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갈림길
권존은 마치 암흑 속에서 부유하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는 암흑.
희미한 의식만 남아 있을 뿐.
자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제대로 인지할 수 없었으나…….
‘……!’
가슴에서 따뜻한 촉감이 느껴졌다.
그것이 그의 의식을 완전히 깨웠다.
‘……누구?’
드러누운 채 가까스로 눈을 뜨자 짙은 어둠이 보였다.
그래도 조금 전까지 부유했던 암흑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안력을 집중하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정광이었다.
그가 권존의 품속에 있던 것들을 꺼내서 살펴보고 있었다.
‘…….’
보통 놈이 아니라는 건 진작 알았다만.
이렇게 날카로우면서도 신중한 눈빛이라니.
어떻게 하면 한 푼이라도 더 후려칠 수 있을까 고민하며 물건의 값어치를 가늠하는 악덕 전당포 업자 같지 않은가?
권존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후우우. 아직 안 죽었다.”
“그렇죠.”
“헌데 왜?”
권존이 의아해하자 정광이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제가 어르신 소지품을 털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아니더냐?”
“저를 뭐로 보시고. 치료해 드리려고 이러는 거잖아요.”
정광은 권존의 품에서 꺼낸 것들을 대충 그러모으며 투덜거렸다.
“치료해 드리려면 영약이나 하다못해 요상약(療傷藥)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하나도 없으시네요. 부자로 유명한 진주언가의 태상가주님께서 말이죠.”
“하나 있었지만 동정호에서 먹었다.”
“아.”
“누구 덕분에.”
정광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하나만 더 챙기시지. 상태가 별로 안 좋으세요. 그 난리 속에서 살아남으셨으니 이 정도인 것도 다행이려나.”
권존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정광이 말한 난리가 떠올라서였다.
‘……대단한 함정이었어.’
절벽이 무너지며 바위와 토사를 쏟아붓고, 바닥이 폭발하며 묻혀 있던 철환과 자갈을 쏘아냈다.
천지(天地)에서 시차를 두고 이뤄진 절묘한 합격!
전신을 호신강기(護身罡氣)로 보호하고 팔방으로 권장지각(拳掌指脚)을 떨치며 떨어져 내렸으나.
그 모든 것들을 막아낼 순 없었다.
무림일절 외문기공인 철갑신공(鐵甲神功)까지 썼는데도.
‘뒤통수에 뭔가를 맞으며 정신을 잃었던 것 같은데. 여긴 어디지?’
캄캄한 어둠과 짙은 흙냄새.
대충 짐작이 갔다.
“땅속에 묻힌 게냐?”
“비슷해요.”
“진천뢰가 터지며 파인 땅은 아닌 것 같다만.”
권존의 말대로였다.
그렇다기엔 너무 깊었다.
절묘하게 맞물려 천장을 이루고 있는 거대한 바위들도 이상했고.
정광이 그의 의문을 풀어줬다.
“우리가 내려서려던 협곡 사이의 길이요. 사마련이 그 밑에 넓은 함정을 파놨어요. 진천뢰가 터지며 함정 위의 땅을 지지하던 목재도 부러졌죠.”
“……땅이 꺼지며 발 디딜 곳이 없어져 신법을 펼칠 새도 없이 여기에 빠진 건가?”
“네.”
“……미친놈들 같으니.”
미쳐도 보통 미친 게 아니었다.
그 넓고 긴 길에 함정을 파다니.
얼마나 많은 인력과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까?
황당해하는 권존과 달리 정광은 사마련을 칭찬했다.
“무식하지만 남는 장사죠. 무림맹 본대가 그냥 지나갔으면 몰살당했을 테니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구나. 우리도 운이 좋았군.”
“네? 뭐가요?”
“위에 쌓인 바위들 말이다. 운 좋게 저런 형태로 떨어지지 않았느냐?”
“운이라뇨. 저렇게 만드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고생했다니? 설마?”
“떨어지면서 검으로 밀고 당겼죠.”
“……!”
정광은 경악하는 권존을 일으켜 앉혔다.
“크윽.”
“그보다 치료부터 하죠. 가부좌 트세요.”
