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275화 (274/569)

2부 4화

감개무량(感慨無量)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뭐! 뭘 원하는 게냐?”

소장주가 부들부들 떨며 묻자.

정광은 온화하게 웃으며 두 손을 모았다.

“무량수불. 아시면서.”

“몰라!”

“너무 과하게 반응하시는 거 아니에요?”

“너 자체가 과하다! 무슨 꿍꿍이냐?”

정광은 피식 웃었다.

‘이렇게 과하게 나오는 이유는 딱 하나지.’

부탁을 들어주기 싫어서다.

하지만 정광은 원하는 걸 받아낼 자신이 있었다.

바로 이렇게.

“사실 부탁이라고 하기엔 좀 무리가 있죠.”

소장주가 흥분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무슨 말인가?”

정광은 소매에서 비수를 꺼내 내밀었다.

“일단 보시죠.”

소장주는 말없이 비수를 건네받았다.

잡자마자 시리도록 청량한 한기가 느껴졌다.

강호에서 진옥룡의 삼신기(三神器) 중 하나로 꼽히는 소운룡(小雲龍)이었다.

‘으음.’

소장주는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자신이 벼려낸 역작을 살펴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현철(玄鐵)을 통째로 써서 만들었는데도 이 모양이 되다니…….’

소운룡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예리하기 그지없던 검붉은 날이 무뎌진 건 물론이요, 이가 나간 부위도 드문드문 있었다.

‘대체 어떤 싸움을 해왔기에…….’

소문으로 전해 듣긴 했으나 그 흔적을 직접 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정광이 아무리 강하도 해도 이제 갓 약관이 될까 말까 한 나이 아닌가.

그런 어린 청년이 목숨을 걸고 싸워 정사대전을 종식시키다니.

고수들만 골라 죽여 최대한 적은 피를 흘리게 만들면서 말이다.

‘강호가 이 녀석에게 빚을 졌어. 그것도 아주 큰 빚을.’

강호를 넘어 천하를 구한 정광이거늘, 말도 안 되는 무리한 요구를 할까 두려워 경계했던 자신이 우스워졌다.

소장주는 마음을 굳혔다.

“원하는 것을 말해보게. 웬만한 것이면 들어주지.”

정광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부탁드리는 게 아니라니까요. 당연히 해주셔야 하는 일인데.”

“……무어라?”

“평생의 역작이라더니. 무슨 비수가 이렇게 물러요. 조금만 부딪혀도 이가 다 빠지고.”

“……!”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정광은 운룡(雲龍)도 뽑아 탁자 위에 올려놨다.

누가 봐도 소운룡보다 안 좋은 상태였다.

“얘도 이래요, 얘도. 현철로 만드신 거 맞나요?”

“…….”

“아. 이것도 보여 드려야지.”

정광은 입을 떡 벌린 채 아무런 말도 못하는 소장주를 보며 경장 윗도리를 벗었다.

철혈무쌍용갑(鐵血無雙龍甲)이 모습을 드러내며 누런빛을 발했다.

“어때요?”

“…….”

“너무 엉망이어서 말씀도 못 하시겠죠? 자잘한 부분은 제쳐두고. 여기 보세요, 여기.”

정광은 손가락으로 구멍이 난 옆구리 부분과 우그러진 어깨 부위를 가리켰다.

“무쌍에 용갑은 무슨. 창날 좀 닿았을 뿐인데 구멍이 숭숭 나지를 않나, 손바닥 살짝 스쳤다고 형편없이 찌그러지기까지.”

“…….”

“두부가 따로 없죠. 믿고 쓰다가 몇 번이나 죽을 뻔했잖아요. 이런 하품(下品)을 주시면 어떡해요.”

“……!”

하품이라는 충격적인 말에 소장주의 정신이 돌아왔다.

동시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익!’

이런 고얀 녀석이 있나!

다들 구경만이라도 해보고 싶어 목을 매는 귀물들을 형편없다고 매도하다니!

“나도 듣는 귀가 있다! 그것들은 사파제일고수였던 전 사마련주 사지환과 그의 심복 한로에게 당한 흔적 아니냐!”

“그런데요?”

“철혈무쌍용갑 덕분에 그런 고수들의 공격을 받고도 살았으면 감사해야지, 어디서 큰소리야!”

소장주의 힐난에 정광이 황당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이거요, 천하제일보의(天下第一保衣)라고 하셨었잖아요.”

“그랬지!”

“그런데 왜 천하제일이 아닌 분들한테 이 모양 이 꼴이 되죠?”

“……!”

아니, 이걸 대체 말이라고!

천하제일보의는 천하제일인이 아닌 자들에게 훼손되면 안 된다는 말 아닌가?

소장주의 관자놀이에 굵은 핏줄이 솟고, 입에서 거친 고함이 터져 나오려는 순간.

정광이 당당히 요구했다.

“셋 다 천하제일이 되게 고쳐주세요.”

“이미 천하제일이야!”

