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288화 (287/569)

2부 17화

좋은 예감

모용세가 내성에 있을 때는 매가 하늘 위에서 맴돌아도 그러려니 했다.

매사냥은 부자 중에서도 부자만 즐길 수 있는 고급스러운 취미였고 모용세가는 그러고도 남을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사냥할 때만 날게 할 수 있나.

평소에도 어느 정도는 놀게 해줘야지.

혹여나 수상한 외지인이 왔다고 감시하기 위해 날렸다 해도 이해해 줄 수 있었다.

정광이 그들이었어도 의심했을 테니까.

그런데 대흥(大興)이라고?

누가 봐도 대흥장의 것 아닌가.

정광은 매의 사체를 모용중에게 내밀며 물었다.

“목패(木牌)를 보아하니 대흥장에서 기르는 녀석 같은데. 왜 저를 따라다녔을까요?”

“…….”

“제가 어디에 가는지 감시하려고 그랬던 것 같은데. 안타까워라. 호기심 많은 똘똘한 녀석인데 죽어버렸네.”

“…….”

정광을 차갑게 노려보던 모용중이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대흥이라 적힌 목패를 달았다고 본장의 것이라 할 순 없지.”

“음. 말씀대로 누가 장난질을 쳤을 수도 있겠네요.”

정광은 매를 던져 올렸다 받는 걸 반복하며 덧붙였다.

“모용세가 본가에서도 저를 감시하지 않았는데 일개 방계(傍系) 가문에서 이럴 리는 없으니까요.”

순간 모용중의 눈에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허나 그의 입에서 나온 음성은 무척이나 담담했다.

“중원처럼 생각하면 곤란하네. 모용의 방계는 단순한 방계가 아니야.”

“어떻게 다르죠?”

“본가는 황궁, 본장은 왕궁이라 할 수 있지.”

정광의 눈이 빛났다.

“어느 정도의 땅을 방계 가문에 떼어주고 자치권을 부여한다. 이런 거군요.”

“얼추 비슷하네.”

“모용세가에서 호족들을 관리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네요.”

“그게 대평원의 율법이니까.”

“대평원의 율법이라…….”

정광은 흥미로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불쑥 물었다.

“어쨌든 요놈은 귀장의 것이 아니란 말씀이죠?”

“그렇네.”

“휴우. 괜한 오해를 할 뻔했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정광과 달리, 모용중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네 지금 뭐 하는 겐가?”

“네?”

“……뭐 하는 것이냐 물었네만. 안 들리나?”

“아.”

정광은 매의 깃털을 계속 뽑으며 대꾸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구워 먹으려고요.”

“…….”

“맛없다는 건 알지만 아깝잖아요.”

“…….”

손놀림이 어찌나 능숙한지, 매는 순식간에 벌거숭이가 됐다.

“아차. 이게 있었지.”

정광은 매의 다리에 채워진 작은 목패를 풀었다.

그리고 대지(大指)와 식지(食指)로 쥔 뒤 슬슬 비볐다.

파스스스-

목패는 물론 거기에 적힌 ‘대흥’이라는 글자까지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정광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이제야 속이 시원하네.”

“…….”

정광의 시선이 대문 위에 걸린 현판을 슬쩍 훑고 지나갔다.

“작은 놈이 이 정도인데. 큰 놈을 잡으면 얼마나 재밌을까.”

“……!”

모용중의 눈에서 너무 뜨거워 차갑게 느껴지는 불길이 솟구쳤다.

그 불길이 가슴 속에서도 올라와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오려는 순간!

장원 안쪽에서 강한 울림이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밖에서 소란 떨지 말고 그만 들어오거라.”

* * *

‘오.’

대흥장은 밖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웅장했다.

정말 왕궁 같은 느낌이랄까.

그만큼 많은 사람이 있는 건 당연한 일.

건장한 무인들이 여기저기서 절도 있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대흥장의 힘이 짐작됐다.

정광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옮기다가 앞에서 걷는 모용중의 뒤통수를 봤다.

‘아까워라. 넘어오기 직전이었는데.’

생각해 보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긁을 만큼 긁어줬고, 애초에 싸우러 온 게 아니지 않은가.

‘우선 조양사에 대해 알아보고. 소득이 없으면 그때 생각하자.’

소란스럽게 굴지 말고 들어오라던 목소리의 주인.

그자를 만나면 알게 되리라.

‘한참 먼 곳에서 들려왔는데도 바로 옆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들렸었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단한 내공을 쌓은 데다 제대로 운용할 줄 아는 고수였다.

‘이 장원의 주인이려나.’

얼마 안 가 그를 만나게 됐다.

모용중을 따라 고풍스러운 전각에 들어가니 위맹한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노인이 앉아 있었다.

노인이 모용수수를 보며 탐스러운 흰 수염을 쓰다듬었다.

“오랜만이군. 잘 있었느냐.”

