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291화 (290/569)

2부 20화

어쨌든

똑같은 손님이어도 초청하는 주체가 누군지에 따라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되는 무게감은 완전히 달라진다.

대공자가 청하면 개인적인 친분에 의한 것으로 비치지만, 가주가 그러면 모용세가 자체가 초청하는 귀빈 중의 귀빈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쯤 되는 손님이라면 최소 한 성(省)을 떨어 울리는 세력가이거나 천하에 명성을 떨치는 대단한 고수여야 했으나…….

정체를 숨기고 있는 정광은 둘 중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천하제일유람단주?’

‘가주가 청했다고?’

‘뭐 하는 자이길래?’

요녕성은 넓었다.

그 넓은 곳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 모두가 정광에 대한 소문을 들을 순 없는 노릇.

자연히 사람들은 의아한 눈빛으로 정광을 힐끔거렸으나.

정광은 담담했다.

사람들이 어떻게 보든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을 초청한 모용오에게 포권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네요.”

“좋은 날이긴 하지. 잘 지냈나?”

“덕분에요.”

정광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런데 왜 가주님께서 직접 초청하신 거죠?”

모용오가 희미하게 웃었다.

“자네가 떠난다고 했으면 잘 가시라 했을 걸세. 허나 남지 않았는가.”

“남았으니 귀빈이다, 이 말씀이네요.”

“비슷하네.”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끼고도 몸을 빼지 않았으니 그만큼 대우하는 거다, 이런 의미였다.

“음. 사람 잘못 보신 것 같은데.”

정광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저, 협객 아니에요.”

“알고 있네. 누가 봐도 그렇지.”

모용오가 정광의 눈을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마음 가는 대로 행하시게. 편히 즐기게나.”

모용오는 대화가 새어나가지 않게 펼치고 있던 내공을 거두며 몸을 돌렸다.

회색빛 하늘 아래 높은 단상이 보였다.

천천히 계단을 밟아 그 위에 올랐다.

내성(內城) 앞 대광장(大廣場).

수많은 사람이 모여 요녕성의 수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무겁게 닫혀 있던 모용오의 입이 열렸다.

“지금부터 개기(開基)를 시작하겠소!”

“와아아아!”

숨죽이고 있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 소리를 들은 성 밖 사람들도 크게 호응했다.

마치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광경!

정광은 따로 마련된 귀빈석에 앉아 주위를 둘러봤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모용의 이름을 높이고 있었다.

‘의미 깊은 날이긴 한가 보네.’

모용세가의 축성(築城) 기념일은 개기(開基)라 불렸다.

개기란 터를 닦기 시작하거나 새로 세운다는 의미.

정광은 그 의미를 가만히 곱씹었다.

‘모용(慕容)씨가 요녕(遼寧)에 자리 잡은 날이라…….’

자리를 잡아도 아주 제대로 잡았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모용씨에, 호족에, 이민족에.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

모용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뭉친 것이다.

그 연대감을 깨지 않기 위함인지 모용오의 연설은 짧았다.

“한 해 동안 고생하셨소이다. 다음 해도 잘 부탁드리오. 세세한 얘기는 차후에 하기로 하고 인사부터 드리겠소.”

말이 인사를 드리는 것이지.

사람들이 인사를 했다.

본거지에서 가져온 수레를 끌고 나아가 단상 앞에 세운 뒤, 한 사람만 계단을 올라 모용세가주에게 예를 표했다.

지켜보는 모든 이들에게 모용세가가 위에 있음을 되새겨 주는 행위.

신분과 힘의 순서대로 가는 걸까.

단상 위에 제일 먼저 오른 사람은 대흥장의 노물(老物)이었다.

“모용회가 가주를 뵈오.”

“오셨소이까. 다시 뵙게 되어 기쁘오.”

모용세가의 위계질서는 중원의 여타 세가보다 엄격했다.

공적인 자리였기에 모용세가주 모용오는 종조부(從祖父) 되는 모용회를 편하게 대했다.

모용회도 당연하게 받아들였으나 원래의 기도를 숨기진 않았다.

위맹한 기세를 풍기며 가주이자 종손(從孫)인 모용오를 지그시 바라봤다.

모용오도 희미한 미소를 띤 채 그를 응시했다.

“…….”

“…….”

잠시 뒤, 모용오의 입이 열렸다.

“원로에 오시느라 고생하셨소. 이따 찾아뵙겠소이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오. 기다리고 있겠소.”

모용회가 단상에서 내려갔다.

대기하고 있던 다른 이들이 줄을 지어 올라갔다.

방계, 호족, 이민족 순이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 눈도장을 찍을 시간도 부족했고 선물을 확인할 틈은 더더욱 없었다.

사람들이 가져온 선물은 광장 한쪽 구석으로 옮겨져 차곡차곡 쌓였다.

정광은 그것들을 주시하며 입맛을 다셨다.

