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2화
내 집
“좋은 분 소개해 드릴까요?”
정광의 느닷없는 말에 사람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자오는 그러려니 했다.
혜진은 황당해했다.
모용상현은 입만 떡 벌렸다.
당사자인 모용수수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묵직이 되물었다.
“소개라?”
“네. 싫으세요?”
“그대 같은 샌님은 싫소.”
“걱정하지 마세요. 취향에 맞으실 테니까.”
“흐음.”
수염도 없는 턱을 문지르던 모용수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중원 사람도 만나보는 게 좋겠지.”
“역시 화끈하시네요.”
“나보다 강하고 제대로 된 자라면 상관없소.”
“은근히 까다로우시네.”
정광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피식 웃었다.
“그분도 나름 강하시니 첫 번째 것은 상관없고. 제대로 된 자라. 그건 보는 눈에 따라 다르니 문제없네요.”
다른 이들이 보기엔 문제가 많았다.
자오가 혹시나 싶은 생각에 전음으로 물었다.
-단주. 설마 저는 아니겠지요?
-그렇다면요?
자오의 전음이 빨라졌다.
-소, 속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는 데다…….
-자오는 가정을 이룰 만한 재정 준비도 안 돼 있잖아요. 나이는 준비가 너무 지나치시고.
-크흑.
-그래도 남궁세가 일이 제대로 시작되면 안정적인 수입이 생기실 테니 희망의 끈은 놓지 마세요.
정광은 자오를 위로한 뒤 모용수수에게 물었다.
“혹시 중원에 나가실 계획은 있으신지?”
“지금은 없소.”
“그럼 상황 봐서 소저께서 가시든 그분이 오시든 하면 되겠네요.”
“그럽시다.”
대충 얘기가 끝나자 아직도 입을 벌린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모용상현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아버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셔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녀석이 이렇게 쉽게 승낙하다니…….”
“무슨 말씀이오? 서신 가득 이 사람의 칭찬을 늘어놓으시고선.”
“그, 그러긴 했다만. 그게 왜?”
“오라버니께서 인정한 강자답게 보는 눈도 있을 터. 무인이 겨뤄볼 만한 이를 소개받았는데 어찌 거부하겠소?”
“아! 그쪽으로 이해한 것이었나!”
“당연한 소리를. 다른 무엇이 있다고.”
누가 봐도 전혀 당연하지 않았다.
자오는 모용수수의 머리를 뚫어져라 보며 진지하게 생각했다.
‘저 속에도 근육이 뭉쳐 있는 건가?’
혜진은 어이없어하면서도 감탄했다.
‘얼마나 무공광(武功狂)이기에 그걸 그렇게 이해할까.’
정광은 이러는 게 맞는 걸까, 잠깐 고민했다.
‘너무 단순한 건 안 좋은데. 아니, 오히려 좋을지도.’
무(武)만 바라보며 생활하는 이가 곁에 있으면 함께하는 이도 더 강해질 수밖에.
정광은 몇 달 동안 못 본 장대한 체구의 사내를 떠올렸다.
‘같은 무공광이니 잘되면 그도 행복해하겠지.’
부부싸움 할 때는 좀 문제겠지만.
물론 이건 정광에게 더 좋은 일이었다.
‘역시 천하는 넓다니까.’
요서를 지나 요동까지 와서 직접 보니 원래의 그림에 덧칠할 만한 부분이 보였다.
그걸 쉽게 칠하려면 두 가문을 피로 잇는 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을 게 분명했다.
‘되면 좋고. 안 되면 뭐 그냥 그런 거고.’
정광이 고개를 주억거리는데 모용수수가 그제야 뭔가 깨달은 듯 물었다.
“잠깐. 혹시 그 소개란 게 비무가 아니라 남녀 간의 만남을 말하는 것이었소?”
“그런데요.”
“…….”
