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284화 (283/569)

2부 13화

새로운 세계

모용상현은 굳은 얼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란히 걷던 정광이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충고했다.

“긴장 좀 푸세요. 얼굴 다 갈라지시겠네.”

“그래서가 아니오. 그보다 긴장은 단주가 해야 하는 것 같소만.”

“제가 왜요?”

“…….”

왜냐니.

요녕성의 수장이나 다름없는 모용세가의 가주를 만나러 가는 길이니 당연히 긴장을…….

‘……안 하는군.’

곁눈질로 본 정광은 긴장하긴커녕 뭔가 기대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단주. 가주를 뵙는 게 부담되진 않소?”

“부담은 무슨. 같은 사람인데요.”

“……!”

같은 사람이라.

일전에 이민족들을 봤는데도 왜 놀라지 않냐고 물었을 때 들었던 대답 아닌가.

모용상현은 깊이 자책했다.

‘나는 아직도 한참 멀었구나.’

그때는 사람 간에 구분을 두지 않는 모습에 감탄해 놓고, 본가에 돌아오자 왜 자신의 아비인 가주를 특별히 생각하지 않냐고 따져 버렸다.

“미안하오. 그대가 줬던 깨달음을 금세 잊었소이다.”

“뭘 드린 기억은 없는데.”

정광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화통하게 말했다.

“그렇지. 드렸다 치고, 그만큼 약재값에서 감해주시면 되겠네요.”

“하하하. 그럽시다.”

“이제야 표정이 풀리셨네. 진작 이러시지.”

“그러게 말이오. 하하.”

모용상현은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덜어낸 무게만큼 밝아진 목소리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얘기했다.

“가주를 뵙고 내가 겪은 일들을 아뢰었소.”

“독대하신 건 아니시죠?”

“나중에 하긴 했소만. 작은 사안이 아닌지라 다른 어르신들도 계셨소.”

그들의 반응은 뻔했다.

이미 서신을 통해 대강의 내용은 알고 있었으나, 대면한 상태로 상세히 들으니 더 분노할 수밖에.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마적일 리가 없을 만큼 강한 고수가 가문의 대공자를 습격한 데다, 호족들이 아무런 언질도 없이 마적단을 압박해 날뛰게 했다니.

이게 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냔 말이다!

누군가 다른 성의 무인을 마적으로 위장시켜 모용상현을 죽이도록 사주한 게 아니냐는 얘기들이 나왔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고 말씀드렸소. 언제까지 마적들을 봐줄 순 없어 변화를 줘봤다는 호가주의 주장도 가감 없이 전해 드렸소이다. 허나…….”

그 주장을 믿을 만큼 순진한 이는 없었다.

호족들의 자치권이야 당연히 인정하나 평소의 그들을 생각하면 이렇게 언질도 없이 행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 아닌가.

모용상현의 얘기를 듣던 정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상한 마적과 호가주님을 연관 짓는 분도 계셨겠네요.”

“그렇소.”

“가주께서는 지나친 억측은 금하라고 주의를 주셨을 테고요.”

모용상현의 눈이 커졌다.

“그걸 어찌 아셨소?”

“호가주님께 원한이라도 있으시다면 모를까. 수장으로서 당연한 일이잖아요.”

“아. 생각해 보니 그렇구려. 확실하지도 않은 일로 결집을 해칠 순 없지.”

“그나저나 별것 아닌 일들인데,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계셨어요?”

별것 아닌 게 아니라 대단히 중요한 사안들이었지만, 정광은 모용상현의 표정이 무거운 이유가 더 궁금했다.

어느 정도 정광의 화법에 익숙해진 모용상현은 쓸데없는 정정 요구 없이 바로 대답했다.

“솔직히 다 말하리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신궁이 때맞춰 나타나 나를 구한 것에 대해 의아해하는 분들이 계시오.”

말이 의아해하는 것이지, 의심스러워하는 거였다.

놀랍게도 정광은 개의치 않았다.

“그러실 만도 하죠. 누가 봐도 너무 공교로우니까.”

“이해해 주셔서 고맙소.”

“뭘요. 그분들 명단 좀 적어주실래요.”

“…….”

