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285화 (284/569)

2부 14화

금과옥조(金科玉條)

정광은 열정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모용오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잠깐. 하북팽가라고 했나?”

“네.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가문이죠.”

“가문보다는 사람이 더 중요하네. 누군가?”

정광이 손가락을 하나 세웠다.

“무림제일 후기지수인 구룡사봉! 그중에서도 패왕의 풍모를 뽐내며 강호를 질타한…….”

“무림맹주 팽 대협의 차자(次子)인 패룡(覇龍)을 말하는 게군. 이름이 팽강휘였지 아마. 흐음.”

모용오가 이맛살을 좁히자 정광의 말이 빨라졌다.

“아드님도 비룡(飛龍)이시니까 사윗감으론 눈에 안 차실 수도 있죠. 허나 용이라고 다 같은 용인 가요? 아. 대공자, 이해 좀 부탁드릴게요.”

당사자인 모용상현이 아니라 모용오가 부정했다.

“구룡 간에 차이가 있어 봐야 얼마나 있다고. 진옥룡이라면 모를까.”

“그와 비교하시면 안 되죠. 가짜 용이 아니라 진짜 용인데.”

모용오가 정광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동의했다.

“그렇지. 진짜 용인 것 같긴 해.”

“어쨌든. 패룡 정도면 인물이죠. 무공광이니 모용 소저와도 잘 맞을 거고. 서로를 자극해 절차탁마(切磋琢磨)한다. 이만한 짝이 또 어디 있으려나. 가주님 부부 빼고요.”

“내자(內子)는 무공을 모르네.”

“하아. 지치네. 어쨌든 좋은 기회니까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죠.”

한동안 침묵하던 모용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아가 패룡을 만나보고 마음에 들어 하면 적극적으로 밀어주겠네. 헌데 혼사와 새로운 세계를 여는 게 무슨 상관인가?”

“두 분이 이어지면 모용세가와 하북팽가가 자연스레 혼인동맹(切磋琢磨)을 맺게 되잖아요. 하북과 요녕이 하나가 된다. 이쯤이면 새로운 세계 아닐까요.”

“…….”

“어째 관심이 없어 보이시네요.”

정말 그랬다.

“본가는 중원에 진출할 생각이 없네. 요녕성만 해도 벅차. 무림맹 일에 나서지 않는 이유일세.”

하지만 정광의 계획은 그런 게 아니었다.

“중원에 나가시는 게 아니라 요녕성을 더 안정시킬 수 있게 되실 텐데.”

“……!”

그제야 모용오는 제대로 된 관심을 드러냈다.

“자세히 말해보게나.”

“이민족들이 교역량을 늘려달라고 떼를 쓰고 있죠?”

“그렇네만.”

“그렇게 해주시면 돼요.”

“…….”

모용오는 손가락 하나로 탁자를 두드렸다.

그 박자에 맞춰 그의 입에서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들의 힘을 키워주라는 말인가? 황상의 명을 무시하고?”

정광이 싱긋 웃자 모용오의 손가락이 움직임을 멈췄다.

“나를 시험하려 하지 말게. 그런 어리석은 짓은 아닐 테고. 무슨 의미인가?”

“기존에 거래하던 것들의 양을 늘리는 게 아니라 다른 품목을 더하는 거죠.”

“어떤 것을?”

“사치품요.”

“…….”

모용오가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쓸데없이 비싸기만 한 사치품으로 그들의 재물이 줄어들게 하고. 사치를 부리게 함으로써 힘 역시 약해지게 한다, 이 말이군.”

“바로 그거죠.”

모용오의 눈에 실망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 방법을 안 써본 줄 아나? 다 해봤지만 별 소용이 없었네.”

“뭘 주셨었는데요?”

“보검, 보석, 도자기, 비단, 서책. 셀 수가 없군. 본가만 그런 것이 아니지. 황상께선 그들에게 관직까지 내려주시면서 달래고 경쟁을 유도하셨네. 하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는 전혀 거두지 못했어.”

정광이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니까 안 되죠. 흔한 것에 욕심이 날 리 있나. 천천히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해요.”

“한 걸음씩이라 하면?”

