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279화 (278/569)

2부 8화

객(客)의 도리

“하아!”

두두두두-

먼 곳에서 한 노인이 무인들을 이끌고 말달려 왔다.

그들의 복색과 소지한 병기들을 훑어본 정광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마적이 아니네. 뭐 그것도 괜찮지.’

금원보는 못 벌지만 귀찮음은 덜게 되지 않았는가.

‘이런.’

하지만 그들이 일으킨 흙먼지가 밀려오자 불쾌감이 솟았다.

‘뭐 하는 놈들이길래 이 난리야?’

정광은 그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노인을 주시하다가 간단한 평을 내렸다.

‘아닌 척하지만 욕심이 많은 놈이네.’

본인은 수수한 황색 장포를 걸쳤으나 말고삐와 안장 같은 곳에는 요란한 장식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병기도 마찬가지.

도파(刀把)와 도갑(刀甲)에 황금이라도 처바른 걸까?

말이 지면을 박찰 때마다 흔들리며 번쩍거리는 꼴이라니.

‘하여간 취향하고는.’

정광은 내심 혀를 찬 뒤 모용상현을 봤다.

안면이 있는 자인지 크게 놀라는 기색은 없었으나 신중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노인을 주시하고 있었다.

“대공자. 선두의 저분, 뭐 하시는 분이에요?”

모용상현은 노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답했다.

“금주를 다스리는 호족인 금주호가(錦州扈家)의 가주. 녹각(鹿角) 호광이오.”

“음. 마음에 드네요.”

“저자가 말이오? 그대가 좋아할 만한 위인이 아닌데.”

모용상현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돌아보자 정광이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이 아니라 별호요. 짧아서 좋잖아요.”

“하하. 확실히 외우긴 쉽겠소.”

모용상현은 입으로만 웃으며 상단 무인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상단 무인들이 재빨리 삼열로 정렬하며 달려오는 자들을 경계했다.

정광은 그 광경을 구경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말을 잘 다루고 싸울 줄도 알아. 하긴, 약탈이 성행하는 북방 지역이니만큼 당연한 일이지.’

이렇게 잘 훈련된 기수(騎手)들은 무공 수위 이상의 전투력을 가지게 된다.

한때 천하를 지배했던 몽고처럼 말에 오른 그들을 상대하는 건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상대가 말을 안 탔거나 잘 못 탈 때의 얘기.

모용상현의 상단은 말을 잘 다루는 마적들에게 고전했었다.

그리고 지금, 금주호가 무인들도 말달려 오고 있었고.

황색 의복으로 통일한 금주호가 무인들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상황.

그들은 진작 상단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속도를 늦추지 않고 달려오고 있었다.

‘모용세가를 떠받치는 여러 호족 중 하나일 텐데.’

모용상현이 이렇게 경계하는 걸 보니 신뢰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일전에 문초했던 마적단 수괴가 호족들에게 압박을 받고 있다고 토설했기에 더 그럴 터.

‘의심과 불신이라. 사람 사는 데가 다 똑같긴 하지.’

차라리 대놓고 적대적인 관계가 편하다.

뒤에서 찔러오는 칼처럼 위험하고 번거로운 것은 없는 법.

‘저들이 어떻게 나올까?’

정광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봤다.

‘어서 와라. 어찌 되든 빨리 끝내게.’

마음속으로 재촉할 필요 없을 만큼 금주호가는 빨랐다.

금세 가까워진 그들은 상단과 십장쯤 되는 거리에서 멈춰 섰다.

홀로 더 다가와 상단과 정광 일행을 슬쩍 훑어본 노인이 두 손을 모으며 우렁차게 외쳤다.

“호광이 대공자를 뵈오!”

모용상현도 예를 표하며 답했다.

“반갑습니다, 호가주. 그새 더 정정해지신 것 같습니다.”

“허허허. 늙은이의 얼굴에 금칠을 하시는구려. 대공자께서야말로 더 헌앙해지셨소이다.”

