라다 준 우향이 펄쩍 뛰었다.

“소, 소협. 소저라는 말씀은 거둬주십시오.”

“그럼 뭐라 불러요? 우 누이?”

우향은 절세고수보다 손을 빠르게 저었다.

“가, 감당하지 못할 말씀을. 빠, 빨리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귀빈석에 앉아 얼마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우향은 어린 시비인 오소와 함께 요리와 술을 가져왔다.

정광이 부탁한 것보다 배는 많은 양이었다.

“어? 너무 많은데.”

“나, 남기시면 됩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소협.”

우향은 오소를 끌고 재빨리 사라졌다.

정광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천천히 즐기기로 했다.

물론 지킬 건 지키면서.

“두 분 모두 요리는 마음껏 드시되 술은 조금 자제하세요.”

자오와 혜진이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싸움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배를 든든히 채우라는 말씀이구나.’

‘당연히 술은 삼가야겠지. 맛만 보는 거다, 맛만.’

그때, 모용세가주 모용오가 단상에 올랐다.

지난밤 노물(老物) 모용회와 벌였던 담판에서 별다른 소득을 못 얻었는지 살짝 굳은 표정이었다.

허나 목소리만큼은 담담했다.

“좋은 아침이외다. 편히 주무셨소이까?”

그럴 리가 있나.

그래도 다들 그렇다고 답했다.

모용오는 그들을 천천히 둘러본 뒤 포권하며 외쳤다.

“개기(開基)의 뜻을 이어받고 기리기 위해 지금부터 격검제(擊劍祭)를 지내겠소! 용맹한 대결에 적은 피가 있기를!”

모두가 포권하며 따라 외쳤다.

“용맹한 대결에 적은 피가 있기를!”

정광은 술을 마시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두 번 외쳐본 게 아니네. 아주 딱딱 맞아.’

용맹하게 싸우면 피를 안 볼 수 없고, 피를 적게 보려면 소극적으로 겨뤄야 한다.

과격하기로 유명한 기마 민족들이 그 이치를 빤히 알면서도 이런 소리를 하는 이유는…….

‘누구 하나 죽어 나가더라도 의가 상하지 않기를 바라는 거지.’

하늘에 빌었는데도 안 되면 어쩔 수 없다.

꽁하지 말고 받아들여라, 이런 의미였다.

‘얼마나 제대로 싸우는지 볼까.’

요녕의 비무는 중원의 방식과 많이 달랐다.

모용오가 손짓하자 한 중년인이 단상에 올라 출전자들을 호명했다.

“모용상원, 성해장(星海莊) 모용진석, 철령고가(鐵嶺高家) 고익, 소극소호(蘇克蘇護) 아고(阿古)…….”

모용세가 본가, 방계, 호족, 여진족 등 다양한 소속의 이름들이 장내를 울렸다.

적게는 약관도 안 돼 보이는 나이부터 많게는 이립을 살짝 넘긴 연배까지.

총 예순다섯 명이 걸어 나와 큰 원을 그리며 대치했다.

그들이 자리를 잡자마자 단상에 오른 중년인이 선언했다.

“개전(開戰)!”

떼를 지어 난전을 벌이는 건 아니었다.

잠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스스로 상대를 골라 도전했다.

“모용상원이 고 형에게 비무를 청하오.”

“받아들이겠소.”

“아고가 모용 형에게 비무를 청하오.”

“받아들이겠습니다.”

지목당한 사람은 거부권이 없었다.

거부는 비무 포기를 선언하는 것.

청년들은 금세 짝을 이뤄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대결은 꽤 흉험했으나 피를 거의 흘리지 않고 끝났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목하여 싸웠기 때문이다.

지켜보던 정광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자기 새끼에게 유리한 대진을 짜느라 장난질을 치느니, 약한 놈은 알아서 먼저 걸러지게 하는 거네.’

소속 가문의 힘에 의해 상대가 정해지는 게 아니라 강자가 약자를 택해 싸운다.

대부분 강자가 이기기 마련.

승리한 이들은 다른 이들의 싸움이 끝날 때까지 휴식을 취한다.

먼저 끝내면 더 많이 쉴 수 있으니 최선을 다할 수밖에.

허나 실력 차가 많이 나는 상대와 싸우기에 피를 많이 보지 않고 끝낼 수 있었다.

중원의 방식보다 호쾌하고 효율적이었다.

정광의 기준으로는 미적지근한 편이었지만.

‘어쨌든 모용상현은 힘을 아꼈구나.’

출전자들의 수가 홀수여서 짝이 안 맞았기에 한 명은 일차 비무를 안 하게 됐다.

대공자 모용상현이 그랬다.

