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271화 (270/569)

271화

천지즉금침(天地卽衾枕)

너른 공터에 세워진 수많은 천막.

그중 한 곳에서 눈을 감은 채 누워 있던 정광이 비명을 토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허억!”

옆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던 백승무가 깜짝 놀라 물었다.

“사, 사형. 무슨 일입니까?”

정광이 이마의 식은땀을 소매로 훔치며 중얼거렸다.

“악몽을 꿨어.”

“어떤 악몽이길래 그러시는지요?”

정광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가 갑자기 쓰러지자 사부님, 맹주, 군사, 십존 어르신들 등 엄청나게 많은 분들이 달려와 상세를 살피시더군.”

“…….”

“나는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기에 여, 영약. 영약을…… 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지.”

“…….”

“그 말을 듣자마자 많은 분들이 경쟁하듯 먼저 영약을 주려고 하셨는데…….”

정광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불존 어르신이 ‘아미타불. 진옥룡의 품에 소환단(小還丹) 두 알이 있을 것이오. 상태가 위중하니 빨리 꺼내 먹여야 하오’ 이러시는 거야!”

“……그래서요?”

정광의 눈이 분노로 물들었다.

“실제로 내 품을 뒤져서 소환단을 꺼내 먹이시더라.”

“……사형.”

백승무는 작게 한숨을 쉰 뒤 말을 이었다.

“실제로 이틀 전에 있었던 일 아닙니까?”

“그러니까 악몽이지.”

“쓰러지셨던 사형은 벌떡 일어나셔서 한 알이면 충분하다며 한 알만 삼키셨고요.”

“그러니까 악몽이라고 했잖아. 왜 내 걸 먹어야 해? 다들 못 주셔서 안달이었는데.”

백승무가 피식 웃으며 위로했다.

“그래도 한 알 남았잖습니까. 사형께서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당연한 소리를. 그런데 이틀이라. 내가 온종일 잔 거야?”

“네. 하루 내내 운기조식을 하신 뒤 바로 잠이 드셨다가 이제야 깨어나신 겁니다.”

“그래서 배가 고팠구나. 사제, 육포 좀 줄래?”

그때, 허청이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일어났느냐?”

“네, 사부.”

허청은 정광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다가가 꼭 안았다.

“뭐 하세요?”

“그냥. 이러고 싶었다.”

“저는 싫은데.”

“잠시만 기다리거라.”

허청은 한동안 더 그러고 있다가 팔을 풀었다.

“멀쩡해 보이는구나. 다행이다.”

“제가 사부께 드릴 말씀이죠.”

“나는 별다른 위험이 없었다만.”

“치열하게 싸우시면서 빨리 와주셔서 저와 어르신들을 살리셨잖아요.”

허청은 이틀 전의 일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네 뒤를 따르던 우리는 엄청난 굉음을 듣자마자 전력을 다해 달렸다. 맹주와 군사가 그리 명했지.”

그렇게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달려 무너진 협곡에 이르렀을 때.

당가의 백리연화가 하늘로 솟았다.

팽수관은 즉시 결단을 내렸다.

전력의 분산을 감수하고 일단 고수들부터 빨리 가게 한 것이다.

“덕분에 선발대는 분지로 향하던 사마련 무리의 꼬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들을 치며 시간을 벌었어.”

불존, 걸존, 환존이 활약했다.

맹주와 군사는 물론 억지로 끌려온 원로들도 마찬가지.

정광이 운기조식에 들어가기 전에 들었던 얘기였다.

“남궁세가의 현 가주님과 전 가주님도 대단하셨다 했죠.”

남궁화운의 놀라운 무공은 십존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줬다.

이상할 정도로 사력을 다한 남궁화인은 또 다른 의미로 놀라웠고.

그 사정을 아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인 허청은 고소를 머금었다.

“신임 가주의 의욕이 대단하더구나. 남궁세가는 앞으로 크게 일어날 게야. 전임 가주는…….”

허청이 말끝을 흐리자 정광이 피식 웃었다.

“폐관수련을 조금이나마 일찍 끝낼 수 있겠죠.”

남궁화인이 공을 세웠다. 남궁화운은 아비인 남궁학에게 아우의 벌을 경감해 달라고 요구할 게 뻔했다.

“그래. 이래저래 잘된 일이다. 무당의 대진 도장…… 아. 자꾸 까먹는구나. 네가 무당혈선(武當血仙)이라 불러달라 했었지.”

