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287화 (286/569)

2부 16화

대흥장(大興莊)

모용수수는 중년인을 모르는 기색이었다.

모용세가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

무엇보다 아무리 봐도 그 얼굴을 빼닮지 않았는가.

눈처럼 하얀 백마(白馬)를 타고 허세를 부리는 꼴도 비슷했고.

‘아 진짜. 이렇게 엮이나.’

정광이 빤히 쳐다보기만 하자 중년인이 쾌활하게 웃었다.

“와하하하.”

꽤 잘생긴 편이었는지라 제법 봐줄 만한 웃음이었다.

말투는 경박했지만.

“이봐. 어서 대답하라고. 내 말이 맞지? 응?”

정광은 근본 없이 구는 중년인과 달랐다.

정파명문 곤륜의 제자 아닌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진중하게 상대했다.

“아니, 사적인 내용을 물으시기 전에 본인 소개부터 하시는 게 예의 아닌가요?”

“그런 걸 따질 성품이 아닐 것 같은데. 신기하군.”

중년인이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빳빳이 세웠다.

“이렇게 가자. 맞춰봐.”

“싫은데.”

“아, 어서.”

“맞추면 뭐 주실 건데요.”

“줘야 하나? 흠.”

눈살을 찌푸리던 중년인이 선심 쓰듯 제안했다.

“좋아. 오늘은 살려 보내주지.”

이번엔 정광이 눈살을 찌푸렸다.

“대마두(大魔頭)세요?”

“안타까워라. 틀렸네.”

“그 얘기가 아니잖아요.”

“마지막이야. 내가 누굴까?”

정광은 잠시 고민했다.

‘그냥 붙어?’

그러기엔 살짝 꺼림칙하고.

중년인은 그만큼 대단한 고수였다.

‘일단 확인부터.’

육성이 아닌 전음으로 해야 했다.

정체가 드러나면 중년인이 혜진과 모용수수를 죽일지도 몰랐다.

-아드님 있으시죠?

-전음으로 바꿀 줄이야. 똑똑한데. 넘겨짚는 것도 잘하고.

-그 아드님. 자부심이 너무 넘쳐서 문제가 되는 그런 계열의 병자시고요.

-확실히 그런 소문을 듣긴 했지. 대체 왜 그렇게 컸을까.

-부전자전이겠죠.

-그건 아니지. 그래도 근래엔 많이 변했다던데. 잠깐. 정말 알고 말하는 거야?

-응담후가(鷹潭后家)의 가주님이시잖아요.

중년인이 허리에 찬 곡도(曲刀)의 도파(刀把)를 어루만지며 탄식했다.

-역시 죽여야 하나. 약조를 했으니 어길 순 없는데. 이런 낭패가 있나.

-일구이언(一口二言)이면 이부지자(二父之者)죠. 그럼 이만.

정광이 말머리를 돌리려 하자 중년인이 툭 내뱉었다.

-이봐. 나도 네가 누군지 알 것 같아. 너 같은 녀석이 또 있다는 건 말이 안 되거든.

-천하유람단의 명성이 벌써? 소문 정말 빠르네요.

-와하하. 재밌는 녀석이군. 아주 재밌어.

중년인이 배를 잡고 웃다가 물었다.

-이 촌구석엔 웬일이야? 뭐 먹을 게 있다고.

-제 말이. 저야 유람하러 왔지만 가주님은요? 뭔가 큰일을 벌이시려고?

중년인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봤다.

먼저 입을 연 건 정광이었다.

-다른 두 사람은 손쉽게 죽이시겠지만 저는 못 죽여요. 그리고 불안에 떨며 사시다가 꽤 고통스럽게 가실걸요.

-도망 하나는 자신 있고 시간은 네 편이라는 거냐. 어디 한번 시험해 볼까.

정광의 눈이 일렁이자 중년인이 손가락을 하나 세워 흔들었다.

-피를 보자는 게 아니야.

-그럼요?

-평화롭게. 이렇게 가보자고.

그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발뒤꿈치로 백마의 배를 가볍게 쳤다.

백마가 순식간에 이장을 좁혀와 정광이 탄 말의 턱을 머리로 들이받으려 했다.

‘쯧쯧.’

정광은 내심 혀를 찼다.

주인이나 말이나 어찌 이리도 예의가 없는지.

그건 둘째고, 두려움 없이 부딪쳐오는 것으로 보아 오랜 훈련과 실전을 겪은 전마(戰馬)임이 분명했다.

‘내 말은?’

모용수수가 조금 전 마련해 준 따끈따끈한 새 말이었다.

준마(駿馬)에 속했으나 호흡을 전혀 맞추지 못한 상태.

‘빨리 친해질 수밖에. 누런색이니까 황금풍(黃金風)이라 하자.’

고삐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히히힝!

황금풍이 비명을 지르며 앞발을 치켜들었다.

그 높이가 어찌나 절묘한지.

