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273화 (272/569)

2부 2화

천당(天堂)

정광이 홀연히 모습을 감춘 이유는 간단했다.

할 만큼 했겠다, 이젠 놀아야 하지 않겠는가!

중원을 유람하는 김에 항마주(降魔珠)의 비밀도 풀고!

현오가 남긴 서책에 그 단서가 있었다.

항마주를 만든 것으로 추측되는 천축 고승 가섭마등과 축법란이 산서성(山西省) 현통사(顯通寺)를 떠나 어디로 갔는지!

정광은 열심히 그 길을 따라갔다.

각 성의 진미와 명주를 맛보고 명승고적을 둘러보는 데 더 집중했지만 가긴 갔다.

그렇게 현오가 지목한 사찰마다 들려 시주도 듬뿍하며 단서를 찾았건만.

정광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한탄했다.

“망할. 진짜 되는 게 없네.”

쓸 만한 내용이 단 하나도 없다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이냔 말이다.

승려들의 극진한 배웅을 받으며 사찰에서 나와 중얼거리자 자오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단주, 시주하신 것들을 회수할까요?”

정광이 인상을 찌푸리자 자오가 재빨리 덧붙였다.

“말씀드리기 전에 행해야 하는 것을. 죄송합니다.”

자오의 신형이 사라졌다.

정광은 자신을 물끄러미 보는 혜진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나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눈빛이 왜 그렇죠?”

“새로운 세상을 봐서 그렇습니다.”

“어째 비꼬는 것처럼 들리는데.”

정광이 고개를 갸웃하자 혜진이 빙그레 웃으며 합장했다.

“아미타불.”

웃음이 적은 혜진이었으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광의 독특한 협행 때문이었다.

‘의로운 이에겐 선(善)을. 불의한 이에겐 악(惡)이라…….’

지금까지 들른 사찰마다 시주했던 정광은 제대로 된 승려가 있는 곳은 그대로 두고 삿된 이들이 머무는 곳은 회수했다.

참 승려인지 가짜 승려인지 어떻게 판별하냐고?

얼굴의 개기름과 재물을 향한 탐욕을 보면 알지, 그게 뭐 어렵겠는가.

‘근방의 의인(義人)이 기뻐하겠구나.’

혜진의 예상대로였다.

자오가 회수해 온 재물은 사찰 인근에 거주하는 소문난 의인에게 주어졌다.

“헉! 누, 누구시길래 이렇게 큰 재물을…….”

놀라는 의인에게 정광은 친절히 답했다.

“천하유람단주(天下遊覽團主)요. 제대로 쓰시길 빌게요. 아주 제대로요.”

“……처, 천하유람단주?”

자오도 혜진도 ‘단주’라는 호칭이 입에 익어 대충 만든 이름이었던 만큼 듣는 이도 황당해했다.

정광은 그런 그에게 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권유했다.

콰콰콰콱-

“헉!”

항상 그랬듯이 바닥을 지그시 밟아 일척(一尺)이나 뚫는 신위를 보이자 의인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제대로 쓰실 거죠? 그럼 이만.”

정광은 신법을 펼쳐 한산한 곳에 이르자 흙을 털어내며 투덜거렸다.

“이거 영 귀찮네. 슬슬 다른 것으로 바꿀까?”

“생각해 두신 게 있으신지요?”

혜진의 물음에 정광이 손뼉을 치며 답했다.

“그렇지. 집을 무너뜨리는 건 어때요?”

“……의인이 슬퍼할 것 같습니다만.”

“드린 돈의 일부로 더 좋게 지으시라고 하면 되죠. 좋은 일을 하면 그럴듯한 대가를 가끔이라도 받으셔야 하지 않겠어요?”

“……!”

혜진의 눈이 커졌다.

‘좋은 일을 하면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너무나 당연한 말이었지만 생소하게 느껴졌다.

왜 그런지 혜진은 곧 깨달았다.

‘옳은 말이지만 실제로 지켜지는 경우는 적어서 그렇구나.’

