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독연(毒煙)
후위진은 정광이 한 말을 가만히 되뇌었다.
‘싫다고?’
목숨을 걸고 왔건만, 단칼에 거절당하다니.
예전이었다면 길길이 날뛰었을 것이나 지금의 그는 아니었다.
‘왜?’
분명 정광에게 좋은 제안이었다.
힘을 소모하지 않고 사부에게 바로 갈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이득.
그걸 걷어찬 연유를 알아야 했다.
“싫은 이유를 말해다오.”
“가슴이 그렇게 시키네요.”
“진짜 이유 말이다.”
정광은 후위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왕 싸우기 시작한 거. 제대로 싸워야죠.”
후위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위기를 기회로 삼으려는 거군.”
“이 정도는 위기 아닌데.”
“자신감이 넘치는구나. 어쨌든 사파무림의 최고수들이 모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최대한 많이 죽이겠다는 말 아니냐?”
정광이 두 손을 모았다.
“무량수불. 정정해 주시죠. 공짜로 등선(登仙)시켜 드리려는 거예요.”
후위진은 잠시 생각한 뒤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 아무리 너라 해도 힘들 거다.”
“그야 제가 알아서 할 일이죠.”
“설령 가능하다 쳐도 바람직한 일이 아니야. 정(正)과 사(邪)의 균형추가 단번에 기울 거다.”
“그걸 원하는 건데요.”
“……무어라?”
“그게 어때서요?”
후위진의 눈에 이채가 맺혔다.
‘무림맹을 망칠 셈인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사부가 정광에게 죽으면 사마련은 곧 항복하게 될 터.
무림맹에게 많은 것을 양보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고수들이 건재하면 괜찮지만 그들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세를 회복하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리리라.
“사마련이 망가지면 외부의 적을 잃은 정파무림도 엉망이 될 텐데.”
“한동안은 평화롭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기들끼리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벌일 거란 말씀이군요.”
“잘 알면서 왜 그러느냐?”
“상관없으니까요.”
“뭐?”
“항상 그래왔는데요 뭐.”
정광이 차근차근 설명했다.
“이게 나아요. 최소한 피를 보며 싸우지는 않을 것이니 전력이 보전될 거고, 천룡단과 지룡단은 전부 청해성으로 가게 되겠죠.”
“…….”
“혹시 일이 터져 그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동문이나 식솔을 잃은 정파무림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고요.”
후위진은 그제야 정광을 이해했다.
“마교를 경계하는 것이냐? 그들이 발호하면 정파무림이 우리를 신경 쓰지 않고 전력을 다하게 만들겠다는 거구나.”
“비슷해요.”
후위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문인 곤륜을 끔찍이 아끼는군.”
“거기에서 계속 사는 게 끔찍해서 이러는 건데요.”
“너는 잘못 생각하고 있다.”
“진짠데.”
“그 얘기가 아니야.”
후위진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마교가 중원을 침공하면 사파무림도 정파무림과 손을 잡고 그들과 싸울 거다. 헌데 전력을 깎아서 어쩌자는 것이냐?”
정광이 피식 웃었다.
“제대로 통제 안 되는 아군은 적군보다 못하니까요. 세를 깎아서 적극적으로 협조하게 해야 하지 않겠어요?”
후위진은 정광을 노려보다가 낮게 말했다.
“정사 간의 균형이 무너지면 황제가 좋아하지 않을 텐데?”
“그건 그분 사정이죠.”
“…….”
“엄살이 왜 이렇게 심해요? 사파무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
후위진은 내심 탄식한 뒤 마음을 굳혔다.
‘생각이 이리도 확고하다니. 더 이상의 대화는 시간 낭비야.’
이렇게 된 이상 제일 중요한 일에만 집중해야 했다.
“무운을 비마. 사부를 죽여.”
“네.”
“방심하지 말란 얘기다. 사부는 강해. 다른 이들도 조심하고.”
“십존 중 네 분이 곧 오실 거예요.”
“그들도 무사하다는 말이군.”
