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272화 (2부) (271/569)

2부 1화

정문입설(程門立雪)

무림맹이 있는 하남성(河南省) 남양(南陽)은 상당히 번화한 곳이었다.

하지만 천자(天子)가 기거하는 하북성(河北省)보다는 못할 수밖에.

그런 하북성의 대토호(大土豪) 가문에서 나고 자란 아이의 눈에는 안 차야 당연한 일이었으나…….

‘와아.’

팽수빈은 촌에서 올라온 아이처럼 입을 살짝 벌린 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거리가 화려해서 그런 건 당연히 아니었다.

좌우로 늘어서 있는 점포들의 현판 때문이었다.

‘옥룡객잔(玉龍客棧), 옥룡반점, 옥룡포목점…….’

무슨 놈의 이름이 전부 이런지.

자신의 사부인 정광의 별호에서 따 온 것 아닌가!

‘둘째 오라버니께서 농을 하시는 줄 알았는데…….’

팽강휘가 호탕하게 웃으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소문으로만 전해 들어서 네 사부의 인기를 잘 모를 거다. 직접 보게 되면 절감하게 될 거야.’

정말 그랬다.

절감하다 못해 황당할 정도.

황당해하는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옆에서 천천히 가던 사두마차(四頭馬車)에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오래 살았다고 생각했거늘. 별일이 다 있군.”

팽수빈은 고개를 돌려 마차를 바라봤다.

팽만소가 창밖을 둘러보며 실소를 흘리고 있었다.

“할아버지. 저는 둘째 오라버니가 저를 놀리는 줄 알았습니다.”

“나도 그랬다. 허풍이 심하다고 면박을 줬던 게 미안해지는구나.”

팽만소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자상하게 물었다.

“오늘도 너무 오래 걷는 것 같은데. 힘들지 않느냐?”

“네.”

당찬 대답과 달리, 팽수빈의 콧등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만 마차에 올라 쉬는 게 좋을 것 같다만.”

팽수빈은 의연하게 걸음을 옮겼다.

“사부께서 매일 이 정도는 걸어야 하체를 굳건히 다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

팽만소는 손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냥 똑바로 걷는 것이면 말도 안 했을 터.

복잡한 보법을 밟으며 전진하면서도 아무렇지 않다니.

‘체력은 물론 정신력의 소모도 극심할 텐데.’

무리하는 게 빤히 보였지만 말릴 명분이 없었다.

제자가 제 사부의 가르침을 따르겠다는데 뭐라 하겠는가?

하물며 그 사부가 고금제일천재로 명성을 날리는 진옥룡인데.

‘그가 이렇게 하라고 했으면 이게 맞는 것이겠지만…….’

손녀가 고생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수련에 매진하는 것도 어느 정도여야 흐뭇해하지, 팽수빈은 과해도 너무 과했다.

본가에 있을 때도 수련만 했는데 밖에 나와서까지 이럴 줄이야.

팽만소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무림맹에 들어가면 연무장에 틀어박혀 계속 이러겠지.’

항상 선기(仙氣)가 담긴 체조법으로 수련을 마무리해서 그런지 별다른 이상은 없어 다행이랄까.

그렇다고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는 일.

잠시의 휴식이라도, 작은 즐거움이라도 안겨주고 싶었다.

“본가에서 나와 먼 길을 왔는데 가고 싶은 곳은 없느냐?”

“네, 할아버지.”

“전혀? 명승고적이 꽤 많은데.”

“네. 없습…… 아.”

팽수빈이 뭔가 떠올린 듯하자 팽만소의 말이 빨라졌다.

“말해보거라. 어서.”

“둘째 오라버니께서 말씀하셨던 반점에 가보고 싶습니다.”

“…….”

팽만소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기껏 생각해 낸 게 반점이라니.

그래도 가보길 원하는 곳이 있다는 게 어딘가.

무림맹에서 점심을 해결하려 했으나 밖에서 먹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팽만소는 마차를 호위하며 걷고 있던 팽가 무인들 중 한 중년인에게 말했다.

“강휘가 훌륭하다고 떠벌렸던 그곳으로 가세나.”

“네, 태상가주님.”

중년인은 거리의 사람들에게 몇 마디 물은 뒤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목적지를 향해 가는데…….

열심히 보법을 펼치며 걷던 팽수빈이 눈을 크게 떴다.

‘나무?’

저 앞에 큰 나무가 걷고 있는 것 아닌가.

‘말도 안 돼.’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아니었다.

허리에 도끼 두 자루를 찬 사내가 아름드리나무를 등에 진 채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사람도 정말 커.’