‘왕이 공물을 받는 것 같네. 매년 이러는데 부자가 안 될 수 없지.’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훨씬 더 많이 받았었는데.’

그러면 뭐 하는가?

그때는 그 소중함을 몰랐는데.

‘됐다. 술이나 먹자.’

정광은 애써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술을 홀짝였다.

혜진도 그랬으나 자오는 주위를 살피느라 바빴다.

그런 그를 정광이 가볍게 타박했다.

“긴장 풀고 즐기세요. 나중을 위해서.”

“알겠습니다, 단주.”

“술도 한잔하시고요.”

“오늘은 삼가겠습니다. 이상하게 느낌이 안 좋습니다.”

정광의 눈이 빛났다.

“드셨다간 또 측간으로 달려가실 것 같아요? 신진공묘유환 효력이 그렇게 강했나?”

“…….”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린 자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 잔 마시겠습니다.”

한 잔은 두 잔이 되고 두 잔은 석 잔이 됐다.

얼마 안 가 자오는 완전히 긴장을 풀게 됐다.

정광은 피식 웃으며 사방에서 들리는 소리를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았다.

“반 시진 정도면 끝나겠구먼. 연회가 곧 시작되겠어.”

“올해도 사흘 동안 먹고 마시게 될 텐데. 살이 또 찌면 어쩌나.”

“내일 열릴 격검제(擊劍祭)와 마상제(馬上祭)가 기대되는군.”

“대공자와 공녀께서 출전하실 게 뻔한데 싱겁지 않을까?”

“그러게 말일세. 흥이 빠진 상태로 마지막 제(祭)를 올리고 떠나게 될지도 몰라.”

“그나저나 귀빈석의 저자들은 뭐야? 천하유람단이라니…….”

천하유람단의 수장인 정광은 사람들의 대화를 듣고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첫날은 먹고 즐기며 인사를 나누는 날이고. 둘째 날은 일반 비무와 마상 비무를 여는 건가. 셋째 날은 제를 지내며 마무리하고.’

마지막 제는 일반적인 것이겠지만 앞의 둘은 특이했다.

‘비무로 제를 올리다니. 기마민족답게 호전적이네.’

천마신교의 멸혼생사투(滅魂生死鬪)나 절멸대전(絶滅大戰)처럼 과격하진 않겠지만 목검으로 투덕거리는 장난질은 아닐 게 분명했다.

‘거기에 모용 남매가 나간다?’

보나 마나 비슷한 연배의 청년들만 출전할 터.

‘꽤 하긴 하지만…….’

정광은 단상 아래에서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는 남매를 흘깃 본 뒤 그들과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을 훑었다.

‘어디 보자. 일단 저놈.’

어제 모용회, 모용중과 함께 온 장년 사내였다.

‘그리고…… 저 녀석도 제법인걸.’

여진족 청년들 중 한 명이 꽤 단단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나머지는 다 고만고만하고. 둘이 문제구나.’

작정하고 손을 쓰면 모용 남매가 위험할지도.

‘뭐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면 알게 되겠지.’

시간이 흘러 연회가 시작됐고.

정광의 눈이 빛났다.

* * *

사람들은 요리와 술을 즐기며 왁자하게 떠들었다.

허나 안 그런 이들이 훨씬 더 많았다.

‘본가 사람들이야 가주가 지시했을 테니 그렇다 치고.’

손님으로 온 방계, 호족, 이민족 중 대다수가 술을 자제하고 있었다.

‘너무 노골적이잖아.’

그 중심에는 늙어도 죽지 않는 노물 모용회가 있었다.

‘공을 많이 들였나 보네. 저쪽으로 많이 기우는데.’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흥겨워하던 이들도 점점 조용해졌다.

그러다 결국 대광장 전체가 정적에 잠겼고…….

모용세가주 모용오가 술잔을 든 채 천천히 일어섰다.

잠시 모용회를 바라보던 그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그는 모두의 시선을 안은 채 모용회 앞에 섰다.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종조부께선 불편하신가 보오?”

모용회가 인정했다.

“그렇소이다. 걱정이 있어서 말이오.”

“걱정이라. 나누면 반이 될지도 모르니 말씀해 보시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모용회의 몸에서 무거운 기세가 피어올랐다.

“근래 들어 몽고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중원 분위기가 뒤숭숭하다 하오.”

“확실히 그렇다 듣긴 했소.”

“본가의 터전인 요녕도 마찬가지외다.”

“요녕이?”

“마적들이 발호하는가 하면 통제를 따르지 않는 부족이 늘어나고 있소. 걱정될 수밖에 없는 상황 아니오?”

모용오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몇몇 부족이 상황을 봐가며 말을 바꿔 타는 건 항상 있었던 일이오. 그들을 다룰 만한 비책이 있고 실행할 것이외다. 그리고 마적이라 하셨소?”

모용오는 호족들을 훑어보다가 금주호가(錦州扈家)의 가주 호광을 응시했다.

