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278화 (277/569)

2부 7화

압박

상단 무인들은 마적단의 시신을 한데 모았다.

정광 일행은 상태가 쓸 만한 화살을 회수했다.

그러자 마적단의 병기와 말이 남았는데, 모용상현은 그것들이 전부 정광의 것이라 선언했다.

“진심이세요?”

“당연한 일 아니오?”

오히려 모용상현이 의아해하자 정광이 피식 웃었다.

“도(道)…… 상도(商道)를 아시네요. 좋아요, 이렇게 하죠.”

정광은 병기와 말을 모두 모용상현에게 팔았다.

모용상현은 그것들의 상태와 운송비를 고려해 값을 치렀다.

휘익-

정광은 금원보로 가득 찬 전낭의 무게를 가늠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나쁘지 않은데.’

아니, 좋은 축에 속했다.

‘사제가 없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상두(商頭)의 얼굴을 스쳐 지나간 안타까운 기색을 보니 모용상현이 후하게 쳐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적단 또 없나. 사양 말고 팍팍 오면 좋을 텐데.’

우선 중요한 일부터 하고.

그들은 삼백장쯤 이동해 식사를 했다.

상단 숙수가 최선을 다해 요리했지만 장이의 솜씨에 비할 수는 없는 게 당연한 일.

‘그래도 이게 어디야.’

딱딱한 육포와 건량에 비하면 천상의 맛 아닌가.

‘아. 배불러.’

술로 입가심까지 한 뒤 배를 두드리자 먼저 식사를 끝내고 지켜보던 모용상현이 입을 열었다.

“단주, 실례지만 별호를 물어봐도 되겠소?”

정광은 기분이 꽤 좋은 상태였다.

평소라면 ‘실례인 걸 아시면 물어보지 마셔야죠’라고 했겠지만 흔쾌히 알려줬다.

“천하유람단주요.”

“……그건 직책이잖소?”

“별호도 그건데요.”

“……다른 두 분은?”

모용상현의 시선이 자오와 혜진에게 향했고 그들의 시선은 정광에게 옮겨졌다.

“음.”

정광은 잠시 고민하다가 오른손 주먹으로 왼손바닥을 내려쳤다.

“이분은 각응(角鷹), 저분은 불취검(不醉劍)이요.”

대충 지어낸 별호였건만.

자오의 눈에 물기가 맺혔다.

-단주. 결국 그때의 약조를 지키시는 겁니까.

-겸사겸사요.

혜진의 눈에 황당한 빛이 떠올랐다.

-단주, 불취검이라니요. 하필이면 그런 별호를.

-왜요? 딱인데.

모용상현은 그들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너무 당당하게 지어내시니 할 말이 없소이다.”

“별론가?”

“그 말이 아니잖소.”

모용상현은 끝없이 이어진 구릉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천하가 넓다 하나 사람의 입도 그에 못지않소. 고수라면 무용에 걸맞는 별호가 붙고 빠른 속도로 퍼지기 마련. 내 견문이 좁다 해도 단주나 다른 두 분의 무명을 들어보지 못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소이다.”

“지금 들으셨잖아요.”

모용상현은 하도 어이가 없어 웃음을 흘렸다.

“하하. 그렇긴 하군.”

“대공자의 별호는 뭔데요?”

“과분하게도 비룡(飛龍)이라 불리오.”

“비룡!”

정광이 눈을 크게 뜨자 모용상현이 손을 내저었다.

“말했잖소. 과분하다고. 중원무림에서 변방에 박혀 있는 나를 구룡사봉의 일원으로 넣을 줄은 몰랐소이다. 내 부족함을 알기에 항상 몸가짐을 조심하고 있소.”

모용상현의 겸손한 말에도 불구하고 정광의 놀람은 가시지 않았다.

“와. 이놈이랑 똑같으시네.”

“무슨 말이오?”

“요놈요, 요놈.”

정광이 등에 멘 비룡을 툭툭 치자 모용상현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 신궁(神弓)의 이름이 비룡이오?”

“네.”

“신궁이 다루는 신궁과 내 별호가 같다니 영광이외다.”

“그러게요.”

정광의 도를 넘는 말에 상단 무인들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모용상현은 달랐다.

그것을 바탕으로 정광의 정체를 추측했다.

‘젊은 나이에 말도 안 되는 신위. 무례해 보일 만큼 꾸밈없는 성품이라. 떠오르는 이가 하나밖에 없는데…….’

하지만 소문과 다른 점도 많았다.

‘잘생겼긴 하나 천하제일미남이라기엔 무리가 있어. 우아한 도복이 아니라 고급스러운 경장을 입었고.’

정체를 숨기기 위해 역용과 변복을 했을 수도 있으나 활과 검을 보자 생각이 바뀌었다.

‘무인이 애병을 바꿀 리는 없지. 이자는 진옥룡이 아니야.’

소문의 그가 활을 다룬다는 얘기는 전혀 듣지 못했다.

활은 지루할 정도로 긴 수련이 필요한 병기.