발굽에 덧댄 편자가 백마의 머리를 노렸다.

중년인이 눈을 가늘게 뜨며 한쪽 고삐를 살짝 당겼다.

백마가 단단한 편자를 피하며 어깨를 들이밀었다.

노리는 건 황금풍의 옆구리.

황금풍은 아직 앞발을 들고 있었다.

부딪히면 바로 균형을 잃고 바닥에 나뒹굴 터.

강제로 나려타곤(懶驢打滾)을 펼칠 상황 아닌가.

정광의 눈이 가라앉았다.

양다리에 힘을 줘 황금풍의 옆구리를 단단히 잡았다.

허리를 살짝 숙였다가 옆쪽으로 비스듬히 세웠다.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반동은 컸다.

황금풍이 허공에 살짝 뜨나 싶더니 일 장 옆에 내려섰다.

“호오.”

중년인이 감탄하며 말고삐를 돌렸다.

푸르륵.

백마가 방향을 틀어 황금풍을 들이받으려 했다.

정광도 가만있지 않았다.

한쪽 고삐를 채자 황금풍도 몸을 돌렸다.

두 말의 어깨가 부딪쳤다.

쿵!

히히히힝!

백마가 더 강했다.

충격을 받은 황금풍이 기우뚱하며 넘어가려는 순간.

정광이 움직였다.

한 손으로 말안장을 잡고 한쪽 등자에서 발을 뗐다.

그 발을 크게 돌려 황금풍이 넘어지려는 쪽의 지면을 밟았다.

그리고 가볍게 박찼다.

황금풍의 몸이 반원을 그리며 세워짐과 동시에 머리로 백마의 옆구리를 밀었다.

의외의 반격에 백마가 밀려났다.

하지만 찰나에 불과했을 뿐.

휙.

중년인이 고삐를 돌리자 바로 균형을 되찾았다.

머리로 황금풍의 머리를 밀며 힘겨루기를 시도했다.

모용수수가 내준 녀석답게 투지가 있는 걸까.

이히힝!

황금풍도 피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버텼다.

두 말이 팽팽히 맞선 그때.

“……!”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그들의 오른손이 동시에 움직였다.

정광은 운룡을 잡고 중년인은 곡도를 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멈췄다.

“…….”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노려봤다.

두 말이 허연 입김을 흘리며 거칠게 투레질하는 소리만 흘렀다.

용을 쓰며 버티던 황금풍이 힘이 꺾여 밀려나려 할 때.

중년인이 씩 웃으며 왼손의 고삐를 당겼다.

백마가 천천히 물러났다.

황금풍이 승리의 기쁨을 표하듯 소리 높여 울었다.

이히히히힝!

정광이 녀석의 목덜미를 찰싹 때리며 나무랐다.

“져놓고 큰 소리는.”

중년인이 황금풍 편을 들었다.

“백광(白光)을 상대로 그만하면 잘한 거야.”

“말 이름이 백광?”

“그래. 멋지지?”

“듣는 제가 다 부끄럽네요. 웬만하면 바꾸시죠.”

“무인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면 쓰나.”

중년인은 당당히 말한 뒤 정광을 칭찬했다.

“말을 다룰 줄 아는군. 정말 의외야.”

“뭐 대단한 거라고.”

중년인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전음으로 설명했다.

-요녕성 같은 곳에서 제대로 싸우려면 그래야 하거든.

-누가 싸운데요?

-앞날은 모르는 거지. 인연이란 참 묘해. 이런 재미 때문에 집에 박혀 있기 싫다니까.

정광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지 마시고 집안일에 신경 좀 쓰시죠.

-매여 있기 싫은데.

-아드님에 대해서도 소문으로 들었다고 하시더니. 오래전에 가출하신 거예요?

-어허. 가출이 아니라 출가거든. 강호라는 큰 사찰에서 바람처럼 떠돌며 수양하는 중이지. 가만. 너무 늦었는걸.

중년인은 해의 위치로 시간을 가늠하려는지 하늘을 봤다.

그리고 작게 웃었다.

“그럼 또 보자고. 그때까지 혀 조심하고.”

그는 정광의 대답도 듣지 않고 떠났다.

그때까지 아무 말도 없던 모용수수가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요?”

“실없는 중년?”

“…….”

“노려보셔도 소용없어요. 저도 잘 모르니까.”

“…….”

“황금풍. 괜찮아? 걸을 수 있지?”

푸르륵- 이히히힝-

“그래. 말이면 그 정도 끈기는 있어야지.”

“…….”

모용수수는 성품이 단순했으나 멍청하지는 않았다.

정광이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물어봐야 제대로 된 대답을 못 들을 것이고 반감만 살 거란 걸 알아서였다.

‘나로선 가늠할 수 없는 고수였다. 기마술도 범상치 않아. 그런 자가 왜?’

천하유람단주라는 듣도 보도 못 한 기인으로도 모자라 그런 괴인까지 나타나다니.