정광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먼저 여인들이 탐낼만한 것부터 시작하는 게 좋아요. 화장의 기본인 백분(白粉), 볼에 생기를 더하는 홍분(紅粉), 눈썹을 아름답게 그릴 수 있는 나대(螺黛), 입술을 화사하게 해주는 연지(臙脂). 이런 기본적인 것들 외에 취향을 좀 타는 것들도 넣죠. 예를 들어…….”

정광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모용상현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의 아비도 비슷했다.

놀란 얼굴로 잠자코 듣던 모용오는 정광의 말이 끝나자마자 감탄하며 물었다.

“그쪽으로도 조예가 깊군. 여인을 많이 겪어서 그런가.”

“……!”

정광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결코 찔려서 그런 게 아니었다.

전생에 자신의 군사(軍師)들 중 하나였던 귀곡자(鬼谷子)가 그것들을 이용해 이민족들의 힘을 꺾었다고 말할 순 없지 않은가!

“그 정도는 알아야 여인과 사귀죠. 다시 일로 돌아가서, 말썽을 적게 부리는 부족에게 소량만 선물해 주시는 겁니다. 그럼 족장의 본처(本妻)가 쓸 거고…….”

용모가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족장이 크게 기꺼워할 터.

“그걸 본 다른 부인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죠. 족장을 들볶거나 유혹해서 자신들도 얻으려 할 거예요.”

“그때부턴 주지 말고 분란을 일으키라는 건가?”

“아뇨. 그 부인들에게는 선물하지 말고 팔아야죠.”

“그럼 본처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그분에겐 더 좋은 걸 주면 돼요.”

“아! 하품부터 시작해서 점점 좋은 것으로 바꿔가란 얘기군.”

모용오가 깨닫자 정광이 덧붙였다.

“어느 정도 무르익으면 선물하는 걸 멈추고 판매하세요. 다른 부족의 족장과 부인들이 부러워할 거고 경쟁이 붙어 엄청나게 사들일걸요.”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기존처럼 비단만 제공하는 게 아니라 중원의 유행에 맞게 옷을 지어 판다.

보석, 노리개, 장신구도 마찬가지.

팔 것은 무궁무진했다.

“여인들을 어느 정도 끌어들이면 다른 쪽에 집중하셔야 해요.”

“족장에게 말인가?”

“아뇨. 자식을 아끼지 않는 부모는 거의 없는 법. 애들이죠, 애들.”

중원의 간식거리로 출발해서 예쁜 의복을 판다. 각종 서책에 글 선생까지 붙여준다.

얘기가 여기에 이르자 모용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글 선생까지 붙이다니. 이민족들은 중원 문화에 잠식되는 걸 경계하네. 아무리 생각해도 힘든 일일세.”

“계속 두드려야죠. 딱 한 명만 뚫으면 돼요, 딱 한 명만.”

처음에는 그 한 명을 다들 욕할 것이다.

중원 놈들의 쓸모없는 학문을 왜 배우냐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다른 집 자식이 뭔가 있어 보이는 말을 하고 다녀요. 내 자식은 못 하는데. 어떻게 될까요?”

“으음.”

“여인들은 사내들보다 다른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적은 편이죠. 나라에서 이런 융화정책을 안 펼쳤던 건 아니겠지만 여인들부터 끌어들이고 하면 다를 거예요.”

“되든 안 되든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군.”

“자. 처가 아름다워지고 자식이 유식해졌어요. 족장은 무척 자랑스러워하겠죠?”

“그렇겠지.”

“이제 족장도 기쁘게 해주는 겁니다. 명주(名酒)가 됐든 화려한 의복이 됐든 뭐든지 팔아서요. 그들이 그런 것에 재물을 써도 부인들은 탓하지 않을걸요.”

“그럴듯하군. 그럴듯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리던 모용오가 불쑥 물었다.

“그런데 말일세. 그 일을 하는 데 하북팽가가 왜 필요한가?”

“황상의 허락과 조정 대신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요.”

“이해가 안 가는데.”

“오늘내일하시는 현 황상께 이 방안을 말씀드리긴 힘들죠. 황태자 전하도 곧 뒤따라가실 것 같으니 안 되고.”

오늘내일이라.