“따로 물어보려 했으나 지금 하리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것이오?”

움찔했던 호광이 억지로 어깨를 펴며 변명했다.

“계속 손해를 보며 살 순 없어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 봤을 뿐이외다.”

“언질도 없이 말이오?”

“추이를 지켜보고 말씀드리려 했소이다. 본가의 영역에서 행한 일인데 너무 몰아붙이시는 것 같소.”

모용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평소와 다른 차가운 미소였다.

“언질을 주셨어야 했소.”

“허나…….”

“언질을 주셨어야 했다고 말했소이다. 못 알아들으셨소?”

모용오의 전신에서 차가운 기세가 피어올랐다.

그 기세를 정면으로 받은 호광은 이를 악물고 몸을 떨었다.

그때, 지켜보던 모용회가 나섰다.

“가주. 그만하시오. 잘해보려다 그리된 걸 탓하는 건 지나친 처사요.”

“지나치다?”

모용오의 시선이 모용회에게 돌아갔다.

“어떤 고견이 있으시길래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오?”

“모용은 약해지고 있소.”

모용회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을 이었다.

“수시로 반기를 드는 이민족들에게 시달리고 탐욕스러운 관(官)에 이용당하고 있소. 좌우에서 우리를 쥐어짜고 있단 말이외다. 호가주가 말했듯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순 없는 노릇 아니오?”

“본가는 여전히 굳건하오. 그리고 비책이 있다고 했소만.”

“말씀해 주시오. 세이공청(洗耳恭聽) 하리다.”

모용오는 모용회를 노려보며 딱딱하게 말했다.

“오늘 밤 따로 말씀드리겠소. 허나 이것만큼은 지금 들으시오. 어떤 이유로든 개기(開基)의 예(禮)를 어기지는 마시오.”

모용회가 무겁게 답했다.

“당연한 말씀이오. 누구보다 본가를 위하는 내가 본가의 근간을 뒤흔들겠소이까?”

“…….”

침묵하던 모용오가 술잔을 높이 들고 주위를 둘러봤다.

“모용을 위해.”

그의 담담한 목소리가 광장에 있는 모든 이의 귀에 꽂혔다.

그들도 술잔을 높이 들며 똑같이 외쳤다.

“모용을 위해!”

모두 들어 올렸던 술잔을 내려 그 속의 술을 입에 털어 넣으려는 순간!

정광이 손을 들며 청했다.

“여기도 좀 주실래요?”

“…….”

어처구니없어하던 사람들이 무서운 눈빛으로 정광을 쏘아봤다.

정광은 당당한 얼굴로 혜진을 가리켰다.

“이분이 다 드셔서요.”

* * *

기묘한 연회는 저녁까지 계속됐다.

그동안 지겨울 정도로 먹고 마신 정광은 모두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모용상현에게 다가가 물었다.

“뭐 좀 여쭤봐도 돼요?”

“그러시오.”

“개기(開基)의 예(禮)가 뭐죠?”

“그게 궁금하셨소? 개기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그 누구도 해쳐선 안 된다는 율법이오.”

“아. 손님들을 불러놓고 그랬다간 결속이 무너질 테니 그러는 거구나.”

“맞소이다. 이제 가도 되겠소이까? 할 일이 많아 그러오.”

정광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랬다간 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요.”

“무슨 의미요?”

정광이 나직이 속삭였다.

“누구도 해쳐선 안 되나 비무에선 다를 거 아니에요. 예를 들어 불의의 사고 같은?”

“…….”

모용상현은 정광을 주시하다가 자신 있게 말했다.

“단주의 눈엔 하찮겠지만, 나와 수아는 약하지 않소.”

“틀린 말씀은 아니지만 상대가 안 좋은데.”

“상대라니? 누굴 말하는 것이오? 자만하는 게 아니라 그럴 만한 이가 없어서 그러오.”

정광은 모용상현의 반응을 보고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게 됐다.

‘웬만한 후기지수는 다 알고 있을 텐데 그 둘을 몰라? 노물이 단단히 준비했네.’

오랫동안 숨기며 키워왔을 수도 있고 어디선가 데려왔을 수도 있다.

‘이 녀석은 이대로 잘 커서 내게 진 빚을 계속 갚아야 하는데…….’

모용수수도 멀쩡한 몸으로 팽강휘를 만나야 했다.

‘모용오와 노물의 대화가 좋게 끝날 리 없지. 어차피 뿌리기로 했으니 앞날을 보고 투자하자.’

정광은 모용상현의 어깨를 두드리며 경고했다.

“대공자도, 모용 소저도 이대로 가다간 죽어요.”

“……!”

“바쁘시다 했죠? 죽으면 바쁘지도 못하죠. 두 분 모두 제 방으로 오세요. 지금 당장.”

“…….”

모용상현의 눈에 서서히 오기가 맺혔다.

“단주 방이 아니라 내 방이오만.”

정광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어쨌든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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