‘단주야 아버님께서 의심하지 말라 하셨고.’

그녀의 시선이 저 멀리 있는 거대한 장원으로 향했다.

아까의 괴인은 분명 저기에서 나왔었다.

‘누구인지, 무슨 일로 온 것인지 알아낸다.’

마침 정광도 그곳에 가길 원했다.

“모용 소저. 저 장원에 가서 조양사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데요.”

“따라오시오.”

모용수수가 앞장서고 정광과 혜진이 뒤를 따랐다.

조용히 말을 몰던 혜진이 정광에게 전음으로 물었다.

-단주. 아까 그자, 정사대전에서 잠깐 봤던 옥기린과 무척 닮았는데……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네. 부친 되세요.

혜진의 눈이 커졌다.

-그런 자가 왜 여기에?

-장원에 가는 김에 알아보죠.

정광은 회색빛 하늘을 슬쩍 올려다본 뒤 장원을 주시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현판의 글자가 또렷해졌다.

정광은 그것을 응시하며 덧붙였다.

-제대로 알려주진 않겠지만.

장원 이름은 ‘대흥장(大興莊)’이었다.

* * *

정광 일행은 대흥장 대문 앞에 이르자 말에서 내렸다.

가주의 여식인 모용수수가 방문하자 마중 나온 사람은 정광도 아는 자였다.

정광을 보고 눈을 치켜뜨던 모용중은 모용수수가 중년인에 관해 묻자 생각에 잠겼다.

아니, 그런 척했다.

“조금 전에 나간 사람이라? 드나드는 이들이 하도 많아 누구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백마를 타고 허리에 곡도를 찬 중년인입니다, 숙부.”

“아. 난 또 누구라고.”

모용중이 이제야 알겠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낭인(浪人)일세. 어찌하다 보니 여기까지 흘러들어 왔다던데 할 만한 일이 있는지 물어보더군.”

“일거리를 구하러 왔었단 말씀입니까?”

모용중이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쯧쯧. 사정은 딱하지만 돌려보냈지. 우리가 뭐 하러 그런 자를 쓰겠는가.”

모용수수가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자 모용중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지네. 안 믿기면 직접 알아보게나.”

모용수수가 뭐라 하기 전에 정광이 나섰다.

“저도 하나 여쭐게요.”

모용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불가(不可).”

“왜죠?”

“몰라서 묻는가?”

“네.”

“…….”

모용중은 정광을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 물음에 답도 안 했었으면서 참 뻔뻔하군.”

“아. 제 궁술요?”

정광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지금 알려 드릴게요.”

“일 없네.”

“비전 중의 비전인데.”

모용중의 눈에 호기심이 맺혔다.

“말해보게나.”

“제 질문도 꼭 답해주셔야 해요.”

“일단 들어보고.”

정광은 모용중에게 바짝 붙어 나직이 속삭였다.

“이름은 관천(毌天). 총 삼초(三招)로 이루어진 궁술이죠.”

“하늘을 꿰뚫는다. 광오한 이름에 비해 초식 수가 적군.”

“그걸로 충분하니까요.”

“어떤 초식들이길래?”

“아. 진짜 알려 드리기 아까운데. 에라 모르겠다.”

정광은 선심 쓰는 듯한 표정으로 차근차근 설명했다.

“개시(開始). 화살을 시위에 메겨요. 집중(集中). 표적을 보고 겨누죠. 휴의(休意). 마지막으로 놓으면 끝.”

“…….”

“때에 따라 안 보고 그냥 느끼기만 할 때도 있고요.”

“…….”

“이제 됐죠? 제가 궁금한 건…….”

“안 됐어! 안 됐다고!”

“진짠데. 증명해 드리죠.”

정광은 황금풍의 안장에 달린 화살통에서 화살 한 대를 꺼냈다.

“일초. 화살을 시위에 메긴다.”

등에 메고 있던 비룡을 쥐고 거기에 화살을 건 뒤 당겼다.

끼기기긱-

“이초. 표적을 보고 겨눈다.”

정광의 시선, 비룡, 화살이 하늘을 향했다.

높은 하늘 위에 매 한 마리가 맴돌고 있었다.

“삼초. 놓으면 끝.”

정광의 손이 시위를 놓았다.

쐐애애액-

빛처럼 쏘아져 올라간 화살이 매를 꿰뚫었다.

끼익!

매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떨어졌다.

“여차.”

정광은 신법을 펼쳐 달려가 그것을 받았다.

매의 한쪽 다리에는 ‘대흥(大興)’이라 쓰인 작은 목패(木牌)가 달려 있었다.

정광은 그것을 가지고 원래 자리로 돌아와 중얼거렸다.

“대흥? 설마 대흥장?”

모용중이 차가운 눈으로 정광을 노려봤다.

“모용세가 내성에 있을 때도 떠 있던데. 여기까지 따라왔네요. 내가 그렇게 좋은가?”

모용중의 눈이 더 차가워져 얼음처럼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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