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276화 (275/569)

2부 5화

비룡(飛龍)

정광이 작은 전각 안에 들어가자 장주와 소장주가 맞이했다.

“…….”

“진옥룡, 어서 오게. 아버님께서도 반갑다고 하시네.”

“안녕하세요. 저도 반가운데…….”

정광은 그들을 번갈아 보며 두 손을 모았다.

“무량수불. 두 분 모두 우화등선하시기 직전이네요. 괜찮으세요?”

그럴 리가 있나.

전혀 안 괜찮았다.

지난 보름 동안 육신은 물론 혼까지 불사른 철 씨 부자의 몰골은 보는 이의 가슴이 아파질 정도로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지 아느냐고 물으시는군.”

정광은 손뼉을 치며 활기차게 말했다.

“자. 작품부터 보죠. 어느 분 것부터 보여주실 거예요?”

순간, 다 죽어가던 철 씨 부자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그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건 소장주였다.

“아버님, 먼저 시작하시지요.”

“…….”

“소자가 어찌 감히.”

“…….”

“자고로 장유유서라 했습니다. 소자를 불효자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

“아니, 아버님. 늦게 하려고 수를 쓰는 게 아니라…….”

정광은 내심 탄식했다.

‘애도 아니고 무슨.’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자들이 어떻게든 선수를 양보하려고 기 싸움을 벌이다니.

이 꼴을 어떻게 보겠는가.

‘지목해서 빨리 끝내야지.’

그래도 고생한 티가 완연한 두 사람 중 한 사람 편만 들 순 없었기에 공평무사하게 말했다.

“장주님께선 소장주님보다 먼저 가실 테니, 소장주님부터 보여주시죠.”

“……!”

장주의 눈썹이 불쑥 치솟고 소장주의 눈이 툭 불거졌다.

“아니면 반대로 가실까요? 그럼 소장주님이 억울하실 텐데.”

“…….”

장주는 눈을 감고 소장주는 한숨을 쉬었다.

“후우우. 내가 먼저 하지. 가져오게나.”

한쪽 문이 열리며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야장(冶匠)들이 두 개의 궤짝을 들고 들어왔다.

“이쪽에 놓으시게.”

“네, 소장주.”

야장들은 궤짝을 내려놓고 인사한 뒤 사라졌다.

소장주는 자신 있는 표정으로 정광에게 권했다.

“직접 열어보게나.”

정광은 사양하지 않고 궤짝을 열었다.

삐걱-

“오오.”

궤짝 안을 들여다본 정광이 눈을 빛냈다.

운룡과 소운룡이 말끔해진 날을 자랑하려는 듯 검붉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좋네요. 이제 아무리 베고 찔러도 흠집 하나 안 나는 건가요?”

“……그게 말이 되는 소리라 생각하나?”

소장주는 간신히 화를 참으며 말을 이었다.

“현철만으로 만들었다고 그런 기적을 행할 순 없네. 가끔 들르게나. 최선을 다해 손봐주지.”

“공짜로요?”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하하. 역시 철혈장이라니까요. 통도 크셔라.”

“……아직 대답하지 않았네만.”

“검집도 새로 만들어주시고. 짙은 묵색에 음각으로 새긴 용이라. 수수하면서도 멋스럽네요.”

검집뿐만이 아니었다.

운룡과 소운룡의 검파(劍把) 역시 원래 새겨져 있던 구름 문양 대신 용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는 정체를 감추고 싶어 하는 정광을 위한 배려.

정광은 정말 고마운 마음을 담아 감사를 표했다.

“조금이나마 성의 표시할게요.”

“……얼마나?”

“도마뱀 내의도 보고요.”

다른 궤짝을 열자 철혈무쌍용갑이 누런빛을 뿜어냈다.

“응?”

정광의 눈이 살짝 커졌다.

자잘한 생채기들과 우그러지고 뚫렸던 부분이 완벽하게 보수되어 있어서가 아니었다.

없던 것이 생겨서였다.

‘이건 뭐야?’

정광은 철혈무쌍용갑의 가슴 부위를 덮고 있는 붉은 금속을 살펴봤다.

‘호심경(護心鏡)인 것 같은데.’

시선을 소장주에게 돌리자 그가 설명했다.