“진짜 천하제일요. 소장주님께 무리면 장주님께 말씀드리러 갈게요.”

“…….”

소장주는 정광을 노려보다가 씹어뱉듯 말했다.

“내가 격장지계에 넘어갈 것 같으냐?”

“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정광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도마뱀 내의를 만드시는 대가로 돈이 아닌 도마뱀 비늘을 받으셨다고 했죠? 그걸 바탕으로 새로운 합금을 연구하시려고요.”

“그렇긴 하다만. 그게 무슨 상관이냐?”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소장주님은 앞으로 나아가시는 분이에요. 선대로부터 전해져 온 지식만 다듬는 게 아니라 새로운 길을 여는 분이시죠.”

“…….”

“장주님을 뛰어넘고 싶으시죠?”

“…….”

소장주의 눈 속에서 불길이 일었다.

정광의 눈도 빛났다.

“기회를 드리죠. 두 분이 함께 만드신 것보다 더 좋게 홀로 고쳐주세요.”

소장주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말을 뱉었다.

“도발해도 소용없네. 그럴 시간이 없어.”

“아아. 아까워라. 안 넘어오시네.”

정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말을 이었다.

“이러긴 싫었는데. 그냥 해주시죠. 나쁜 소문을 내기 전에.”

“흥. 본장이 만든 병기들이 명성과 다르게 형편없다고 떠들 생각인가?”

“아뇨. 엄청나게 칭찬할 건데요.”

“……무어라?”

“제가 해낸 대부분의 일들은 모두 소장주님과 장주님께서 만들어주신 것들 덕분이라고요.”

“……!”

“삼류 무인도 손에 쥐면 절대고수가 되는 병기! 모두 오셔서 하나씩…… 아니. 몇 개씩 장만하세요, 이러려고…….”

“그만!”

소장주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지금도 수없이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미칠 지경인데, 정광이 그런 소문을 퍼뜨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하지 않은가!

‘후우우. 악귀보다 더 사악한 놈 같으니.’

도무지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뭐라도 해줄 참이었으니 넘어가 주는 게 나을 터.

소장주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이번 한 번만이네. 더 이상은 없어.”

“그건 차차 상황 보고 또 얘기하죠. 숙소는 전에 거기 쓰면 되죠?”

“마음대로 하게나.”

“일행이 있는데.”

“밖의 사람들 눈에 안 띄게 알아서 데려오게.”

“감사합니다. 그럼 장주님 뵈러 가죠.”

“……아버님은 왜?”

“제작을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

정광은 눈을 크게 뜨는 소장주를 보며 싱긋 웃었다.

“통역도 해주실 겸 같이 가서 들으시죠.”

“…….”

소장주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현철만으로 검을 만든다는 기상천외한 생각과 그것을 가능케 한 지식을 갖고 있던 정광 아닌가.

‘이번엔 또 어떤 비결로 무엇을 만들려고?’

재물을 얼마나 쏟아부어야 할지, 어떤 고생을 하게 될지 감도 잡히지 않았으나 거절할 수 없었다.

몸속에 흐르는 장인의 피가 그를 움직였다.

“가세나.”

다시 만난 철혈장주는 여전히 과묵했다.

정광은 그에게 인사를 한 뒤 원하는 것을 말했다.

장주의 화상 가득한 얼굴은 미동조차 안 했다.

대신 소장주가 입을 열었다.

“갑자기 그걸 왜 필요로 하는가?”

“요즘 천하정세가 좀 그렇잖아요. 혹시 몰라서요.”

“몽고를 말하는 게군. 그걸 다룰 줄은 아느냐고 물으시네.”

“물론이죠.”

“허어. 정말 못하는 게 없는 겐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니 만들어주겠다고 하시는군.”

“좀 어려울 건데요.”

“무슨 의미인가?”

정광이 어깨를 으쓱했다.

“현철로 만들어주세요. 다른 것들처럼 통으로.”

“……!”

장주의 눈썹 한 올이 꿈틀하자 어이없어하고 있던 소장주가 동의했다.

“그렇지요. 아버님 말씀대로입니다.”

“소장주님, 혼자만 듣지 마시고 통역 좀 해주세요.”

“잘 듣게. 자네 덕에 현철을 탄성 있게 제련할 순 있었으나 검이어서 가능했던 일일세. 허나 그것은 달라. 훨씬 더 강한 탄성이 필요하지. 이해했는가?”

“네.”

“후우. 다행이군.”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소장주는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얼굴을 굳혔다.

“그래도 하실 수 있으시죠?”

“안 된다니까!”

“소장주님 말고 장주님요.”

장주는 정광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소장주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맞장구쳤다.

“맞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쉬운 일이 아니지요.”

“소장주님, 통역요.”

“현철에 적연철(赤軟鐵), 고석(鈷石), 금(金)을 넣어 탄성을 준다 치세. 적절한 배합률을 알려면 많은 시행착오를 반복해야겠지만 되긴 될 게야.”