모용수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웬만한 사내보다 기골이 장대한 데다 매일 말달리며 참마도를 휘두르는 자신에게 왜 사내를 소개해 주려고 한단 말인가.
“밖에만 나가봐도 어여쁜 여인들이 발에 챌 만큼 많거늘, 왜 내게 이러오?”
모용수수보다 정광이 더 어이없어했다.
“예뻐서 뭐 해요. 잘 싸우거나 잘 버는 게 최고지.”
“…….”
“아. 솔직히 모용세가의 이름값도 봤어요. 그런데 상대도 만만치 않은 가문이니 부담 갖지는 마시고요.”
“…….”
모용수수는 정광을 물끄러미 보고 모용상현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단주, 그 얘긴 나중에 합시다. 빨리 가서 어르신들께 보고를 드려야 하오.”
“네. 다녀오세요.”
“수아야. 너도 가야 한다. 중요한 일이야.”
“알겠소, 오라버니.”
“그럼 단주. 내 집이라 생각하시고 편히…….”
정광은 이미 전각 문을 열고 들어가 누울 곳을 찾고 있었다.
“……펴, 편히 쉬고 계시오.”
“물론이죠. 그보다 시간이 꽤 걸리실 것 같은데. 가시는 길에 하나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럽시다. 무엇이 필요하오?”
“모용세가에 있는 약재 목록요. 영초나 영물, 영약이 있으시면 그것들도 다.”
“금원보를 바꿀 준비를 하시려는 거군. 알겠소이다. 사람을 보내 드리겠소.”
오누이가 떠나자 자오와 혜진이 전각 안으로 들어와 궁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정광이 더 빨랐다.
“운기조식 해보실래요.”
“……?”
“경지를 좀 살펴봐야 할 것 같아서요.”
“……!”
정광에게 몇 번이나 영약을 받아 복용한 자오였다.
혜진도 그에 대해 여러 번 들었었고.
‘우리의 내공과 몸 상태를 확인하고 약재로 영단(靈丹)을 만들어주려고 하시는구나.’
‘말로만 듣던 이런 기연을 얻게 되다니.’
두 사람은 즉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정광은 그들의 명문혈(命門穴)에 손바닥을 대고 화후(火候)를 살펴보다가 빙그레 웃었다.
‘눈곱만큼씩이지만 계속 나아지고 있어. 요령 안 부리고 착실히 수련한 게 보이네.’
무혈단원들도 그러고 있으리라.
곤륜의 사람들도.
‘어디 보자. 둘 다 내공을 높이는 것보단 토양을 더 깨끗하게 해주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정순함이 필요한 시기야.’
일전에 비슷한 걸 만들어봤기에 재료만 있으면 됐다.
‘마침 나도 필요한 상황이니 같이 만들자.’
정광은 내공의 양과 정순함을 모두 끌어올려야 했다.
‘언젠가는 가겠지.’
전생의 경지에 다다르려면 아직도 멀었으나, 지금까지 꽤 왔고 이미 한 번 걸었던 길이니 별다른 문제는 없으리라.
‘자꾸 조급해지려는 마음만 버리면 돼. 하나씩 하나씩 하는 거다.’
그때, 모용상현이 보낸 사람이 왔다.
정광은 자오와 혜진에게서 손을 떼고 인사를 나눈 뒤 묵직한 장부를 받았다.
상인 차림의 사내가 그 장부에 대해 설명했다.
“본가가 소유하고 있는 약재들의 목록입니다. 거기에 없는 건 대공자의 권한 밖의 것이오니 그분을 탓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미리 솔직히 말씀해 주셔서 좋네요. 잘 볼게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사내가 떠나자 정광은 모용상현의 침상에 엎드려 장부를 훑었다.
파라라락-
수많은 약재들의 이름과 수량, 가격 등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사라진 그것들은 정광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장부의 책장을 전부 넘겼을 때.
‘…….’
정광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역시 부자네.’
