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피를 즐기는 자들
정광은 사마련주 사지환에게 집중하면서도 주위를 슬쩍 둘러봤다.
‘꽤 넓네.’
울창한 나무들로 둘러싸인 분지.
한쪽에 밖으로 통하는 갈래길이 나 있었는데, 각각 어디로 이어지는 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수도 적지 않고.’
생각보다 적의 숫자가 많았다.
토굴에서 후퇴해 나온 이들뿐만 아니라 상당한 수의 무인들이 사지환의 뒤에 도열해 있는 것 아닌가.
십존들이 당황할 정도였으나 정광은 아니었다.
입속의 육포를 꼭꼭 씹어 전부 삼켰다.
‘꿀꺽. 어? 이게 누구야.’
한 사람을 보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잘 계셨어요?”
“…….”
정광에게서 도주했던 소면호리(笑面狐狸) 한로가 그답지 않게 굳은 얼굴로 경고했다.
“련주께서 계시다. 예를 지켜라.”
“왜 안 웃으세요? 전에 도망가시면서 웃음도 잃으셨나?”
“네놈이 감히…….”
“그만.”
사지환이 차갑게 말하자 한로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본 정광의 눈에 이채가 맺혔다.
“련주님, 대단하시네요. 저 음흉한 분을 종처럼 다루시고.”
“너도 제법이다. 도발이 일상생활인가?”
“설마요. 그럴 만한 분께만 그러는 거죠. 그런데 여긴 웬일이세요?”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직접 손을 쓰시려고요?”
“어떡할 것 같으냐?”
정광은 대답하지 않고 당기황에게 눈짓했다.
“어르신. 지금이에요.”
당기황은 재빨리 백리연화(百里煙火)를 꺼내 터뜨렸다.
퍼엉!
당가를 상징하는 녹색 연기가 푸른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던 사지환이 정광을 노려봤다.
“무림맹 본대에 신호를 보낸 것이냐?”
“아뇨. 분위기가 너무 흉흉해서요. 부드럽게 만들어보려고요.”
사지환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정말 손을 쓰고 싶게 만드는 재주가 있군. 준비도 많이 했고. 헌데 원군이 제시간에 올 수 있을까?”
“와. 더 차가워지셨네.”
“협곡이 폭발하는 소리를 들었을 테니 발걸음을 서두르고 있긴 하겠다만…….”
사지환이 화려한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의 몸에서 태산같이 무거운 기세가 일어났다.
“네 신호를 본 건 무림맹만이 아니야.”
정광은 어깨를 으쓱했다.
“네. 무너진 협곡에 있는 련주님의 수하분들도 오시겠죠. 아. 좀 곤란한데.”
“곤란해할 것 없다.”
“왜요?”
사지환의 눈에 냉기가 어렸다.
“너는 그 전에 내 손에 죽을 테니. 쳐라!”
“존명!”
그의 뒤에 늘어서 있던 자들은 물론, 토굴에서 빠져나온 이들까지 십존에게 달려들었다.
정광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어르신들!”
“……!”
“힘내세요!”
“…….”
힘찬 응원에도 불구하고 십존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이렇게 많은 고수들을 어떻게 상대하라고!
하지만 십존은 십존.
금세 평정을 되찾고 적들을 상대했다.
마치 평생을 함께해 온 동문 사형제들처럼 서로의 등을 지켜주며!
뭐 그래 봐야 오래 버티진 못하겠지만 어쩌겠는가.
하는 데까진 해봐야지.
정광은 그들을 흘깃 본 뒤 사지환을 주시했다.
‘머리를 빨리 베면 틈이 나겠지. 살릴 수 있어.’
격장지계고 뭐고 전부 꺼내 쓰려는 그때.
사지환이 의자에 기대놨던 단창(短槍) 두 자루를 양손으로 잡았다.
삼척(三尺)쯤 되는 길이.
그 끝에 달린 창날에 잔혹할 정도로 차가운 기운이 맺혔다.
정광의 눈썹 끝이 솟구쳤다.
‘이런. 힘들려나.’
현생에서 만난 그 어떤 자보다 강한 느낌.
정광은 혀를 차는 대신 운룡을 뽑았다.
