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5화
감이 그렇게 말했다
‘조양사(朝陽寺)인지 뭔지. 분명 여기에 있다며…….’
항마주(降魔珠)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춥고 황량한 요녕성 심양(瀋陽)까지 왔거늘.
뭐가 어째?
있는 게 아니라 있었어?
오래전에 전부 불타 버렸다니!
영은사(靈隱寺)의 주지(住持). 아니지. 주지는 무슨. 그 빌어먹을 땡중이 떠올랐다.
‘기분 좋게 거금을 쾌척하고 회수하지도 않은 데다 마기(魔氣)를 느껴도 살려줬는데. 이게 뭐야!’
현오처럼 뭔가 있는 시늉을 하며 선문답 흉내를 내더니만.
현오는 춘화라도 잘 그리지, 그놈은 그냥 사기꾼 아닌가!
‘하늘이 나처럼 특별한 이를 내려보낸 건 합당한 이유가 있어서라 했지.’
이제야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 땡중이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두들겨 패는 것이리라.
‘그래. 조금만 기다려라. 금방 가서 예뻐해 주마.’
정광의 몸에서 살벌한 사기가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헉!”
모용상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원한과 고통이 한데 섞여 뒤틀리는 전장의 것보다 더 지독한 살기라니!
내공을 끌어 올린 건 물론이요, 재빨리 의자에서 일어나 몇 걸음 물러난 뒤 조심스레 물었다.
“표정이 안 좋소. 정말 모르셨나 보오.”
“알면 왔겠어요?”
“미, 미안하오.”
“아뇨. 미안해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요 뭐. 하하.”
“…….”
정광이 이를 드러내며 웃자 모용상현은 그 사람이 누구든 간에 곱게 죽진 못할 거라 확신했다.
자신도 여기 계속 있어 봐야 수명만 줄어들 것 같았고.
‘거참. 대단하군.’
정광의 경악스러운 살기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불취검이라는 여인도 놀라웠다.
어느새 신법을 펼쳐 멀찍이 떨어져 있는 모습을 보니 자신보다 절대 하수가 아니었다.
이 와중에도 술병을 기울이고 있는 건 황당했지만.
‘단주가 어떻게 나올까? 길(吉)보다 흉(凶)이 많을 듯하구나. 그만 물러나는 게 좋겠어.’
정광이 보내주지 않았다.
“대공자. 언제 소실됐어요? 누가 그랬죠? 남은 것들은 없나요?”
모용상현은 머릿속에 담겨 있던 내용들을 줄줄이 꺼냈다.
“대략 백 년 전이오. 여진족의 일부 부족들이 심양을 급습한 적이 있는데 그때 불탔소이다. 전란 중에 벌어진 일이라 누가 그랬는지는 확실치 않소. 잿더미가 되어버렸으니 아마 남은 것은 없을 것이오.”
“백 년 전에 사라진 사찰을 어떻게 아시죠?”
“심양에서 제일 유서 깊은 사찰이었는지라 기록이 남아 있소.”
“혹시 무승들이 수양하는 곳이었나요?”
“아니오. 덕이 높은 고승들이 많은 보통 사찰이었소.”
“그 기록. 보고 싶네요.”
“별다른 내용은 없소만. 가져오겠소.”
“가시는 김에 약재 목록도 부탁드려요. 가주님께서 약조하신 대로 영초, 영물, 영약이 포함된 것으로요.”
“알겠소이다.”
자리를 피할 핑계가 생긴 모용상현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광은 탁자에 머리를 박고 흥분을 가라앉혔다.
‘백 년 전에 잿더미가 됐다고 했지. 변방에 처박혀 있는 사찰이니 영은사의 땡중이 모를 만도 해.’
정광의 정체를 알면서도 감히 장난질을 칠 위인은 아니었다.
‘전쟁통에 불이 나는 건 비일비재해. 여진족이 약탈을 하며 방화했을 가능성이 큰데 확신할 수는 없고. 여긴 북방이잖아.’
북방의 민초들은 거칠고 사납기로 유명했다.
평소 부처를 찾다가도 혼란한 틈을 타 오래된 사찰을 약탈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땡중이 장난을 친 것도 아니고. 방화한 흉수도 모르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책임을 물을 만한 대상이 없지 않은가.
‘그냥 만들어?’