허청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대진을 칭찬했다.

“그가 보인 놀라운 무용은 장차 무당이 다시 일어서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정말 좋은 일들뿐이어서 다행이야.”

천룡단도 공을 세웠고 뒤따라온 지룡단과 무혈단도 한몫했다.

그렇게 싸우며 쫓고 쫓기다 보니 길이 두 갈래로 나누어졌다.

그 길들이 분지에서 하나로 합쳐진다는 것을 걸존이 높은 나무에 올라 확인했다.

무림맹은 먼저 한쪽 길로 들어선 적들을 쫓지 않고 다른 길을 택해 달렸고, 그들과 비슷한 시간에 분지에 도착해 대치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정광과 어르신들을 살린 데다 쓸데없는 살생도 줄일 수 있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천막 한쪽에 놓인 철혈무쌍용갑이 보였다.

흉하게 뚫린 구멍과 우그러진 모양새를 보니 정광이 얼마나 흉험한 격전을 벌였는지 다시 한번 알 수 있었다.

허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정광을 바라봤다.

엉망이 되어버린 곤륜의 도복을 벗고, 고급스러운 경장(輕裝)을 입고 있는 모습이 낯설었다.

이대로 영영 떠나 버릴 것 같은 느낌이랄까.

‘설마…….’

허청이 불안한 얼굴로 입을 여는데.

손님이 찾아왔다.

팽수관이 보낸 자였다.

“진옥룡, 몸은 괜찮으십니까?”

“네.”

사내가 기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맹주께서 찾으십니다.”

* * *

정광은 천막에서 나와 사내를 따라 걸었다.

‘벌써 어둑어둑해졌네.’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간을 가늠하는데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반가운 얼굴로 몰려들었다.

“진옥룡! 몸은 괜찮으신가?”

“귀, 귀하의 신위에 감복했습니다! 소생으로 말씀드리자면 청도위가(靑道魏家)의 위모…….”

“함께 싸울 수 있어 영광이었소! 나는 요지환검(搖之幻劍) 안중이라 하는데, 이것도 인연이니 곡차나 한잔…….”

정광은 곡차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지만 사람들에게 잡혀 시달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바로 절초를 펼쳤다.

“으윽.”

살짝 비틀거렸다가 안내인의 팔을 잡으며 몸을 가눴다.

“아, 안녕하세요.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려 죄송해요. 몸이 아직 안 좋은 상태라…….”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두 손을 저었다.

“죄송하다니. 우리가 미안하네.”

“허어. 자네가 그런 중상을 입은 걸 잊고 소란을 피웠구먼.”

“정양해야 하실 것 같은데 어딜 가시는 길입니까?”

정광은 가쁜 숨을 쉬며 설명했다.

“맹주께서 찾으셔서요.”

전에 한번 만났고, 그때처럼 곡차 운운했던 사내가 비장하게 말했다.

“그런 몸으로도 맹을 위해 움직이시는구려. 요지환검 안중이 앞장서서 길을 트겠소. 갑시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도왔다.

정광을 보고 몰려드는 이들에게 사정을 설명하며 길을 열었다.

덕분에 정광은 편하게 팽수관의 천막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천만의 말씀. 그대를 호위할 수 있어 영광이었소. 다음에 인연이 되면 곡차나…….”

정광은 그들에게 포권한 뒤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팽수관과 제갈문형이 반가운 얼굴로 맞이했다.

팽수관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정광의 어깨를 두드렸다.

팡팡.

“그래, 몸은 많이 나았나?”

“어깨는 아직 다 안 나았는데요.”

“으하하하. 멀쩡해 보이는군. 소환단의 효력이 대단하긴 대단해.”

팡팡.

“아프다니까요.”

웃으며 지켜보던 제갈문형이 의자를 가리켰다.

“앉게나. 할 얘기가 있네.”

“긴 얘기는 아니죠?”

“자네가 도망칠 정도는 아니야.”

정광이 의자에 앉고 팽수관도 앉았다.

“맹주. 직접 말씀하시겠습니까?”

“군사가 하시오.”

“알겠습니다.”

제갈문형의 시선이 정광에게 향했다.

“한 시진 전에 사마련과 협상을 끝냈네.”

“많이 뜯어내셨어요?”

“하하. 쏠쏠하다고 할 수 있지.”

작게 웃던 제갈문형이 정색했다.