“감사합니다. 헌데 무슨 일로 그리 급히 달리는 중이셨습니까? 제 일정을 내다보시고 마중 나오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

정광은 티 안 나게 감탄했다.

‘그래, 시간 낭비 안 하려면 이렇게 나가야지.’

네가 나를 맞이하러 왔을 리는 없고, 그 많은 수의 무인들을 이끌고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이냐?

이런 노골적인 질문에 호광의 눈이 살짝 흔들리다가 고정됐다.

“여전히 시원시원하시오. 요녕의 복이외다. 노구를 이끌고 이렇게 나온 건 마적 놈들이 행패를 부린다는 소리가 들려 징치하기 위해서요.”

“그러셨군요.”

모용상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도 오는 길에 몇 번 만났습니다.”

“허어. 그랬소이까?”

호광은 놀란 얼굴로 모용상현과 상단을 둘러본 뒤 웃었다.

“역시 대공자시오. 약한 놈들이긴 하나 몇 무리나 만나셨는데도 별 피해가 없어 보이시고.”

모용상현이 입을 열려고 하는데 정광이 막았다.

-싸우지 않고 돈으로 달랬다고 하세요.

-……!

-처음에 만났던 마적단은 얘기하지 마시고요.

-…….

모용상현은 정광이 인정할 정도로 영특한 청년이었다.

전음에 담긴 의미를 짐작하고 그대로 따랐다.

“헛된 피해를 보기 싫어 재물을 썼습니다.”

“……재물을?”

“그들은 상단 깃발을 보고도 달려들었습니다. 평소 없던 일이라 만일을 대비해 그렇게 해야 했지요.”

“으음.”

잠시 생각에 잠겼던 호광이 시원하게 인정했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현명한 판단을 하셨소이다.”

“그렇습니다. 참지 못하고 싸웠다면 뒤이어 덤벼드는 놈들을 상대하느라 큰 피해를 봤을 것입니다.”

“그러게 말이오. 헌데…….”

호광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재물도 좋지만 피를 보고 싶어 하는 무리도 있었을 텐데. 전부 얌전히 물러나다니. 거참, 신기한 일이군.”

“…….”

말고삐를 쥔 모용상현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지켜보던 정광은 속으로 웃었다.

‘돌려 말하기는. 처음 만났던 마적치곤 강한 수괴가 이끌던 그놈들을 얘기하는 거잖아.’

다른 이들은 몰랐지만 정광은 알았다.

호광이 그 마적단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다는 것을.

‘멀리서 모용상현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으면서 무슨.’

이제 와서 태연히 맞이하며 은근히 떠보기나 하다니.

‘이 도련님도 감을 잡은 것 같은데. 어떻게 나가는지 볼까.’

모용세가 대공자는 정광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마적단이 과하게 행패를 부려 걱정입니다.”

“그러게 말이오.”

“헌데 그들이 이상한 얘기를 하더군요.”

“무어라 했길래 그러시오?”

모용상현은 호광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본가와 함께 하는 가문들의 압박이 거세져, 먹고살려니 어쩔 수 없다고 했습니다.”

“…….”

“그 말이 사실입니까?”

“……허허.”

호광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말하리다.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소.”

“무슨 말씀이신지?”

“얼마 전 몇몇 가주들과 담소를 나누던 중 마적단 얘기가 나왔소이다. 곧 겨울이 시작되니 놈들에게 식량을 줘야 하는데 언제까지 이 짓을 계속해야 하는지.”

“설마?”

“놈들을 한번 지워보기로 했소.”

“가주. 헛된 수고라는 걸 아시면서 왜 그런 결정을.”

호광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까 말했듯이 계속 이렇게 가는 것도 문제 아니오? 별것 아닌 놈들을 달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놈들에게 줄 식량으로 빈민구제를 하는 게 백번 낫소이다.”

“본가에는 말씀하시고 진행하신 겁니까?”