“그럭저럭요.”
“이쪽은 팔사가 없는 줄 아느냐? 십이웅도 있다.”
“부련주 어르신은 땅 위에 계시다고 하셨고. 사천성에서 두 분, 여기에서 세 분…… 아. 쌍사 그분들은 한 분으로 치죠? 그럼 두 분을 보내드렸죠. 십이웅은 몇 분이었더라? 어쨌든 같이 보내 드렸고요. 얼마 안 남으셨네요?”
“…….”
후위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축객령을 내렸다.
“그만 가거라.”
“그럼 이만. 아.”
정광이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사천성에 있던 사마련 세력이 곧 도착할 거예요.”
“투웅을 말하는 것이군.”
“네. 원래 대회전이 벌어지면 간을 보다가 무림맹 쪽을 은근슬쩍 거드는 역할이었는데 바꿔도 되겠네요.”
“어떻게?”
“그분들이 갑자기 나타나자 무림맹이 한 발짝 물러나 싸움을 멈추는 그림 어때요?”
후위진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가균 다음으로 그가 사마련을 이어받길 원하는 것이냐?”
“본인이 받으려고 하셨어요? 감당이 되시려나?”
후위진은 정광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
아주 담담한 목소리로.
“그야 내가 알아서 할 일이지.”
* * *
정광은 후위진과 헤어지고 두더지 사내에게 갔다.
“그만 갈게요.”
“수고하셨습니다. 어디로 모셔 드릴까요? 들어오셨던 구멍으로는 곤란합니다. 사마련 고수들이 와 있습니다.”
“흐음.”
정광은 두 가지 점에 주목했다.
‘사마련 애들이 위에 있는 걸 어떻게 아는 거지? 청력이 기이할 정도로 좋은 건가?’
그게 아니고선 설명이 안 됐다.
정광조차 기감을 잔뜩 키워야 아는 사실을 무공이 낮은 두더지가 어찌 알겠는가?
또 다른 한 가지 의문은.
‘둘 다 ‘본련’이라 안 하고 사마련이라 칭하네.’
후위진이야 사마련주인 사부를 치기로 마음먹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두더지는 왜?
정광은 전음을 보냈다.
-사마련이 아니라 저분에게만 충성하시나 봐요?
의외로 두더지 사내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런데 그 내용 역시 무척 의외였다.
-소가주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네?
-소인은 소가주의 부친이신 응담후가(鷹潭后家)의 가주께만 충성합니다.
-그분이 누구신데요?
두더지 사내가 화제를 돌렸다.
-어디로 모실까요? 빨리 안내해 드리고 가봐야 합니다.
정광은 남의 집 일에서 신경을 끊고 원하는 곳을 말했다.
아까 들어왔던 구멍 전에 있는 토굴 중 하나였다.
-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두더지 사내는 아무런 소음도 없이 놀라운 속도로 땅을 팠다.
금세 토굴 바닥에 구멍을 내고 정중히 인사했다.
-무운을 빕니다.
-다음에 만나면 알려주셔야 해요.
-…….
정광이 올라가자마자 두더지 사내는 구멍을 메우며 사라졌다.
‘다시 시작해 볼까.’
도복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팔다리를 풀자 사마련 무인들이 나타났다.
“네 이놈! 여기 있었구나!”
“진옥룡! 반드시 죽여주마!”
정광도 화답했다.
“안녕히 가세요!”
가짜 진천뢰를 꺼내고 화섭자로 불을 붙였다.
그것을 살짝 던지며 변성술로 크게 외쳤다.
“콰아앙!”
“…….”
아무도 속지 않았다.
대신 분노한 목소리로 정광을 성토했다.
“장난질은 여기까지다!”
“폭음이 계속 들렸지만 무너진 토굴은 없었어!”
“우리를 바보로 아는 것이냐?”
“이런 비열한 새끼를 봤나! 사람을 이런 식으로…… 헉!”
정광은 자신을 욕한 자의 머리통을 철구(鐵球)로 찍었다.