운룡이 찬란한 황금빛을 발했다.
그것을 본 사지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핏 봐도 좋은 검이군.”
“쓸 만한 편이죠. 특히 돼지고기 썰기 딱 좋던데요.”
정광이 고기 자르는 시늉을 하며 빙글거렸다.
사지환은 자신이 직접 죽인 아들이자 둘째 제자인 상소운을 떠올렸다.
‘쓸모없는 놈 같으니.’
여인들을 취해 아이를 몇 낳았지만 마음에 드는 놈이 없었다.
그나마 나은 게 상소운이었으나 결국 하자품이었고.
“그것으로 둘째의 왼팔을 벤 것이냐?”
정광은 알면서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분이 누구신데요?”
사지환은 정광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간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네 눈 속에 가라앉아 있는 기운을 보니 확신이 드는구나.”
“뭐가 가라앉아 있길래요?”
사지환은 짧게 대답했다.
“피.”
“와.”
정광은 길게 받아쳤다.
“벌써 헛것이 보이시면 어떡해요. 빨리 의원에게 가보셔야 할 것 같은데. 무한의가(武漢醫家)가 용하다더군요.”
사지환은 정광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중얼거렸다.
“놀랍군. 정기(正氣)와 마기(魔氣)가 공존하다니.”
“잘못 보신 거라니까요.”
“이해할 수가 없다.”
“저야말로요.”
정광은 태연히 대꾸하는 것과 달리 내심 놀라고 있었다.
‘그걸 느껴? 감이 좋은 놈이잖아.’
무공이 높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기감이 기이할 정도로 발달해야 했다.
마도칠대가문(魔道七大家門) 중 하나인 오로나가(烏魯羅家)에서 그런 기이한 능력을 가진 자가 가끔 태어나는데…….
전생에 한 놈 죽이기도 했었고.
‘뭐 이놈도 죽이면 되지.’
바로 도발했다.
“이러다 해 넘어가겠네. 오시죠.”
“네가 와라.”
정광은 사지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움직였다.
쉬이익-
질풍처럼 달려들며 운룡십삼검(雲龍十三劍)을 펼쳤다.
금빛으로 물든 운룡이 우아하면서도 멋진 선을 그렸다.
사지환도 즉시 대응했다.
후우웅- 쐐액-
왼손의 단창을 돌려 운룡을 튕겨내고 오른손의 단창을 내질러 정광의 목을 노렸다.
정광의 눈이 살짝 커졌다.
‘빨라!’
정교한 데다 위력까지 강했다.
갖은 도발을 다 했거늘, 아무런 보람이 없지 않은가.
‘망할.’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운룡을 다잡으며 용형보(龍形步)를 밟았다.
용이 꿈틀거리듯 좌측으로 피했으나 도복 앞섶이 단창에 스쳐 찢어졌다.
그 틈으로 무각사룡의 누런 비늘이 드러났다.
그것을 확인한 사지환의 눈이 빛났다.
“이게 그 보의군.”
“타앗!”
정광의 기합 소리가 그의 목소리를 눌렀다.
운룡이 깨끗한 반원을 그리며 사지환의 가슴을 베어갔다.
사지환이 이맛살을 좁혔다.
예상을 웃도는 기민한 반격이라니.
하지만 딱 거기까지.
못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푸르스름하게 물든 두 개의 단창이 엇갈리며 운룡을 물었다.
콰직!
정광이 인상을 찡그렸다.
‘창대를 무엇으로 만들었기에 안 잘리는 거야?’
놀란 건 사지환도 마찬가지였다.
단창에 힘을 주어 정광을 밀어낸 뒤 물었다.
“아무리 철혈장이라 해도 쉽게 만들 수 있는 검이 아니야. 그런 귀물을 타인에게 줄 리도 없고. 역시 그놈이 너를 도운 것이냐?”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도통 모르겠네요.”
“넷째.”
“아. 옥기린 그분.”
주위를 둘러본 사지환은 후위진의 모습이 안 보이자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줄 알았지. 숨었군. 더러운 피를 이은 놈답게 눈치 하나는 빨라.”
“왜 더럽다고…… 아!”
정광이 안 됐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옥기린의 모친 되시는 분을 연모하셨는데, 불쌍하게도 다른 분에게 빼앗기신…….”