아미산에서 내려와 사마련과 싸운 뒤 정광을 따라 천하를 주유했다.

덕분에 많은 것을 알게 됐는데, 그녀의 눈에 비친 세상은 의로운 이일수록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잠깐. 그런데 단주는 왜?’

궁금증이 솟았다.

“손해 보는 걸 누구보다 싫어하는 단주께서 역용에 변복까지 한 상태로 선행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자오가 웃으려다 입을 틀어막고, 정광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직설적이시네.”

“그걸 좋아하셔서 그랬습니다.”

“그래도 정도가 있죠.”

정광은 고개를 몇 차례 저은 뒤 설명했다.

“본색을 드러낸 상태로 그러고 싶긴 한데, 달라붙는 사람이 너무 많아 역용을 할 수밖에 없잖아요.”

정말 그랬다.

첫 목적지였던 호북성에서부터 무인들도 그랬지만 여인들이 어찌나 몰려들던지.

혜진의 외모에 혹해 집적거리는 사내들도 많았기에 정광은 그녀까지 역용시켰다.

심지어 평범함의 극치를 달리는 자오까지.

물론 자오는 역용한 외모조차 평범했다.

정광은 예전보단 못했으나 역용술에 한계가 있어 대단한 미남자가 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니까 일단 이렇게 하고요.”

“……일단?”

혜진이 어리둥절해 하자 정광은 당연하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중에 필요한 상황이 오면 천하유람단주(天下遊覽團主)가 바로 나다, 이러려고요.”

“……!”

“좋은 일을 하면 대가를 받아야죠. 안 그래요?”

“…….”

한동안 침묵하던 혜진이 나직이 웃었다.

어쨌든 선한 이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고 협을 행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하하.”

“왜 웃으세요?”

“너무 단주다워서 그렇습니다.”

“칭찬이죠?”

“물론이지요.”

혜진은 가벼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광의 꾸밈없는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그래, 이게 단주의 길이었지.’

정광은 그녀의 사조인 대원이 말한 것처럼 길을 열어주진 않았으나, 이런 길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내 길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깊은 생각에 빠진 그녀와 달리, 정광이 가야 할 길은 명확했다.

‘호북성, 안휘성, 강서성, 복건성. 모두 허탕이었어. 다음은 절강성(浙江省)인데. 만약 그곳에서도 아무런 소득이 없으면…….’

뭐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가자.’

상유천당(上有天堂) 하유소항(下有蘇杭)이라.

남송(南宋)의 범성대(范成大)가 말했듯,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蘇州)와 항주(杭州)가 있지 않은가.

절강성의 성도(省都)가 바로 항주!

무조건 가야 했다!

‘좋아. 제대로 즐겨주마.’

항주에 들어가기 전, 소흥(紹興)에 들러 아름다운 운하를 감상하며 그 유명한 소흥주(紹興酒)를 마셨다.

술도 일품이었지만 소흥주를 넣어 끓인 동파육(東坡肉)은 또 어찌나 맛있는지.

소림사에 가져가 냄새를 솔솔 풍기면 불존이든 방장이든 간에 당장 뛰쳐나와 맛을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

‘느낌이 좋아! 이대로 간다!’

목적지는 현오가 알려준 사찰들 중 마지막으로 남은 곳이었다.

소림사보다 먼저 지어진 절로, 천축의 고승(高僧) 혜리(惠理)가 찾아와 신령이 깃든 곳이라며 세운 영은사(靈隱寺)!

더구나 영은사가 있는 산의 이름은 무림산(武林山)이었다!

가섭마등이나 축법란처럼 천축의 고승이 세운 사찰인 데다 산의 이름까지, 뭔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진하게 풍기지 않는가!

무림산에 올라 비래봉(飛來峰)에 새겨진 수백 개의 장엄한 조각상들을 구경하며 영은사에 들어갔다.

소림, 아미와 같이 선종(禪宗) 계열인지라 괜히 더 친숙한 기분!

승려들도 승려다웠다.

정광은 기분 좋게 거금을 시주한 뒤 용건을 꺼냈다.