기대한 것보다 훨씬 많은 종류의 약초들이 있었고 수량 또한 상당했다.
모용상현이 했던 말처럼 질이 좋아서 그런지 가격이 꽤 비싸 보였으나 깎아달라고 하면 될 일.
‘진짜는 모용상현이 아니라 그 윗선을 통해 알아봐야 한다는 얘기인데…….’
이것들로만 해도 그럴듯한 효능을 가진 단환을 만들 수 있었으나 그것으론 모자랐다.
‘가주를 만나면 돼.’
어차피 모용수수에 관한 얘기도 해야 하니 겸사겸사 처리하면 된다.
‘적장자(嫡長子)를 구해줬으니 가주가 먼저 찾겠지.’
모용상현이 누이를 데리고 간 지 얼마 안 됐으니 한참 더 기다려야 할 터.
우선 운기조식을 마친 자오와 혜진을 다른 방으로 보냈다.
‘낮잠을 잘까, 술을 한 잔 걸칠까.’
침상에서 뒹굴뒹굴하며 한참 고민하는데.
갑자기 나타난 두 사람 때문에 일어나야 했다.
“어디에서 온 뉘신지?”
이제 지학(志學)이나 됐으려나?
정광의 물음에 영준한 소년이 의젓하게 말했다.
“소협이 천하유람단주시오? 만나게 되어 반갑소이다. 나는 모용상진이라 하오.”
다음은 일곱 살이나 될까 싶은 수줍음 많은 꼬마였다.
“저는 모용상우입니다.”
정광도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반가워요. 그럼 이만.”
그리고 다시 침상에 드러누우려 하는데.
이 어린 것들은 끈질겼다.
“서신을 통해 얘기는 전해 들었소. 형님을 도와주신 점, 깊이 감사드리오.”
“저도 감사합니다.”
“네. 네. 알겠으니 그만 가셔서 쉬시죠.”
“조금만 더 시간을 내주시면 안 되겠소? 궁금한 점이 무척 많소이다.”
“저도 그렇습니다.”
“흐음.”
정광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혹시 이공자와 삼공자?”
“그렇소.”
“그렇습니다.”
“제가 대공자를 도운 게 고맙다고요?”
두 사람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정광이 의아해했다.
“왜요? 그분이 가셔야 두 분한테 차례가 올 텐데.”
“……!”
“네? 무슨 말씀입니까?”
정광이 설명하려 하자 모용상진이 제지했다.
“그만. 아이가 있는데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정광은 어이없는 눈으로 모용상진을 훑었다.
“제 눈에는 이공자나 삼공자나 비슷한데요.”
“…….”
모용상진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가 폈다.
“나까지 애 취급하지 마시오. 내년이면 전장에 나가게 되는 나이외다.”
“저런. 그렇게 빨리요? 싸움이 얼마나 잦길래.”
“빠르지 않소. 그게 대평원의 율법이외다. 어쨌든 형제간에 분란을 일으킬 만한 말씀은 삼가 주시오.”
애늙은이 같은 모용상진의 말에 정광은 호기심을 느꼈다.
“중원에선 형제끼리 그렇게 싸우곤 하는데요.”
“본가는 다르오.”
모용상진의 얼굴에 자부심이 떠올랐다.
“절대 형제를 해치지 않소. 가문의 결집력을 유지한 상태로 정당한 경쟁을 하오. 그 경쟁을 토대로 더 훌륭한 이가 가주가 되어 모두를 이끄는 것이오. 그게 바로 모용세가외다.”
“흐음.”
정광은 머리를 긁으며 중얼거렸다.
“우애를 지킴으로써 가문의 힘을 유지한다라. 그래야 대평원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그것참. 이상적이긴 한데…….”
“…….”
“그게 되나?”
“…….”
“잘 안 될 때도 있었죠?”
“…….”
모용상진은 정광을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부정하진 않겠소. 허나 극히 적다는 것은 알아두시오.”