“자네가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 들었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정도가 아닌, 다른 이라면 목숨이 몇 개라도 부족한 과격한 방식이라더군.”

진천마였던 시절과 비교하면 무척이나 얌전하게 싸워온 정광이었으나 세간의 평은 그랬다.

“황소보다 고집이 센 자네가 다른 식으로 싸우게 되지는 않을 터. 앞으로도 수많은 상처를 입게 되겠지.”

천하는 넓고 기인이사(奇人異士)는 많은 법.

소장주는 정광의 강함은 인정했지만 무적일 거라곤 믿지 않았다.

“그래서 호심경을 달았네. 최소한 심장만큼은 제대로 보호해야 하지 않겠나.”

소장주는 호심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쌍각사룡(雙角沙龍)의 비늘과 자네 덕분에 얻었던 깨달음으로 만들어낸 합금일세. 적금강(赤金剛)이라 이름 붙였지.”

적금강이 자신의 이름을 듣고 대답하는 것처럼 붉게 빛났다.

“양이 얼마 안 되기에 그 정도밖에 못 썼지만 장담하네. 천하의 그 무엇보다 더 단단할 게야. 그러니 믿고 쓰면 될…… 잠깐! 잠까안! 지금 뭐 하는 겐가?”

운룡을 높이 들어 올렸다가 내려찍으려던 정광이 대답했다.

“말씀대로인지 시험해 보려고요.”

“안 해도 돼! 운룡을 또 고치게 할 셈인가!”

“음.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걸 보니 진짜인가 보네요.”

“당연한 말을!”

정광은 운룡을 내려놓고 정중히 포권했다.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

소장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당부했다.

“적금강을 믿고 심장을 미끼로 삼아 싸우란 얘기가 아닐세. 피하지 못할 공격을 받더라도 목숨만큼은 부지하길 바라서야.”

진지하게 말을 마친 소장주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 하는 겐가?”

정광은 전표 한 다발을 내민 채 대답했다.

“성의 표시요.”

“……제법 만족스러운가 보군. 됐네. 어려운 이들이나 돕게나.”

소장주는 희미하게 웃으며 장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 아버님 차례입니다.”

“…….”

“아버님?”

“…….”

“하하. 별것 아닙니다. 이보게, 가져오게나.”

야장이 또 들어와 긴 목함(木函)을 놓고 사라졌다.

“…….”

“진옥룡, 열어보라고 하시네.”

아까부터 목함을 주시하고 있던 정광이 손을 뻗었다.

달그락.

덮개를 열자 그가 원하던 것이 드러났다.

“……!”

삼척(三尺)쯤 되는 길이.

빛을 빨아들이고 피를 머금을 기세로 검고 붉게 빛나는.

산봉우리 두 개가 맞닿은 모양으로 아름답게 휜 활이었다.

“…….”

정광은 말없이 그것을 잡았다.

운룡과 소운룡에서 느껴지던 청량한 한기가 전해졌다.

“…….”

정광의 입술이 활처럼 부드럽게 휘었다.

‘좋은 놈이야.’

운룡을 처음 쥐었을 때와 똑같은 기분을 느끼며 활에 새겨진 용무늬를 매만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주가 눈을 빛냈다.

초조한 얼굴로 주시하던 소장주가 아비 대신 입을 열었다.

“휴대하기 좋게 동쪽의 고려(高麗)…… 지금은 조선(朝鮮)이지. 그들이 즐겨 쓰는 각궁(角弓) 형태로 만들었다 하시네.”

“…….”

“각궁은 작은 크기와 달리 대단한 사거리를 자랑하는 활이지. 허나 이놈은 각궁을 한참 뛰어넘는 강도와 탄성을 지녔네.”

“…….”

“시위는 자네가 알려준 것을 사용했고. 쌍각사룡 가죽 밑에 붙어있던 힘줄을 가공해 촘촘하게 꼬았네. 대단한 영물이야. 현철로 만든 활의 탄성을 능히 감당하더군.”

정광은 내공을 끌어올렸다.

왼손으로 줌통을 움켜쥐고 오른손으로는 시위를 잡아당겼다.

끼기기기긱-

활이 으스스한 비명을 흘리며 급격히 휘었다.

피잉-

시위를 놓자 반대로 꺾이며 날카로운 바람을 쏘았다.