“하지만 힘도 실어줬어.”

“부련주에게요?”

“그렇네. 도사(刀邪) 가균. 당장 사마련에 그만한 인물은 없으니까.”

평소 공포로 군림하다가 연이은 패배로 인심을 잃은 사지환과 달리, 인망 높던 가균은 사마련을 단숨에 휘어잡았다.

무림맹 본대와 동시에 분지에 도착한 그는 싸움을 멈출 것을 주장했고 사지환의 제자인 후위진이 그를 지지했다.

그때부터 이어진 협상이 오늘에서야 끝난 것이다.

정광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나마 온건하고 말이 통하는 상대죠.”

“수장에 어울리는 자야. 그가 권력을 잡았으니 사마련이 더 강해질지도 모르지.”

정광이 미소 짓자 제갈문형도 싱긋 웃었다.

“나이가 있으니 오래 살지는 못할 테지만 말일세.”

사마련의 앞길은 가시밭길이었다.

황제에게 밉보이고 전력도 많이 깎였다. 체면까지 잃은 데다 사지환과 최고수들 여럿이 죽었다.

인물이라 할 수 있는 가균이 련주가 되었으나 자중지란이 일어날 수밖에.

“사마련은 오랫동안 고생하겠죠.”

“수왕도 그들과 척을 진 셈이 됐으니 장강을 넘는 걸 두고 보진 않을 걸세.”

“아. 맹으로 돌아가실 때 수왕 그분 조심하셔야 할 거예요. 틈을 보이면 가만히 계실 분이 아니니까요.”

“잘 알고 있네. 걱정하지 말게나.”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이건 맹주께서 말씀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

제갈문형의 말에 팽수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보게, 진옥룡.”

“네, 맹주님. 무혈단주 자리에서 물러날게요. 아예 무혈단을 해체하죠. 다들 고생했거든요.”

정광이 선수를 치자 팽수관이 웃었다.

“아네. 알아. 자네나 그들이나 할 만큼 했지.”

“할 만큼이 아니라 넘치도록 했죠. 엉뚱한 직책 같은 거. 주실 생각하지 마세요. 그럼 평생 무림맹 쪽은 쳐다보지도 않을 거예요.”

“너무 경계하는 것 아닌가? 응? 긴장 풀게. 내가 설마 자네를 잡아먹을까.”

너스레를 떨던 팽수관이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겼으나 방심할 생각은 없네. 사천성에 있던 무리를 이끌고 마지막에 도착한 투웅이라는 사내도 자네 말대로 보통이 아니더군.”

“괜찮은 분이죠.”

“그가 합류하자 사마련의 전력이 올라갔지. 그것을 감안해 협상을 하며 조금 양보한 부분이 있으니 그의 명성은 더 높아질 걸세.”

“그에게도 힘을 실어주려고 그러신 거 아니에요?”

팽수관의 눈이 깊어졌다.

“거기까진 좋은데. 옥기린 그자가 꺼림칙해. 자네가 그에게 부상을 입혔나?”

“아뇨.”

“자네와 함께 있던 분들도 아니라고 하시더군. 자해하고 연기를 했다는 얘긴데 보통 인물이 아니야. 외모나 언행이나 소문과는 다르게 현인 같은 면이 있지만 효웅이더군.”

후위진은 싸움을 멈춰 많은 이들을 살렸고, 뒤늦게 온 가균을 밀어 사마련을 안정시켰다.

팽수관과 제갈문형이 경계할 만한 사내였다.

“그를 죽이라는 말씀인가요?”

“그럴 리가 있나.”

“그럼요?”

팽수관이 눈을 빛냈다.

“가균이 죽으면 투웅이 그 자리를 이어받겠지. 옥기린이 사파무림의 정점에 올라섰을 땐, 나나 군사나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

제갈문형이 덧붙였다.

“투웅을 중간에 밀어내고 옥기린이 련주가 될지도 모르지.”

팽수관도 동의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래 봐야 최소 이삼십 년은 걸리겠지만…… 잠깐. 어딜 가려는 겐가?”

정광이 엉덩이를 반쯤 일으킨 채 물었다.

“그때가 되면 저보고 그를 상대하라고 말씀하려 하셨죠?”

“내가 그렇게 염치없어 보이나? 아니, 아니. 대답하지 말게.”

팽수관은 급히 손을 저으며 말을 빨리했다.