호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텃밭을 어떻게 일굴지는 그 텃밭을 다스리는 각 가문이 정하는 것이오. 대공자시라 해도 그런 발언은 삼가는 게 좋을 것 같소이다.”

“……결례를 저질렀군요. 죄송합니다.”

호족들이 모용세가를 떠받드는 것은 모용세가가 그들의 자치권을 인정하기 때문.

명분에서 밀린 모용상현이 사과하자 호광이 대범하게 웃었다.

“하하. 혈기왕성하실 때니 그럴 수도 있다는 걸 아오. 이미 잊었으니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껄껄. 괜찮다 했잖소.”

두 사람의 말싸움을 구경하던 정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총명하긴 한데 연륜이 부족해서 밀려 버렸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

모용상현은 말하기 전에 생각을 더 깊게 하는 습관을 키워야 했다.

‘이 늙은이는 눈빛부터 숨길 줄 알아야 하고.’

그때, 득의양양한 눈빛을 흘리며 웃던 호광이 정광에게 시선을 돌렸다.

“헌데 자네는 누군가?”

정광은 모용상현을 탓했던 것과 다르게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

“천하유람단주(天下遊覽團主)요.”

“……무어라?”

“아. 연세가 있으시지. 천하유람단주요!”

“…….”

정광이 버럭 고함을 치듯 말하자 호광의 눈에 노기가 맺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얼마 안 가 평정을 회복한 그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정광을 훑었다.

“무공을 제대로 안 익힌 것 같은데. 맞는가?”

“나름 수련하긴 했는데 한참 부족하죠.”

“저런. 무인이 그래서야 쓰나.”

“제가 좀 귀하게 자란지라.”

“그래 보이긴 하네.”

아직 반박귀진(返璞歸眞)의 경지에 오르진 못했으나 정광의 무공은 높고도 높았다.

그런 그를 처음 본 호광이었기에 경지를 제대로 엿보긴커녕 무공을 제대로 익히지 않은 몸이라 판단할 수밖에.

“솔직해서 좋군. 이곳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일로 왔나?”

“유람하려고요.”

“…….”

정광을 물끄러미 보던 호광의 눈이 자오와 혜진에게 향했다.

“자네들도 천하유람단인가?”

두 사람이 그렇다 하자 호광이 묘한 표정으로 정광을 노려봤다.

‘형편없는 무공과 달리 검과 활은 명품이야. 철없는 부잣집 도련님이 호위를 거느리고 유람하는 것 같은데…….’

보통 부잣집이 아니라 상당한 명성을 떨치는 가문이리라.

그만큼 자오와 혜진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범상치 않았다.

“흐음. 대공자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가?”

모용상현이 둘러대려고 했으나 정광이 더 빨랐다.

“하북성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요녕성이 궁금해서 동행을 부탁드렸죠.”

“음. 대공자, 잘 모르는 이들에게 선행을 베푸셨소.”

모용상현이 태연히 설명했다.

“하북성에서 도움을 받은지라 보답을 하는 것뿐입니다. 단주 덕분에 이번 거래에서 돈을 아꼈지요.”

“좋은 인연이구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빨리 가보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호광이 빙그레 웃었다.

“대공자께서 마적단 놈들에게 재물을 주셨다 하지 않았소? 놈들은 필요한 식량을 사고 본거지로 돌아갔을 것이오. 금주에 오신 걸 환영하오. 본가로 갑시다. 호가의 이름을 걸고 최선을 다해 모시겠소.”

모용상현의 눈에 당혹감이 맺혔다.

이래저래 의심스러운 호광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해서였다.

‘거절하면 호가를 무시하는 게 되는데. 이를 어쩐다.’

그의 고민을 정광이 해결해 줬다.

-제 핑계 대세요. 들르는 곳마다 최고의 객잔에서 묵기로 했다고.

-……!

먼저 한 약조를 지켜야 한다고 하면 호광도 뭐라 할 수 없다.

모용상현은 안타까운 얼굴로 정광의 말을 그대로 읊었다.

