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282화 (281/569)

2부 11화

선자불래(善者不來) 내자불선(來者不善)

요녕성은 그 중심부를 관통하는 요하(遼河)를 기준으로 요서(遼西)와 요동(遼東)으로 나뉘는데, 성도(省都) 심양(瀋陽)은 드넓은 요하평원(遼河平原)이 펼쳐진 요동에 자리 잡고 있었다.

요서만 하더라도 한족(漢族)이 대부분이었으나 요동은 아니었다.

회흑색(灰黑色)의 요녕성 앞 넓은 평야에 펼쳐진 시장에 접어들자 더 그랬다.

다양한 복색의 이민족들이 독특한 억양으로 한족 상인들과 흥정하는 모습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흐음.”

정광이 그 광경을 흥미로운 눈초리로 바라보자 모용상현이 지나가듯 물었다.

“이민족이 신기한가 보오.”

“아닌데요.”

“그렇소? 중원에서 온 이들은 하나같이 놀라곤 하는데 의외외다.”

“의외일 거 있나요. 같은 사람인데.”

정광은 정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곤륜이 있는 청해성만 해도 강족(羌族), 토욕혼족(吐谷渾族) 등 여러 민족이 어울려 살아가는데 뭐가 신기할까.

무엇보다 전생의 정광도 한족이 아니었는데 무슨.

허나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모용상현은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사람이라. 분명 맞는 말이긴 한데…….’

말이 쉽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저 종잡을 수 없는 성품이라 여긴 게 미안해지는군. 상당히 열린 편이구나.’

한족의 자존심은 지나치게 과했다.

함께 부대끼며 살든 말든 자신들 외에는 모두 오랑캐라 규정하고 멸시하는 게 보통이거늘.

이렇게 위화감 없이 받아들일 줄이야.

그것도 억세고 흉악하기로 이름 높은 북방 이민족들을.

‘마음에 들어.’

모용상현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했다.

“단주는 알면 알수록 놀랍구려. 감탄했소이다.”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서 더 궁금해졌소. 그럼 무엇이 단주의 흥미를 끈 것이오?”

정광은 이민족들이 끌고 온 말들과 수레에 잔뜩 쌓여 있는 것들을 가리켰다.

“저것들, 꽤 좋아 보이네요.”

“잘 보셨소. 말은 튼튼하고 모피의 질은 천하제일이라 할 수 있소이다. 약초의 효능도 훌륭한 편이고.”

“모용세가는 저런 것들을 사서 중원에 내다 파시는 거죠?”

“그렇소.”

“이분들처럼 소소하게 하시는 게 아니라 대량으로.”

“그렇소만.”

“부러워라. 얼마나 쏠쏠할까.”

“…….”

정광은 정말 부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용상현은 그제야 그가 무엇에 흥미를 느낀 것인지 알게 됐다.

‘결국 돈인가?’

입에서 웃음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비웃음이 아니라 유쾌한 웃음이었다.

“하하하.”

“왜요?”

“단주는 유람이 아니라 장사를 하시는 게 더 맞을 것 같아 그러오. 허나 잘못 보셨소이다. 그렇게까지 쏠쏠하진 않소.”

“그럴 것 같긴 하네요.”

정광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나란히 말을 몰던 혜진이 물었다.

“단주, 왜 그런 것입니까?”

“저분들이 말, 모피, 약초를 팔고 그 대가로 무엇을 가져가는지 보세요.”

이민족들은 곡식, 농우(農牛), 철제 농기구를 주로 챙기고 있었다.

혜진은 그 모습을 빤히 보고도 어떤 의미인지 깨달을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정광은 간단하게 설명했다.

“곡식을 가져가는 건 먹을 게 부족해서이고 농우와 농기구를 챙기는 것은 농지를 개간하기 위함이니, 이 역시 식량 사정이 안 좋다는 걸 의미하죠.”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모용세가 입장에선 말이나 모피가 탐나도 저들에게 너무 많이 살 순 없을 거란 얘기예요.”

“아!”

혜진의 눈이 빛났다.

“사는 만큼 줘야 하니 적당한 양만 거래해서 저들의 힘을 통제하는 것입니까?”