퍽!
“끅!”
그리고 쓰러지는 사내를 한쪽으로 밀어내며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진천뢰 맞는데 하품(下品)인가 보네요.”
“…….”
죽은 사내의 머리가 제법 단단했는지, 가짜 진천뢰는 잔뜩 찌그러져 있었다.
“그래도 사람 죽이긴 충분하죠. 다음 분 오세요.”
“……죽여!”
정광은 철구로 그들을 팼다.
패고 패다가 철구가 쪼개지자 파편까지 던졌다.
그렇게 적당히 상대하다가 뒤로 물러났다.
사마련 무인들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놈이 시간을 끌려고 한다!”
“여기에서 반드시 죽여야 해! 저놈이 도주하면 우린 평생을 두려워하며 살게 될 것이다!”
정광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도주한다고? 왜?’
뒤에서 익숙한 기운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네 명의 십존이 드디어 운기조식을 마치고 정광을 돕기 위해 온 것이다!
선두는 당연히 권존이었다.
그는 놀라운 속도로 달려오며 사자후를 질렀다.
“뒤로 물러나라!”
“네?”
정광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돌아보며 묻자.
권존이 비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내가 길을 여마! 내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네?”
권존은 황당해하는 정광을 스쳐 지나가며 전면에 있는 적에게 일권을 내질렀다.
“타핫!”
언가 비전 붕산권(崩山拳)이 폭발했다.
콰앙!
“끄악!”
그의 주먹에 맞은 사마련 무인이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하압!”
권존은 멈추지 않았다.
쩡!
토굴이 진동할 만큼 강한 진각(震脚)을 밟으며 연환권을 펼쳤다.
퍼퍼퍼퍽!
“커헉!”
“궈, 권존이다! 물러서!”
“권사(拳邪) 어르신께서 앞으로 나가신다! 비켜 드려!”
토굴의 폭이 좁다 보니 여럿이 나란히 서서 싸우기는 힘든 상황.
사마련 무인들이 한쪽 벽으로 비켜섰다.
사이한 기운을 물씬 풍기는 건장한 노인이 그 틈으로 질풍처럼 달려왔다.
그리고 권존과 격돌했다.
콰아앙!
“큭.”
“훅.”
권존과 노인이 각각 한 걸음씩 물러났다.
한 치도 기울어지지 않는 동수!
“……그대가 권사인가?”
“……그렇다. 네가 권존이구나.”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이 눈을 빛내며 움직였다.
“한번 놀아볼까!”
“어르신께서 죽여주마!”
콰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치열한 싸움이 계속됐다.
정광은 두 귀를 손바닥으로 막고 얼굴을 찡그렸다.
‘안 그래도 토굴이라 소리가 울리는데 왜 이리 시끄러워.’
더 시끄러운 건 따로 있었다.
당기황이었다.
“제자야! 괜찮냐?”
“네.”
“말도 안 되는 소리! 오는 길에 봤다! 시신투성이더구나! 엄청난 격전을 벌이며 여기까지 온 게 틀림없거늘, 왜 거짓말을 해!”
창존도 꽤 시끄러웠다.
“네가 걱정돼서 한달음에 달려왔느니라. 헌데 첫 번째로 남긴 암어는 무슨 뜻이었느냐? 도저히 해독할 수가 없던데.”
“그건 그냥 넘어가죠.”
남궁학은 그나마 조용한 편이었다.
“고생했다. 그만 뒤로 물러나 운기조식해라. 우리에게 맡기고 기력을 보충해.”
쉬라는데 굳이 거절할 필요 있나.
저렇게 싸우고 싶다는데 양보해야지.
정광은 십존들의 뒤로 가서 편하게 앉았다.
“잠깐 쉴게요. 힘내세요.”
십존들이 동시에 대답했다.
“우리를 믿어라!”
“네.”
정광은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그리 많은 내공을 소모한 상태는 아니었는지라 오래 걸리지 않아 전부 회복할 수 있었다.
