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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마협-266화 (265/569)

266화

눈부신 빛

내가 몇 살이었더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만큼 역천경은 오랜 세월을 살아온 존재였다.

그 긴 시간 동안 이렇게 집중해 본 적이 있었던가.

친절한 정광은 너무 무섭다 못해 소름이 끼쳤다.

어디지? 여기다!

역천경은 더 짙은 사기(邪氣)가 느껴지는 토굴을 향해 미친 듯이 진동했다.

-웅! 웅!

-이쪽? 고마워.

-우웅! 우웅!

-응? 고맙다고 했는데 싫다고? 짜증 나?

-……!

역천경은 환장할 것 같았다.

‘천만에요’라고 공손히 말했는데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다니!

하지만 정광은 여전히 친절했다.

-그래. 그럼 다음부턴 고마워하지 않을게.

-…….

-이것도 싫어?

-우웅! 우웅!

-그래,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 걱정하지 마.

정광은 부르르 떠는 역천경을 쓰다듬어 주며 토굴 옆에 무림맹 암어를 새겼다.

그런데.

새기고 보니 영…….

‘십존들이 이걸 알아볼까?’

살짝 삐뚤삐뚤하고 조금 일그러진 모양이라 솔직히 자신 없었다.

그렇다고 이깟 거 제대로 새기려고 심력을 낭비할 수도 없고.

‘뭐 어느 쪽인지만 알면 됐지.’

대충해도 알아서 따라오리라.

정광은 역천경이 지목한 토굴로 들어갔다.

이곳도 깜깜하긴 매한가지라 안력을 돋워야 했는데.

안에서 맴돌고 있던 미약한 사기가 일렁이는 게 느껴졌다.

정광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것이었다.

‘이런 건가.’

사마련은 각 토굴의 끝마다 갈림길을 만들어놨다.

얼마나 계속될진 모르지만 그 숫자가 상당할 게 분명했다.

함정에 빠진 이들이 어느 쪽으로 향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듯, 그들을 기다리는 사마련도 어떤 곳을 통해 그들이 올지 모르는 건 마찬가지.

정광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기로 적의 위치를 파악하는 거네.’

대단한 건 아니었으나 효과적인 사술(邪術)이었다.

‘많은 토굴을 전부 감지하려면 사술을 부리고 있는 놈들의 수가 꽤 많겠지.’

지금 정광의 위치를 알아냈으니 사마련도 움직일 것이다.

어떻게?

최대한 빠르게.

무너진 협곡 위에서, 만에 하나 정광 일행이 살아 있을 시 올라오길 기다리고 있는 사마련 무인들은 무림맹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퇴각할 것이다.

토굴 속에 있는 놈들도 그럴 거고.

오래 있어 봐야 뭐 하겠는가?

빨리 끝내고 몸을 피해 무림맹 본대를 상대할 준비를 해야지.

‘곧 몰려올 것 같긴 한데. 어떡할까?’

좁은 이곳에 굳건히 버티고 서서 적들을 상대하며 시간을 끄는 게 현명한 방법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정광은 그렇게 한가한 사내가 아니었다.

‘사마련주가 직접 왔어. 그놈이 구경만 하고 있을 리 없지.’

끝없이 밀려오는 적들과 싸우며 힘을 빼다가 놈이 나타나면 필패다.

‘토굴은 좁으니 제법 하는 녀석들만 있을 거야.’

여러 토굴에 흩어져 있을 적들이 모이기 전에 먼저 친다.

이게 정광의 결론이었다.

‘그럼 가볼까.’

우선 확인부터 좀 하고.

-천경아.

-웅! 웅!

-여기 맴도는 사기 있잖아.

-웅!

-그것과 이어져 있는 놈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지?

-…….

‘있어?’가 아니라 ‘있지?’였다.

할 수 있냐고 묻는 게 아니라 하라는 말 아닌가!

역천경은 울분이 치솟았다.

밥도 제대로 안 주면서 뭐?

