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
“수고하셨습니다.”
지풍(指風)이 쏘아졌다.
퍽-
사지환의 목에 구멍이 나며 핏물이 튀어 나왔다.
정광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 피가 자신을 향해 쏟아져서가 아니었다.
목울대를 노렸건만, 그 옆을 뚫어버린 것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우웅-
사지환의 단전에서 막대한 사기(邪氣)가 솟구쳤다.
마치 육신을 터뜨려 버릴 것처럼 급격하게!
스스로 폭사(爆死)해 육편(肉片)을 암기처럼 쏘아 동귀어진을 노리는 사공!
하지만.
쿵!
정광은 이미 진각을 밟으며 전진하고 있었다.
얼굴에 핏물을 뒤집어써 세상이 붉어졌으나 개의치 않았다.
어디를 때려야 하는지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기에.
선운비뢰장(仙雲飛雷掌).
눈부실 만큼 빠르게 쏘아진 정광의 손바닥이 사지환의 단전에 부드럽게 닿았다.
퍼엉!
큰 북이 울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사지환의 신형이 세차게 진동했다.
“끄윽.”
그 진동은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대신 아랫배의 단전을 부수고 전신을 터뜨리려던 사기를 흐트러뜨렸다.
“쿨럭.”
사지환의 입에서 내장 조각이 섞인 피가 쏟아져 나왔다.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잠시 비틀거리다가 풀썩 무릎을 꿇었다.
순간, 그의 양손이 모이며 입술이 달싹거렸다.
동시에 정광의 손이 그의 양 손목을 잡고 억지로 벌렸다.
“사술은 나빠요.”
우드득-
“크흑.”
양 손목이 부러진 사지환이 신음했다.
정광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수고가 지나치시네. 힘들게.”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이 나누어진 그때.
비통한 외침이 들려왔다.
“련주!”
한로였다.
팔사를 비롯한 사마련 무인들과 함께 십존을 몰아붙이던 그가 정광을 향해 달려왔다.
하지만.
“더 오시면 쏠 거예요.”
정광이 사지환의 머리를 중지(中指)로 겨누자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한로의 전신에서 살기가 솟구쳤다.
“네 이놈! 손을 치우지 못할까! 아니면 당장 오체분시(五體分屍)를 내주마!”
“제가 지풍을 쏘게 하려고 화를 돋우시는 거예요? 련주님께 불만이 많으셨나 보네.”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아니시면 흥분하지 마시고 조용히 해주시죠. 련주님과 얘기 좀 해야 하니까.”
“크윽.”
정광은 어느새 싸움을 멈춘 채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이들에게도 경고했다.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예요. 움직이시면 련주님이 바로 등선 하실 거예요.”
“…….”
마음이 동하는지 몇 명이 눈을 굴리자 정광이 덧붙였다.
“그럼 련주님을 보내드린 분으로 명성을 떨치시겠죠. 그것까진 괜찮은데…….”
“……?”
“정파인의 힘을 빌려서 그러시는 거잖아요. 그래놓고 사파무림에서 살아가실 수 있으려나?”
“……!”
갈등하던 이들은 눈치를 보다가 마음을 접었다.
사파무림에서 수장의 뒤통수를 치는 거야 흔한 일이지만 집안싸움일 때의 얘기.
사파인으로서의 자존심이 있지.
정파인을 끌어들여서 그랬다간 배신자라고 손가락질받기도 전에 난자당해 죽을 게 뻔했다.
“다들 이해가 빠르시네요. 훌륭해요.”
정광은 가볍게 손뼉을 친 뒤 십존을 훑어봤다.
“쯧쯧.”
꼴이 말이 아니었다.
전신이 피투성이인 것이 서 있는 게 놀라울 정도 아닌가.
“용케 살아 계셨네요.”
이게 칭찬인지 욕인지.
대노한 당기황이 고함을 질렀다.
“용케라니! 당연한 일이거늘! 우리가 누구라 생각하는 것이냐!”
다른 십존들도 한마디씩 하려고 하는데.
정광이 다전음을 펼쳤다.
-제가 신호하면 토굴로 뛰세요.
-……!
-잠시나마 적들이 당황할 테니 몇 대 맞으시더라도 무시하시고 최대한 빨리요. 그래야 살 수 있어요.