“오래전 가섭마등 선사와 축법란 선사의 의발(衣鉢)을 전해 받으신 분이 귀사에 들르셨다고 들었는데, 혹시 남겨진 기록이 있나요?”

영은사의 역사가 깊다 하나 천축의 두 고승이 중원에 들어온 시간보다는 이백 년 이상 늦었다.

현오는 한 고서에서 그들의 뜻을 이은 승려가 영은사에 들렸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서책에 남긴 것이다.

‘너무 오래전 기록이라 그리 신뢰가 가진 않지만 현오라면…….’

아니나 다를까.

주지(住持)가 불호를 외우며 인정했다.

“아미타불. 그렇습니다.”

“좋아!”

정광은 벌떡 일어나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또다시 헛고생을 하나 했건만, 드디어 해낸 것이다!

‘고진감래라더니 과연! 이제 됐어!’

자오는 애써 담담한 척하고 혜진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린 가운데 정광이 다급히 물었다.

“그거, 볼 수 있나요?”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

“헌데…….”

주지가 정광의 눈을 들여다보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시주께서 실망하실 것 같습니다.”

“왜요?”

“무슨 연유로 그분에 관한 기록을 찾으시는지는 모르지만, 대단한 내용은 없기 때문입니다.”

정광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이, 일단 보죠.”

잠시 뒤.

정광은 주지와 단둘이 작은 서고에 들어갔다.

먼지가 잔뜩 쌓인 고서가 정광 앞에 놓였다.

재빨리 책장을 넘기자 주지가 설명했다.

“제일 뒤에 있습니다.”

그의 말대로였다.

마지막 장에 정광이 찾던 자에 대한 글귀가 있었다.

[……갑자기 경내(境內)에서 기이한 일들이 일어나 분위기가 흉흉한 와중에 얼굴이 상처로 뒤덮인 노승이 찾아왔다. 그에게 물었다. ‘어디에서 오신 누구십니까?’ 그가 답했다. ‘가섭마등 선사와 축법란 선사의 의발을 물려받아 천하를 떠도는 문우라 하오’.]

중원에 부처의 말씀을 전한 고승들의 뜻을 물려받았다고 주장하다니.

놀란 영은사 승려들이 재차 물으려는 그때, 대웅전(大雄殿) 지붕에서 검은 형상의 악귀가 나타났다.

‘악귀? 사술인가?’

정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술을 부려놓고 한몫 챙기는 사기꾼 아니야?’

다행히 아니었다.

[문우라 말한 노승이 무거운 음성으로 외쳤다. ‘내 너를 쫓아 노구를 이끌고 여기까지 왔거늘, 네가 결국 몸을 드러내니 모든 게 부처의 뜻이니라! 너를 정화함으로써 천하의 악귀를 모두 소멸하겠노라!’]

‘……!’

정광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이렇게 창피한 말을 외쳤다고?’

하지만 그 결과는 놀라웠다.

[문우가 합장하자 한쪽 팔이 위엄 있게 울며 찬란히 빛났다. 악귀는 그 소리와 빛을 견디지 못하고 도주하려다 사그라졌다. 이는 실로 부처의 현신이 행한 일 같았으며…….]

정광의 눈이 커졌다.

산서성 현통사(顯通寺)에서 봤던 감몽구법설(感夢求法說)과 비슷한 내용 아닌가!

‘그래! 그래서?’

[……악귀를 처단한 문우가 갑자기 쓰러졌다.]

‘……뭐?’

[그는 고개를 돌려 빛을 뿌렸던 자신의 팔을 지그시 바라봤다. 팔목에 걸려 있던 단주(短珠)가 먼지가 되어 흩날리고 있었다. 그가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라고?’

[‘내가 모자라 그 쓰임을 다했구나. 부끄럽고 또 부끄럽도다’.]

정광의 눈썹이 솟구쳤다.

‘아니, 부끄러워하려면 아까 그 낯간지러운 말을 외칠 때 했어야지, 빨리 쓸모 있는 말이나 남기라고!’