마음에 안 드는 놈을 떠올리려고 하는 순간, 혜진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단주. 상심이 깊으신 것 같은데 이것으로 푸시지요.”
탁.
고개를 들자 술이 가득한 술잔이 눈앞에 있었다.
“…….”
정광은 일단 꿀꺽 삼키고 말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조르륵-
술잔이 또 채워졌다.
“한 잔 더 드십시오.”
“그냥 병째로 주시죠.”
정광은 술병을 건네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목구멍과 배 속이 뜨거워지며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보답으로 새 술병을 하나 열어 혜진에게 건넸다.
“소저가 사람 하나 살리셨네요.”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도 몰라요. 아직 안 정했었거든요.”
혜진이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은근히 농을 잘하십니다.”
아닌데.
“상심을 털어내시니 보기 좋군요. 이제 안심하고 기대하겠습니다.”
기대?
뭐를?
정광이 눈으로 묻자 혜진이 담담히 말했다.
“지금껏 그래왔듯, 단주가 끊어진 길을 스스로 잇고 질주하는 모습을 말입니다.”
정광의 눈이 흔들렸다.
“군사나 할 법한 표현을. 혹시 취하셨어요?”
“취하는 게 뭔지는 모르겠고. 기분이 살짝 좋은 것 같습니다.”
“취하셨네. 역시 북방의 술은 독하다니까. 어? 언제 이렇게 많이?”
탁자는 빈 술병들로 가득했다.
심지어 바닥까지.
마치 사람이 아니라 곰들이 모여 죽도록 퍼마신 후의 흔적 같다고 할까.
정광은 내심 감탄했다.
‘최대한 짧은 시간에 최대한 많이 마시는 방식을 택했구나.’
식사를 시작하기 전, 내일 떠날 거라고 말했던 것 때문에 무리한 게 분명했다.
‘할 수 있을 때 한다. 나쁘지 않은 자세지.’
밖은 벌써 어두워진 지 오래.
정광은 혜진에게 마음에 드는 방을 골라 푹 쉬라고 했다.
그녀는 모용상현의 방을 택했다.
‘안목이 있네. 제일 나은 방을.’
홀로 남은 정광은 술을 홀짝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모용상현이 돌아와 서류뭉치와 서책을 내밀었다.
“조양사에 대한 기록이 담긴 서류와 단주가 원하는 것들이 기재된 서책이오.”
“감사합니다.”
모용상현은 정광의 안색이 평온해진 걸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들어가 쉬겠소. 보시다가 궁금한 점이 있으면 편히 찾아와 말씀하시오.”
“네. 쉬세요.”
모용상현은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가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왔다.
그는 길게 베인 무복 앞섶을 여미며 다급히 변명했다.
“소저! 미, 미안하오! 절대 고의가 아니외다! 어? 자, 잠깐. 여긴 내 방인데?”
조금 시끄러웠으나, 정광은 눈앞의 것에 집중했다.
먼저 백 년 전 기록부터.
‘별다른 내용은 없다더니 사실이네. 말로 들은 딱 그 만큼이야.’
다음은 약재 목록이었다.
‘하수오(何首烏)도 있고. 말로만 듣던 장백삼(長白蔘)도 있고. 전부 몇백 년은 묵은 것들인데…… 오. 구엽신초(九葉神草)까지.’
기분이 더 나아졌다.
정광의 머리가 빠르게 움직였다.
‘어디 보자. 말도 안 되게 비싼 건 나중에 한번 말해보고. 이것과 이것을 섞되 배합 비율은…….’
얼마 안 가 그럴듯한 효능을 기대할 수 있는 영단이 머릿속에서 만들어졌다.
‘이쯤이면 되려나. 아. 진공묘유환(眞空妙有丸)도 만들어야지.’
필요한 품목과 수량을 정리하고 서책에 기재되어 있는 금액을 적용해 계산했다.
‘뭐가 이리 비싸? 싸게 해준 것 맞아?’
전에 상인 차림의 사내가 줬던 장부의 내용을 떠올렸다.
겹치는 품목들을 비교해 보니…….
‘확실히 싸긴 싸네.’
그래도 마적들을 잡으며 번 금원보를 몽땅 쏟아붓고 백승무가 챙겨준 전표들도 상당수 써야 했다.