-…….
십존들은 바로 이해했다.
정광이 기회를 만들고 그 틈을 타 토굴로 피한다. 폭이 좁으니 어떻게든 적들을 막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우리야 그렇다 치고 저 녀석은?’
정광은 토굴과 먼 거리에 있었다.
십존들이 먼저 들어가면 사마련 무인들이 바로 따라올 터.
정광은 토굴에 들어갈 기회조차 없이 고립되는 것이다.
‘네 희생을 바탕으로 살라고?’
‘그건 아니지.’
‘우리를 뭐로 보고!’
‘살아남으면 혼 좀 내야겠구나!’
그때, 정광의 다전음이 그들의 귀를 한 번 더 울렸다.
-저는 강해요.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더.
정광은 꼿꼿이 서서 오연한 눈빛으로 십존을 둘러봤다.
십존은 복잡한 눈빛으로 시선을 맞출 뿐이었다.
-그럼 나중에 봬요.
십존이 이런저런 전음을 날렸으나 정광은 귓등으로 흘렸다.
바닥에 떨어뜨렸던 운룡과 소운룡을 챙긴 뒤 한 사람 앞에 섰다.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푹 숙인 사지환이었다.
“남길 말은요?”
사지환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냉랭한 눈으로 정광을 올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끄륵…….”
“뭐라고요?”
“끄르륵…….”
목에 구멍이 났으니 이럴 수밖에.
사지환은 몇 번이나 더 시도한 뒤에야 알아들을 수 있을 만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끅…… 올려다보기 힘들군.”
정광은 친절히 말했다.
“눈높이를 맞춰 드리죠.”
말이 끝나자마자 주저앉았다.
사지환의 눈이 더 차가워졌다.
“버티기 힘들었으면서 허세는.”
“멀쩡한데.”
“갈비뼈가 세 개나 부스러지고 내상을 입지 않았더냐. 그곳을 단창에 또 찔리고.”
정광이 피식 웃었다.
“간신히 말씀하시는 분한테 들을 얘기는 아니네요.”
사지환은 이마가 깨지고 가슴이 움푹 파였다.
목도 뚫린 데다 단전까지 박살 나고 기맥 또한 뒤엉켰다.
양 손목이 부러진 것은 물론이요, 피를 철철 흘리는 주제에 누굴 놀린단 말인가?
사지환이 시인했다.
“그렇긴 하지. 훌륭했다. 내가 졌다.”
정광은 그가 마음에 들었다.
“역시 련주시네요. 무인다우세요.”
“무공도 놀랍지만 정말 싸울 줄 아는구나.”
“저는 더 칭찬해 드릴 게 없는데.”
“왜 바로 죽이지 않은 것이냐? 이렇게 말장난이나 하려고?”
“설마요. 궁금한 게 꽤 많아서죠.”
“내가 대답할 것 같으냐?”
정광은 사지환의 눈을 들여다봤다.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 있을 텐데도 차갑게 얼어붙은 눈이라니.
“안타깝게도 아닐 것 같네요.”
“그럼 내가 물으마.”
“저도 싫은데.”
사지환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너는 네 의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냐?”
“물론이죠.”
“확신하는 것 같군. 나도 그렇다고 생각했다만…….”
사지환의 눈에 어린 냉기가 서서히 옅어졌다.
“돌이켜 보니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저런. 이용당하신 거예요? 누구에게요?”
정광이 안쓰러운 얼굴로 묻자 사지환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너도 그럴 수 있어.”
“그럼 그런 거죠 뭐.”
“별로 상관치 않는구나.”
정광이 씩 웃었다.
“마지막이 오기 전에만 비틀면 되니까요.”
“……그래서 네 의지로 만든다?”
“네. 간단하죠?”
“…….”
잠시 침묵하던 사지환이 눈을 빛냈다.
차가운 것이 아닌, 순수하게 밝은 빛이었다.
“재밌어지겠군.”
“위에서 편히 구경하세요.”
정광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사지환을 내려다보며 나직이 물었다.
“그래서, 남길 말은요?”
사지환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냥 죽여.”
뻑!
정광의 수도(手刀)에 사지환의 천령개가 갈라졌다.
정광은 피로 물든 손을 모으며 중얼거렸다.