보이지도 않는 거리에서 쏴 마적단 수괴와 자신의 병기를 동시에 꿰뚫는 묘기라니.

짧은 시간에 익혀 해낼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허리에 차고 있는 검 또한 그랬다.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구름 문양이 아니야. 짙은 묵색에 음각으로 새긴 용이라. 대단한 명품으로 보이긴 하나 천지 차이지.’

다른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평범한 외모의 중년인이야 천하에 넘쳐나고. 저렇게 사나워 보이는 여인은 들어본 적이 없어.’

모용상현은 정광 일행의 정체를 캐는 걸 포기하고 솔직히 말했다.

“단주. 그대들의 진짜 신분이 궁금하나 더는 묻지 않으리다. 심양(瀋陽)에 무슨 일로 가는지도.”

“역시 사내다우시네요. 자고로 사내라면 말수가 적어야죠.”

자오가 서운한 표정을 지었지만 한순간이었기에 모용상현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의문을 털어낸 개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야말로 호쾌하오.”

“뭐가요?”

“비룡이라는 과분한 별호를 받아 항상 불편했는데 대수롭지 않게 받아주지 않았소?”

모용상현은 정말 기뻐했으나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정광이야 원래 그런 성품이고.

자오와 혜진이 지금까지 만나본 이들이 누군가?

십존도 이웃집 노인네처럼 자주 본 처지인데 무혈단에도 넘치는 구룡쯤이야.

허나 모용세가(慕容世家)의 대공자라는 신분은 특별했다.

그 사실을 아는 자오가 정광에게 전음을 보냈다.

-단주. 모용세가는 여타 세가와 다릅니다.

-어떻게요?

-한 성의 대토호인 그들과 달리 요녕성의 왕과 같은 존재입니다. 길림성(吉林省)과 흑룡강성(黑龍江省)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지요.

-황상께서 그걸 허락해요?

자오가 눈짓으로 황량한 구릉을 가리켰다.

-보시다시피 이런 곳인지라.

-하긴. 먹을 게 없는 쓸모없는 땅이긴 하네요.

납득하던 정광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자오, 왜 이렇게 말이 짧아졌어요?

-큼. 핵심만 전해 드리느라…….

-이상하네. 적응 안 되게 왜 이러시지?

-그, 그건…….

자오가 난처한 표정을 짓자 그들이 전음을 나누는 걸 눈치챈 모용상현이 거리낌 없이 말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물으시오. 성심성의껏 답하리다.”

정광이 사양할 리 있나.

대놓고 물었다.

“모용세가주께서 요녕성의 왕이세요? 대공자는 세자 저하시고?”

“큰일 날 소리를 하시는구려.”

모용상현이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본가는 황상께 충성하는 무가일 뿐이오. 그걸 아시는 황상께서 본가를 부려 요녕성 관리들을 돕게 하신 것이고.”

“아. 왕이 아니라 왕 비슷한 거셨구나.”

“…….”

모용상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한숨을 쉬었다.

“후우우. 내 정확히 말하리다. 요녕성은 여러 이민족이 섞여 사는 곳이오. 본가가 이곳에 터를 잡은 지 오래인지라 그들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은 편이고.”

모용세가는 오래전부터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에 산재한 이민족들과 중원의 교역을 담당해 왔다.

그런 그들이 있었기에 항상 식량난에 시달려 중원을 약탈하던 이민족들의 행패가 줄어들었고, 그 공을 인정한 황제는 모용세가에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주게 됐다.

물론 암묵적으로.

“이해하셨소이까?”

정광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왕 맞으시네.”

“…….”

“세자 저하.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좋을 대로 생각하시오. 입 밖으로 꺼내지 말고 생각만.”

“그런데 그렇게 귀한 분이 왜 상행을 하세요?”

모용상현은 말없이 굳은살로 뒤덮인 손바닥을 내밀었다.

정광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검만 수련하신 게 아니군요.”

“맞소. 본가 사람은 누구나 생업에 종사해야 하오. 일하는 자만이 무공을 익히고 먹을 수 있소. 그게 우리 가문의 가법이외다.”

“그리고 무한경쟁?”

이번엔 모용상현의 눈이 빛났다.

“핵심을 꿰뚫으시는군. 중원의 세가들은 소가주를 일찍 정한다고 들었으나 본가는 다르오. 오랜 경쟁을 한 후에나 정해지지.”

“대공자께서 앞서 나가고 계시겠네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

정광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모용세가가 크다 하나 대공자 정도 되는 인재는 많지 않을 것 같아서죠.”

“…….”

한동안 침묵하던 모용상현이 미소를 지었다.

정광처럼 강하고 꾸밈없는 이는 칭찬에 인색하기 마련이거늘, 이런 찬사를 듣다니.

‘가까워지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척만 지지 말자 다짐했는데…….’

정광이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왔는지는 모르나 사람 자체의 본질은 어렴풋이나마 보였다.

‘이런 이를 놓칠 수 있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포권했다.

“모용상현이 청하오. 귀하와 친우가 될 수 있겠소이까?”

정광도 일어서서 포권하며 답했다.

