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267화 (266/569)

267화

놀라운 말

그야말로 승승장구(乘勝長驅)였다.

-크아아앙!

역천경이 사기(邪氣)를 물어뜯어 사술을 펼친 자들에게 타격을 주고.

“콰아아앙!”

정광은 가짜 진천뢰와 변성술(變聲術)을 이용해 고수들을 썰었다.

사기야 그렇다 치고.

사람도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으아아악!”

다른 이가 진천뢰를 터뜨리는 시늉을 하면 의심부터 했겠지만.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명성을 떨치는 정광 아닌가?

‘이런 미친놈을 봤나!’

‘아까부터 폭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진짜였어!’

입이 싼 한로 덕분에 정광이 철혈무쌍용갑(鐵血無雙龍甲)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마련 고수는 없었다.

그것이 아무리 귀물(貴物)이라 해도 진천뢰의 폭발을 완전히 막을 수 있을 거라 보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이놈이라면!’

‘터뜨리고도 남아!’

원래 미친 정광이 철혈무쌍용갑을 믿고 이런 미친 짓거리를 한다는 생각에 속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정광은 사마련이 심혈을 기울여 안배한 진천뢰의 연쇄 폭발 속에서도 무사히 나오지 않았던가.

-좋아! 다음은 어디냐?

-웅!

거칠 것이 없었다.

사람과 귀물(鬼物)이 하나가 되어 질주했다.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짝이랄까.

물론 의심이 너무 많아 피곤한 자도 있었다.

“속지 마! 저놈이 아무리 미쳤어도 진천뢰를 터뜨릴 정도는 아닐 거다!”

목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르는 딱한 이도 있었고.

“진천뢰라니! 악독한 놈! 그냥 같이 죽자!”

이런 식으로 나오면 정광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나.

정정당당하게 싸워야지.

“하압!”

낭랑한 기합과 함께.

독분(毒粉)을 뿌리고 철전(鐵錢)을 던졌다.

“이런 비열한!”

연이어지는 암수에 놀란 상대가 틈을 보이면 운룡으로 마무리했다.

서걱-

“끄륵.”

말끔했던 새 도복이 적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정광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아 진짜. 이것도 버려야 하나.’

청해성주가 선물했던 우아한 도복들 중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었는데.

권웅(拳雄)이니 쾌웅(快雄)이니 하는 놈들을 해치운 대가라 생각해야지, 별수 있나.

어쨌건 사마련에 더 이상의 진천뢰는 없다는 걸 확인했다.

힘도 최대한으로 아꼈고.

여기까지만 보면 정말 잘 굴러가고 있었으나…….

슬슬 선택을 해야 했다.

‘토굴이 언제까지 계속될 리는 없지. 얼마 안 남았을 거야.’

역천경이 토굴의 동향을 감지하는 사기를 물어뜯어 사술을 펼치는 자들에게 타격을 줬지만 마냥 좋은 건 아니었다.

정광이 사마련주에게 똑바로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려준 셈 아닌가.

‘지금쯤이면 여러 토굴에 흩어져 있던 놈들이 거의 모였으려나. 한꺼번에 밀려올 것 같은데.’

정광이 아무리 힘을 아꼈다 해도 최상의 상태는 아니었다.

그들까지 상대하게 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

‘숫자는 상당히 줄였으니 다른 토굴에서 시간을 끌며 십존을 기다릴까.’

사마련주가 토굴 끝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협곡에 직접 오고 함정을 발동시킨 건 정광을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표출한 것.

사마련주는 강자였다.

그와 맞닥뜨릴 때까지 최소한 지금 정도의 기력은 유지하고 싶었다.

‘일단 할 일부터 하고.’

소운룡과 운룡을 살짝 내려쳐 핏물을 털어냈다.

둘 다 대충 바닥에 놓고 봇짐도 끌러 내려놨다.

아까 던졌던 가짜 진천뢰 옆에.

“에구구.”

그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바로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대담하다 못해 무모한 행동!

그래도 어쩌겠는가.

틈이 났을 때 조금이라도 내공을 모아야지.

막 소주천(小周天)을 이루려고 하는데.

-우웅!

역천경이 다급히 울었다.

동시에 정광의 머리 위 허공이 열리며 은신하고 있던 복면인이 떨어져 내렸다.

쉬익-

그의 손에 들린 도가 정광의 정수리를 반으로 갈랐다.

서걱.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두 동강이 났으나.

‘……!’

복면인의 눈이 일그러졌다.

손맛이 전혀 안 느껴지는 것 아닌가!

‘허상?’

순간적으로 움직이며 남는 잔상 따위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흩어진 허상 주위에 놓여 있는 소운룡, 운룡 등의 이런저런 물건들을 보자.

머릿속에 정광에 대한 소문 중 하나가 떠올랐다.