글귀가 이어졌다.

[‘조양사(朝陽寺)에 계신 사형이셨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을’.]

문우의 목소리가 잦아들자 놀란 승려들이 물었다.

[‘대사! 괜찮으십니까?’]

문우가 답했다.

[‘천하의 악귀를 모두 처단했소. 이제 아무리 악한 자라도 술법을 통해서나 놈들의 힘을 빌려올 수 있을 터. 여한은 없소이다’.]

이게 그의 마지막이었다.

정광은 분노했다.

‘내가 여한이 있다! 이게 끝이야?’

아니, 뭘 제대로 좀 남기던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렸다고?

정광이 부들거리자 주지가 조용히 말했다.

“대단한 내용은 없으나 아주 헛걸음을 하신 건 아닐 것입니다. 조양사에 가보십시오.”

“하아. 어디에 있는 사찰인데요?”

주지의 말을 들은 정광이 입을 떡 벌렸다.

“요녕성(遼寧省)입니다.”

“……!”

요녕성?

하필이면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데다 황량하기 그지없으면서 이민족들이 판을 친다는 거기?

‘그냥 확 때려치워?’

정광이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주지가 부드럽게 웃었다.

“왜 웃으시죠?”

“가실 걸 알기 때문입니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시주의 기운 때문이지요.”

“어떻길래요?”

“마(魔)와 협(俠)이 함께하나, 협이 마를 능히 포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

정광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무공도 없는 주제에 감이 좋네.’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는데 주지가 또 웃었다.

“아. 묻기 싫은데. 또 왜요?”

“고민하는 것 자체가 협이 더 강하기 때문이거늘, 왜 고민하십니까?”

“선문답은 그만하시고요. 혹시 저 아세요?”

“모릅니다.”

“아시면서.”

“진옥룡이라는 별호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거봐요. 역용했는데 아시잖아요.”

주지가 염주를 굴리며 답했다.

“듣는 귀가 있는지라 본래의 별호는 짐작했으나 시주가 어떤 존재인지는 정말 모릅니다. 다만…….”

그의 손에서 돌던 염주가 뚝 멈췄다.

“하늘이 시주처럼 특별한 이를 내려보낸 건 합당한 이유가 있어서일 터. 천하에 큰일이 일어날 예정일 것입니다. 소승은 그저 지켜볼 뿐이지요.”

정광은 피식 웃었다.

주지가 이미 입적한 현오가 했던 말을 그대로 해서였다.

“혹시 춘화(春畵) 좋아하세요?”

“아미타불. 어찌 그런 불경한 말씀을…….”

“눈동자가 흔들리시네요.”

주지의 대지(大指)가 빠르게 염주 알을 굴렸다.

“아이금강삼등방편(我以金剛三等方便). 신승금강반월풍륜(身乘金剛 半月風輪)…….”

“아니, 겨우 그런 걸 가지고 항마진언(降魔眞言)씩이나…….”

정광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다가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가시려는 것입니까?”

“네. 시주 듬뿍했으니까 함구해 주실 거죠?”

“소승을 해하시는 게 더 확실할 것입니다만.”

정광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손을 저었다.

“그렇긴 한데. 제가 아는 분과 닮아서 그냥 지나갈래요. 안녕히 계세요.”

정광은 서고 문을 열고 나갔다.

주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합장했다.

“무운을 빕니다.”

“스님이시면 스님답게 부처께서 함께하실 거다, 그러셔야죠.”

“이미 함께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정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현오와 자웅을 겨룰 수 있는 땡중이구나.’

그만큼 심지도 굳건하고 현명한 자였기에 쓸데없는 소문을 퍼뜨릴 위험은 없었다.

쉽게 말해 인물이랄까.

정광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명승고적을 둘러보는 것도 좋지만 사람 구경도 나름 괜찮단 말이지.’

요녕성이라.

꼭 나쁘지만은 않으리라.

정광은 자오와 혜진을 불러 산에서 내려왔다.

자오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정광에게 물었다.

“단주, 일은 잘되셨습니까?”

“아뇨.”