모용상현이 곤란한 표정을 짓자 정광이 해맑게 웃었다.

“농이에요, 농. 진짜 주시면 감사히 받겠지만요.”

모용상현이 걸음을 멈추고 두 손을 모았다.

“단주. 그럴 자격은 없지만 내가 대신 사과드리겠소.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주시오.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은 정말 소수요.”

“가주께서는 뭐라 하셨죠?”

“의아한 점은 있으나 은인을 욕되게 하지 말라며 나무라셨소이다.”

“저를 감시하는 분이 없는 걸 보면 애초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나 봐요.”

“그렇소.”

“좋은 판단을 하셨어요. 모용세가는 복이 많네요.”

“……!”

정광의 무덤덤한 말에 모용상현은 소름이 끼쳤다.

만약 안 그랬다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고 모용세가는 큰 타격을 받았을 거란 의미 아닌가.

‘대단한 자신감이구나.’

다른 이가 이런 말을 했다면 분노했겠지만, 그로선 측량할 수조차 없는 고수인 정광이 이러자 정말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상상하게 됐다.

‘단주는 신궁이다. 싸우면 아무리 본가라 해도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어.’

물론 자신의 가문이 질 거란 생각은 추호도 안 했다.

아니, 정광이 반로환동(返老還童)한 고수라 해도 가문의 무력 조직 중 하나인 묵혈철기대(墨血鐵騎隊)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죽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여긴 대평원이야.’

대평원에서 나고 자란 그였기에 기마(騎馬)와 숫자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았으나…….

‘그래도 단주의 대단함은 부정할 수 없지.’

모용상현은 정광의 말을 시원하게 인정했다.

“자존심 상하지만 그대의 말이 맞소. 가주께서 아주 옳은 판단을 하셨소이다.”

“대공자께서도 판단력이 좋으시네. 모용세가는 앞날까지 밝다니까.”

“하하하. 고맙소. 하지만 단주도 자중해 주시오. 본가는 강하오. 괜한 분란이 일어나는 건 원치 않소이다.”

“물론이죠. 좋은 게 좋은 건데.”

정광도 쓸데없는 싸움을 할 생각은 없었다.

평원에서의 기마와 숫자가 얼마나 상대하기 까다로운 것인지 전생의 경험을 통해 잘 알아서였다.

‘피곤하게 그래서 뭐 해. 얻을 것만 얻고 가자.’

영단 재료를 싸게 얻고 원래의 그림을 더 그럴듯하게 덧칠할 기회 아닌가.

기분이 좋을 수밖에.

그렇기에 갑자기 나타나 시비를 거는 중년인을 보고도 별다른 불쾌감을 느끼지 못했다.

“나는 모용중이라 하네. 자네가 천하유람단이라는 기이한 조직의 단주인가?”

“아뇨.”

“무어라? 그럼 누군가?”

정광은 가슴을 활짝 펴고 당당하게 말했다.

“천하유람단이라는 멋진 조직의 단주인데요.”

“…….”

모용중의 이마에 깊은 주름살이 잡히자 모용상현이 급히 나섰다.

“숙부. 회의가 끝난 지 오래인데 아직 안 돌아가셨습니까.”

“그 회의 때문에 할 일이 많지 않나.”

“그렇군요. 고생이 많으십니다. 가주께서 천하유람단주를 찾으셔서 제가 안내하는 중입니다. 서둘러 가야 하니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가주를 들먹이며 영리하게 빠져나가려 했으나 모용중은 노회한 인물이었다.

“수고가 많군. 허나 궁금한 게 너무 많아 이대로 물러나긴 그렇네. 그래, 이렇게 하는 건 어떤가?”

“어떻게 말입니까?”

“함께 걸으며 가주께 가는 동안만이라도 얘기하세.”

이렇게까지 나오니 모용상현으로서는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그렇게 하시지요.”

세 사람은 나란히 발걸음을 옮겼다.

모용중은 정광을 노골적으로 훑으며 캐묻기 시작했다.

“나도 이러긴 싫네만 사안이 사안이니 이해해 주게나. 자네는 누군가?”

“천하유람단주요.”

“이름 말일세, 이름.”