이미 한 번 들었던 표현이지만 여전히 기겁하는 모용상현과 달리 모용오는 그 의미에만 집중했다.

“맞는 말일세. 얼마 안 가 황태손 저하께서 황위에 오르실 테니 그때 말씀드려야겠지. 헌데 그분께서 허락하실까? 본가가 위험해질 수도 있네.”

제위(帝位)에 오른 자는 의욕적으로 이런저런 정책을 펼치기 마련.

그 대부분은 황권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

하지만 정광이 말한 방안은 나라의 안정에 큰 도움이 되지만 모용세가의 세도 커지는 부작용이 있었다.

황태손이 이를 의심스러워하면 모용세가에 큰 화가 닥칠 터.

하지만 정광은 해결 방법이 있었다.

“팽가가 그분을 움직일 수 있어요. 정확히 말하면 팽가가 아니라 팽가의 태상가주님이지만.”

“어떤 관계가 있길래?”

“황태손 저하께서 태상가주님을 스승으로 모시거든요. 그분의 말씀을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여기실 정도로 믿으시죠.”

“……!”

비밀인 사실이었지만 정광은 거리낌 없이 말했다.

모용오를 설득하고 팽가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였으나 사심도 조금 있었다.

팽만소가 자신의 정체를 황태손에게 말했던 것처럼 똑같이 돌려준 것이다.

“처음 듣는 얘기군.”

“사실인데. 나중에 직접 확인해 보세요.”

“으음.”

“물론 황태손 저하도 고집이 있는 분이라 무턱대고 따르진 않으실 거예요. 아니다 싶으면 가차 없이 쳐내시겠죠.”

“하지만 이건 꽤 그럴듯한 방안이지.”

“네. 하북팽가의 큰 어른이 혼인동맹을 맺은 모용세가를 보증하며 황태손 저하를 설득해요.”

“…….”

“군부에 진출한 팽가 사람들이 그 정책을 지지하고요. 북방의 건강한 말들을 더 들여와 군마로 쓸 수 있으니 좋은 명분 아닐까요.”

“…….”

“부족했던 모피와 약재도 맘껏 쓸 수 있게 될 테니 문관들도 좋아할 거고요.”

“…….”

“황태손 저하께서도 나쁘지 않은 치적을 쌓으실 기회죠. 백성들이 얼마나 기뻐하며 칭송할까.”

“…….”

“돈을 좀 뿌려야 하고 일이 잘되면 그분께 성의 표시를 해야겠지만 모용세가와 하북팽가도 큰 이득을 볼 거고요.”

“…….”

침묵하던 모용오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가 얻는 건?”

“천하가 평안해지는 것으로 족하죠. 그래야 편하게 이곳저곳 다니며 놀 수 있으니까.”

“…….”

모용오가 빤히 노려보자 정광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적당히 떼주세요. 어때요. 괜찮은 그림이죠?”

“……자네는 누군가? 어떻게 그런 것들을 알지? 내가 생각하는 그가 맞나?”

정광이 당당히 말했다.

“네. 천하유람단주 맞습니다.”

* * *

정광은 모용세가주의 집무실에서 나와 모용상현과 함께 걸었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던 모용상현이 궁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단주. 하나 물어봐도 되겠소?”

“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소?”

“돈 냄새가 나서요.”

“……돈이 부족하진 않으신 것 같소만.”

“아직 부족한데.”

곤륜과 청해성이 떵떵거리며 살려면 부족했다.

당장이 아니라 앞으로도 그렇게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줘야 했다.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이 그렇게 형편없어서야 쓰겠는가.

‘장강과 북방 일이 잘 풀리면 대충 되려나.’

할 일은 다 했다.

나머진 남궁세가와 모용세가, 하북팽가에 달렸다.

‘장강 쪽 일이야 위진홍과 사제가 있으니 잘될 거고. 여기 일은 모용세가가 관건인데.’

낌새를 보아하니 모용상현이 겪었던 일들 외에도 안 좋은 일들이 있는 듯했다.

제법 유능한 모용오가 알아서 처리하겠지만 혹시라도 모용세가에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잘 풀리는 게 좋지만 굳이 땀을 빼가며 억지로 바로 잡을 생각은 없었다.