“그 정도면 훌륭하죠.”
정광이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하자 모용상진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알아주셔서 고맙소.”
“뭘요. 이제 가실 거죠?”
“음…….”
지금껏 어른스럽게 굴던 모용상진이 머뭇거렸다.
그러자 가만히 있던 모용상우가 수줍은 표정으로 용건을 꺼냈다.
“천하유람단주라 하심은 천하를 유람하는 단체의 주인이란 뜻입니까?”
“그렇죠.”
“여기저기 많이 다니셨을 것 같습니다.”
“그런 편이에요.”
“단주께 중원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들을 수 있겠습니까?”
정광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철이 빨리 든 편이지만 애들은 애들이네. 궁금해할 만도 하지.’
요녕성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모용세가의 아이들이지만 중원의 화려함을 언제 경험해 봤겠는가.
정광은 두 아이의 청을 쾌히 승낙했다.
“뭐 어려운 일이라고. 재밌는 얘기 많이 해드릴게요.”
“흠. 흠. 고맙소이다.”
“감사합니다!”
“뭘요. 각응! 잠깐 와보실래요?”
다른 방에 있던 자오가 유령처럼 나타났다.
“단주, 부르셨습니까.”
“네. 인사하세요. 이분은 이공자, 저분은 삼공자.”
“처음 뵙겠소. 각응이라 하오.”
그의 기이한 신법에 놀란 표정을 짓던 형제가 다급히 예를 표했다.
정광은 그런 그들에게 자오를 소개했다.
“각응은 말을 재미있게 하기로 유명한 분이죠. 두 분은 운이 좋으신 거예요.”
“고, 고맙소이다.”
“감사합니다.”
정광은 자오에게 눈짓했다.
“이분들을 모시고 후원에라도 가셔서 얘기를 들려주시겠어요? 괜찮으시죠?”
오랜만에 입을 풀 수 있게 된 자오가 하얗게 웃었다.
“물론입니다. 열과 성을 다해 즐겁게 해드리겠습니다.”
소년과 꼬마의 눈이 기대감으로 불타올랐다.
자오가 그들을 데리고 사라지자 자유로워진 정광은 침상에 길게 누웠다.
그리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정리했다.
‘나쁘지 않아.’
모용상현, 모용수수, 모용상진, 모용상우. 모두 괜찮은 인재였다.
‘자식들을 보아하니 가주의 됨됨이도 괜찮을 것 같고.’
직접 만나봐야 정확히 알 수 있겠지만, 최소한 글러먹은 자는 아니리라.
‘아이들은 어른들을 보며 배우는 법. 형제간의 우애가 괜찮다는 건 윗사람들도 그렇다는 얘기인데.’
모두 그렇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은 그럴 가능성이 컸다.
‘척박한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된 것만은 아니야. 보통 유목민들과는 확실히 다른 점이지.’
그들의 경우 형제끼리 싸워 진 세력의 가솔들을 전부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일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행패를 부리는 이민족들을 주기적으로 토벌하는가 본데. 지학쯤 되면 전장에 뛰어든다고?’
마치 무림의 무가가 아니라 관의 무가 같지 않은가.
‘아니, 전쟁 상대인 기마민족들에 가깝지. 하긴, ‘모용’이라는 성을 쓰니 당연한 것이려나.’
자오에게 조금씩 들었던 모용세가에 대한 정보를 되뇌는데.
그 가문의 대공자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자신의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는 정광을 황당한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지금 뭐 하시는 게요?”
“말씀하신 대로 내 집이라 생각하고 편히 있는 중인데요.”
“……부탁을 들어주어 고맙소.”
“뭘 이런 걸 가지고.”
“…….”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모용상현이 유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도저히 못 당하겠군. 역시 단주외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모용상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객이 주인에게 왜 왔냐고 물어서가 아니었다.
“단주. 가십시다. 가주께서 찾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