‘이렇게 쉽게 구한 게 어디야.’
정광은 오해는 풀었으나 자신의 방을 빼앗긴 채 멍하니 서 있는 모용상현에게 청했다.
“지필묵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럽시다.”
“아니지. 그냥 말씀드릴게요. 기억하실 수 있죠?”
모용상현은 구룡에 포함될 정도의 인재.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지만 그 정도쯤이야.
“……말씀하시오.”
정광은 필요한 것들을 말한 뒤 물건이 준비되면 값을 치르겠다고 말했다.
상인의 본능이 솟은 걸까.
모용상현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알겠소. 밤이 깊었으니 오늘은 무리고. 내일 중으로 가져오리다.”
“네. 그림 내일 봬요.”
정광은 모용상현의 침실 다음으로 좋은 방을 차지했다.
모용상현은 어이없는 얼굴로 지켜보다가 유쾌하게 웃었다.
이런 기인을 언제 어디서 또 만날까.
“하하하. 내일 봅시다.”
* * *
다음 날 아침.
정광은 모용상현의 세심한 배려로 방을 나오자마자 아침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술이 완전히 깬 혜진은 모용상현에게 정중히 사과했고 모용상현은 별것 아닌 일로 이러지 말라며 그녀를 위로했다.
분위기가 무척 화기애애해질 수밖에.
그때, 자오가 나타났다.
“오셨어요?”
“……네, 단주.”
“밤을 새우신 것 같네요.”
누가 봐도 그랬다.
퀭한 눈을 끔뻑거리며 비틀비틀 걷는 모습이라니.
밤을 새워도 보통 새운 게 아니지 않은가.
자오는 의자에 간신히 주저앉은 뒤 물부터 들이켰다.
한 잔, 두 잔, 세 잔.
이렇게 석 잔을 삼킨 자오가 앓는 소리를 냈다.
“으으. 이제야 조금 살 것 같군요. 혀가 마르다 못해 갈라지는 줄 알았습니다.”
“왜요?”
자오는 머뭇거리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말을 하도 많이 해서…….”
“이공자와 삼공자가 그렇게 보챘어요?”
“보챈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자오가 몸을 부르르 떨며 탄식했다.
“나이 앞에 장사 없더군요. 어찌나 체력들이 좋던지.”
“그럴 때긴 하죠.”
자오의 퀭한 눈에 이채가 맺혔다.
“설마 단주께서도 소싯적엔 궁금한 것을 끝없이 묻고, 만족할 때까지 답변을 듣는 걸 즐기셨습니까?”
“음.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자객이나 세작을 고문해 진실을 토설하라 강요하고, 모든 사실을 듣고 난 후에야 만족했었으니 비슷하긴 했다.
“다, 단주께서? 의외입니다.”
정광을 제외한 모두가 그렇게 느꼈다.
“그런데 다 끝나긴 한 건가요?”
“…….”
“저런. 고생하세요.”
“……감사합니다.”
정광은 자오의 등을 두드려 준 뒤 식사를 마저 끝냈다.
‘슬슬 가볼까.’
오래전 잿더미가 됐다 해도, 가서 확인은 해봐야 할 터.
“대공자. 조양사가 있던 자리에 가보고 싶은데요.”
“직접 안내해 드리고 싶소만, 어제 요청하신 걸 처리해야 하오. 대신 사람을 붙여 드리겠소.”
“설명만 해주시면 되는데.”
“단주의 성정을 모르는 건 아니나 본가 사람과 가는 게 나을게요. 심양은 넓고 외지인에게 배타적인 곳이외다. 호전적인 이들이 많아 쓸데없이 귀찮은 일에 엮이실 수도 있소.”
가만히 들어보니 맞는 말 아닌가.
“그럼 부탁드릴게요.”
“맡겨주시오. 적임자를 데려오리다.”
잠시 뒤.
정광은 눈앞에 나타난 건장한 무인을 가만히 바라봤다.
무인의 눈썹이 꿈틀했다.
“왜 그렇게 보오?”
“잠시만요. 대공자님.”
정광의 시선이 모용상현에게 향했다.
“이분이 적임자예요?”
“그렇소. 불편하오?”
“아뇨. 저는 괜찮은데 이분이 저를 그리 마음에 안 들어 하셔서요.”
모용상현이 무인에게 물었다.