“회수할까요?”

“네…… 아뇨. 그냥 가요.”

자오가 놀란 표정을 짓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 어디로 향하실 겁니까?”

정광의 눈이 빛났다.

“우선 놀죠.”

유명한 악왕묘(岳王廟)부터 찾았다.

북송(北宋)의 명장 악비(岳飛)가 모함을 받아 죽은 뒤, 훗날 누명을 벗고 악왕(鄂王)으로 추봉(追封)되며 세워진 사당이었다.

정광의 감상은 간단했다.

‘사람 진짜 많네.’

유명한 곳답게 아주 바글바글했다.

그만큼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점포도 많았고.

정광은 그곳들을 둘러보며 깊이 한탄했다.

‘산동악가는 대체 뭐 하는 거야? 이런 탐스러운 곳을 두고 엉뚱한 데서 땅이나 일구고.’

다음으로 향한 곳은 서호(西湖).

비싼 배를 띄워 이름 높은 서호십경(西湖十景)을 즐겼다.

소제춘효(蘇堤春曉), 곡원풍하(曲院風荷), 평호추월(平湖秋月) 등을 지나 삼담인월(三潭印月)에 이르기까지.

계절과 시간이 맞지 않아 제대로 즐기지 못한 곳들도 있었지만 전부 둘러봤다.

‘정말 괜찮은데.’

정광이 만족한 만큼 자오도 크게 감탄했다.

“단주, 대단합니다. 연꽃과 술의 향기가 섞여 몽롱한 기분이 들면서도, 버드나무가 하늘거리며 정신을 일깨워 주는가 싶더니, 맑은 새소리가 더해져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것은 물론…….”

“다른 계절에 한 번 더 오죠. 혜진 소저도 마음에 들어요?”

혜진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헌데…….”

“편하게 말씀하세요.”

“보타산(普陀山)에도 가보실 생각입니까?”

“흐음.”

정광은 잠시 고민했다.

“사대불교명산(四大佛敎名山) 중 하나라는 거기요?”

“그렇습니다. 관음보살(觀音菩薩)의 도량(道場)이지요. 비구니들로만 이루어진 신비 문파, 보타문(普陀門)이 있는 곳이고요.”

정광은 잠시 고민했다.

‘대대로 십존 중 살존(薩尊)으로 꼽히는 검후(劍后)를 배출하는 곳이라 했지. 한번 가볼까?’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보타산은 천 개가 넘는 섬으로 구성된 주산군도(舟山群島)에 있다고 들었어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섬들 중에 해적 본거지가 있다더군요. 괜히 갔다가 엮여서 또 배를 뛰어다니며 싸우긴 귀찮네요.”

본래 주산군도는 해적들이 날뛰는 곳으로 유명했다.

태조(太祖)가 명(明)을 세웠을 때의 황도(皇都)는 강소성(江蘇省) 남경(南京)이었기에 가까이 있는 주산군도를 토벌했으나 아직도 해적들이 횡행한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

장강에서도 짜증스러웠는데 집채만 한 파도가 덮치는 바다에서 그놈들과 싸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혜진도 이해했다.

“단주,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제가 있는 곳이 바로 천당이거늘, 쓸데없는 욕심을 부렸군요. 다른 곳으로 가시지요.”

정광은 그녀의 눈을 봤다.

미련을 훌훌 털어버린 눈이었다.

‘말이 거의 없는데도 그렇게까지 얘기한 걸 보면 간절히 원한 것이었을 텐데. 포기할 땐 확실히 포기하니 데리고 다닐 만하단 말이야.’

정광은 기분 좋게 앞을 가리켰다.

“자. 가죠. 천당으로.”

항주에 도착한 그들은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며 다양한 진미를 맛봤다.

절강성도 사마련의 세력권이었으나 내부의 문제가 산적한 그들이 역용한 정광 일행을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아. 진짜 괜찮네. 다음 천당으로 갈까요?”

“네! 단주!”

그들은 항주와 쌍벽을 이룬다는 강소성 소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의외의 인물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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