아까 들었던 것처럼 깊은 울림이 있는 목소리였으나…….

노인의 용모는 정광이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이건 또 뭐 하는 물건이지? 몇 년이나 묵은 거야?’

옷 밖으로 드러난 피부는 칼집을 촘촘히 넣은 것처럼 주름투성이였고, 눈에서는 진물이 조금씩 흘러나왔다.

그런 얼굴에 달린 풍성한 흰 수염이라니.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괴이하게만 느껴지는 노물(老物) 아닌가.

‘말 그대로 늙어 죽지도 않는 노물이네.’

그런 노인을 모용수수는 태연하게 상대했다.

“종증조(從曾祖) 할아버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기체 강녕하셨습니까.”

“나는 항상 똑같다. 수아 너도 그렇구나.”

정광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쩐지.’

종증조는 증조부의 형이나 아우에게 붙이는 호칭.

그렇게 오래 묵었다면 저런 외모를 가질 만한 자격이 있었다.

‘수왕과 같은 배분이네. 그보다 더 늙었지만.’

무공도 더 강할 것 같았다.

패왕처럼 굳세고 거침없는 기도라니.

그 기도가 정광을 향했다.

“네가 천하유람단주라는 아이냐?”

“청년이요.”

“듣던 대로 말장난을 잘하는구나.”

“감사합니다. 일단 모용 소저 용무부터 보시죠. 저는 그다음이라서.”

노인에게서 흘러나오는 기도가 강해졌다.

정광은 양쪽 입꼬리를 올리며 허리를 곧게 세우고 가슴도 활짝 폈다.

정광을 짓누르려던 노인의 기도가 한순간 움직임을 멈추더니 사라져 버렸다.

“제법이군. 네 말이 옳다. 선후는 지켜야지.”

노인은 시선을 모용수수에게 돌렸다.

“그래, 무슨 일이냐?”

모용수수는 또박또박 말했다.

“오는 길에 수상한 자를 만났습니다. 대흥장에서 나온 자였습니다.”

“그래서?”

모용수수는 모용중을 힐끔 봤다.

“숙부께서는 그자가 일개 낭인일 뿐이고 일거리를 구하러 왔었다고 하셨습니다. 허나 도저히 믿어지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무공을 측량할 수 없는 대단한 고수였습니다. 기마술도 그랬습니다.”

“그렇군. 또 뭐라고.”

노인은 모용수수를 빤히 보며 나무랐다.

“내 그자를 보진 못했지만 어떻게 된 건지 대충 알겠다. 네 시야가 정말 좁구나.”

“…….”

“하늘 밖엔 하늘이 있다는 걸 모르느냐? 네 알량한 무공으로 알아볼 수 없었다고 상대를 터무니없이 높이지 말거라.”

“…….”

“알아들었느냐?”

모용수수는 항변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노인의 배분이 까마득하게 높아서가 아니었다.

무인은 힘으로 말하는 법.

네 무공이 낮아 그렇게 느껴놓고 왜 쓸데없는 의문을 품냐며 힐난하니 할 말이 없어서였다.

모용수수는 돌처럼 굳어버린 얼굴을 무겁게 숙였다.

“네. 종증조 할아버님.”

“한 명은 됐고.”

노인의 시선이 정광에게 꽂혔다.

“네 차례다.”

정광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물었다.

“백 년 전 조양사가 불탔을 때요. 어르신도 계셨나요?”

“그곳에 있었냐는 말이냐, 태어났었냐는 말이냐?”

“둘 다요.”

“있었다. 이립(而立)이 막 되었을 때였지.”

“백 년 하고도 서른 해를 더 사신 거네요.”

“그렇다. 놀랐느냐?”

“아뇨. 그럴 것까지야.”

전생의 아비는 장장 백오십 년을 살다가 떠났다.

이 노물이 아무리 용을 써봐야 삼십 년을 더 살 수는 없을 터.

정광의 눈에 비친 그는 관 속에 한 발을 넣고 있는 반 시체나 다름없었다.

‘싸움이야 제법 하겠다만. 아니, 잘 싸울 것 같기도 하고.’

가주인 모용오도 그렇고 이 노물도 그렇고.

촌구석에 무슨 놈의 고수가 이리도 많은지.

‘거기에 후위진의 아비도 기어들어 왔지.’

그건 그거고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설마 어르신께서 불을 지르신 건 아니죠?”

노인이 아니라 모용중이 호통쳤다.

“감히 그따위 망발을 하다니!”

“네? 말 머리에 ‘설마’를 붙였잖아요. 게다가 불을 ‘지르셨죠’가 아니라 ‘지르신 건 아니죠’라고 여쭸고요.”

“그게 그거 아니냐!”

“완전 다른데.”

더 화내려는 모용중을 노인이 손짓으로 막았다.

“그만. 조용히 하거라.”

“죄, 죄송합니다. 할아버님.”

