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0화
심양(沈陽)
원래 목적대로 객잔으로 갈까.
화마에 휩싸인 본거지로 갈까.
수많은 고민 끝에 마음을 굳히고 대계(大計)의 첫걸음을 내딛기 직전이었으나…….
호광은 후자를 택했다.
대계든 뭐든 간에 가문이 멀쩡해야 할 것 아닌가!
“뛰어라! 어서!”
호광이 신법을 펼쳐 질풍처럼 달리자 식솔들도 죽을힘을 다해 따랐다.
무척 급박한 상황이었으나 그들의 눈은 굳은 의지로 빛났다.
‘아직 늦지 않았어!’
‘빨리 가면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저! 저!’
거리가 가까워져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었다.
안 그래도 거대했던 불길이 급속도로 몸집을 키우고 있었다.
‘이미 늦은 건가!’
‘빨리 안 끄고 뭘 하는 거야!’
불길이 치솟는 장원에 도착하고서야 알았다.
남아 있던 식솔들은 놀고 있는 게 아니었다.
“포기하지 마!”
“물을 더 길어와라!”
“그것만으론 안 돼! 흙을 파서 뿌리라고! 어서!”
검댕이 잔뜩 묻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화마와 악전고투하는 모습이라니.
그 광경을 확인한 호광은 이를 부드득 갈며 아들에게 명했다.
“무엇 하느냐! 빨리 달려가 돕지 않고!”
“아, 알겠습니다! 모두 나를 따라오게!”
호광도 구경만 하지는 않았다.
장원 내의 식솔들을 지휘하고 있는 아우에게 급히 달려가 물었다.
“어떻게 된 겐가?”
“아! 가주! 오셨소?”
“어떻게 된 것이냐고!”
호광의 아우 호진은 피를 토하는 듯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나도 모르오!”
“무어라?”
“갑자기 여기저기서 불길이 치솟더니 이 지경이 되어버렸소!”
“……!”
“어쨌든 인명 피해는 없고 바쁘니까 이따 얘기합시다! 뭣들 하느냐? 동쪽의 불길이 커지고 있다! 어서 가서 잡아!”
“…….”
화마가 계속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으나 호광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갑자기 여기저기서 불길이 치솟았다고?’
누군가 실수로 낸 불이 번진 게 아니라 다수가 계획적으로 저지른 방화라는 의미 아닌가!
그의 차가워진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장원을 집어삼킬 기세로 퍼진 화마가 그 눈에 맺혔다.
‘어떤 놈들이 감히!’
호광은 붉게 물든 눈으로 장원에서 제일 높은 전각을 바라봤다.
그의 거처인 그것을 거대한 화마가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있었다.
‘저것이야 그렇다 치고.’
호광의 시선이 서쪽에 있는 작은 전각으로 향했다.
그것은 지붕만 탔을 뿐,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의 아우 호진이 최우선으로 손을 써서 그런 것이리라.
‘그나마 다행이군.’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쉰 호광은 흉수가 누구일지 생각했다.
‘근방의 놈들은 아니야.’
호가는 금주(錦州)의 패자.
금주에서 호가에게 시비를 걸 담량이 있는 자들은 없었다.
‘회(會)에 소속된 이들이 그럴 리도 없는데…….’
대계를 이룬 후엔 경쟁을 해야 하나, 벌써 이럴 리 있나.
‘설마 모용상현 그놈이?’
최근 금주에 들어온 외지인은 그밖에 없었다.
‘아니. 불가능한 일이지.’
구룡(九龍) 중 하나로 꼽힐 만한 자질이 있는 놈이었으나 그래 봐야 후기지수.
이곳에 잠입해 불을 지른 뒤 유유히 사라질 수 있는 고수는 아니었다.
‘그럼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럴듯한 답이 안 나왔다.
‘……그만. 침착해져야 해.’
호광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우우.”
누가 방화를 했는지, 어떤 의도로 그랬는지 언젠가는 알게 될 터.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는 법. 반드시 갚아주마! 몇 배로 불려서!’
호광은 분노를 억누르며 식솔들을 다그쳤다.
“모두 힘을 내라! 조금만 더 힘을 내!”
그 역시 물을 쏟고 흙을 뿌리며 최선을 다했으나…….
힘을 낸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점점 커지는 화마가 호광의 얼굴에 붉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망할! 이를 어쩐단 말인가!’
* * *
“이야. 볼만하네.”
천하에서 제일 재밌는 구경거리는 불구경과 싸움 구경이라 했던가.