기골이 장대하기로 유명한 팽가 사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한이라니.

‘그래도 그렇지. 저 큰 나무를 어떻게?’

팽수빈만 놀란 게 아니었다.

팽만소를 비롯한 팽가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대단한 신력이구나. 대체 누구기에?’

거한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걷다가 현판조차 없는 반점 앞에 멈춰 섰다.

그가 등에 지고 있던 나무를 내려놓자 굉음과 함께 땅이 흔들렸다.

쿵!

그 소리와 진동에 놀랐는지 반점 문이 벌컥 열리며 점소이가 뛰어나왔다.

“처, 철월. 자꾸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손님들께서 놀라십니다. 살살 좀 부탁드립니다.”

“철월은 살살 놨다!”

“하아아. 조금만 더 살살 부탁드립니다.”

“철월은 살살 놨다!”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철월은 배고프다! 빨리 자르고 먹는다!”

거한은 밑도 끝도 없는 말을 내뱉으며 등에 메고 있던 무지막지한 크기의 대월(大鉞)을 쥐었다.

그리고 높이 들어 올렸다가 내려쳤다.

콰직! 콰직! 콰직!

아름드리나무는 순식간에 일정한 크기의 나무토막들로 변해 버렸다.

거한은 양손으로 귀를 막고 있던 점소이에게 가슴을 내밀며 선언했다.

“철월은 밥값 했다!”

“네, 네.”

“당장 자장이에게 전해라! 철월은 오늘도 밥값 했다!”

점소이가 한숨을 쉬었다.

“후우. 작은 어르신은 지금 맹에서 근무 중이신데 어떻게 전합니까? 큰 어르신께서 이미 준비해 놓으셨으니 들어가셔서 드십시오.”

“철월은 먹는다!”

거한은 체구와 어울리지 않는 놀라운 신법을 펼쳐 반점 안으로 사라졌다.

점소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무토막들을 노려봤다.

“어휴. 이걸 언제 다 옮기나.”

팽가 일행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그자가 바로 철월이었군.’

‘듣던 대로 대단하구나.’

그들의 기척을 느낀 점소이가 재빨리 몸가짐을 바로 했다.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팽만소가 마차 문을 열고 나와 지팡이를 짚고 섰다.

“식사를 할까 하는데. 자리가 있는가?”

“물론입니다, 노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팽가 일행은 반점 안에 들어갔다.

점심시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자리가 반 이상 차 있었다.

그들이 여러 개의 탁자에 나눠 앉자 점소이가 물었다.

“어떻게 올릴까요?”

팽가 일행은 벌써 한쪽 구석에 앉아 무지막지하게 먹고 있는 철월을 보느라 대답하지 못했다.

자주 있는 일인지 다른 손님들은 신경 쓰지 않았으나 팽가 사람들의 눈에는 무척이나 신기했다.

‘명불허전이로다.’

‘대단한 식성이야.’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챈 점소이가 쓴웃음을 지었다.

“좀 보기 불편하시겠지만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팽만소가 빙그레 웃었다.

“아무렇지도 않으니 걱정하지 말게나. 손주 녀석에게 들은 대로라 신기해서 이러는 것일세. 수빈아, 그렇지 않느냐?”

팽수빈은 철월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허허. 요 녀석, 이제야 네 나이답게 구는구나.”

“아!”

팽만소가 머리를 쓰다듬자 팽수빈이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붉혔다.

“죄송합니다. 둘째 오라버니가 했던 말과 정말 한 치의 틀림도 없어서 그만…….”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점소이의 눈이 빛났다.

“복색과 체구를 보고 하북팽가의 영웅들이신 줄은 알았습니다만. 혹시 패룡(覇龍) 팽 소협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자네, 눈썰미가 좋고 견문도 넓군.”

팽만소가 인정하자 점소이가 허리를 넙죽 숙였다.

“하북팽가의 태상가주님과 진옥룡의 고명제자(高名弟子)이신 팽 소저를 뵙습니다.”

“……!”

순간 팽가 일행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얼어붙었다.

심지어 혼을 실어 먹고 있던 철월조차!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사람에게 꽂혔다.

그 사람은 젊어서는 강호를 주유하며 수많은 협행을 하고, 중년이 되자 군에 투신하여 몽고군을 무찔렀으며, 나이가 들자 팽가로 돌아와 형으로부터 가주 자리를 이어받았던 무림 명숙 팽만소가 아니었다.

그의 손녀인 팽수빈이었다.

“지, 진옥룡의…….”

“……제자?”

“저 어린 소저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열기 어린 말에 팽수빈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어, 어째서?’