“웃기지도 않는구나.”
“아니면 옥기린의 부친이 많이 뛰어나신가 봐요. 그분을 질투하셔서 더럽다고…….”
“닥쳐라.”
정광의 눈이 빛났다.
사지환의 눈에서 열기가 일렁이는 것 아닌가!
“화나셨죠?”
“혀부터 잘라야겠군.”
“와. 넘겨짚었는데. 진짜네.”
기쁜 마음으로 혀를 쏙 내밀었다.
“여기요. 윽.”
고개를 젖히자 간발의 차로 단창이 지나갔다.
정광은 그대로 뒷걸음쳐 거리를 확보한 뒤 투덜거렸다.
“하란다고 진짜 하시네.”
어쨌든 됐다.
사지환이 조금이나마 흥분한 것이다.
‘와라. 어서.’
사지환은 말없이 단창을 움직였다.
벤 뒤 찌르고.
후려치며 끌어당긴다.
두 개의 단창이 그려내는 현란한 움직임에 정광의 눈동자가 확대됐다.
‘미친. 이제부터가 진짜구나!’
운룡의 움직임도 변했다.
찌그러진 원을 그려내다가 강하게 내려치고.
빛처럼 쏘아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몸을 빼며 다른 곳을 벤다.
쉴 틈 없는 공방이 이어졌다.
정광의 도복이 찢어지고 사지환의 장포에 구멍이 났다.
정광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럴듯한 외공까지 익혔구나. 긁혔을 뿐, 상처 하나 없어.’
출혈이라도 일으켜야 조금이나마 유리해질 텐데.
사지환의 내공은 정광보다 심후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질 수밖에.
‘무림맹보다 사마련이 빨리 오겠지. 되도록 빨리 끝내야 해.’
사지환은 진짜 고수였지만…….
‘내가 조금만 더 늙었으면!’
나이가 어려 고전하다니, 울화통이 터졌다.
‘그렇다고 못 죽일 줄 아냐!’
정광은 승부수를 던졌다.
허벅지를 매섭게 베어오는 단창.
그것을 무시한 채 사지환의 목을 노렸다.
쉬익-
강맹한 태허도룡검(太虛屠龍劍)의 일식이 쏘아졌다.
사지환이 눈매를 좁히며 다른 단창으로 운룡을 밀어냈다.
챙!
운룡이 방향을 틀고, 아까의 단창이 정광의 허벅지를 베려는 그때!
정광은 오히려 전진했다.
쩡!
강한 진각(震脚)을 밟자 자연스레 자세가 낮아졌다.
그의 허벅지를 탐하던 단창이 옆구리를 베었다.
창날이 아닌 창대로.
빠각!
“쿨럭.”
정광의 입에서 핏물이 튀어 나왔다.
아득히 멀어지려는 정신을 억지로 붙잡으며 해야 할 일을 했다.
정광의 왼손 소매에서 소운룡이 튀어나왔다.
그것을 잡고 그대로 찔렀다.
사지환이 다른 단창을 급히 움직여 막으려 했으나.
아까 튕겨냈던 운룡이 다시 그의 목을 향해 다가오는 것 아닌가!
“……!”
사지환의 눈이 파랗게 빛났다.
이형환위(移形換位)의 신법으로 주르륵 물러나며 두 개의 단창으로 베고 그었다.
그야말로 사파무림 최강자다운 수!
채앵!
운룡을 막았다.
챙!
소운룡까지 밀어냈다.
하지만.
후웅-
“……!”
정광의 백옥 같은 이마까지 막아낼 순 없었다.
콰앙!
“큭!”
이마가 깨진 사지환이 뒷걸음질 쳤다.
상처에서 터져 나온 피가 시야를 가렸다.
그래도 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왼쪽!’
왼손의 단창을 휘돌려 방어하며 오른손의 단창을 내질렀다.
“젠장.”
정광이 짜증을 내며 물러섰다.
그사이 사지환은 상처 부위의 혈도를 짚은 뒤 소맷자락으로 눈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소문이 부족하군.”
그의 말에 정광이 동의했다.
“련주님이야말로요.”
“몇 개나 부러졌느냐? 두 개?”