그중에서도 보기 더 힘든 것은 불구경.
정광의 감상처럼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넘실거리는 화마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활활 타라. 활활.”
하지만 다르게 보는 이도 있었다.
뒤늦게 객잔 밖으로 나온 모용상현이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단주. 그렇게 좋아할 일이 아니오. 불타고 있는 건 호가의 장원이외다. 대체 누가 저런 짓을…….”
“화톳불이 옮겨 붙었나 보죠.”
“그럴 리는 없소.”
“추워서 불을 좀 세게 때는 건가.”
“단주. 농을 할 때가 아니외다.”
“그런데 안 가세요?”
“무슨 말이오?”
모용상현이 어리둥절해 하자 정광이 설명했다.
“귀찮더라도 가셔서 돕는 시늉이라도 하세요. 호가에 빚을 지우고, 그곳에 몰려가 구경하고 있는 수많은 분들의 칭송도 받으셔야죠.”
“아!”
모용상현이 탄성을 질렀다.
딴마음을 품고 있는지도 모르는 호가 아닌가.
그런 호가에게 중인환시(衆人環視)리에 도움을 주면 그들이 모용세가의 뒤통수를 쳤을 때 많은 사람들이 비난할 게 분명했다.
미리 막지는 못하더라도 훗날 가시 하나쯤은 박히게 하는 수라 할까.
모용상현은 정광에게 정중히 포권했다.
“단주, 깨우쳐 줘서 고맙소.”
“뭘요. 앞으로도 잘 먹이고 잘 재워주실 거라 그러는 건데요.”
“……어쨌든 고맙소. 다녀와서 봅시다.”
모용상현은 상단 무인들을 이끌고 호가를 향해 달렸다.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혜진이 정광에게 물었다.
“단주. 자오 대협이 걱정입니다. 안 가봐도 되겠습니까?”
“네. 그만 들어가죠.”
“그래도…….”
혜진이 머뭇거리자 정광은 자신의 방 창가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조금 전에 돌아오셨거든요.”
“……!”
“자. 자. 가자고요.”
정광이 혜진과 함께 방에 들어가자 자오가 기다리고 있었다.
“단주, 다녀왔습니다.”
“아주 멋지게 해치우셨네요.”
“단주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하하. 아니에요. 자오의 자질이 훌륭해서죠.”
서로의 얼굴에 금칠을 하는 두 사내를 혜진이 어이없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방화를 한 걸 가지고 가르침 덕분이라니, 자질이 훌륭해서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오가 짊어지고 있던 자루를 뒤집자 탁자 위로 전표 뭉치들이 쏟아져 내렸다.
“오오. 수고하셨어요.”
“아닙니다. 단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다행입니다.”
“중원에서도 통용되는 것들이네요. 기대 이상인데요. 호가주님요, 의심이 무척 많으신 것 같은데 어떻게 찾으셨죠?”
“가주의 거처가 활활 타는 데도 작은 전각의 불부터 잡으려 하는 걸 보고 알아챘습니다.”
“하하. 역시 자오시라니까.”
“하하. 단주 덕분이지요.”
“쓸 만한 정보는 있었나요?”
자오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호가주가 혈도(血刀)라는 자의 행방을 찾고 있었습니다. 어디서 뭘 하길래 모용세가의 대공자가 멀쩡히 나타났냐며 길길이 날뛰더군요.”
“우리가 처음으로 만났던 마적단의 수괴가 도를 썼죠.”
“저도 그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호가주님이 식솔들을 이끌고 객잔 코앞까지 오셨던 걸 보면 모용세가를 어찌하시려는 게 분명하고요.”
“맞습니다. 그리고 먼저 나섰다가 토사구팽을 당하진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무량수불. 손을 잡은 이들을 신뢰하지 못하시다니.”
정광이 안타까워하자 자오가 웃다가 덧붙였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야 말겠다고 중얼거렸는데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알기론 호가가 모용세가 위에 섰던 적은 없는데 말입니다.”
“흐음.”
잠시 생각에 잠겼던 정광이 피식거렸다.
“설마 그건 아니겠지.”
“짐작이 가는 게 있으십니까?”
“아마 아닐 거예요.”
정광은 자오와 혜진에게 그만 돌아가 푹 쉬라고 말했다.
“단주도 주무십시오.”
“내일 뵙겠습니다.”
두 사람이 예를 표하고 나가자 정광은 침상에 드러누워 아까의 말을 되새겼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다라. 그 의미가 맞을 것 같긴 한데…….’