“외부의 적이 당분간 없어지다시피 됐으니 무림맹은 점점 분열할 걸세.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벌일 게야. 정파인으로서 해서는 안 될 패악을 부리는 자도 나타나겠지. 최대한 막아보겠지만 천하가 워낙 넓다 보니 완전히 해낼 자신은 없네.”

“아아.”

정광은 올렸던 엉덩이를 의자에 편하게 댔다.

“마음에 안 드는 분이 있으면 패도 된다는 말씀이구나.”

“마음에 안 드는 자가 아니라 패악을 저지르는 자.”

“그게 그거죠.”

“후우우. 어쨌든 자네 뜻대로 하게나. 단, 나나 군사나 공식적으로 싫은 소리를 조금이나마 하게 될 걸세. 자네의 손속은 너무 맵거든.”

혹시나 모를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불렀다는 말.

정광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 정도야 이해해 드릴게요. 천룡단은 청해성으로 보내실 거죠? 지룡단도요. 이번에 공을 세워서 능력을 증명했잖아요.”

“자네 말이 맞아. 그렇게 하겠네. 최대한 빨리.”

정광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량수불. 그럼 안녕히 계세요. 아. 천룡단에 인재 한 분 추천해도 될까요?”

“추천이 아니라 반드시 넣으라는 얘기로 들리는군. 누군가?”

정광의 눈이 빛났다.

“와룡당주(臥龍堂主)님요. 맹에만 갇혀 있기엔 아까운 분이시더라고요.”

“신익이라. 나도 눈여겨보던 인재일세. 그래, 그렇게 하지.”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정광이 몸을 돌리려는데 팽수관이 물었다.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무슨 말씀이세요?”

팽수관은 정광을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열었다.

“수빈이를 잘 부탁하네.”

“걱정하지 마세요. 안 그래도 가르쳐 줄 걸 챙겼거든요.”

현오가 남긴 얘깃거리들을 떠올리며 대답하자 팽수관이 기꺼운 표정을 지었다.

“고맙네. 잘 가게나. 여유가 되면 나도 찾아와 주고.”

제갈문형도 비슷한 청을 했다.

정광은 대충 대답한 뒤 밖으로 나갔다.

‘하여간 눈치 하나는 좋다니까.’

아까처럼 아픈 척하며 무혈단의 천막으로 향했다.

단원들이 반갑게 맞이했다.

정광은 그들에게 선언했다.

“고생하셨는데 실컷 먹고 마시죠.”

“와아아!”

무혈단만의 잔치가 벌어졌다.

건량과 육포를 씹고 차를 마시는 잔치였으나 분위기만큼은 최고였다.

“아우. 평복을 입으니 더 근사하군. 아주 잘 어울리는걸.”

“유 소협도 새 옷 좀 입으세요. 사천성에서 샀던 것들. 그냥 버리실 거예요?”

유정풍이 울상을 지었다.

“나도 입고 싶어. 하지만 그랬다간 사부에게 치도곤을 당할 건데 어쩌라고.”

모두 왁자하게 웃었다.

정광도 웃으며 잔치를 즐겼다.

그리고 파할 때가 되자 몇 명에게 전음을 보냈다.

전음을 들은 이들의 표정이 변했다.

그들을 본 단원들은 뭔가 있구나 눈치챘지만 모른 척했다.

정광과 함께한 날이 하루 이틀인가?

그가 앞으로 어떻게 할지 대충이나마 짐작하고 있었다.

언제 또 볼지 모를 정광을 불편하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할 일을 다 끝낸 정광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건강히 잘 계세요.”

단원들은 정광을 뚫어져라 보다가 일제히 외쳤다.

“네! 단주!”

“내일 보자, 도사!”

정광은 그들을 한 번 더 둘러보고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왔다.

들어가 보니 허청이 앉아 있었다.

“안 주무시고 뭐 하세요?”

“네 얼굴을 보려고 그런다.”

“설마 또 껴안으시려는 건 아니죠?”

“허허. 네 도가 높구나. 사부의 속도 들여다보고.”

허청은 정광을 살짝 안고 등을 두드렸다.

“몸조심하거라.”

“사부님도요.”

“되도록 빨리 돌아오고.”

“노력할게요.”

정광은 손상된 철혈무쌍용갑을 입고 운룡과 소운룡도 챙겼다.

마지막으로 봇짐을 들던 그는 이맛살을 좁혔다.