“제 갈비뼈요? 쌩쌩한데.”
“세 개였군.”
정광이 한숨을 쉬었다.
“후우. 머리를 다치셨나. 왜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세요.”
“죽을 준비나 하거라. 십존처럼.”
정광은 곁눈질로 십존 쪽을 봤다.
아닌 게 아니라 오래 버티지 못하고 등선해 버릴 것 같았다.
“련주님이 더 걱정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수하분들이 많이 드러누워 계시잖아요.”
“저 늙은이들과 맞바꾸는 것이니 손해는 아니지.”
“팔사 분들도 그렇고 십이웅 분들도 그렇고. 많이 없어지셨는데 련을 유지하실 수 있으려나.”
사지환의 눈에 오만한 빛이 떠올랐다.
“내가 련이다. 나만 있으면 언제라도 다시 세울 수 있어.”
정광은 한마디 쏘아붙이려다 말았다.
사지환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강자였다.
‘조금 더 흔들어볼까.’
강한 자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긴 자가 강한 것이다.
정광은 강한 자에게 항상 이겨온 강자 중의 강자.
“어질어질하신 게 서 있기도 힘드시죠? 이거 몇 개로 보이세요?”
정광이 운룡을 살짝 흔들며 묻자 사지환이 웃었다.
“어? 머리 많이 다치셨나 보네. 그런 흉악한 미소를 지으시고.”
“확실히 피를 즐기는 녀석이군.”
“련주님이야말로 그렇다니까요.”
“네 성품은 마음에 안 든다만. 나머진 괜찮아.”
“저는 련주님의 모든 게 싫은데.”
“그럴 게다. 널 죽일 몸이니.”
사지환이 신형을 날렸다.
정광 역시 마찬가지.
두 개의 단창이 폭풍이 되어 거센 바람을 일으켰다.
운룡과 소운룡이 허공을 날며 포효했다.
그렇게 얼마나 싸웠을까.
정광이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그만큼 사진환은 서서히 전진했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흐르자.
사지환이 눈을 번뜩였다.
‘기회!’
눈으로 보고 느낀 게 아니었다.
그의 유별난 감각이 알려준 것이었다.
정광이 뇌전보(雷電步)를 펼쳐 옆으로 돌려는 순간.
사지환의 단창이 정광의 신형이 향할 곳을 찔렀다.
실제로 정광의 몸은 그곳으로 움직였고.
결국 단창에 옆구리가 꿰였다.
콰직!
“윽!”
단창의 날이 철혈무쌍용갑을 부수며 들어갔다.
사지환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떠오르다가…….
어느 순간 굳어버렸다.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정광이 소운룡을 팽개치고 창대를 움켜쥐고 있는 것 아닌가!
“어떻게?”
정광이 피로 물든 이를 드러내며 대답했다.
“제 감이 더 좋으니까요.”
“……!”
정광은 왼손으로 창대를 꽉 쥔 채 오른손의 운룡을 뻗었다.
사지환이 다른 단창으로 방어하려 했으나 운룡에 담긴 힘은 보통이 아니었다.
정광의 전력을 다한 일격이었다.
콰작!
운룡이 창대에 깊숙이 박혔다.
정광은 운룡에 계속 힘을 줌과 동시에 자신의 옆구리에 꽂힌 단창을 강하게 밀었다.
끼리릭-
하나의 단창은 아래로 처지고 다른 단창은 정광의 살과 철혈무쌍용갑을 헤집으며 밖으로 나왔다.
피가 쏟아졌으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 힘에 밀린 사지환이 살짝 균형을 잃는 그때.
놀랍게도 정광은 양손을 놓으며 크게 전진했다.
오른손을 말아 주먹을 쥐며 그대로 쏘아냈다.
태청신권(太淸神拳)의 묵직한 일격이 사지환의 가슴을 때렸다.
쿵!
“커헉!”
가슴이 움푹 파인 사지환이 신형을 바로 세우려 했으나.
정광의 주먹에서 가운뎃손가락이 꼿꼿이 펴졌다.
“수고하셨습니다.”
곤륜 비전 지공(指功) 태허지(太虛指).
허허로운 지풍이 사지환의 목을 꿰뚫었다.
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