동남동녀(童男童女)의 피는커녕 잡스러운 사기만 주워 먹게 하면서 이딴 일을 시켜?

내 이놈을 당장!

-빨리하자. 시간 없다.

-웅!

친절하던 정광이 차갑게 말하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그런 자신이 싫었으나 어쩌겠는가?

그렇게 길들여진 걸 어쩌라고!

역천경은 요기를 끌어 올려 토굴 속을 떠도는 사기를 물어뜯었다.

-크아아앙!

끼아아악!

한입 크게 베인 사기가 울부짖었다.

정광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칭찬했다.

-옳지, 잘했다.

-우우우우웅!

-그럼 달릴 테니 빨리 알려주고 빨리 해치워.

-웅?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던 역천경은.

곧 알 수 있었다.

정광이 정말 달린 것이다!

그것도 엄청 빨리!

쉬이이익-

-어디?

정광이 토굴 끝의 갈림길에 이르러 묻자 정신을 차린 역천경이 급히 울었다.

-웅! 웅!

쾅!

정광은 무림맹 암어 따위는 집어치우고 역천경이 알려준 토굴 옆에 주먹질로 표시를 남겼다.

그리고 그 토굴을 달렸다.

안에 있던 사기가 흔들렸다.

-뭐 해?

-크, 크아아앙!

꺄아아악!

사기가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정광은 계속 달리며 역천경의 힘을 북돋아줬다.

-이제 말하기 전에 알아서 할 거지?

-우, 웅!

질주가 시작됐다.

순식간에 여러 개의 토굴을 통과함은 물론이요, 사술을 펼치고 있던 자들에게 타격을 줬다.

모두 역천경의 활약 덕분!

정광은 흐뭇한 마음에 통 큰 결심을 했다.

‘녀석. 잘하네. 일이 정리되면 돼지 피라도 듬뿍 줘야겠어.’

그건 그거고.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기감을 키우자 뚜렷한 두 개의 기가 느껴졌다.

그것들이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왔냐?’

이렇게 반가울 수 있나.

예전에 상대했던 창사, 부사 정도의 실력자 아닌가.

‘사파무림에서 제일 센 놈들이 팔사(八邪)라 했지. 그다음 배분에서는 십이웅(十二雄)이고.’

모두 토굴에 있지는 않고 땅 위에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나뉘어 있을까?’

그들만 생각해선 안 됐다.

천하는 넓고 사람은 많기 마련.

사파무림에도 남궁학처럼 대기만성형의 인물이 있거나 남궁화운처럼 숨어 지내 천하가 모르는 고수가 있을 것이다.

‘한로 그놈도 팔사급이었지.’

방심하지 말고 하나하나 최선을 다해 상대해야 했다.

‘되도록 쉽게. 빨리 죽인다.’

정광은 새로운 토굴에 들어서자마자 신형을 멈췄다.

역천경은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고 포효했다.

-끄아아앙!

끼아아악!

토굴 속의 사기가 괴로워하며 스러지는 그 순간.

두 사람이 나타났다.

무척 왜소한 체구의 노인들이었다.

“어? 진짜 똑같이 생기셨네요. 얼굴의 점 위치만 빼고.”

정광이 놀라자 노인들이 한목소리로 물었다.

“쌍포태(雙胞胎)를 처음 보느냐?”

“아뇨. 그건 아닌데…….”

정광은 두 노인을 번갈아 보며 감탄했다.

“이렇게 인상이 더러우신 쌍포태는 처음 봐서요.”

“…….”

노인들은 부정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래서였다.

하지만 기분이 좋을 리 있나.

목소리에 살기가 맺혔다.

“듣던 대로 입이 걸구나.”

“조금 아프게 죽여주마.”

“헌데 대체 무슨 수를 쓴 것이냐?”

“어떻게 사기를 흔들어 술사들이 피를 토하고 거꾸러지게 했지?”

역천경이 으스댔다.