권존은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으나 이를 악물며 정광의 말에 따랐다.
마침내 가부좌를 튼 그는 뒤를 봤다가 정면을 주시했다.
“통로가 있구나.”
아까부터 약한 바람이 불어온다 싶더니, 꽉 막힌 뒤와 달리 긴 토굴이 뚫려 있었다.
높이도 폭도 일장 반 정도 되려나?
지지대인 듯한 수많은 목재가 토굴 벽과 천장을 단단히 떠받치고 있었다.
정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여기부터가 협곡 사이의 길이 끝나는 곳일 거예요. 사마련이 함정을 파기 위해 들어온 통로겠죠.”
“나를 데리고 잘도 여기까지 뛰었구나. 정말 아슬아슬했겠어.”
“한쪽 절벽 거의 끝까지 가던 중에 뛰어내렸으니까 구덩이 속에서 달린 거리는 얼마 안 돼요.”
권존은 정광을 새삼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이런 겸손이라니, 정말 정광이 맞나 싶었다.
“어쨌든 고맙다. 헌데 이 통로 쪽으로 나갈 생각이냐?”
정광이 천장의 바위들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위로 못 나갈 건 아닌데. 나가봐야 적들이 새까맣게 몰려와서 기다리고 있을걸요.”
“하긴. 내가 사마련주여도 그랬을 것이다. 합공을 당하다가 죽느니 소수로 다수를 상대할 수 있는 토굴이 낫지.”
“죽긴 왜 죽어요. 조금 귀찮을 뿐이지.”
“……네 말이 옳다. 내가 약한 소리를 했구나. 다른 이들은?”
권존이 다른 노인들을 찾자 정광이 피식 웃었다.
“어르신 몸부터 챙기세요. 내상을 입으신 데다 출혈도 있잖아요. 타박상도 심하시고. 뼈는 부러지지 않으셔서 다행이지만.”
보통 내상과 출혈이 골절보다 더 심각한 피해였지만, 권존은 정광의 말을 이해했다.
“그래. 몸을 놀릴 수는 있으니 최악의 상황은 아니야.”
“문제는 머리인데…….”
“멀쩡하다.”
“그건 제가 판단해야죠.”
정광은 권존을 빤히 노려보다가 불쑥 물었다.
“제가 아까워요, 손녀분이 아까워요?”
“당연히 의진이가 아깝지.”
“좋아요. 여전히 계산을 못 하시는 걸 보니 정신을 차리셨네요.”
“…….”
권존은 어이가 없어 정광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서도 이런 농을 하다니.
이놈의 배포는 얼마나 넓은 걸까?
하지만 정광은 진심이었다.
‘아무리 셈을 못 해도…… 이건 제대로 계산해 주겠지.’
품에서 작은 목갑(木匣)을 꺼냈다.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그것을 감싸고 있는 기름종이를 풀었다.
“그게 무엇이길래?”
“조용히 해주실래요. 안 그래도 마음이 흔들리는데.”
정광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목갑을 열고 그 속에 있던 작은 단환(丹丸)을 꺼냈다.
그것을 한참 노려보다가 묵직한 기합을 질렀다.
“하압!”
“흡!”
단환이 입속으로 들어오자 권존의 눈이 커졌다.
혀에서 쌉쌀한 맛이 느껴진다 싶더니 금세 녹아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것 아닌가!
순식간에 뜨거운 열기가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여, 영약?’
정광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나직이 속삭였다.
“무림제일의가인 무한의가(武漢醫家)의 속명단(續命丹)이에요. 딱 하나 남아 있던 거죠. 대단한 값어치를 가진 귀물이지만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
권존은 무척 놀랐다.
영약은 아니나, 최고의 요상약으로 이름 높은 무한의가의 속명단이라!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이런 것을 준다고? 허어. 소문과 다르게 무척…… 아니지.’
그럴 리가 있나.
다른 이들에게 몇 번 들어본 얘기가 생각났다.
“나중에 갚으면 되니까?”
“…….”
정광이 권존을 노려보다가 일어섰다.
“다른 분들은 토굴을 살펴보러 가셨어요. 곧 오셔서 호법을 서 드릴 테니 운기요상에 전념하세요.”