“역시 철혈장이라니까요.”

“끝까지 듣게나. 그것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지 않는가. 그 탄성을 견딜 만큼 질긴 것이 또 필요해.”

“당연하죠.”

“하지만 그런 것을 만들 재료를 어디서 구하겠는가? 아니, 천하에 그런 게 있기나 할까?”

“있는데요.”

“……!”

“진짠데.”

“…….”

장주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소장주의 얼굴이 굳었다.

“말해보라고 하시네. 정말 그런 게 있다면.”

정광의 입이 열리고 한 단어가 흘러나오자 철 씨 부자의 눈이 커졌다.

정광은 그들을 번갈아보며 웃었다.

“이제 됐죠?”

“…….”

두 사람은 대답하지 않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정광은 그런 그들에게 경쟁의 불을 지폈다.

“기대할게요. 두 분 중 어느 분의 작품이 더 뛰어날지.”

“……!”

철 씨 부자의 시선이 부딪혔다.

그리고 잠시 뒤.

소장주가 열기 어린 음성으로 항변했다.

“아버님보단 부족하지만 저도 많이 늘었습니다.”

“…….”

“네. 말씀대로 제가 맡은 것이 더 쉬운 일이긴 하지요. 하지만 그만큼 더 뛰어나게 보수하면 되는 일 아닙니까?”

“…….”

“맞습니다. 장인이라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증명해야지요.”

“…….”

“쉽진 않으실 겁니다.”

“…….”

“그럼 보름 뒤에 다시 뵙지요.”

“…….”

두 사람은 서로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네 개의 눈에 담긴 열기만큼 주위도 달아올랐다.

그 따스함에 하품을 하던 정광이 진지한 어조로 제안했다.

“그런데 밥은 언제 드세요? 배고픈데 같이 가시죠.”

* * *

밤이 깊어지자 밖에서 기다리던 자오와 혜진은 정광을 따라 철혈장의 담을 넘었다.

철혈장 무인들과는 이미 얘기가 된 상태.

그들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숙소로 들어갔다.

자오가 감개무량(感慨無量)한 표정으로 방 안을 둘러보자 정광이 물었다.

“왜 그러세요?”

“옛 생각이 나서 그렇습니다.”

“네?”

“이 방에서 뒹구시던 단주를 감시하다가 발각됐었지요. 고문도 당했고요. 어찌나 아프던지…….”

자오가 몸을 부르르 떨자 정광이 웃었다.

“엄살은. 잘 견디셨으면서.”

“……아혈(啞穴)을 짚인 상태였잖습니까. 토설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어 더 아팠습니다.”

“아.”

“결국 단주께서 눈치를 채시고 점혈을 풀어주셨지만, 저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생각나는 대로 다 떠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런 내용이었지요? 소인은 사십삼 년 전 귀주성(貴州省) 정안현(正安縣)에서 삼남이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나이 열하나에 사흑맹(邪黑盟) 소속인 파천방(破天幇)에 입문하여…….”

“정확하니까 그만하시죠.”

자오가 빙그레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단주.”

“뭐가요?”

“까마귀인 저를 각응(角鷹)으로 바꿔주신다 하셨고, 그 약조를 지켜주셨지 않습니까.”

“각응이 아니라 다설범협(多舌凡俠)으로 불리시잖아요.”

“저는 그 별호가 더 자랑스럽습니다.”

“하긴. 딱 어울리긴 하죠.”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혜진은 그들의 대화를 흥미롭게 듣다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자오 대협은 단주를 만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됐어. 나 역시 그렇겠지.’

아미산이 아닌 속세에서 지내는 것 자체가 새로운 삶이라 할 만했으나 자오만큼 극적인 변화는 아니었다.

‘나는 어떻게 변할까?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정광의 말에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혜진 소저, 생각나시죠?”

“네? 아미산 말씀입니까?”

“아뇨. 술이요.”

“……!”

“놀라시기는. 한잔 하실래요?”

혜진은 빙그레 웃었다.

정광과 자오처럼.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라. 기쁘게 응하겠습니다.”

세 사람은 밤이 되면 술을 즐기고 날이 밝으면 수련을 했다.

엄밀히 말하면 자오와 혜진만 수련했는데 정광은 그들의 무공을 봐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둘 다 한창때라 그런지 빨리 느네.’

자오는 중년이었으나 전생도 있는 정광에겐 애송이였다.

‘애초 예상보다 더 강해지겠는데.’

그래도 정광의 기준에는 한참 모자랐다.

‘더 빨리 나아갈 수 있게 등이라도 살짝 밀어줘야겠어.’

정광의 살짝은 타인에겐 목숨이 위태로운 경지.

자오와 혜진은 토하고 기절하기를 반복하게 됐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그들은 그만큼 더 강해졌다.

그리고 어느 날 오후.

장주와 소장주가 정광을 찾았다.

철혈장에 온 지 보름째 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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