철월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의문을 풀어줬다.

“꼬마! 네가 도사의 제자냐?”

“그, 그렇습니다만…….”

철월의 험악한 얼굴에 연민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힘내라!”

“……네?”

철월은 다시 먹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거참. 천고의 기연을 얻었구먼.”

“부럽군. 정말 부러워.”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나직이 속삭이던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 우르르 몰려왔다.

먼저 팽만소와 다른 팽가 무인들에게 정중히 인사한 그들은 팽수빈에게 달라붙었다.

“강 모(某)가 하북팽가의 금지옥엽(金枝玉葉)이자 진옥룡의 장중보옥(掌中寶玉)인 팽 소저께 인사드리오.”

“허허. 사부를 빼닮아 아주 영특해 보이는군. 무림의 앞날이 기대돼.”

“나는 이번 정사대전에서 자네의 사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운 요지환검(搖之幻劍) 안중이라 하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당과(糖菓)나 한 개…….”

팽수빈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몰려와 좋은 말을 던지며 환심을 사려 하다니.

그녀가 언제 이런 일을 경험해 봤겠는가.

‘왜 내게 이러지?’

어린 만큼 순진하기에 혼란에 빠진 그녀를 팽만소가 구했다.

“인사는 다 나눈 것 같으니 그만 식사들 하시게.”

팽가 무인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강하게 노려보며 무언으로 압박하자 사람들은 바로 흩어졌다.

팽만소는 고개를 살짝 젓다가 손녀에게 물었다.

“놀랐느냐?”

“네, 할아버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심해질 게다. 익숙해져야 해.”

“네?”

팽만소는 이해하지 못하는 손녀에게 차근차근 설명했다.

“네 사부가 종적을 감춘 지 벌써 몇 달이 지났다. 저들은 그와 연을 맺고 싶어 하던 참에 제자인 네가 나타나자 접근한 것이야.”

“아!”

“네 사부의 명성은 끝없이 커질 것이고 네 환심을 사려는 자들은 더욱 늘어날 게다. 이해했느냐?”

팽수빈은 반만 알아들었다.

“사부께서 강하시고 큰 공을 세우셔서 그런 것입니까?”

“한 가지 더 있다.”

“그게 무엇입니까?”

팽만소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네 사부는 세간의 평이 아닌 자신의 기준으로 사람을 대한다. 적으로 규정하면 절대로 용서치 않아. 상대가 그 누구더라도.”

아까 물러났던 무림인들이 부르르 떨었다.

반점 안에서 나누는 대화를 못 들을 만큼 약한 이들이 아니어서였다.

팽만소는 그들을 힐끔 본 뒤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사람이라 여기면 아낌없이 베풀지.”

“아낌없이…….”

“그래. 너나 네 둘째 오라비, 이 반점 주인의 아들인 장이라는 일반 무인에게 해준 것처럼 말이다.”

팽수빈은 정광이 베푼 것들을 떠올렸다.

체조법은 물론이요, 보법과 신법에 암기술까지.

뿐이랴. 자신에게 꼭 맞는 수빈패검(秀彬覇劍)과 수빈일기공(秀彬一氣功)을 창안해 가르쳐 줬다.

‘사부…….’

항상 고마워하고 있었지만 새삼스레 다시 한번 느끼게 된 순간이었다.

팽만소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모두 네 사부와 연을 맺고 싶어 한다. 그의 사람이 되진 못하더라도 훗날 적으로 만날 위험은 없애기 위해서. 쉽게 말해 눈도장을 찍으려는 게지.”

“…….”

“그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다. 네가 호가호위할 성품은 아니기에 말해주는 것이야. 앞으로 어떡해야 하겠느냐?”

팽수빈은 가슴을 펴며 또박또박 대답했다.

“항상 몸가짐을 바로 하며 사부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그거다.”

“또한, 지금까지보다 더 열심히 수련해 사부께서 말씀하신 대로 천하제이인이 되고야 말겠습니다.”

“아, 아니. 수련은 쉬엄쉬엄해도 충분…….”

흐뭇한 미소를 짓던 팽만소가 대경하여 다급히 구슬리려고 하는데, 어느샌가 사라졌던 점소이가 중년부인과 함께 나타났다.

“아이고.”

앞치마로 손을 닦으며 허겁지겁 달려온 중년부인은 팽만소에게 공손히 인사한 뒤 팽수빈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은공의 제자 되시는 분이군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팽수빈이 깜짝 놀라 물었다.

“네? 사부께서 제 얘기를 하셨습니까?”