말도 안 되는 얘기였지만, 말도 안 되는 꿈을 꾸는 자가 허다한 세상 아닌가.
‘혹시라도 귀찮은 일이 생길지 모르니 조양사(朝陽寺)에 빨리 가는 게 좋겠어.’
정광은 상념을 털어내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깊은 잠에 빠졌다.
* * *
모용상현과 상단 무인들은 아침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검댕이 묻은 건 물론이요, 의복 여기저기가 그을린 그들은 형편없는 몰골에도 불구하고 표정만큼은 밝았다.
마침 일 층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정광은 그들을 보고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답례로 두둑이 받으셨나 보네.”
모용상현이 밝게 웃었다.
“그렇소.”
“아. 나도 갈걸 그랬나.”
“돈을 받은 게 아니외다. 칭찬을 많이 들었소.”
“응? 구경하시던 분들한테요?”
“그렇소.”
“나중에 쓸모는 있겠지만 그게 뭐 그렇게 좋은 일이라고.”
정광이 어이없는 얼굴로 중얼거리자 모용상현이 정색했다.
“협행이란 본래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하는 것이거늘, 과한 대가를 받았으니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소?”
“네. 네. 그럼 이만.”
정광이 일어서려 하자 모용상현이 다급히 말했다.
“내 기준이 그렇다는 것이지, 단주가 잘못됐다는 게 아니외다.”
“당연하죠. 장원은 어떻게 됐어요?”
“전력을 다해 불길은 잡았지만 피해가 심각하오. 장원의 절반이 넘는 공간이 잿더미가 되어버렸소.”
“호가주님, 머리 좀 아프시겠네요.”
“그래 보였소이다.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을 만큼.”
모용상현의 기분이 무척 좋은 이유 중 하나였다.
“그렇군요. 그럼 씻고 푹 쉬세요.”
정광은 지나가듯 말했으나 모용상현은 눈치가 꽤 빨랐다.
“혹시 먼저 떠나시려는 것이오?”
“네.”
“왜 갑자기?”
“그냥 빨리 가고 싶어서요. 천하를 유람해야 하거든요.”
잠시 생각하던 모용상현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알겠소. 갑시다.”
“네?”
“같이 가겠다고 했소.”
정광이 말릴 틈도 없었다.
모용상현은 상단 무인들에게 길을 떠날 준비를 하라고 명했다.
“네! 대공자!”
상단 무인들은 군말 없이 명을 따랐다.
정광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모용상현에게 따졌다.
“저기요, 대공자님. 저분들 피곤해하시는 거 안 보이세요?”
“잘 보이오.”
“그런데 이러시면 곤란하죠. 대체 왜 그러세요.”
모용상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한 명이라도 더 살리고 싶어서지 왜겠소?”
“이런. 저를 이용하시려고요? 싫은데.”
모용상현은 협객이자 상인이었다.
“마적을 잡든 누구를 잡든. 병기며 말이며 지금까지보다 두 배로 셈해 드리겠소.”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조금 쉬었다 가죠.”
“……빨리 가고 싶다고 하시지 않았소?”
정광은 상단 무인들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랬다간 쓰러지실 것 같아서요. 갈 길이 머니 멀리 봐야죠.”
“옳은 말이오. 그렇게 합시다.”
반나절 동안 쉰 그들은 객잔을 나와 말달렸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다 못해 잿더미가 되어버린 호광은 그들에게 신경을 쓸 겨를조차 없었다.
정광과 모용상현은 일행의 선두에서 말달리며 앞으로의 일을 논의했다.
“대공자. 마적분들이야 그렇다 치고. 호가주님 같은 분들은 만나기 싫거든요.”
“마찬가지외다.”
“그렇게 갈 만한 경로가 있나요?”
모용상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사람이 적은 길이 나을 터. 조금 돌아가는 감은 있으나 북녕(北寧) 쪽으로 간 뒤 흑산(黑山)을 거쳐 가는 게 좋을 것 같소만.”
“그러죠.”
요녕성이 초행인 정광은 모용상현의 의견을 존중했다.
다행히 모용상현이 경로를 잘 택했는지 호광 같은 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마적단은 세 무리나 마주쳤는데 모두 정광의 재물로 바뀌었고.
‘생각보다 쏠쏠한데.’
전보다 두 배를 받았으니 그럴 수밖에.
‘좀 더 안 오나?’
안 왔다.
편한 곳에서 묵지 않고 노숙을 거듭하며 말달린 그들은 며칠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모용세가와 조양사가 있는 곳.
요녕성의 성도(省都) 심양(沈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