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280화 (279/569)

2부 9화

대계(大計)의 첫걸음

별다른 대화 없이 마시고 또 마셨다.

객잔 지붕 위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은신하고 있는 호광이 내심 울화통을 터뜨릴 만큼.

‘슬슬 끝낼까.’

밤이 깊어지자 정광은 술에 취한 어눌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으으. 토할 것 같네.”

모용상현이 걱정 어린 어조로 나무랐다.

“그러게 왜 그리 많이 마셨소?”

“제가 마셨나요? 술이 저를 마셨지.”

“허어. 단주의 주량이 대단한 건 인정하나 정도를 지키시오. 이러다 탈 나겠소이다.”

“벌써 난 것 같은데. 맞다. 술 좀 깨게 영약이라도…….”

“……없으니 그만 올라가 쉬시오. 부축해 드리리다.”

상단 사람들은 각자의 방으로 흩어진 지 오래.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자오와 혜진이 모용상현을 제지하고 정광을 일으켜 세웠다.

“대공자. 단주는 우리가 챙기겠소.”

“덕분에 잘 마셨습니다. 내일도 잘 부탁드립니다.”

“……알겠소이다, 불취검.”

모용상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신의 방으로 사라졌다.

자오와 혜진은 정광을 부축해 그의 방으로 데려갔다.

정광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또렷한 말투로 지시했다.

“호가주님이 가셨네요. 자오, 주즉시공으로 취기를 몰아내세요.”

제일 적게 마셨으나 얼굴은 가장 붉은 자오가 고개를 숙였다.

“네, 단주.”

“혜진 소저, 주즉…… 아. 모르시는 데다 필요도 없으시지. 그냥 푹 쉬고 계세요.”

제일 많이 마셨으나 유일하게 멀쩡한 안색의 혜진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단주.”

정광이 행하는 모든 일에는 마땅한 이유가 있는 법.

두 사람은 의문을 품지 않고 지시에 따랐다.

정광은 걸음을 옮기며 주즉시공을 운기했다.

그가 모용상현의 방에 이르렀을 때, 몸속에 쌓였던 주독은 말끔히 사라지고 없었다.

“대공자, 들어가도 되죠?”

정광은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의자에 단정히 앉아 있던 모용상현이 담담히 맞이했다.

“오셨소.”

“안 놀라시네요.”

“이러실 것 같았소.”

“저도요.”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호가주의 이목을 흐리느라 고생 많으셨소이다. 편히 앉으시오.”

정광이 맞은편에 앉자 모용상현이 눈을 빛냈다.

“단주가 나를 찾아온 건 그가 떠났다는 의미 같은데. 맞소이까?”

“네.”

“궁금한 게 많소. 몇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소?”

길고 길었던 술자리에서조차 전음으로 묻지 않고 묵묵히 기다렸던 모용상현이었건만.

기회가 오자 조급함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말씀하세요.”

정광이 승낙하자마자 그의 입이 열렸다.

“이상하리만치 강했던 마적단 수괴와 호가주가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을 것만 같소. 단주의 의견을 듣고 싶소이다.”

“그럴 가능성은 있죠.”

“으음.”

“너무 두루뭉술해서 실망하셨나.”

모용상현이 정색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오히려 확신을 담아 말했으면 믿음이 안 갔을 것이오.”

“바로 그거죠. 다음은 뭐죠?”

“호가주를 비롯한 호족들이 왜 마적단을 압박하는지 알고 싶소.”

“그야 그분이 말씀하셨던 대로 새로운 시도를 해보시는 것일 수도 있고.”

정광은 말을 잠시 끊었다가 이었다.

“혼란을 일으켜 구심점을 흔들려는 것일 수도 있죠.”

“……!”

요녕성의 구심점은 모용세가.

모용세가 대공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자 정광이 위로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것 역시 확실한 건 아니니까.”

“……아니. 타당한 추론이오.”

호족들이 정말 딴마음을 먹었다면, 장차 모용세가를 이끌게 될지도 모를 모용상현을 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마적에게 죽으면 본가의 체면이 땅에 떨어지겠지.’

모용세가의 대공자가 무림고수도 아닌 마적 따위에게 죽는다?

모용세가는 마적들을 자극한 호족들에게 책임을 묻긴커녕 그 사실을 덮는 데 급급해야 하리라.

‘나를 인질로 삼아 다른 일을 획책할 수도 있고.’

허나 정광의 추측엔 빈틈이 있었다.

모용상현은 자신이 느낀 의문을 늘어놨다.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 호족들의 압박 때문에 마적들이 날뛴다. 그 사실을 언젠가는 모두 알게 될 것이오. 그럼 사람들의 원망이 어디로 향하겠소?”

“호족분들이요.”

“맞소이다. 노회한 그들이 그런 악수를 두진 않을 것 같소만.”

“아뇨. 길게 보셔야죠.”

모용상현이 이해하지 못하자 정광은 아이에게 가르치듯 차근차근 설명했다.

“마적단을 몽땅 때려잡게 되면요? 피해를 본 소수는 빼고, 모두 기뻐하며 호족분들에게 감사를 표할걸요?”