“물론이지요. 식사하러 오실 때마다 그러셨습니다.”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팽수빈이 궁금한 얼굴로 묻자 중년 부인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제법 똘똘하니 많이 벌어올 거라거나, 전장에 데려 다니며 실전을 경험시켜 빨리 키울까 같은 말을 했다고 얘기하기는 곤란해서였다.

그때마다 정광을 가까스로 말렸던 그녀는 말을 돌렸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금방 요리해 올리겠습니다.”

“아니, 부, 부인…….”

팽강휘가 장담했던 대로 반점의 요리는 아주 맛있었다.

극진한 대접을 받은 팽가 일행은 무림맹으로 향했다.

팽수빈은 걸음을 옮기며 중년 부인의 반응을 되새겨 봤다.

‘사부님을 지극히 존경하는 것 같던데. 사부님께 내가 모르는 면이 있는 건가?’

경천동지할 신위와 일대종사처럼 갖가지 무공을 창안해 내는 능력.

종잡을 수 없는 성품에 상대를 가리지 않는 독한 손속.

도사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물욕까지.

수많은 협행을 했다고 들었으나 자신이 아는 정광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사부님의 가르침을 따라 무공을 닦고 협을 행하겠다고 하니, ‘협?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데. 뭐 하고 싶으면 하고’라며 손을 내젓던 사람 아닌가?

‘겉으로는 아닌 척하시면서 협을 품고 계실지도…….’

팽수빈은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며 무림맹에 도착했다.

팽가 일행의 신원을 확인한 일반 무인들이 따뜻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봤다.

“진옥룡의 제자께서 오셨군요.”

“하하. 모두 기뻐할 것입니다.”

팽수빈이 의아한 마음에 이유를 묻자 그들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까 했던 말 그대로입니다.”

“진옥룡의 제자이시니까요.”

반점 사람들과는 다른 순수한 호감에 팽수빈의 얼굴이 붉어졌다.

팽만소는 작게 웃은 뒤 일반 무인들에게 물었다.

“맹주를 만나러 왔네. 안에 있는가?”

“일전에 보내주신 서신을 받고 오매불망 기다리고 계십니다.”

“허청 도장은?”

“천룡단을 이끌고 청해성으로 가신 지 오래됐습니다. 대신 곤륜에서 운학 진인이 오셨는데 태상가주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럼 운학 진인께 안내를 부탁하네.”

“이리로 오시지요.”

일반 무인은 팽가 일행을 곤륜파의 숙소로 안내했다.

그곳에서 운학을 만난 팽만소는 정중히 포권하며 사과했다.

“미안하오. 내가 억지를 부려 귀파의 진옥룡이 무기명제자(無記名弟子)를 거뒀소이다. 곤륜산에 올라 장문인께 사과해야 마땅한 일이거늘, 몸이 이래서 무림맹으로 와 진인을 뵙게 됐소.”

운학은 빙그레 웃으며 사과를 받았다.

“아니오, 잘하셨소이다. 서신으로 마음이 전해진 지 오래인데 뭐 하러 그런 불필요한 일을 하시겠소?”

“이해해 주셔서 감사하오. 수빈아, 인사드리거라. 네 사부의 사문인 곤륜의 진인이시다.”

팽수빈이 정중히 인사하자 운학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허허. 정광 그 녀석이 제자 하나는 아주 잘 골랐구나. 자신과 빼닮은 아이를 거둬 고생 좀 하길 바랐거늘, 완전히 다른 제자라니.”

운학이 흡족해할 만큼 팽수빈은 예의 바르고 영민해 보였다.

“그래, 네 사부가 험하게 대하진 않았고?”

정광에게 받았던 혹독한 수련들을 떠올리며 걱정스레 물었건만.

팽수빈은 담담히 부정했다.

“아닙니다. 상냥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무, 무어라! 저, 정광이?”

“네. 그렇습니다.”

운학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팽수빈을 보다가 탄식했다.

“무량수불. 사부를 생각하는 마음이 갸륵하구나.”

“……네?”

“더 말해서 무엇하겠느냐? 일단 물러나 쉬거라. 네 조부님과 먼저 얘기를 나누마.”

팽만소도 고개를 끄덕이자 팽수빈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방에서 나왔다.

‘대체 사부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길래 저러실까?’

그때, 한 더벅머리 청년이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맹주님의 따님이신 팽 소저 아니십니까?”

“그렇습니다. 소협께서는…….”

청년이 밝게 웃으며 포권했다.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습니다. 소저의 사부이신 진옥룡께 큰 은혜를 입은 장이라고 합니다.”