-우우우웅!

안타깝게도 정광의 머릿속에서만 들리는 외침이었다.

-시끄러.

-……웅.

정광은 노인들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역으로 물었다.

“팔사 중 쌍사(雙邪)로 불리는 분들이신 것 같은데. 두 분으로 괜찮으시겠어요?”

“물론.”

“거짓말. 시간 끌려고 헐레벌떡 달려오신 거면서.”

“……!”

담담하던 쌍사의 표정이 바뀌었다.

음습한 살기를 줄기줄기 흘리며 병기를 꺼내 들었다.

얼굴 왼쪽에 점이 있는 노인, 좌사는 두 개의 원앙월(鴛鴦鉞). 오른쪽에 점이 있는 노인, 우사는 팔 길이에도 못 미치는 쇠꼬챙이였다.

정광은 그들을 보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체구도 작은 데 단병기(短兵器)를 쓰네. 좁은 토굴에선 상당히 효율적이겠어.’

운룡을 못 쓸 만큼 좁지는 않았으나, 작은 노인 둘이 서로 다른 방향에서 공격해 올 게 뻔했다.

‘적수공권으로 상대하는 게 나으려나.’

정광은 그들의 살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내며 왼손을 까딱거렸다.

“오세요. 거의 동시에 태어나셨으니, 가시는 것도 그렇게 해드리죠.”

“…….”

쌍사는 이를 지그시 물으며 참았다.

새카맣게 어린 정광이 도발을 넘어 폭언을 했지만, 먼저 움직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흔들리지 말고 시간을 끌어야 해.’

‘놈은 진짜 고수다.’

‘가균, 창사, 부사에다가 련주의 한쪽 팔인 한로까지 당했어.’

‘진천뢰를 쏟아부어 만든 함정에서도 살아남다니. 이게 사람인가?’

다른 것이야 그렇다 쳐도.

마지막 것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강하다 해도 한낱 인간에 불과하거늘, 그 엄청난 폭발을 어떻게 견뎠을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둘이 동시에 똑같은 생각을 하는 순간.

정광이 움직였다.

일장 반 정도밖에 안 되는 너비의 토굴에 나란히 서 있는 쌍사.

그들 중 좌사에게!

후웅-

정광의 주먹이 무거운 기세를 품고 쏘아졌다.

좌사는 물러서지 않고 대응했다.

그의 양손에 들린 원앙월이 정광의 손목을 절월세(切鉞勢)의 수로 잘라갔다.

우사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쇠꼬챙이를 쭉 내밀어 정광의 허벅지를 찔러오는 것 아닌가.

‘이런.’

정광은 눈살을 찌푸렸다.

두 사람 모두 철혈무쌍용갑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부위를 노리고 있어서였다.

‘한로 그놈이 도마뱀 내의에 대해 불었구나.’

입이 무거워 사내다운 가균이 그리워졌다.

재빨리 한 걸음 물러나 쌍사의 공격을 피한 뒤 좌사를 버리고 우사에게 달려들었다.

쉬익-

오른 다리가 채찍같이 휘며 우사의 관자놀이를 노렸다.

우사는 자세를 낮추며 쇠꼬챙이로 정광의 정강이를 찔렀다.

좌사도 바닥을 지지하고 있는 정광의 왼다리를 원앙월로 찍어갔다.

정광의 눈이 빛났다.

왼손을 활짝 펴자 소매 속에서 소운룡이 튀어나왔다.

그것을 그대로 잡고 좌사의 미간을 쑤셨다.

오른다리를 다시 접어 쇠꼬챙이를 피했다.

동시에 오른손으로 허리에 있던 운룡을 뽑아 휘둘렀다.

쉬익-

누가 봐도 감탄이 나올 만큼 불시에 이루어진 적절한 공격이었으나.

“훅.”

“흡.”

쌍사는 재빨리 뒤로 굴렀다.

소운룡과 운룡이 그들을 종이 한 장 차이로 비껴갔다.