“그건 좀. 제가 은근히 수줍음이 많아서.”

“……지금 장난하자는 겐가?”

“아뇨. 진지한데요.”

모용중의 눈에 노기가 떠올랐다.

“언행이 이래서야 원. 자네 사부가 골치깨나 썩었겠군. 안 됐다고 말하고 싶지만 자업자득이지. 사부 책임이 더 커. 제자를 이렇게 키워서야 쓰나.”

“……!”

모용상현의 눈이 커졌다.

‘제자 앞에서 대놓고 사부를 비난하다니! 숙부가 작정하고 시비를 거는구나!’

모용중은 아까의 회의에서 정광이 의심스럽다고 주장한 사람들의 대표 격인 인물이었다.

내외부로 영향력이 큰 자였기에 가주도 적당히 나무라고 끝냈는데 이렇게 찾아와 도발할 줄이야.

‘대체 뭘 노리는 거지? 심계가 깊은 숙부가 충동적으로 이럴 리는 없는데.’

연유를 파악하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

사부가 욕을 먹었는데 어느 제자가 참겠는가.

‘단주가 가만히 있을 리 없어. 막아야 해!’

하지만 정광은 남달랐다.

“제 말이. 사부가 저를 잘못 가르치시긴 했죠. 그러니 저 때문에 골치 아파하시는 건 자업자득이고요.”

“……!”

모용 숙질은 걸음을 멈춘 채 입을 찢어져라 벌렸다.

“그런데 어떻게 아세요? 신기하네.”

“…….”

늙은 생강이 매운 법.

모용중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사부를 탓하다니. 진심인가?”

“그런데요.”

“허어. 믿을 수가 없군.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정광이 계속 걸음을 옮기자 모용중은 재빨리 따라가며 분노를 뛰어넘어 탄식했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 했거늘. 천하에 이런 망종이 있나!’

하지만 그가 모르는 게 있었으니.

정광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망할 놈의 도경만 빼면 모두 혼자 익히다시피 했고, 오히려 허청에게 수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기까지 한 형편 아닌가.

이렇게 맞는 말에 맞는 대답을 했건만.

정광은 기분이 묘하게 안 좋아진 걸 느꼈다.

‘뭐지? 뭔가 좀 정정해야 할 것 같은데.’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저기요. 모용 대협.”

“말하게.”

“사부도 나름 가르치신 게 있고 저 때문에 아주 많이 머리 아파하시진 않아요. 그래서 그런지 수명도 많이 남으셨죠.”

정광은 모용중을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사부가 훨씬 오래 사시겠네.”

“…….”

모용중은 분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빛냈다.

‘망종이긴 하되 사부를 챙기긴 하는군.’

기이한 성품을 드러내며 제멋대로 굴고 있으나, 사특한 사기나 마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정파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정사 중간이야. 거기에 놀라운 고수라.’

모용상현은 과장되게 떠벌리는 이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극찬한 인물이 바로 정광이었다.

‘직접 봐도 수준을 알 수가 없구나. 이 나이에 말이 되나? 중요한 시기에 이런 괴물이 나타날 줄이야.’

느닷없이 나타난 변수였다.

변수가 속한 세력을 알아내야 했다.

‘물으면 또 딴소리나 해댈 거고. 신궁이라 했었지.’

정광이 등에 메고 있는 독특한 활.

저런 것을 사용하는 문파는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넌지시 물었다.

“자네 사부를 비난한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말게나. 헌데 그 활은 뭔가? 생김새는 각궁(角弓)인데 재질은 철궁(鐵弓)이군. 그걸 쓰려면 신력은 기본이요, 독특한 궁술이 필요할 것 같은데…….”

“아. 그게 궁금하셨군요. 알려 드릴까요?”

“부탁하네.”

“근데 어떡하죠? 시간이 안 되는데.”

“무슨 소리인가?”

정광은 걸음을 멈추고 눈앞의 것을 가리켰다.

“모용세가에서 제일 높은 전각이네요. 가주님 집무실 같은데. 맞죠?”

“……어, 어느새!”

정광은 눈을 치뜨는 모용중을 보며 싱긋 웃었다.