후욱-

앞의 공간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퍼졌다.

“…….”

정광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좋네요.”

“……!”

장주가 쥐고 있던 주먹에 힘줄이 솟았다.

소장주가 분한 얼굴로 아비의 말을 전했다.

“그놈을 자네처럼 쉽게 다룰 수 있는 무인은 거의 없을 거라 하시네.”

“그렇겠죠.”

“그만큼 대단한 활이야. 허나 활을 관리하기 위해 수시로 시위를 풀고 올리는 건 어렵고 번거로운 일이지.”

“맞아요.”

“그래서 위력을 조금 희생하더라도 굳이 시위를 풀고 올리지 않아도 되게 만드셨다고 강조하시네. 자네의 성품을 깊이 고려한 것이라고 덧붙이시는군.”

정광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탁월한 선택이세요. 편한 게 최고죠.”

“활에 걸맞는 철시(鐵矢)도 준비하셨지만, 웬만한 상대에겐 보통 화살을 쓰라고 하시네.”

“그게 맞죠. 귀한 거 쐈다가 뛰어가서 회수하는 건 바보짓이니까요. 전부 마음에 드네요.”

“……진심인가?”

“네.”

장주와 소장주가 서로를 바라봤다.

잠시 뒤.

그들의 시선이 정광에게 향했다.

“…….”

“아버님과 나. 어느 쪽의 것이 더 마음에 드는지 말해주게.”

정광은 간단하지만 진지하게 대답했다.

“호부호자(虎父虎子). 결과물도 같아요. 감사합니다.”

* * *

철 씨 부자로선 분하면서도 자랑스러운 결과였다.

정광도 만족했고.

심지어 자오와 혜진도 기뻐하게 됐다.

정광과 길을 떠나려는 그들에게 철 씨 부자가 마음에 드는 병기를 취하라고 한 것이다.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잘 쓰겠습니다.”

이미 철혈장의 병기들을 써봤던 자오는 신중한 눈빛으로 자신에게 맞는 비수(匕首), 아미자(峨嵋刺), 유엽비도(柳葉飛刀) 등을 챙겼다.

“거참. 최소한으로 골랐는데도 봇짐이 미어터지려고 하는군요.”

큰 봇짐을 진 채 멋쩍어하는 자오와 달리 혜진의 차림은 단출했다.

그녀의 허리춤에는 기성품이지만 현철이 한 냥(兩)이나 섞인 검이 걸려 있었다.

“자오 대협. 제가 조금 나눠 들겠습니다.”

“하하. 아닙니다. 기분이 좋아 엄살을 부린 겁니다.”

혜진도 자신의 새로운 검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정광은 그녀의 검을 보며 다른 이를 떠올렸다.

‘현철 한 냥짜리 검이라. 수빈이의 것과 같네.’

어차피 철혈장에서 요녕성(遼寧省)으로 가려면 팽가를 지나야 했다.

‘잠깐 들러서 현오가 남긴 얘기나 전해주자.’

정광 일행은 철 씨 부자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안녕히 계세요.”

“…….”

“자네가 또 안 오면 안녕하실 것 같다고 하시네.”

“하하. 장주님, 의외로 농을 잘하시네요.”

“…….”

“……빨리 안 가냐고 물으시는군. 헌데 활의 이름은 정했나?”

“물론이죠.”

정광은 등에 멘 활을 툭툭 치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비룡(飛龍)요. 멋지죠?”

“…….”

“……운룡에 소운룡에 비룡이라. 참 일관성 있군. 잘 가게나.”

정광 일행은 철혈장을 몰래 빠져나가 마방(馬房)에 들렀다.

백승무가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자오의 활약으로 적당한 가격에 여러 필을 살 수 있었다.

“달려볼까요.”

“네! 단주!”

그들은 예비마를 끌고 출발했다.

자오의 인도하에 좋은 곳만 골라 먹고 마시며 달렸는데, 중간 목적지인 하북팽가 인근에 이르자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됐다.

“수빈이가 태상가주님과 함께 무림맹에 가 있다고요?”

소문을 모아온 자오가 설명했다.

“그렇습니다. 슬슬 돌아올 때가 됐긴 했다는데 언제쯤일지는 모르겠다더군요.”