“어? 무거워졌네.”

허청이 웃었다.

“하하. 승무가 아까 이것저것 챙겨 넣더구나.”

“사제도 도가 높아졌네요. 제가 떠날 걸 다 알고.”

정광은 허청에게 정성스럽게 절을 올렸다.

“다녀오겠습니다.”

“기다리마.”

* * *

밤길을 걷던 자오가 정광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정광이 씩 웃었다.

“이곳저곳 가봐야 할 곳들이 있어요.”

“미리 말씀해 주시면 제가 앞서가며 준비해 놓겠습니다.”

“그러실 것까지야.”

정광은 낭랑한 목소리로 시를 읊었다.

“취래와공산(醉來臥空山) 천지즉금침(天地卽衾枕).”

취해서 텅 빈 산에 드러누우니 하늘과 땅이 곧 이불과 베개로다.

난데없는 말에 자오가 어리둥절해 하자 혜진이 설명했다.

“시선(詩仙) 이백(李白)이 지은 우인회숙(友人會宿)의 한 구절입니다.”

“……!”

자오의 눈이 붉어졌다.

우인회숙이라니.

벗과 모여 함께 묵는다는 의미 아닌가!

정광이 자신을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었을 줄이야.

“……정말 감사합니다.”

“뭘요. 그렇다고 노숙이 좋다는 말은 아닌 거 아시죠?”

자오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힘주어 말했다.

“저만 믿으십시오, 주군.”

“주군 싫다니까요.”

“그럼 마음속으로 그렇게 부르겠습니다.”

“이거야 원.”

정광이 한숨을 쉬는데 가만히 지켜보던 혜진이 물었다.

“단주. 저는 왜 데려가시려는 겁니까?”

“이제 단주 아닌데요.”

“진옥룡, 말씀해 주십시오.”

정광이 인상을 찡그렸다.

“약조를 지키려고 그러죠.”

“……아!”

혜진은 사조인 대원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진옥룡이 네게 길을 열어주기로 했다. 그를 믿고 따르거라.’

정광은 귀신처럼 혜진의 생각을 눈치챘다.

“그분이 하신 말씀 믿지 마세요. 길을 열어드리기로 한 거 아니거든요. 그냥 세상을 보여주기로 했죠.”

“…….”

“왜 그렇게 뚫어져라 봐요?”

“생각보다 더 신의가 있으셔서 놀랐습니다. 그런데 약조 때문이라면 철월은 왜 안 데려가십니까?”

정광이 어깨를 으쓱했다.

“철월을 치료하려면 오래 걸려요. 그때까지 장 소협에게 돌봐달라 했으니 철월도 만족하겠죠.”

자오도 동의했다.

“장 소협 모친의 요리 솜씨는 환상적이지요. 분명 좋아할 겁니다. 아니, 평생 머무르려고 할지도 모르겠군요.”

혜진이 다른 이름을 꺼냈다.

“그럼 군사와 백 소협은…….”

“얘기 다 끝났어요. 있을 만한 곳을 추천하고 해야 할 일을 말해줬죠.”

사실 정광이야말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가균과 후위진이 숨기고 있는 비밀들을 알아내야 하는데.’

문초한다고 토설할 이들이 아니니 어쩔 수 있나.

그렇다고 마령제혼술(魔靈制魂術)을 써서 망가뜨릴 수는 없지 않은가.

‘가만. 그러고 보니 의향을 물어보지도 않았잖아.’

정광은 혜진의 눈을 들여다보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세상을 볼 만큼 보셨으면 이만 헤어지는 게 좋…….”

혜진이 합장하며 빙그레 웃었다.

“아미타불. 잘 부탁드립니다.”

“하아아. 무림맹 직위를 벗어던졌으니 이제부터 제 마음대로 할 거예요. 각오 단단히 하세요.”

혜진의 합장한 두 손이 살짝 떨렸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密多時)…….”

날이 밝자 무림맹 숙영지에서 난리가 났지만 이미 떠난 이들을 찾을 순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글별자리입니다.

271편을 끝으로 곤륜마협 1부를 마무리 짓게 되었습니다.

모두 독자님들 덕분입니다.

오랜 시간 함께 달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2부를 위해 2주 동안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돌아오겠습니다.

건강하시고 많이 웃는 하루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긴 얘기는 2부 완결 후에 드리기로 하고,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글별자리 배상(拜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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