“무량수불. 푹 쉬시길.”
지켜보던 이들이 경악했다.
한로가 피를 토하듯 부르짖으며 달려들었다.
“이 새끼가 감히!”
스르릉-
정광은 기다렸다는 듯 운룡을 뽑았다.
한로를 노려보며 십존에게 다전음을 보냈다.
-신호 보냈는데 뭐 하세요? 어서 뛰세요!
-……!
십존의 눈이 커졌다.
신호를 기다리고 있긴 했었지만, 이런 과격한 신호일 거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래도 십존은 십존.
상황을 인지하자마자 움직였다.
토굴이 아니라 정광에게로!
정광의 눈이 커졌다.
‘이런 바보들을 봤나!’
욕설을 퍼붓고 싶었으나 그럴 시간이 없었다.
지척까지 다가와 쌍장을 내미는 한로부터 처리해야 했다.
음유(陰幽)한 두 줄기의 장력이 정광을 향해 쏘아졌다.
정광의 눈이 불꽃처럼 일렁였다.
‘속전속결(速戰速決)!’
눈부신 속도로 사지환의 목덜미를 잡고 일으켰다.
사지환의 시신에 장력이 적중했다.
쿠쿵!
“미친!”
한로가 노호성을 질렀으나 사지환은 이미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린 상태.
정광이 경악한 목소리로 나무랐다.
“아직 안 돌아가셨었는데! 한로께서 련주님을 시해…….”
“시끄럽다!”
그 순간.
푸욱-
사지환의 배를 뚫고 운룡이 쏘아졌다.
정광이 그의 등 뒤에서 찌른 것이다.
“이런 흉악한 놈을 봤나!”
정광은 그의 생각보다 더 흉악했다.
운룡으로 공격하며 사지환의 시신으로 시야를 가리는 한편 소운룡을 던졌다.
퍽!
“끄악!”
소운룡이 오른 발등을 뚫고 바닥에 박히자 한로가 비명을 질렀다.
정광은 사지환의 시신과 운룡을 그에게 밀쳐내며 자세를 낮췄다.
쾅!
한로가 다급히 쏘아낸 장력에 어깨를 맞았으나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그대로 할 일을 했다.
곤륜 비전 운룡각(雲龍脚)!
낮게 회전한 정광의 발이 한로의 왼쪽 발목을 부러뜨렸다.
콰직!
“컥!”
한로는 사지환의 시신을 받으며 나동그라졌다.
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어, 어떻게 이리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과거 정광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어려운 환술을 펼치느라 몸이 약해진 상태긴 했지만 이렇게 당할 줄이야!
정광은 경악하는 그에게 달려가 관자놀이를 걷어차며 설명했다.
“한번 싸웠던 상대니까요.”
빠각!
머리가 터진 한로는 비명도 못 지르고 숨졌다.
‘후우. 이제야 갚았네. 이게 뭔 고생이야.’
정광은 운룡과 소운룡을 챙기며 투덜거렸다.
일전의 묘한 독도, 사술도 못 쓰게 하느라 전력을 다했더니 육신도 정신도 힘들었다.
‘아프잖아.’
무엇보다 장력에 적중당한 왼쪽 어깨에 감각이 없었다.
‘반쪽이 됐어.’
왼쪽 옆구리를 다친 거야 그렇다 쳐도 어깨까지 다쳤으니 왼팔은 더 이상 쓸 수 없는 상황.
‘뭐 이 정도야.’
현생에선 처음이지만 전생에선 숱하게 입었던 부상이다.
이보다 더 심하게 당해도 일어섰고 끝끝내 살아남아 정점에 올랐던 정광 아닌가.
하지만 적이 너무 많았다.
‘아. 살려면 고생깨나 하겠는데.’
그렇다고 약한 꼴을 보일 수야 있나.
‘에구구.’
허리를 곧게 세우고 가슴을 넓게 폈다.
그리고 씩 웃는데 그제야 달려온 십존이 놀란 음성으로 떠들어댔다.
“제자야! 머리까지 다친 것이냐?”
“이렇게 무리한 싸움을 하다니!”
“익히 알고 있었다만 정말 제정신이 아니구나!”
“내가 길을 뚫으마! 내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권존이 비장하게 외치며 눈을 번뜩일 만했다.