“그래야죠. 게다가 철제 농기구는 녹여서 병기나 갑주로 만들 수 있잖아요. 틈난 나면 약탈을 해대는 이들인데 많이 주면 손해 아닐까요.”

“확실히 그렇군요.”

자오는 마치 알고 있었던 것처럼 고개를 주억거리고 혜진은 감탄했다.

모용상현은 더는 놀랄 힘도 없다는 시늉을 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하하. 역시 단주시오. 단번에 꿰뚫어 보시는구려.”

“뻔한 데요, 뭐. 이래저래 고민 좀 되시겠어요.”

“안 그래도 시간이 갈수록 머리가 아파지고 있소이다.”

겨울이 되면 굶주린 마적들을 달래기 위해 약간의 식량을 내어주듯, 이민족들이 약탈하는 걸 막기 위해 어느 정도의 교역은 하는 형편이었다.

전자의 경우는 귀찮아서였으나, 후자인 이민족과의 교역은 많은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 그 교역량이 날이 갈수록 늘어난다는 게 문제였다.

이민족들의 거센 요구 때문에.

“몽고족(蒙古族), 거란족(契丹族) 등 많은 이민족이 있지만…….”

모용상현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눈짓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을 가리켰다.

기마 민족들 특유의 변발(辮髮)을 한 사내들이었다.

“저 여진족(女眞族)들이 제일 문제요.”

“그건 왜 그렇습니까, 대공자?”

혜진이 호기심을 드러내자 모용상현이 입을 열었다.

“요녕성에 있는 몽고족은 소수요. 그들이나 거란족이나 유목민들이기에 힘을 키우는 데는 한계가 있소이다. 허나 여진족은…….”

농사를 짓고 사냥을 했다.

유목하다가 약탈을 하는가 하면, 정상적인 교역을 하는 한편 해적질도 서슴지 않았다.

살기 위해선 무엇이든 하는 이들이라 할까.

정광은 간단하게 감상을 말했다.

“참 열심히 사시는 분들이네요.”

“……그렇게 볼 수도 있다니 놀랐소.”

모용상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말을 이었다.

“게다가 저들은 싸울 줄 아오. 그런 자들이 힘을 비축해 가며 더 많은 교역을 원하고 있소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갈 순 없지 않소.”

“그렇죠. 보고는 이미 하셨을 거고. 황상께서는 뭐라고 하세요?”

“역사가 증명하듯 강한 존재가 압박하면 약한 자들은 살기 위해 뭉치기 마련. 황상께서는 그것을 염려하셨기에 저들의 숨통을 틔워주라 명하셨었소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깊이 고민 중이시라 하오.”

“저런.”

정광은 안타까운 얼굴로 두 손을 모았다.

“무량수불…… 거기에 아미타불까지 더해야겠네요. 안 그래도 오늘내일하신다던데 그냥 마음 편히 떠나시지. 무슨 미련이 그리도 많으신지 원.”

“……!”

“어? 왜 놀라세요? 무슨 일 있나요?”

정광이 오히려 놀란 표정을 짓자 입을 떡 벌렸던 모용상현은 가까스로 혀를 움직였다.

“……다, 단주. 농이 과하오.”

“진심인데.”

“…….”

모용상현은 안 돌아가는 목을 억지로 돌려 자오와 혜진의 안색을 살폈다.

“…….”

그들은 이 정도는 익숙하다는 듯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후우우. 빨리 갑시다. 이러다간 정신을 놓을지도 모르겠소. 단주는 이제 어디로…… 이런.”

모용상현은 재빨리 말을 끊고 사과했다.

“미안하오. 묻지 않기로 해놓고 실수했소이다.”

“그러게요.”

“……주의하리다. 그보다 먼 길을 오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본가에 잠시 들러 여독을 푸시는 건 어떻겠소?”

정광은 쓸데없는 일에 휘말릴까 싶어 거절하려 했으나 모용상현이 자오를 가리키며 덧붙이자 웃을 수밖에 없었다.

“각응(角鷹) 대협께서 등에 지고 계신 금원보의 무게가 보통이 아니외다. 본가에 들러 가볍고 부피도 작은 귀물이나 전표로 바꿔 가시는 게 나을 것이오.”