그리고 몸을 돌려 토굴을 향해 걸었다.
권존은 황당한 얼굴로 그 모습을 보다가 이맛살을 좁혔다.
‘얼굴도 멀쩡하더니 도복 또한 말끔하군. 전혀 안 다친 것인가? 무공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말이 안 되는…… 아!’
권존의 눈이 커졌다.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는 넝마가 다 된 옷을 봐서였다.
‘이건 곤륜 특유의 도복! 게다가 피투성이!’
고개를 돌리자 정광이 메고 있는 작은 봇짐이 보였다.
‘입고 있던 것을 버리고 새것으로 갈아입은 것이구나!’
권존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벗어놓은 도복만 봐도 중상을 입은 게 확실하거늘,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속명단을 양보하다니!
권존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부끄럽고, 또 부끄럽도다.’
정광의 희생 덕분에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살아났건만.
그런 줄도 모르고 모진 말을 해버렸다.
정광을 다시 볼 면목이 없었으나.
권존은 일의 선후를 아는 노강호였다.
‘먼저 몸을 회복한다.’
언온태산기공(彦蘊太山氣功)을 운기했다.
단전에서 솟아오른 내공이 속명단의 약기를 흡수해 온몸 구석구석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권존의 머리와 가슴에 그가 해야 할 일이 새겨졌다.
‘회복하자마자 진옥룡 앞에서 길을 연다! 내 모든 것을 걸고!’
* * *
정광은 얼마 걷지 않아 돌아오던 세 노인과 만났다.
“어떠셨어요?”
남궁학이 대표로 대답했다.
“십장 더 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어르신. 토굴이라 많이 울리네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내공으로 차단 좀 해주실래요? 내공이 제일 정순하시니…….”
“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요?”
“양쪽 다 십장을 가면 또 갈림길이 나온다. 거기서 멈췄다.”
“잘하셨어요. 몸도 성치 않으신데.”
남궁학, 당기황, 창존 모두 꼴이 말이 아니었다.
의복이 엉망인 건 물론이요, 상처투성이인 데다 안색까지 파리했다.
“권존 어르신께서 운기조식하고 계시니 어르신들께서도 같이하세요. 돌아가시면서 호법 서시고요.”
“잠깐. 제자야, 너 홀로 토굴들을 뒤질 생각이냐?”
당기황의 물음에 정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죠. 출구도 찾아야 하고 언제 적들이 몰려올지 모르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되니까 했죠.”
당기황이 또 소리치려는데 창존이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놈들이 토굴들을 다 막아버릴지도 모르겠군. 아니, 벌써 막혔을지도.”
“그건 아닐걸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애초에 폐쇄하지 않았으니까요.”
“자세히 말해보거라. 어서.”
창존이 채근하자 정광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 함정은 무림맹 본대를 잡으려고 만든 거예요. 우리 같은 소수가 아니고요. 많은 이들이 파묻혔으면 그만큼 생존자도 꽤 나왔겠죠?”
“그렇겠지.”
“그들을 생포할 생각이었을 거예요.”
“왜?”
“진천뢰를 이렇게 많이 터뜨렸으니 역모죄를 피할 수 없겠죠.”
“그게 무슨 상관이냐?”
“정파 무인들을 잡아서 몰래 바치면 황상께서도 누그러지시지 않을까요? 눈엣가시였던 무림인들을 떼로 죽이고 정파 무공을 아는 자들을 진상한다. 누그러지시는 정도가 아니라 좋아하실 것 같은데.”
“…….”
“그래도 남은 정파무림의 세력이 적지 않으니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사마련의 죄를 어느 정도 선에서 눈감아주실지도 모르죠. 제위를 넘겨주실 때가 됐는데 사마련을 치느라 황군을 소모하는 것보단 나은 장사일 듯싶은데. 와. 정말 무서운 분이시네.”
“……나는 네가 더 무섭구나.”
세 노인이 질린 눈으로 쳐다보자 정광은 손을 저었다.