“수아야. 그렇느냐?”
모용수수가 무겁게 답했다.
“그렇긴 하나 일은 일이니 걱정 붙들어 매시오.”
“단주, 들으셨소?”
모용상현의 눈이 진지하게 빛났다.
“다른 뜻은 없소이다. 심양에서 편하게 움직이시려면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 이와 함께해야 하오. 그런 이들이 적진 않으나 생판 모르는 사람보다는 수아가 낫지 않겠소?”
“그렇긴 하네요. 모용 소저, 잘 부탁드려요.”
“맡은 일은 반드시 완수하니 그럴 필요 없소.”
딱딱한 말투였지만 그만큼 믿음이 가는 말이었다.
정광은 고개를 주억거린 뒤 혜진에게 물었다.
“소저는 어떡하실 거예요?”
“단주를 따르겠습니다.”
“각응은요?”
“……밥만 먹고 이공자의 처소에 다시 가야 합니다.”
어제만 해도 이제야 지음(知音)을 만난 기분이라며 좋아해 놓고선, 사신(死神)을 만나러 가는 듯한 표정을 짓다니.
어쨌든 밖으로 나갈 인원이 정해졌다.
정광과 혜진이 자오를 한 번 더 위로하는 동안 모용상현은 누이에게 신신당부했다.
-수아야. 단주는 보통 사람이 아니란다. 잠시라도 함께하며 배웠으면 좋겠구나. 성품만 빼고 말이다.
-그럴 만한 게 있으면 그러겠소.
-그래. 믿으마.
모용수수가 준마 세 필을 끌고 왔다.
정광은 말에 가볍게 올라타 그녀에게 손짓했다.
“가시죠.”
“하아!”
모용수수는 성안에서부터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익숙한 몸짓으로 피했고 정광과 혜진도 그녀를 따라 말달렸다.
그렇게 내성을 나와 외성까지 통과한 그들은 광활하게 펼쳐진 평원을 거침없이 질주했다.
‘말달리기 딱 좋은 곳이네.’
정광은 가슴이 탁 트이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미소 지었다.
주변 풍경이 빠른 속도로 끊임없이 밀려났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드넓은 밭이 나타나자 모용수수가 말을 멈춰 세웠다.
“이곳이오.”
“네?”
모용수수가 밭을 가리키며 한 번 더 말했다.
“여기에 조양사가 있었소.”
“…….”
정광의 이마에 주름이 생겼다.
뭐라도 단서가 있을까 싶어 왔는데 밭이라니?
하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짓는데 저 앞에 있는 거대한 장원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누구 집이죠?”
“본가의 어르신 중 한 분 것이오.”
“이 밭도 그분 것이고요?”
“그렇소.”
“백 년 전부터?”
“맞소이다.”
모용수수가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분의 부친께서 몰려온 여진족들을 무찌르는 데 큰 공을 세우셨소. 그 공을 인정받아 이 토지를 받으셨고 그분께서 이어받으신 것이오.”
“흐음.”
뭔가 냄새가 나는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고.
뺨을 긁으며 거대한 장원을 노려보는데 문이 열렸다.
그리고 한 사람이 말을 타고 나왔다.
정광의 눈이 커졌다.
‘고수!’
강대한 기운이 느껴지는 건 아니었지만 감이 그렇게 말했다.
사내도 눈을 크게 뜨고 정광을 바라보다가 말달려 왔다.
‘싸우려는 건가?’
정광은 혜진과 모용수수에게 손을 내저었다.
“뒤로 물러나세요.”
“갑자기 왜…….”
“말 들으세요.”
정광의 말에 담긴 기세에 모용수수가 입을 다물었다.
혜진은 벌써 물러나 있는 상태.
모용수수도 이를 지그시 물며 물러났다.
그사이 사내가 말달려와 정광과 이장 거리에서 멈춰 섰다.
그의 목소리는 중년쯤 되어 보이는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무척 쾌활했다.
“오오. 이게 누구야?”
“저 아세요?”
“아니. 몰라서 물었는데.”
“…….”
사내가 빙글거리며 정광의 얼굴을 뜯어봤다.
“얼굴이 영 부자연스러운데. 역용을 한 거냐?”
얼굴이라는 말을 듣자 정광도 확신하게 됐다.
사내는 누군가와 무척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