정광은 나직이 감탄했다.

“정말 훌륭한 나려타곤(懶驢打滾)이네요!”

“…….”

“막을 생각조차 안 하고 구르시는 걸 보니 제 검이 잘 드는 걸 아시나 봐요.”

“…….”

“다른 팔사 어르신들보단 한참 못하지만 꽤 하시네.”

정광이 이죽거리자 쌍사의 눈빛이 강해졌다.

그렇다고 달려들지는 않았고.

병기로 자신들의 몸을 엄밀히 보호할 뿐이었다.

“격장지계는 소용없다.”

“네놈이야말로 제법 하는구나.”

정광은 운룡을 검집에 꽂고 소운룡도 소매 속에 넣었다.

그리고 정중히 두 손을 모았다.

“칭찬 고마워요.”

“…….”

무슨 수작을 부리는가 싶어 바짝 긴장하고 있던 쌍사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너무 어둡네. 불 켜고 해보죠.”

정광은 품속에서 화섭자(火攝子)를 꺼내 불을 밝혔다.

화르륵-

빛이 일어나며 어둠을 먹었다.

쌍사는 더 황당해진 얼굴로 정광을 주시했다.

‘너무 어둡다고?’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웬만한 고수만 돼도 어둠은 큰 장애가 되질 못한다.

하물며 정광 같은 고수에게 불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지만 정광은 마음에 안 찬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래도 어둡네. 더 밝게 해볼까.”

메고 있는 작은 봇짐에 손을 쑥 넣는가 싶더니.

“여차.”

어린아이 머리통 크기의 칙칙한 구체(球體)를 꺼냈다.

한쪽에 달린 눈곱만 한 심지가 인상적이었다.

너무 인상적이어서 쌍사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지, 진천뢰?’

‘저, 저걸 어떻게?’

놀람이 가시기도 전.

그 짧디짧은 심지에 화섭자의 불이 붙었다.

정광은 그것을 살짝 던지며 웃었다.

“많이 밝아질 거예요.”

“……!”

쌍사는 눈부신 속도로 판단을 내렸다.

‘신법을 펼치기엔 늦었어!’

‘어떻게든 버틴다!’

즉시 양팔의 상박으로 안면을 가리며 온몸을 웅크렸다.

호신강기(護身罡氣)를 일으켜 전신을 보호하며 이를 악물었다.

‘이 미친 새끼!’

‘이것만 견디면 가만두지…….’

눈부신 빛이 토굴을 밝히며 굉음이 터졌다.

“콰앙!”

쌍사가 움찔하는 그때, 정광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동정호의 쇠기둥 조각들을 우그려 만든 철구로 쌍사를 속인 그는, 폭음을 흉내 내 외치며 찬란히 빛나는 운룡을 휘둘렀다.

서걱!

“끄악!”

쌍사의 천령개가 갈라졌다.

고강한 무공으로 강호를 질타하던 그들답지 않은 허무한 죽음이었다.

정광이 아무리 강해졌어도 그들을 이렇게 쉽게 죽일 순 없었으나.

정광이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수작을 부려 그걸 가능케 한 것이다.

‘아. 더러워.’

정광은 운룡에 묻은 불쾌한 것들을 쌍사의 옷에 문질러 닦아냈다.

그리고 철구를 주웠다.

혹시 몰라 구멍을 뚫고 달아뒀던 작은 심지가 아직도 붙어 있었다.

‘진천뢰로 장난치는 놈이 있으면 나도 있다고 협박하려 했는데. 먼저 꺼내지 않는 걸 보니 다 썼나 보네.’

쌍사는 시간을 끌어야 하는 형편인데도 진천뢰를 꺼내지 않았다.

‘힘도 아껴야 하고. 혹시 모르니 만나는 놈마다 꺼내서 확인해 봐야지.’

정광은 철구를 봇짐에 넣고 손목과 발목을 몇 번 돌렸다.

“좋아. 다시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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