“마적단을 전부 없애는 건 불가능한 일이오. 설령 그렇게 한다 해도 새로운 마적들이 계속 흘러들어 올 텐데 무슨 소용이겠소?”

“영원히 없게 할 필요는 없는데.”

“어떤 의미인지 이해가 가지 않소이다. 미안하오만 자세히…….”

정광은 손을 들어 모용상현의 말을 막았다.

“상도의가 없으시네.”

“……지금 상도의라 했소?”

“많이 말씀드렸으니, 이제 제 차례라는 얘기죠.”

“……후우. 말씀하시오.”

정광은 재깍 물었다.

“모용세가의 전력과 호족분들의 전력을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강해요?”

난데없는 물음에 황당해하던 모용상현이 허리를 바로 세우며 대답했다.

“본가는 강하오. 단주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지만 그것보다 더.”

“객관적으로 말씀하시는 거죠?”

“물론이외다.”

“그렇군요. 그럼 이만.”

“다, 단주!”

정광이 일어서자 모용상현은 손을 뻗어 붙잡으려다 멈췄다.

‘강제할 수 없는 자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해.’

아쉬움을 억지로 털어낸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포권했다.

“깨우쳐 줘서 고맙소이다.”

“뭘 그런 걸 가지고.”

“…….”

역시 두 손을 모아 답례한 뒤 방을 나간 정광은 혜진을 불러 자오에게 갔다.

주즉시공으로 취기를 완전히 몰아낸 자오가 의자를 빼며 그들을 맞이했다.

“단주, 오셨습니까.”

“고마워요. 두 분도 앉으세요.”

정광은 그들에게 모용상현과 나눈 대화를 들려줬다.

그들도 모용상현과 비슷한 의문을 느꼈다.

“마적이 영원히 없게 할 필요는 없다는 게 무슨 말씀입니까?”

“단주, 저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정광은 그들에게 간략하게 설명했다.

“한동안만이라도 없게 하면 된다는 의미죠. 호족분들은 모용세가가 요녕성을 관리해 온 것과 다른 방법을 써서 그 성과를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걸 거예요.”

요녕성 사람들에게 내세울 쥐꼬리만 한 명분이라도 만드는 것이리라.

판을 뒤집은 뒤 민심을 다스리는 데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테니 나쁜 수는 아니었다.

가만히 듣던 혜진의 눈에 이채가 맺혔다.

“호족들이 모용세가 위에 서려고 한다는 말씀입니까?”

“모용세가를 없애려 하거나, 모용세가의 머리를 바꾸려 하거나. 둘 중 하나겠죠.”

모용상현이 호족들보다 모용세가가 더 강하다고 했으니 후자 쪽일 가능성이 컸다.

잠시 생각하던 혜진이 알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마적을 영원히 없앨 필요는 없다는 말씀을 이제야 이해했습니다. 목적을 이룬 뒤엔 예전 방식으로 그들을 달래면 되니까요. 민초들이 한동안은 불만을 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희석되겠지요.”

“어? 하하.”

정광은 크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산에서 내려오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훌륭한 속인(俗人)이 되셨네요. 아니지, 원래 이런 음습한 쪽으로 머리가 빠르신 건가.”

“…….”

이걸 칭찬이라고.

혜진이 난감한 표정을 짓자 소리 없이 웃던 자오가 표정을 고치며 물었다.

“단주. 모용세가의 일에 끼어드실 생각입니까?”

“아뇨. 자기들끼리 싸우든 말든 무슨 상관이에요. 우리 할 일만 하면 되지.”

자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사마련 때문에 그 고생을 하셨는데 이젠 푹 쉬셔야지요.”

“그렇죠. 저는 푹 쉴 테니 수고하세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정광은 밤이 더 깊어지면 호광이 찾아올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자오는 정광의 의중을 이해했다.

“정말 올지 안 올지 살펴보란 말씀이군요.”

아니, 자오는 아직 정광을 잘 몰랐다.

“만약 오려고 하면 못 오게 해주시고요.”

“네?”

“왜요?”

자오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단주, 제게 그럴 만한 무력이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정광도 황당해했다.

“누가 정면에서 막으래요? 한로 그분이 극찬할 만큼 대단한 영인(影人) 출신이시라면서요? 거기에서 배우시고 지금까지 해오신 것처럼만 하시면 되는데.”

“…….”

침묵하던 자오가 결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단주께서 해낼 수 있다고 하셨으니 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다녀오겠습니다.”

“그럴듯한 정보가 있으면 챙기시고요.”

“알겠습니다.”

“가시는 김에 재물도 좀.”

“……그러지요.”

자오는 객잔에서 나와 금주호가의 장원을 찾았다.

찾기는 쉬웠다.

근방에서 제일 높이 솟은 전각이 있는 곳이었다.

‘저기군.’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잠행술을 펼쳐 가보니 칠대세가와 비교할 순 없으나 상당히 큰 장원이었다.

자오는 담을 넘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화톳불이 너무 많아.’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겠지만 추운 날씨도 한몫하는 것 같았다.