누구나 인정하는 요녕 제일의 후기지수였기에 아무도 도전하지 않은 것이다.

‘흠.’

그러나 정광이 봤을 때 최고수는 따로 있었다.

대흥장에서 출전한 모용진궁이라는 이름의 장년 사내였다.

‘역시 제법 하잖아. 수은망극단을 안 먹였으면 필패였겠어.’

일차 비무가 끝나고 일각 동안 휴식을 취한 청년들은 다시 상대를 골라 싸우기 시작했다.

이번엔 모용상현도 싸웠다.

상대를 지목해 덤빈 것이다.

간밤에 정광이 언질을 줬던 모용진궁은 아니었다.

모용진궁도 다른 이를 택했고.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으나 혜진은 의아해했다.

“단주. 왜 두 사람이 서로 피하는 겁니까? 어차피 꺾어야 할 상대는 정해져 있는데 말입니다.”

“한쪽은 자연스럽게 상대를 죽이길 원하고 한쪽은 최대한 상대의 전력을 파악하길 원하니까요.”

“아. 전자가 대흥장이고 후자가 대공자겠군요.”

그랬다.

이차 비무는 일차 비무보다 훨씬 더 치열했다.

쭉정이를 한번 걸러냈으니 그럴 수밖에.

아까보다 많은 피가 튀었으나 사망자는 나오지 않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다음 비무라면?

그다음 비무에서도 사망자가 나오지 않을까?

“싸움은 갈수록 치열해질 거예요. 최후에 남는 두 사람의 실력은 거의 비등하겠죠. 누구 하나 죽기 딱 좋은 그림이라 할까.”

“말씀대로 대공자가 먼저 싸움을 끝내고 모용진궁이라는 자의 전력을 파악하려고 하는군요.”

허나 모용진궁도 상대를 빨리 눕혔기에 많은 걸 알아볼 시간은 없었다.

혜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대공자도 곤란하겠습니다. 저자와 먼저 싸우자니 설령 이긴다 해도 다음 상대를 자신할 수 없지 않습니까.”

자오도 동의했다.

“그럴 것이오. 또 다른 자객이 있을지도 모르니 함부로 움직일 수 없을 것이외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니, 이럴 땐 차라리 마음을 편히 먹고…….”

정광이 자오를 제지했다.

“마음 편히 보게 잠시만 조용히 있어 주실래요?”

“……네, 단주.”

비무는 빠르게 진행됐다.

상대를 쓰러트리거나 스스로 패배를 인정해야 끝나는 비무였다.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으나 많은 이들이 다쳤다.

그리고 단 두 명만이 남게 됐다.

모용상현과 모용진궁이었다.

단상에 올라 비무를 주관하던 중년인이 크게 외쳤다.

“최후의 비무를 치르기 전에 한 식경 동안 휴식을 취하겠소! 모두 그때까지 각자의 볼일을 보기 바라오!”

사람들이 분분히 일어나 흩어졌다.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자들은 지금껏 본 비무의 내용에 대해 토론하며 최후의 승패를 점쳤다.

“거참. 팽팽하겠는걸.”

“그래도 대공자가 이기지 않을까?”

“나는 진궁이라는 청년을 더 높이 보네.”

“나 역시 그래. 대흥장에 저런 아이가 있었다니. 무척 놀랐어.”

모용상현이나 모용진궁이나 전력을 다하진 않았지만 고수들은 느낄 수 있었다.

승부의 추는 모용진궁에게 기울어 있었다.

사람들이 떠드는 말에 모용진궁이라는 이름이 더 많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반기를 든 이들은 같은 편이기에 더더욱 그랬으나…….

정광의 생각은 달랐다.

“대공자가 이길걸요.”

“…….”

사람들의 시선이 정광에게 모였다.

크게 외친 건 아니었으나 누구나 들을 수 있을 만큼 절묘한 순간에 말해서였다.

그들 중 정광을 못마땅해하는 모용중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그게 사실이니까요.”

“자네, 의외로 안목이 없군.”

“제 말이. 그대로 돌려 드려도 되죠?”

“…….”

모용중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확신하는 겐가?”

“네.”

“자네의 명예를 걸 정도로?”

정광이 고개를 젓자 모용중이 냉소를 흘렸다.

“그럼 그렇지.”

“그 뜻이 아닌데.”

“무어라?”

“그깟 명예 따위 걸어서 뭐 해요.”

정광은 씩 웃으며 품속에 손을 넣었다 뺐다.

그 손에는 두꺼운 전표 뭉치가 들려 있었다.

쿵!

그것을 탁자 위에 호쾌하게 놓으며 반문했다.

“정말 확신하면 돈을 걸어야 하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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