‘진법!’

아니나 다를까.

사상허상진(四象虛像陣)으로 복면인을 속인 정광이 나타났다.

그것도 복면인의 바로 위에서!

번쩍 치켜들고 있던 수도(手刀)를 눈부신 속도로 내려치며 떨어진 것이다!

‘……!’

수도에 베인 복면인이 반으로 갈라졌다.

하지만 잔상이었을 뿐, 그의 신형이 이장 밖에서 나타났다.

놀랍게도 정광은 이미 그의 지척에 이르러 있었다.

달려드는 도중에 주운 걸까?

어느새 정광의 손에 들린 운룡이 황금빛을 토하며 쏘아졌다.

쩡!

“큭.”

복면인이 도면으로 겨우 막았으나.

끼이익-

운룡은 그것을 뚫고 들어갔다.

그리고 복면인의 얼굴을 꿰뚫으려는 순간!

복면인이 도를 놓으며 신법을 펼쳤다.

데굴데굴.

정광이 앞서 상대한 쌍사보다 훌륭한 나려타곤의 신법이었다.

“멋진 절기네요!”

정광은 감탄하며 그를 힘차게 걷어찼다.

뻥!

“컥!”

옆구리를 차인 복면인이 낮은 비명을 토하며 굴렀다.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은 통증에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묘한 향이 콧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독!’

급히 호흡을 멈췄으나 이미 미량의 독분을 마신 상태.

‘어떤 독이지?’

소름 끼치는 살기를 발하며 날아오는 운룡을 피하려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내공이 미세하게나마 흩어지는 것 아닌가!

‘산공독(散功毒)!’

그를 어찌할 정도로 대단한 독은 아니었지만.

상대는 정광이었다.

아주 작은 기회도 제대로 잡고 결과를 낼 줄 아는 정광!

운룡을 가까스로 피해낸 복면인의 발목을 운룡과 함께 주웠던 소운룡으로 그었다.

사악-

‘……!’

피가 튀어 올랐다.

복면인의 눈이 커졌다.

하필이면 발목을 베이다니!

자신의 가장 큰 장기인 보법과 신법을 봉쇄당한 것이다!

‘아직 아니야!’

복면인은 억지로 보법을 밟았다. 양 소매에서 두 자루의 소도를 꺼내 정광의 후속 공격을 모조리 막아냈다.

정광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한 걸음 물러났다.

“안 아프세요?”

“…….”

“피 줄줄 흐르잖아요. 무리하지 마시고 지혈부터 하시죠.”

“…….”

복면인은 대꾸하지 않고 정광의 눈을 노려봤다.

‘악귀 같은 놈. 내가 네 속셈을 모를 줄 아느냐?’

지혈하기 위해 허리를 숙이는 찰나의 순간을 노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복면인의 눈이 살짝 떨렸다.

‘산공독은 대충이나마 밀어냈지만 큰일이군.’

출혈이 심했다.

지혈하지 않고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그의 생각을 흩으려는 듯 정광이 입을 열었다.

“몰래 계속 따라오셔서 거슬렸는데. 넘어와 주셔서 감사해요.”

“…….”

“더는 참기 힘드신 데다 욕심이 나서 그러신 거죠?”

복면인은 무언으로 인정했다.

들키지 않기 위해 오랫동안 심력을 쏟아부었다.

그런 와중에 정광이 운기조식을 하는데, 어찌 가만히 있으랴.

‘가짜 진천뢰로 장난질을 쳐 살육을 벌일 정도로 흉악한 놈이거늘. 그걸 못 참다니.’

뼈저리게 뉘우치며 스스로를 나무랐지만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정광이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냈기 때문 아닌가.

너무 궁금해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분명 운기조식 중이었는데 어떻게 움직인 것이냐?”

“풀고 움직였죠.”

“…….”

괜히 물어봤다는 생각에 아픔이 더 커졌다.

“팔사세요? 암사(暗邪) 맞으시죠?”

“……그렇다.”

“명불허전이네요.”

“……날 조롱하는 것이냐?”

암사가 분노에 찬 음성으로 묻자 정광이 정색했다.

“제가요? 은신하셨다는 것만 눈치챘을 뿐, 위치를 파악하기 힘들었을 정도로 대단하신 분을 왜요?”

“…….”

암사는 정광을 노려보다가 중얼거렸다.

“진심인 것 같군.”

“물론이죠.”

“좋아.”

암사의 전신에서 끈적끈적한 투기가 일어났다.

“끝을 내볼까?”

“시간 안 끄시고요?”

“네가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놈이더냐?”

“그렇긴 하죠.”

정광이 부드럽게 웃었다.

“갈게요.”

“와라!”

치열한 싸움이었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암사는 대단한 강자였으나 정광을 이길 정도는 아니었다.