“죄송합니다, 가주. 실은…….”

호광은 살짝 얼굴을 굳혔다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러신 줄도 모르고 곤란하게 해서 미안하오. 먼저 한 약조를 지켜야 하는 건 당연한 일. 들어갑시다. 그곳까지만이라도 배웅해 드리겠소.”

정광도 씩 웃었다.

‘기(氣)가 아주 요동치네. 부들부들 떨려? 이제 어떻게 나오려고?’

오늘이 지나기 전에 알게 되리라.

정광은 즐거운 마음으로 말을 몰았다.

금주 최고의 객잔을 기대하며.

* * *

정광이 어이없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자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모용상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단주, 왜 그러시오?”

“……왜냐고요?”

“그렇소. 뭐가 문제시길래?”

“……하아아.”

뭐가 문제긴.

모든 게 문제지.

“대공자. 솔직히 말하세요. 여기가 금주 최고의 객잔이 맞나요?”

“그렇소만. 마음에 안 드시오?”

안 들다마다.

아니, 곤륜이나 소림보다야 낫다만 비싼 돈을 내고 묵을 만한 곳은 절대 아니지 않은가.

“와. 요녕성 실망이네.”

정광이 투덜대자 모용상현이 희미하게 웃었다.

“중원의 고급 객잔들보다 못한 건 사실이나 요리는 드실 만할 것이오.”

객잔 시설이 이 모양인데 요리가 기대될 리 있나.

맛없으면 심양(瀋陽)에 있다는 조양사(朝陽寺)로 최대한 빨리 말달리려 했건만.

‘어라?’

감자, 가지 등을 활용한 소채 요리와 향신료가 적게 들어가 담백한 맛을 내는 양고기가 많았는데 모양새는 좀 그랬지만 생각 외로 괜찮았다.

‘내 도가 낮구나. 아직도 일부만 보고 전체를 판단하려 하다니.’

그러면 어떠랴.

알았으니 즐기면 되지.

“대공자, 술도 한잔하죠.”

정광은 곤란한 표정을 짓는 모용상현에게 전음을 보냈다.

-아까 그분의 낌새가 이상하다 해서 절제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되죠. 역으로 방심을 끌어내야지.

-아! 그대의 말이 맞소. 깨우쳐 줘서 고맙소이다.

정광의 깊은 심계에 감탄했던 모용상현은 얼마 안 가 깊이 실망하게 됐다.

‘마, 마시는 척하는 게 아니라 저렇게 들이붓다니!’

북방은 추운만큼 술도 독하거늘.

정광은 그 독한 술을 물보다 더 쉽게 들이켜고 있었다.

‘각응 저자는 그래도 낫군. 불취검(不醉劍)은…… 헉! 괜히 불취검이 아니구나!’

모용상현은 혀를 내두르다가 정신을 차렸다.

-단주! 너무 과하오!

-침착하세요. 우리를 지켜보는 눈이 있으니까.

-……!

-그렇죠. 태연하게. 잘하시네요.

모용상현은 당황하지 않고 젓가락을 놀렸다.

정광은 술을 계속 퍼마시며 빙그레 웃었다.

‘장원으로 가는 척하더니 직접 와서 살펴?’

객잔 지붕 위에서 느껴지는 기는 호광의 것이었다.

‘의심이 많아 모든 일을 직접 처리해야 성에 차는 놈이네.’

아까는 보는 눈이 많아 그렇게 넘어갔지만 밤이 되면?

일부러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고급 객잔을 잡았으나 호광이 어떻게 나올진 확신할 수 없었다.

‘또 홀로 와서 염탐만 할까, 수하들을 이끌고 와 도를 휘두를까?’

둘 중 뭐가 됐든 다시 오긴 할 터.

‘쯧쯧.’

정광은 혀를 찬 뒤 마음속으로 도호를 외웠다.

‘무량수불. 주인만 애쓰게 할 수 있나. 객도 움직여야지.’

정광의 도리 중 하나.

객(客)의 도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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