“하하. 이러려고 계속 금원보로 주신 거예요?”

모용상현이 정색했다.

“나는 그렇게까지 교활하진 않소. 요녕성에는 전표가 통하지 않는 곳이 많기에 그랬을 뿐이오. 게다가 마적들이 그렇게 많을지 어찌 알았겠소? 더구나 최근엔 두 배로…….”

“신용 있는 훌륭한 거래였죠. 귀물이라면 어떤 게 있나요?”

“모피는 별 관심이 없으실 것 같고. 동북방의 약초는 영험하기로 이름 높소이다. 마음에 드실 것이오.”

“흐음.”

들어보니 마음이 움직였다.

‘도마뱀 내단도 얼마 안 남았고. 소환단(小還丹)은 한 알밖에 없고. 뭐라도 좀 만들긴 해야 해.’

모용세가쯤 되면 영초(靈草)나 그것에 비견할 만한 것들이 있을 터.

정광은 기분 좋게 승낙했다.

“가보죠.”

“잘 생각하셨소.”

모용상현은 시장 외곽에서 사람들이 거래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흑의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흑의인들 중 한 명이 빠른 신법으로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대공자.”

“자세한 얘기는 어르신들께 직접 드리겠소. 손님들을 모시고 본가에 갈 것이니 먼저 가서 소식을 전해주시오.”

“알겠습니다.”

흑의인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 말에 올라타는가 싶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정광은 저 멀리 말달려가고 있는 흑의인과 시장 외곽에 그대로 남아 주변을 둘러보는 흑의인들을 번갈아 봤다.

‘모용세가. 제법인걸.’

모용상현은 이곳까지 오며 안 좋은 일을 많이 겪었다.

그가 어떤 식으로든 그 소식을 보냈을 텐데도 외인들과 함께 나타나니 멀찍이서 지켜보기만 하다가 부르자마자 움직이다니.

‘참을성이 강하고 경거망동하지 않아. 이러니 시장도 평화롭게 돌아갈 수밖에.’

이민족들은 상인들에게 언성을 높이려다가도 흑의를 입은 모용세가 무인들을 의식해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처럼 모용세가에서 시장을 관리하지 않으면 금세 피바람이 불 게 확실하리라.

‘무공도 나쁘지 않고. 저런 이들이 모여 있으면 호족들이 일거에 쳐들어와도 쉽게 무너지진 않겠는데. 마음 편히 가자.’

정광은 모용상현이 이끄는 대로 말을 몰았다.

그들은 심양성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그 옆의 길로 나아갔다.

그렇게 일식경(一食頃)쯤 지났을까.

모용상현이 앞을 가리키며 소개했다.

“저곳이 본가요.”

“헉!”

“이럴 수가!”

자오와 혜진은 물론이요, 어지간하면 흔들리지 않는 정광조차 놀랄 만큼 모용세가는 거대했다.

‘뭐야 이건? 장원이 아니라 성이잖아.’

아까 지나친 심양성의 성벽 높이를 떠올려 봤다.

‘삼장(三丈)이 될까 말까 했는데.’

모용세가의 성벽은 사장(四丈)을 가뿐히 넘는 것 아닌가!

검붉은 전벽(磚壁)이 늘어선 길이는 심양성과 비교가 안 되게 짧았으나 일개 가문이 이런 성을 쌓고 살 줄이야!

‘이런 돈지랄을 하다니. 생각보다 부자인가 보네.’

그리고 이런 성이 필요할 만큼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살아왔으리라.

‘아니지. 예단하지 말자. 겉만 번지르르할 수도…….’

쿠쿠쿠쿠-

아니었다.

장정이 열 명 이상 달라붙어야 간신히 움직일 수 있을 큰 문이 열리며 성 내부가 드러났다.

‘……부자 맞네.’

빼곡히 솟은 높고 낮은 전각들과 활발히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

이런 집안이 부자가 아니면 누가 부자랴.

‘오길 잘했어. 이래서 마음을 착하게 먹어야 하는 건가.’

뭐가 됐든 건질 게 있으리라.

정광은 기쁜 얼굴로 모용상현을 안내했다.