“네 나이가 벌써 지천명(知天命)을 훌쩍 넘었거늘. 수양이 그것밖에 안 돼?”

모용중이 식은땀을 흘리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

“소손,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노인은 자신의 손자를 한동안 응시하다가 정광을 노려봤다.

“내가 불을 지른 게 아니다.”

“그럼 누가 그랬는데요?”

“전투 중에 벌어진 일이다. 여진족이 그랬는지, 인근의 민초들이 그랬는지 아무도 모를 수밖에.”

“불타고 남은 것들은 없고요?”

노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계속 대답해야 할 의무는 없는 것 같다만.”

“그렇긴 하죠.”

“내 차례다. 왜 조양사에 관해 캐묻는 것이지? 구경하러 왔는데 없어져서 그러는 것이라 할 거면 아예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게다.”

그의 충고대로 정광은 아무 말도 안 했다.

“…….”

노인은 진물이 흐르는 눈으로 정광을 집어삼킬 듯 보다가 손을 내저었다.

“버릇없는 녀석 같으니. 그만 가거라.”

“만수무강하세요.”

정광은 우두커니 서 있는 모용수수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가죠. 더 있어 봐야 좋은 소리 못 들을 것 같은데.”

“……알겠소.”

정광은 모용수수, 혜진과 함께 걸음을 옮기다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어르신. 제가 누군지는 왜 안 물으셨죠?”

“네가 뭐라 할지 뻔하니까. 누구든 간에 상관없기도 하고.”

정광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꽤 의미심장한 말 아닌가.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요. 제게 사실만 말씀하신 거 맞나요?”

노인의 몸에서 다시 패왕의 기세가 흘러나왔다.

“나 모용회.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부끄럼도 없는 삶을 살아왔다.”

말이 이어질수록 강한 힘이 실렸다.

“네 좁은 식견으로 나를 판단하려 들지 말아라.”

* * *

정말 황당한 말을 들으면 대꾸할 의지조차 사라지기 마련.

조금 전의 정광이 그랬다.

‘하늘을 우러러 뭐가 어째? 인두겁을 쓰고 그런 말을 내뱉을 줄이야.’

늙어 노망이 난 건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는 몰랐으나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천하에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부처나 원시천존도 불가능한 일인데 무슨.’

생각하면 할수록 어이없는 말 아닌가.

대흥장에서 나와 한창 말달리는 중이었는지라 이러다간 낙마하겠다 싶어 머릿속 한 귀퉁이에 밀어버렸다.

대신 다른 걸 꺼내 곱씹었다.

‘내가 누구든 간에 상관없다 했지.’

손자인 모용중은 정광의 정체를 어떻게든 캐내려 했지만 모용회는 그리 말했다.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다는 얘기인데. 그 정확한 의미는…….’

그때, 옆에서 말달리던 모용수수가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단주. 왜 종증조 할아버님께 그리 무례하게 굴었소?”

“무례하게라뇨. 평소대로 했는데.”

확실히 그렇긴 했다.

“저도 궁금한 게 있는데. 장원 이름이 대흥장이잖아요. 크게 흥하다니. 그 어르신, 욕심이 많은 분인가요?”

“그렇진 않소. 누구보다 본가를 위하며 살아오신 것으로 명망 높으신 분이오.”

“흠. 그렇게는 안 보이시던데.”

“……뭔가 이상한 점이라도 느끼셨소?”

“글쎄요. 그보다 왜 그런 걸 물으시죠? 혹시 소저야말로?”

모용수수는 정면을 응시하며 두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분은 원래 그런 분이라 별다른 이상함은 못 느꼈소. 허나 숙부가 평소답지 않아 그분까지 낯설게 보였소.”

대흥장에서 매를 이용해 정광을 감시한 건, 마음에는 안 들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월권 행위임이 분명했으나 가문을 위한 마음에 그럴 수도 있다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낭인이란 자는…….

‘내 안목이 낮은 건 사실이나, 절대 낭인으로 떠돌 자가 아니다.’

모용수수는 마음을 굳혔다.

‘아버님을 만나 말씀드린다.’

마침 정광도 마음을 굳히는 중이었다.

‘영 찜찜하네. 영단을 빨리 만들어야겠어.’

모용수수도 마음이 급하고 정광 또한 그랬다.

덩달아 혜진까지.

그들은 빠른 속도로 말달려 모용세가의 외성을 지나 내성에 들어갔다.

모용상현의 거처에 도착해 보니.

정광이 원했던 것들이 준비돼 있었다.

‘아주 착착 맞아떨어지는구나. 예감이 좋은걸.’

이렇게 좋은 예감이 드는 게 대체 얼마 만인지.

‘좋아. 시작해 볼까.’

손바닥을 비비며 의욕을 하얗게 불태우는데.

영단 재료들을 가져온 모용상현이 정광의 어깨를 잡았다.

“단주. 값을 치르시는 걸 잊으셨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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