정광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팽가에 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자오가 덧붙였다.

“소가주는 가주를 대신해 팽가를 잘 이끌고 있으며, 팽 소협은 소가주를 돕는 한편 무공 수련에 힘쓰고 있다 합니다. 크게 신경 쓰실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잘됐네요. 그럼 들르지 말고 그냥 가죠.”

혜진이 물었다.

“단주, 황궁에 가시려는 겁니까?”

“아뇨. 분위기도 안 좋은데 뭐 하러요. 요녕성으로 바로 가요.”

며칠 동안 먹고 자며 달리던 그들은 하북성을 지나 요녕성에 진입하게 됐다.

정광은 길게 펼쳐진 구릉(丘陵)을 둘러보며 혀를 찼다.

‘뭐가 이렇게 황량해?’

익히 듣긴 했다만 이 정도일 줄이야.

풍경이 썰렁해서 그런지 바람도 차가웠다.

‘조양사(朝陽寺)가 있다는 심양(沈陽)까지 가려면 한참인데.’

이래서야 심심해서 어찌 가나.

눈살을 찌푸리며 고민하는데…….

‘어?’

멀리서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곳에 뭐 먹을 게 있다고 싸움을?’

안력을 키우자 두 무리의 사람들이 병기를 휘두르는 모습이 보였다.

‘난잡하게 입은 놈들은 마적단이 확실하고. 다른 쪽은 상단 같은데.’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심심함도 달랠 겸 비룡을 시험해 볼 기회 아닌가.

“으차.”

정광은 말을 탄 채 등에 메고 있던 비룡을 쥐었다.

‘철시는 아깝고. 싼 것으로 가야지.’

말안장에 달아 놓은 화살통에서 화살을 꺼내 시위에 메겼다.

끼기기긱-

천천히 당기자 비룡이 소음을 내며 휘었다.

‘이쯤인가.’

정광은 자신의 감을 믿고 시위를 놓았다.

쐐애애액-

화살이 놀라운 속도로 날아가 사라졌다.

정광이 하는 짓을 지켜보던 자오와 혜진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단주. 갑자기 왜 화살을?”

“누구에게 쏘신 겁니까?”

정광은 먼 곳을 바라보며 답했다.

“마적단 우두머리한테요.”

“마적단!”

“잡으셨습니까?”

정광은 고개를 저으며 또 다른 화살을 시위에 메겼다.

“아뇨. 종이 한 장 차이로 빗나갔어요.”

* * *

‘마적단 따위가 감히!’

모용상현은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일검마다 마적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이래도 안 물러나?’

웬만한 자들이었으면 벌써 도주했으련만.

상단을 급습한 이 마적단은 오히려 살기를 키우며 덤볐다.

‘빌어먹을. 무공은 별것 아니지만 수가 너무 많아.’

이대로 가다간 수에 밀려 죽게 될 터.

‘수괴를 노려야 해.’

누가 수괴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화려한 담비 가죽을 걸치고 상단 무인들을 학살하고 있는 장신의 사내였다.

‘일격필살!’

모용상현의 신형이 날아올랐다.

마적들을 뛰어넘은 그는 수괴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며 검을 내리그었다.

‘쇄천검(碎天劍)!’

하늘을 부순다는 이름처럼 검으로 펼친 것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강한 일격!

수괴가 놀란 얼굴로 도를 치켜들었으나 이미 늦은 상태.

모용상현은 속으로 외쳤다.

‘죽어!’

그 순간, 화살이 눈부신 속도로 날아와 그의 검을 꿰뚫었다.

쐐애액- 콰직!

“큭!”

화살에 얼마나 강한 힘이 실렸는지, 모용상현의 손아귀가 찢어지며 검이 날아갔다.

‘누가 이런 신위를!’

궁금해할 틈이 없었다.

떨어져 내리는 그를 향해 마적단 수괴가 도를 휘둘렀다.

“이익!”

모용상현은 신형을 비틀어 간신히 피하며 바닥에 처박혔다.

쿵.

“크흑!”

그런 그에게 주위의 마적들이 달려와 병기를 내려쳤다.

‘내가 이렇게 죽다니!’

모용상현의 암울하게 가라앉은 눈에 비가 내렸다.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날아온 화살비였다.

콰콰콰콰콰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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