“아! 장 소협을 뵙습니다. 둘째 오라버니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팽 소협은 잘 계신지요?”

“네. 매일같이 용맹정진하고 계십니다.”

“팽 소협답군요. 하하.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괜히 패룡이 아니시지요.”

지켜보던 팽가 무인들이 미소를 짓자 장이가 청했다.

“팽 소저께 꼭 보여 드리고 싶은 곳이 있어서 모시러 왔습니다만. 괜찮겠습니까?”

팽가 일행을 인솔해 온 중년인이 물었다.

“어디를 말하는 것인가?”

“현협각(顯俠閣)입니다.”

“아. 내가 오히려 부탁하네.”

중년인은 쾌히 승낙하며 젊은 팽가 무인들에게 말했다.

“너희들도 같이 가거라. 정파인이라면 반드시 가봐야 하는 곳이야.”

“네, 백부.”

장이가 활짝 웃으며 팽수빈에게 권했다.

“가시지요. 얻는 게 많으실 겁니다.”

마침 가보고 싶던 곳이라 팽수빈은 젊은 무인들과 함께 장이를 따라갔다.

‘엄숙해 보이는구나.’

현협각을 본 팽수빈의 감상이었다.

‘중원 무림을 지키시다가 스러져 간 협객들을 기리는 곳이니 당연하겠지.’

내부도 그랬다.

협객들이 처단한 마두들의 병기를 보니 가슴이 무거워지며 묘한 투기가 일어났다.

‘나도 빨리 커서 이분들처럼…….’

팽수빈이 다짐하는데 장이가 한쪽을 가리켰다.

“팽 소저. 이것들을 보십시오.”

“네, 장 소협…… 아!”

팽수빈의 눈이 커졌다.

주르륵 놓여 있는 병기들 밑에 새겨진 글귀들 때문이었다.

[현 사마련주 도사(刀邪) 가균의 한풍도(寒風刀). 곤륜의 진옥룡이 산서성에서 신위를 떨쳐 가균을 꺾으며 챙긴…….]

[사마련 소속 창사(槍邪)의…… 부사(斧邪)의…… 곤륜의 진옥룡이 단신으로 그들을 상대해…….]

[전 사마련주 사혼관천(邪魂毌天) 사지환의 쌍창(雙槍). 곤륜의 진옥룡이 그를 주살하여 정사대전을 승리로 이끌…….]

“…….”

이런 엄청난 위업이라니.

팽수빈의 눈에서 열기가 일었다.

그녀를 지켜보던 장이가 나직이 말했다.

“팽 소저의 사부께서 하신 일들입니다.”

“…….”

가슴이 뿌듯했다.

“아무런 이득도 없는데 목숨을 걸고 말입니다.”

“…….”

속에서 뭔가 울컥하고 치밀어 올랐다.

팽수빈의 시선이 장이에게 향했다.

장이의 눈도 뜨겁게 일렁이고 있었다.

“천하가 오해하나 진옥룡은 이런 분이십니다.”

“…….”

천하의 오해를 받는 사부.

“이런 엄청난 공을 세우셨는데도 훌쩍 떠나실 만큼 명성에 관심이 없는 분이시고요.”

“…….”

명성에 취하긴커녕 훌훌 털어버리고 사라진 사부.

“그래서 그분의 사부이신 허청 도장께서 이 병기들을 모아 현협각에 전시하셨습니다. 이렇게라도 세간의 오해를 씻으려고 하신 것이지요.”

“…….”

사부의 사부만이 모든 걸 이해하고 있었던 걸까.

“그걸 알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제자이신 팽 소저께도 오해를 받으시면 진옥룡께서 얼마나 마음 아파하시겠습니까?”

“……!”

순간, 가슴이 쿡 쑤셨다.

팽수빈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래. 사부는…….’

자신의 머리를 귀찮다는 듯 대충 쓰다듬던 정광의 손이 기억났다.

그 손에 담겨 있던 온기까지도.

‘……따뜻한 분이셨어.’

잠시 침묵하던 그녀는 더없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장 소협.”

“별말씀을.”

장이가 희미한 미소를 짓자 팽수빈의 얼굴에도 비슷한 것이 걸렸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눈에 습기가 차기 시작했다.

그녀는 천하제일미남이라는 소문과는 다르게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사부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물었다.

‘사부. 어디 계신가요?’

거침없이 천하를 질주하며 마음 내키는 대로 즐기고 있을 그가 그리웠다.

‘제자, 사부를 뵙고 싶습니다.’

* * *

같은 시간.

정광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한탄했다.

“망할. 진짜 되는 게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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