‘형편에 맞춰 살면 되지.’

곤륜과 청해성이 떵떵거리며 사는 게 아니라 그냥 남부럽지 않게 살면 되는 일 아닌가.

모용오가 급한 일부터 해결하고 사실 여부를 알아본 뒤 추진하자 했으니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웬만하면 모용수수와 팽강휘가 서로 마음에 들어 하면 좋을 텐데.’

두 사람이 안 이어져도 못할 사업은 아니었다.

‘내 정체를 짐작하고 있으니 뒤통수를 치진 않을 거고.’

모용오뿐 아니라 아들인 모용상현도 알아챈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입 밖에 내지 않는 건 믿을 만한 이들이라는 의미.

‘모용오가 일을 정리하는 동안 내 할 일을 하자.’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모용상현의 거처에 도착했다.

혜진이 밖으로 나와 반겼다.

“오셨습니까, 단주.”

“잘 쉬셨어요?”

“네. 그렇습니다.”

“푹 자고 내일 떠날 테니 미리 준비해 놓으세요.”

정광의 말에 모용상현이 놀랐다.

“벌써 말이오? 조금 더 머무르시지 않고.”

“할 일이 있어서요. 끝나고 들를게요.”

“아. 그러셨지. 먼 곳이오?”

“저도 모르는데요.”

정광이 조양사(朝陽寺)의 정확한 위치를 물으려고 하는데.

자오의 신형이 나타났다.

“왜 벌써 오세요?”

정광이 의아해하자 자오가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서론은 대충 끝났고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식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

옆에서 듣던 혜진의 눈이 커졌다.

한 시진은 족히 넘었는데 이제 겨우 서론이 끝났다니.

“대협. 이공자와 삼공자는…….”

그때, 후원 쪽에서 모용상진과 모용상우가 달려왔다.

잔뜩 흥분한 얼굴로.

“각응 대협! 식사는 간단히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희는 안 먹어도 됩니다. 그냥 계속 얘기를 들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자오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을 달랬다.

“이제 겨우 말문을 열었을 뿐인데 왜 그리 조급해하시오? 배를 든든히 채우고 제대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소만.”

밥을 먹고 제대로 시작하자는 말에 아이들의 눈이 빛났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어서 가시지요.”

정광과 혜진은 입을 살짝 벌린 채 아이들을 바라봤다.

자오의 말을 마치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받아들이는 모습이라니.

이게 대체 말이나 되는 일인가.

“단주. 다녀오겠습니다.”

“……그러세요. 너무 무리하진 마시고요.”

“하하. 무리라니요. 이제야 지음(知音)을 만난 기분입니다.”

자오는 두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밥 얘기를 들은 정광은 덩달아 배가 고파져 모용상현에게 청했다.

“우리도 가죠.”

“여기에서 드시는 게 어떻겠소? 괜한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말이오.”

아까 만났던 모용중처럼 시비를 거는 이가 있을지도 모를 거란 의미.

“그러죠. 아. 술은 많이 부탁드려요. 불취검이 계시니까요.”

혜진은 얼굴을 붉히고 모용상현은 크게 동의했다.

잠시 뒤.

화려하진 않지만 소박한 멋이 있는 요리들이 탁자 위에 놓였다.

정광은 술병의 대부분을 혜진 쪽으로 밀고 젓가락을 들었다.

“자. 차린 건 없지만 드시죠.”

“……나름 차렸소만.”

“소식하는 게 가풍이신가 보네. 뭐 나쁘지 않죠.”

정광은 배를 채우고 술도 걸쳤다.

당장 해야 할 일을 끝내자 아까 하려던 말이 떠올랐다.

“대공자. 조양사에 가려고 하는데요. 어딘지 아시나요?”

“아! 조양사!”

“역시 유명한 곳인가 보네요.”

“목적지가 거기였소? 의외외다.”

“하하. 제가 불심이 깊은지라.”

불심은 무슨.

꽤 웃기는 농이었으나 모용상현은 웃지 않았다.

그의 이어지는 말에 정광 역시 그렇게 됐다.

“화재로 소실된 지 오래인데. 모르셨소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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