그 내용을 들은 모용상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친우는 좀 그렇고. 세자 저하,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 * *

‘모용상현이라…….’

무공은 별것 아니지만 됨됨이는 괜찮은 편이다.

요녕성을 주무르는 가문을 잇게 될지도 모르니 신분도 그럴듯하다.

이왕 요녕성에 왔으니 편히 가려면 같이 움직이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건만.

현실은 아니었다.

‘요녕성의 와아앙? 세자아아?’

아니, 그런 대단한 가문의 도련님께서 가시는 길에 무슨 놈의 마적들이 또 몰려든단 말인가!

‘나참. 어이가 없어서.’

정광은 생각과는 다르게 정성 어린 손길로 활시위를 당겼다가 놓았다.

쉬이이익-

“끄악!”

하나가 죽었으니 병기 한 개와 말 한 필을 또 번 셈.

‘어이가 없을 정도로 좋잖아.’

정광의 손이 바삐 움직였다.

그만큼 마적들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멸하게 됐다.

‘이, 이럴 수가!’

‘사람이 어찌 이런 신위를!’

상단 무인들은 찢어질 듯 커진 눈으로 정광을 바라봤다.

그들은 물론 자오와 혜진이 손 쓸 새도 없었다.

정광 홀로 해치운 것이다.

“으으. 뻑적지근해라.”

활 쏘는 감각을 한 차례 더 새긴 정광은 비룡을 등에 메고 기지개를 켰다.

“대공자, 뭐 하세요?”

전과 다르게 정광의 신위를 지근거리에서 똑똑히 목격한 모용상현은 경악을 금치 못하다가 정신을 차렸다.

“뭐, 뭐라고 하셨소?”

“우두머리인 분은 살려 드렸잖아요. 문초하셔야죠.”

“아! 알겠소이다.”

모용세가가 그런 걸까, 모용상현이 그런 걸까.

그의 손속은 명문세가의 자제답지 않게 독했다.

이를 견디지 못한 마적단 우두머리가 필사적으로 애원하며 토설했으나…….

‘쓸 만한 내용이 없어.’

모용상현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수괴를 노려봤다.

호족들의 압박이 거세져 먹고 살려다 보니 상대를 알아보지 못하고 덤볐다는데 뭐라 하겠는가.

‘얼마 전 상대했던 이상하리만치 강한 놈과 달리 보통 마적인 게 분명해.’

힘이 탁 풀린 모용상현은 수괴의 목숨을 거두고 생각에 잠겼다.

‘가만. 왜 하필 지금?’

요녕성에는 모용세가만 있는 게 아니었다.

세가를 떠받치는 여러 호족이 있었는데 그들이 왜 갑자기 마적단을 압박했을까?

‘겨울이 시작되면 어느 정도의 식량을 내어주는 게 보통인데.’

굶주린 마적들이 날뛰는 걸 상대하는 것보다 달래는 게 쉬웠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이라면 마적단을 토벌하는 게 옳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또 다른 놈들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될 것이 뻔한데 괜한 힘을 왜 쓰겠는가.

‘하북성에 내려간 사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모용상현은 속도를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단주, 지금부턴 조금 빠르게 가겠소.”

“그러세요.”

이동 속도가 빨라졌다.

정광은 주위를 구경하며 지금까지의 일들을 정리했다.

‘적절히 통제해 왔던 마적단을 갑자기 압박해서 내몰아?’

그 강한 천마신교도 혈사풍(血沙風) 같은 마적단의 숨통을 어느 정도는 틔워줬었다.

‘흠. 그런 일을 벌일 경우 노리는 건 뻔한데.’

해당 지역에 혼란을 일으켜 강력한 구심점을 흔들려는 것이리라.

‘뭐 알아서 하겠지.’

모용세가의 대공자가 당황하는 상황이었으나 알 바 아니었다.

정광의 목적은 요녕성의 패권이 아니었다.

조양사(朝陽寺)에 들러 뜻을 이루기만 하면 이런 황량한 곳에 다시는 안 올 터.

‘빨리 가면 나야 좋지. 아차!’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은 정광은 아직도 생각에 잠겨 있는 모용상현에게 물었다.

“손 아파 죽겠네. 이번 것들도 전부 사주실 거죠?”

“……그럽시다.”

모용상현은 이번에도 값을 후하게 치렀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두 번이나 더 마적단을 마주친 모용상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만큼 금원보를 더 받은 정광은 환하게 웃었고.

‘나쁘지 않아. 아니지. 꽤 좋아! 제법 쏠쏠해!’

병기도 그렇지만 말은 무척 비싼 가축이다.

그 두 가지를 스스로 달려와 바치는 이들이 이리도 많다니!

‘요녕성이라. 재물이 끝없이 굴러들어오는 곳이구나!’

어찌나 고마운지 황량하다고 무시했던 게 미안해질 정도.

‘더 와라, 더!’

안타깝게도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모용상현이 말했던 대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할 만한 반점이 있을 만큼 번화한 금주(錦州)에 이르자…….

정광의 눈이 빛났다.

‘이건 또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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