“조심히 가세요.”

* * *

모용세가주의 집무실 내부는 그 위상에 걸맞지 않게 무척 소박했다.

정광은 그게 마음에 들었다.

‘이거지. 아껴야 잘 산다니까.’

모용세가주도 제법 괜찮아 보였다.

남궁화운을 떠올릴 만큼 강해 보이는 기운 때문이 아니었다.

희미한 미소를 띤 채 인사를 건네며 해야 마땅할 말만 해서였다.

“만나서 반갑네. 모용오일세. 아들 녀석을 구해준 보답을 하고 싶네만. 원하는 게 있는가?”

“화통하셔라. 역시 모용세가의 기상은 남다르네요.”

“너무 애쓸 필요 없네. 편히 말해보게나.”

“약재를 좀 사고 싶어요. 싸게요.”

“조치하지.”

“영초나 영물. 영약도요.”

“흐음.”

모용오는 수염을 쓰다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주지. 단, 최소한의 금액은 지불해야 하네.”

“감사합니다!”

아까의 칭찬은 예의상 던진 것이었으나 이번의 감사는 진짜였다.

‘돈이 있어도 못 구하는 것들을 사는 게 어디야. 그것도 싸게.’

기분이 좋으니 표정도 좋아졌다.

모용오는 그런 정광의 얼굴을 유심히 보다가 자연스럽게 물었다.

“그 대가로 요구하는 건 아니네만. 몇 가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만요.”

“그럴 참이었네.”

모용오는 정말 정광이 감추려고 하지 않는 것들만 물었다.

“자네는 대단한 고수군. 맞나?”

“네.”

“활만 잘 다루는 게 아니라 검술에도 조예가 깊을 것 같은데.”

“물론이죠.”

“번거로운 걸 무척 싫어할 것 같네만.”

“잘 아시네요.”

“자네 같은 인물은 음모 따위를 꾸미느니 칼춤을 추는 걸 택하니까.”

모용오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왜 금주호가(錦州扈家)에 불을 질렀나?”

“제가 한 게 아닌데.”

“자네가 한 건 아니다…… 단원들의 실력도 대단하다더니 그 이상인가 보군. 아. 이건 못 들은 걸로 하게나.”

“네? 뭐라 하셨죠?”

“활뿐만 아니라 검술에도 능할 것 같다고 했네.”

“물론이죠.”

모용오는 잠시 고개를 끄덕이다가 저었다.

“판단이 힘든 문제가 있네. 상현이가 회의에서는 말하지 않고 독대하는 자리에서 말해주더군. 자네의 추측 말일세. 그 가능성이 얼마나 될 거라 생각하는가?”

“호족들이 마적을 이용해 혼란을 일으켜 모용세가의 위상을 흔들려고 한다는 거요?”

“마적으로 위장한 자로 상현이를 죽여 본가의 체면을 땅에 떨어뜨리고. 그 마적과 호가주가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까지 포함해서.”

“복잡해라.”

정광은 모용오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저보다 가주님께서 아시는 게 더 많을 것 같은데요.”

“…….”

“외인인 저한테 확신을 얻으려 하지 마시고 원래 생각대로 가시죠.”

“…….”

잠시 침묵하던 모용오가 나직이 말했다.

“구구절절이 맞는 소리라 할 말이 없군.”

“마침 저는 할 말이 있네요.”

“말해보게.”

정광은 모용수수에게 사내를 소개해 주기로 했고 모용수수가 승낙했다고 얘기했다.

지금껏 평정을 지키고 있던 모용오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사내를? 수아가? 승낙까지?”

“네.”

“상현아, 사실이더냐?”

“그렇습니다, 가주.”

모용상현이 확인해 주자 모용오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놀랍군. 정말 놀라워.”

“이제 놓아주실 때가 된 거죠.”

“때야 진작 지났지. 헌데 왜 이런 일을 벌이는 겐가?”

정광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진정한 현인이 있다면 이럴까.

심지어 목소리조차 진중하게 변했다.

“가주님, 이렇게 만나 뵙게 된 것도 인연 아닐까요.”

“……인연?”

“그러니 일 하나 함께하시죠. 새로운 세계를 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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