“오해예요, 오해. 그보다 중요한 건. 본대가 오기 전에 척후조인 우리가 함정을 발견했다는 거죠. 이왕 들킨 일, 할 수 없이 함정을 발동했겠지만 우린 살았고요. 아니, 애초에 소수 정예만 올 거라 예상하면서도 이랬을 수도 있겠네요.”
당기황이 가슴을 펴며 거들먹거렸다.
“나를 잡으려면 그 정도로 애를 쓸 만도 하지.”
창존이 콧방귀를 뀌었다.
“자네가 아니라 정광 때문인 것 같은데.”
“악가야, 최소한 너는 아니다.”
“흠. 확인해 볼까?”
“원하던 바다!”
정광이 눈살을 찌푸렸다.
“몸부터 회복하시죠.”
“…….”
“곧 몰려올 테니까요.”
창존이 당기황을 노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알겠다. 그렇게 하마.”
“그럼 먼저 갈게요. 갈림길마다 무림맹 암어를 남길 테니 운기조식 끝나시면 오세요.”
당기황이 얼굴을 찡그렸다.
“잠깐. 아무리 생각해 봐도 위험해. 토굴 천장을 뚫고 올라가는 건 어떠냐? 시간이 좀 걸리고 소리가 나서 적들이 몰려오겠지만 넓은 곳에서 신법을 펼치며 싸울 수 있으니 그게 더 나을 것 같다만.”
정광이 턱을 쓰다듬었다.
“나쁜 방법은 아니네요.”
“그렇지? 흐흐.”
당기황이 창존을 보며 턱을 치켜드는데 정광이 덧붙였다.
“그렇게 하더라도 토굴에서 적의 숫자를 줄이고 하죠.”
“…….”
“최대한 많이 줄이고 싶거든요.”
“…….”
세 노인의 눈에 뜨거운 빛이 맺혔다.
“그래, 그래야 내 제자지.”
“후후. 간만에 피가 끓는군.”
“잠시 후에 보자.”
그들이 돌아서는 순간.
정광이 다전음을 펼쳤다.
-절벽에서 떨어지다가 기절하신 권존 어르신을 방패로 쓴 건 비밀이에요.
-……!
-어르신들께서도 권존 어르신 덕분에 덜 다치셨잖아요. 맞죠?
세 노인의 눈이 흔들렸다.
-외공이 워낙 탄탄하셔서 별로 안 다치셨으니 죄책감 느끼지 마세요.
세 노인은 고개를 돌려 정광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고 눈빛으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정광은 씩 웃어 보인 뒤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십장쯤 걸었을까.
남궁학의 말대로 갈림길이 나왔다.
‘냄새하고는. 뭐가 이렇게 축축해?’
음습한 습기는 물론 더러운 기운이 풀풀 풍겼다.
‘뭐, 상관없지.’
권존의 도움을 받은 데다 철혈무쌍용갑(鐵血無雙龍甲)을 입고 있어 별다른 부상은 입지 않은 상황.
권존의 피가 묻고 넝마가 된 도복은 새것으로 갈아입어 속에 입은 철혈무쌍용갑을 완벽히 감췄다.
‘남궁세가에서 봤던 한로 그놈이 도마뱀 내의에 대해 사마련주에게 말했으려나?’
가균처럼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 말 안 했으면 좋을 텐데.
‘아니면 말고.’
소모했던 내공은 권존이 깨어나기 전에 운기조식해서 보충한 지 오래였다.
한마디로 거의 완벽한 몸 상태.
‘권존의 소지품들도 봇짐에 넣었고. 흐음. 어디가 나으려나.’
정광은 토굴 두 개를 번갈아 보다가 빠른 길을 택했다.
-천경아, 천경아. 바쁘니?
정광의 너무나 부드러운 물음에 역천경이 소스라치게 놀라 부정했다.
-우웅! 우웅! 우웅!
-그래? 그것참 다행인걸?
-웅! 웅! 웅!
정광은 품속에 손을 넣어 역천경을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놀란 역천경이 파르르 떨었다.
-네가 할 일이 있거든. 열심히 해줄래?
-웅! 웅! 웅!
역천경은 미친 듯이 울고.
정광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제일 더러운 사기(邪氣)가 느껴지는 통로 있지? 그쪽을 알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