정신을 차린 적들이 살기를 피우며 다가오고 있는 것 아닌가!
정광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십존을 타박했다.
“아 진짜. 토굴 속으로 가시라고 했는데 왜 오셨어요.”
남궁학이 적들을 경계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럴 바엔 죽고 말지.”
창존이 껄껄 웃었다.
“으하하하. 자네, 처음으로 옳은 말을 하는군.”
당기황이 두 손을 비빈 뒤 암기들을 움켜쥐었다.
“제자야. 어찌할까?”
정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쩌긴 어째. 튀어야지.’
원래 사지환과 한로만 죽이면 그럴 계획이었다.
뛰어다니며 시간을 끌다 보면 무림맹 본대가 도착할 터.
협곡에 있던 사마련 무인들도 오겠지만 무림맹보다 많지는 않으리라.
‘그런데 이놈은 안 나올 셈인가? 존재감을 키울 기회를 놓쳐? 실망인데.’
실망이 너무 커서 다시 만나면 죽여야 할 정도였다.
정광은 누군가의 얼굴을 머릿속에 되새기며 생각을 굴렸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십자진(十字陣)이 아니라 첨자진(尖字陣)으로 뚫자. 어느 쪽이 좋을까?’
분지 밖으로 나 있는 갈림길을 힐끔거리는데.
기다리던 자가 드디어 나타났다.
“멈추시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토굴 쪽으로 향했다.
준수한 청년이 비틀거리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사마련 무인들이 놀라 외쳤다.
“사공자(四公子)!”
청년은 사지환의 넷째 제자 후위진이었다.
“안 보인다 했더니 토굴 속에 계셨구려!”
“헌데 그 상처는 대체…….”
후위진은 왼쪽 옆구리를 움켜쥔 채 걷고 있었다.
걸음마다 옆구리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대충 봐도 무척 위중한 상황!
허나 후위진의 표정은 담담했다.
사지환의 시신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하자.
정성스레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그대로 한동안 엎드려 있던 그가 일어섰다.
붉게 충혈된 눈이 살기로 불타올랐다.
그 살기가 정광에게 향했다.
“네가 사부를 시해한 것이냐?”
“그런데요.”
후위진은 말없이 정광을 노려봤다.
정광은 그 시선을 받으며 이맛살을 좁혔다.
-저를 사지에 몰아넣고 참 여유 있게 나오시네요.
-놀라지 않는구나. 역시 내가 올 걸 예상했나 보군.
-어서 할 일이나 하시죠. 더 늦기 전에.
정광의 말이 옳다는 걸 증명하듯, 권사(拳邪)와 검사(劍邪)가 앞으로 나섰다.
“사공자. 비키시게.”
“우리가 끝내지.”
십존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흥. 네놈들이 내 제자를? 웃기지도 않는군.”
“토굴에선 도주하던 놈들이 밖으로 나오니 목에 힘이 들어가는구먼.”
팔사와 십존의 시선이 부딪혔다.
서로를 향해 살기를 쏟아내며 움직이려는 그때!
“여기까지 하시지요.”
후위진이 낮지만 강한 목소리로 말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
“사공자, 설마 이대로 싸움을 끝내자는 건 아니겠지?”
권사와 검사의 물음에 후위진이 담담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말도 안 되는…….”
권사의 말을 끊고 후위진이 외쳤다.
“이대로 다 죽을 셈입니까? 곧 무림맹 본대가 올 것입니다! 아군도 올 것이나 세가 밀릴 게 뻔한 일! 그때는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진옥룡과 십존을 죽일 수야 있겠지요. 허나 그랬다간 우리의 피해도 막심할 것입니다. 분노한 무림맹이 달려들면 모두 죽은 목숨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반박하려던 권사가 말끝을 흐렸다.
그의 시선이 외부로 통하는 갈림길로 향했다.
정광은 이미 그쪽을 보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생각보다 빠른걸.’
시간이 흐를수록 기운이 또렷해졌다.
더 지나자 수많은 사람들이 지면을 박차며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쯤 되자 모든 이들이 상황을 깨달았다.
‘원군!’
잠시 뒤.
두 개의 길에서 사람들이 나타났다.
각각 다른 기운을 가진 무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