장기인 암습은 막히고 정면 대결이 되어버렸기에 더욱더 그랬고.

정광은 그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한숨 쉬었다.

“후우우. 생각보다 끈질기네.”

어찌나 집요하게 달라붙던지.

정말 진천뢰가 있었으면 입에 처넣은 뒤 불을 붙이고 싶을 정도였다.

‘조금이라도 모아야겠지.’

가볍게 운기조식해서 내공을 그러모았다.

소지품들을 전부 챙기고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우득. 우드득.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몸에 활력이 돌았다.

‘아. 잊고 있었네.’

품속에 손을 넣어 역천경을 쓰다듬어 줬다.

쓸데없는 짓이었지만 위험을 감지하고 알려주지 않았는가.

-우우우웅-

정광의 손길이 닿자 역천경이 부르르 떨었다.

-자식. 좋아하기는.

-…….

-그런데 그 정도 기운은 안 알려줘도 돼. 알았지?

-……웅.

정광은 역천경에게서 신경을 끊고 기감을 확장했다.

멀리서 많은 기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드디어 모인 건가?’

힘을 보존하려면 아군이 필요했다.

오는 내내 독을 좀 뿌렸으나 십존이라면 알아서 헤치고 올 터.

‘십존이 올 때까지 시간을 질질 끌다가…… 응?’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잠시 뒤.

바닥이 들썩거리더니 구멍이 났다.

‘얼씨구?’

그 구멍에서 기이할 정도로 큰 손이 튀어나왔다.

그다음으로 나온 건 뾰족하게 솟은 코.

‘와아.’

정광은 너무 신기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두더지?”

정말 두더지처럼 생긴 사내가 얼굴만 내민 채 평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두더지도 아니고 적도 아닙니다.”

“그럼 누구신데요?”

구멍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광이 익히 아는 기운을 가진 자의 것이었다.

“잠깐 내려와 주겠느냐?”

“왜요?”

“긴히 할 말이 있어 그런다.”

“바쁜데.”

“그것과 관계된 일이야.”

정광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끄덕였다.

어차피 적들을 잠시 피할 참이었고,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궁금해서였다.

‘한번 가보지 뭐.’

십존이 있었으면 이 흉험한 형국에 제정신이냐며 잔소리를 했겠지만.

정광은 걱정하지 않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그에게 살심을 품을 정도로 멍청한 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똑똑한 축에 속했다.

“그러죠.”

정광이 승낙하자 두더지 사내가 완전히 올라온 뒤, 구멍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먼저 들어가십시오. 깔끔히 메워 흔적을 지우고 따라가겠습니다.”

“뒤통수치면 화낼 거예요.”

“소인이 어찌 감히. 땅 파는 재주밖에 없습니다.”

“겸손하시긴. 대단한 재주잖아요.”

“…….”

“웬만한 무공보다 훨씬 낫죠.”

“…….”

두더지 사내가 묘한 눈빛으로 정광을 봤다.

“그럼 수고하세요.”

“……감사합니다.”

정광은 그에게 손을 한번 흔들어 보이고 구멍으로 들어갔다.

평소라면 도복이 더러워져 꺼렸을 테지만 이미 버린 도복 아닌가.

‘일이 끝나면 옷부터 구해야겠어.’

한동안 기어가자 앉을 수 있을 만큼 넓은 곳이 나타났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내가 빙그레 웃었다.

짙은 어둠 속이었지만 주변이 밝게 변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멋진 미소였다.

“오랜만이구나.”

정광도 씩 웃었다.

눈앞의 현인(賢人) 후위진보다 훨씬 더 멋지게.

“그러게요. 여긴 어쩐 일이세요?”

후위진이 미소를 거두며 대답했다.

“한적한 곳에 감금되어 있다가 끌려왔다.”

“저런. 또 사석(捨石)으로 쓰이신 거예요?”

“어쩔 수 없었어.”

“부련주 어르신은요? 설마?”

“마찬가지다. 땅 위에 계셔. 의심 많은 사부가 그와 나를 나눠놨지.”

정광이 탄식했다.

“이거야 원. 이러시라고 놔드렸던 게 아닌데.”

“그래서 몰래 찾아온 것 아니냐.”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려고 오신 건 아니죠?”

고요히 가라앉아있던 후위진의 눈이 빛을 발했다.

“당연한 소리. 너를 도우러 왔다.”

“어떻게요?”

정광이 흥미로운 표정을 짓자 후위진의 어조에 힘이 실렸다.

“쓸데없는 싸움 없이 사부에게 바로 갈 수 있게 안내해 주마.”

“오오. 정말요?”

“물론.”

후위진의 놀라운 말에.

정광이 환하게 웃었다.

“싫은데요.”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