‘어디에 있을까.’

호광은 가주였다.

자오는 장원에서 가장 화려한 전각을 주시했다.

‘저기부터 봐야겠군.’

자오의 잠행술과 은신술은 정광이 인정할 정도.

대단한 고수인 한로에게도 한동안 발각되지 않았었는데 그보다 약한 호광과 그의 식솔들쯤이야.

번(番)을 서는 자들의 이목을 희롱하며 지붕 위로 올라갔다.

영인의 비기(秘技)를 펼쳐 방 천장에 스며드니, 호광이 호리호리한 중년인에게 호통을 치고 있었다.

“아직도 알아내지 못했단 말이냐!”

“죄, 죄송합니다. 소문에 밝은 이들도 천하유람단이라는 조직은 금시초문이라 합니다. 그들의 용모와 병기에 대해서도 말했지만, 그것들에 대해서도 역시 들어본 바가 없다고…….”

“그만! 혈도(血刀) 그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게냐! 모용상현이 멀쩡하게 나타났잖아!”

“사, 사람을 풀었으니 곧 소식이 들어올 겁니다.”

“곧?”

“죄송합니다, 가주!”

중년인이 바닥에 엎어져 머리를 처박자 호광의 안색이 누그러졌다.

“됐다. 일어서.”

중년인이 눈치를 보며 일어섰다.

호광은 그를 노려보다가 혀를 찼다.

“쯧쯧. 아이들 준비는?”

“끝냈습니다.”

“흠. 나가서 기다리거라.”

“네, 가주. 헌데…….”

중년인이 침을 꿀꺽 삼킨 뒤 말을 이었다.

“대공자와 그의 수하들을 치실 생각이십니까?”

호광은 살짝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놈이 뭔가 눈치를 챈 게 틀림없어. 이대로 보낼 수는 없지 않느냐. 다만…….”

호광의 눈에 살기가 떠올랐다가 사그라들었다.

“괜히 먼저 나섰다가 토사구팽(兎死狗烹)을 당하는 건 사양이다. 상황을 봐서 움직일 터. 그리 알고 아이들에게도 주의를 주거라.”

“…….”

“뭐 하는 게냐? 빨리 나가지 않고.”

잠시 망설이던 중년인이 무거운 목소리로 간청했다.

“가주. 제발 한 번만 더 재고해 주십시오. 많은 이들이 죽게 될 겁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들의 피를 반석으로 삼아 본가는 더 위로 올라갈 것이다.”

“아버님. 그건…….”

“공과 사를 가려라! 네가 지금 내 명을 거역하는 게냐?”

“……죄송합니다.”

중년인은 허리를 깊게 숙인 뒤 밖으로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보던 호광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제 놈을 위해 이러는 것인데 허튼소리나 내뱉다니.”

말과 다르게 그의 눈은 탐욕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야 말리라. 바로 지금부터.”

호광이 사라지자 자오는 비기를 거두고 바닥에 내려섰다.

‘역시 모용세가의 뒤통수를 치려고 하는 건가.’

사실 확인은 했다.

‘헌데 저들을 어떻게 막아야 할지 모르겠구나.’

창문 틈으로 보니 호광이 식솔들과 함께 떠나고 있었다.

‘생각해라, 자오. 생각해.’

그는 고민을 하는 와중에도 방을 샅샅이 뒤졌다.

정광의 두 번째 명과 세 번째 명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없군.’

얼마 안 가 자오는 움직임을 멈췄다.

‘의심 많은 늙은이 같으니. 서류도 재물도 다른 곳에 숨겼어.’

자오의 생각은 다시 첫 번째 임무로 넘어갔다.

‘어쩐다. 조금 후면 호광과 그의 식솔들이 객잔에 도착할 텐데…….’

그냥 돌아가 정광에게 호광이 오고 있다고 보고하고 싶었지만, 자신을 믿어준 정광을 위해 제대로 해내고 싶었다.

‘생각해 내야 해. 할 수 있어. 단주께서 할 수 있다고 하셨어.’

정광을 계속 떠올리다 보니 그라면 어떻게 했을까 상상하게 됐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가…….

자오의 눈이 빛났다.

‘이러면 되겠군!’

* * *

호광은 눈앞의 객잔을 노려봤다.

아들에게 말했듯이 상황을 보고 어찌할지 정하려 했으나 목전에 이르자 마음이 흔들렸다.

‘안에 들어가면 무조건 손을 써야 할 수도 있어. 대계(大計)의 첫걸음을 내가 내딛는 건 영 꺼림칙한데…….’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뒤섞였다.

그리고 얼마 안 가 하나로 굳어졌다.

‘내가 시작함으로써 더 많은 공을 세울 수 있다!’

마음을 정한 그는 식솔들을 돌아보며 명했다.

“지금부터 대계를 시작한다. 모두 내 명을 따라…… 헉!”

야망으로 불타오르는 그의 눈보다 훨씬 더 붉고 거대한 화마(火魔)가 보였다.

저 멀리 있는 그의 장원 방향이었다.

“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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