“자. 자. 들어가시죠. 아, 어서요.”

* * *

성은 외성(外城)만 있는 게 아니었다.

너른 외성을 통과해 내성(內城) 안으로 들어가자 진정한 모용세가가 나타났다.

‘좋아. 아주 좋아.’

정광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건축 양식이며 사람의 복색이며 화려한 맛은 없다시피 했으나 힘 있고 간결한 멋이 풀풀 풍겼다.

‘보통 이런 집이 알부자지. 돈은 좀 들겠지만 영초를 제법 구할 수 있겠어.’

생각보다 훨씬 싸게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모용상현과 지금껏 쌓아온 정이 있는데 설마 홀대하겠는가.

정광이 열기 어린 눈으로 사방을 살피자 모용상현의 마음 한편에서 불안감이 솟았다.

‘분명 내가 청해서 모시고 온 손님이거늘. 이 기분은 뭐지?’

선자불래(善者不來) 내자불선(來者不善)이라.

착한 사람은 오지 않고, 오는 사람은 착하지 않다는 강호의 격언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기분 탓이겠지.’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정광은 모용상현의 거처에 도착하자마자 영초를 헐값에 강탈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순간, 한 여인이 다가와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오라버니. 오셨소.”

모용상현은 순식간에 걱정을 씻어내고 밝은 얼굴로 여인을 맞이했다.

“수아야. 그간 잘 있었느냐?”

“덕분에. 이번 상행에서 욕을 보셨다 들었소만.”

“하하. 네가 걱정할 정도는 아니니라. 그래, 여긴 어쩐 일이냐?”

“어쩐 일이긴. 오라버니를 걱정하던 참에 오셨다는 얘길 듣고 달려왔소.”

“으하하하. 귀여운 녀석. 내 마음이 무척 기쁘구나.”

“실없기는.”

모용상현은 껄껄 웃으며 어린 누이를 대하듯 말했으나, 여인의 나이는 방년(芳年)이 넘어 보였다.

게다가 모용세가 같은 명문가의 여식이라면 부끄러워하거나 차갑게 반응하기 마련이건만 퉁명스레 대꾸하는 모습이라니.

하지만 놀랍게도 그 모습이 아주 잘 어울렸다.

자오와 혜진은 입을 살짝 벌린 채 모용수아를 바라봤다.

‘무, 무슨 여인의 체격이…….’

‘사내 중에서도 장신에 속하는 단주와 맞먹을 정도라니!’

정광의 감상은 남달랐다.

‘와. 싸움 좀 하겠는걸.’

무공 수위가 높다는 게 아니라 진짜 싸움을 말함이었다.

‘근육 좀 보게.’

품이 좁지 않은 흑색 무복도 그녀의 크고 아름다운 근육들을 감출 순 없었다.

‘하체도 제대로 안정되어 있고. 기마술이 경지에 올랐구나.’

말을 타고 달리며 뿌리는 일격은 얼마나 볼만할까.

‘병기도 딱이네.’

그녀가 등에 메고 있는 참마도(斬馬刀)는 이름 그대로 말을 두 동강 낼 만큼 거대했다.

정광이 뜨거운 눈길로 주시하자 그녀의 눈썹이 역팔자로 꺾였다.

“오라버니. 이 샌님이 서신에 적으신 천하유람단주요?”

모용상현이 재빨리 손을 저으며 부정했다.

“어허. 샌님이라니. 단주는 대단한 고수다. 어서 사과드리거라.”

정광을 한 번 더 훑어본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수라 하시니 그렇겠지만 신기하오. 아무리 봐도 샌님 같은데. 단주, 일단 사과는 하리다.”

“수, 수아야. 그런 실례를…….”

“아니요. 괜찮아요.”

정광이 대범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소저. ‘수아’는 아명 같고. 방명(芳名)이 어떻게 되시죠?”

“수수요.”

“오. 모용수수라. 좋네요. 아주 거침없으시고.”

“좋소? 나는 그대가 그리 마음에 안 드오만.”

“아. 그건 좋으실 대로 하시고요.”

모용수수의 눈썹이 꿈틀했다.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거요?”

정광이 진지한 얼굴로 제안했다.

“좋은 분 소개해 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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