정광이 눈을 뜨자 맑은 물처럼 깨끗하고 고요한 눈이 드러났다.
그 눈이 살짝 일그러졌다.
‘이거야 원. 저래서야 언제 끝날까.’
권존과 권사는 아직도 굉음을 터뜨리며 싸우고 있었다.
‘그건 그거고.’
정광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온종일 열심히 몸을 놀렸더니 배가 고픈 것 아닌가.
‘기력을 보충하라 했으니 제대로 해야지.’
정광은 봇짐을 풀러 장이의 모친이 만든 육포를 꺼냈다.
화섭자의 불로 굽자 향긋한 육포 향이 퍼졌다.
그 냄새를 맡은 십존들은 ‘이놈이 또 황당한 짓거리를 하는군. 그래도 먹고 힘내는 게 낫지’라며 넘어갔으나.
사마련 무인들은 경악했다.
“이 향은!”
“육포?”
누군가의 말대로 육포가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며 나는 냄새였지만.
천하를 울리는 정광의 악명이 그들의 판단력을 흐렸다.
“방심하지 마! 상대는 진옥룡이다!”
“독연(毒煙)일지도 모른다! 호흡을 멈춰!”
이는 팔사 중 한 명인 권사도 마찬가지였다.
자신과 같은 반열에 있는 이들을 벌써 여러 차례 꺾은 정광 아닌가!
‘악랄한 놈! 별의별 암수를 다 쓰는구나!’
치열히 겨루고 있는 권존은 편하게 호흡하고 있었으나 권사는 그럴 수 없었다.
‘이놈은 미리 해약을 먹었을지도 몰라. 이대로 가면 불리한데.’
호흡을 멈추고 싸우는 건 한계가 있는 법.
권사의 눈에 악독한 빛이 맺혔다.
‘잠시 물러나자.’
그대로 몸을 돌려 사마련 무인들을 옆으로 밀치며 달렸다.
놀란 사마련 무인들이 우왕좌왕했다.
“어, 어르신!”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그때, 당기황의 암기가 쏟아졌다.
“으아악!”
“도, 독존이다!”
“피해!”
사마련은 계속 후퇴했다.
뒤에 있던 검사(劍邪)가 앞으로 나오며 노호성을 질렀다.
“못난 놈들 같으니! 정신 차려라! 내가 정파의 위선자들을 상대하마!”
검사의 푸르스름한 기형검을 보자 남궁학이 나섰다.
“너는 내 것이다.”
“오만한 놈! 와라!”
쨍!
검과 검이 부딪혔다.
허나 검사는 남궁학을 이길 수 없었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패색이 짙어졌다.
검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십존에도 속하지 못한 놈이 어떻게!’
남궁학이 정광이라는 기연을 얻은 걸 알 리 있나.
결국, 그도 도주했다.
같은 팔사인 귀사(鬼邪)가 이를 악물며 막으려 했으나, 남궁학의 검과 그 뒤에서 찔러오는 창존의 창을 막을 수는 없었다.
‘빌어먹을! 괜히 나서가지고!’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고 했던가.
귀사는 장기인 사술을 제대로 펼치지도 못한 채 검에 베이고 창에 꿰여 죽어버렸다.
“귀사 어르신께서 당하셨다!”
“여기는 너무 좁아서 안 돼! 나가서 싸우자!”
사마련 무인들은 피를 토하듯 외치며 후퇴했다.
십존은 그런 그들을 추적했고.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완만하게 위로 올라가던 토굴이 끝나고 지상으로 나오게 됐다.
제일 뒤에서 육포를 꼭꼭 씹어 먹으며 나온 정광이 눈을 빛냈다.
수많은 나무들로 둘러싸인 분지.
그 중앙에 놓인 화려한 의자.
그 위에 앉아 있는 중년인을 봐서였다.
“또 뵙네요.”
중년인이 스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문대로 식탐이 많구나. 아니, 피를 더 즐기는 것인지도 모르겠군.”
정광이 씩 웃었다.
“련주님만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