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264화 (263/569)

264화

천근추(千斤錘)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고, 무림맹 본대가 오기 전에 제거한다.

되도록 쉽고 안전하게.

“잠시만요.”

정광이 한 손을 들자 경신술을 펼쳐 빠르게 달리던 척후조가 우뚝 멈춰 섰다.

“무슨 일이냐?”

당기황이 묻자 정광이 허리를 숙여 자신의 다리를 주물렀다.

“좀 무리했나? 다리가 땅겨서요.”

“…….”

“먼저 가시죠. 금방 따라갈게요.”

“…….”

당기황은 황당한 표정으로 정광을 바라볼 뿐이었다.

“왜요?”

“……다리가 땅긴다고? 네가?”

“네. 출발 안 하세요?”

“…….”

당기황은 바보가 아니었다.

정광이 어떤 사람인지도 알 만큼 알았고.

‘뭔가 있구나.’

사천성(四川省)에서 정광에게 속아 생사를 넘나들며 싸워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또 당할 것 같냐!’

당기황은 한 걸음 물러나며 자신의 양팔을 쓰다듬었다.

“계속 바람을 맞으며 달려서 그런가. 이상하게 춥군.”

이번엔 정광이 황당해했다.

“혈색은 좋으신데.”

“아직 어린 네가 뭘 알까. 내 나이가 몇인 줄 아느냐?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야.”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정광은 고개를 돌려 다른 이들에게 권했다.

“어르신들, 먼저 가시죠.”

“…….”

“어서요. 이러다 날 새겠어요. 어느 분이 선두에 서실지 지목해 드릴까요?”

정광의 시선이 남궁학을 향했다.

남궁학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정광에게 속아 용화산(龍華山)에 은신해 있던 적들에게 홀로 뛰어들었던 기억이 나서였다.

“나는 싫다.”

“외로움을 많이 타시네요. 그럼 권존 어르신?”

권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정광의 흉계에 빠져 동정호(洞庭湖)에 수장될 뻔한 그였다.

며칠이나 지났다고 그걸 잊겠는가?

“사양하지.”

“그럼 창존 어르신. 괜찮으시죠?”

창존의 근엄한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다른 이들처럼 정광에게 당해 죽을 뻔했던 경험은 없었으나.

들은 얘기만으로도 충분하다 못해 넘칠 지경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차라리 다 같이 쉬었다 가자꾸나.”

“와. 어르신들. 왜 이렇게 소극적이세요?”

네 노인은 정광을 노려보며 속으로 외쳤다.

‘당연히 네놈 때문이지!’

정광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자신을 가리켰다.

“설마 저를 의심하시는 거예요?”

모두의 눈이 빛났다.

‘말이라고!’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쌩쌩하던 놈이 협곡이 나타나자마자 엄살을 부리다니.’

‘지형하고는. 함정을 파기 딱 좋은 곳이야.’

‘군사가 주의하라고 했던 곳들 중 하나답군.’

‘강호에서 구른 세월이 있지. 우리가 당할 것 같냐?’

네 노인은 내공을 끌어 올렸다.

오감(五感)이 깨어나며 기감(氣感)도 확장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노인들의 얼굴이 굳었다.

‘특별히 느껴지는 건 없는데.’

‘이 녀석은 뭔가 알아챈 게 틀림없어.’

‘감 하나는 좋은 녀석이니.’

‘대체 어떤 함정이 있길래?’

한편, 정광은 그들을 둘러보며 내심 혀를 차고 있었다.

‘텄네. 무슨 놈의 의심이 이렇게 많아?’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차선을 택할 수밖에.

“어? 협곡에서 희미한 기가 느껴지네요.”

“…….”

“잠시만요. 오오. 여기저기 많이 있는데요?”

“…….”

정광은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노인들에게 물었다.

“저처럼 느끼신 분? 손이요.”

“…….”

“어? 진짜 못 느끼신 거세요? 강호를 떨어 울리시는 어르신들께서요?”

성격이 제일 급한 당기황이 폭발했다.

“이런 고얀 놈을 봤나! 이제는 격장지계까지 쓰는 것이냐!”

“네.”

“아니긴 뭐가 아니…… 뭐?”

정광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격장지계, 맞아요.”

“……왜?”

“힘들더라도 본대가 오기 전에 해치우고 싶어서죠.”

남궁학이 물었다.

“공을 탐하는 것이냐?”

“아뇨. 그런 거 세워봤자 뭐에 쓴다고.”

“그럼?”

“본대와 함께하면 힘은 좀 덜 들겠지만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겠죠.”

“그렇겠지.”

“하지만 소수 정예로 나서면 실패하더라도 몸을 빼긴 쉽지 않겠어요?”

“흐음.”

어차피 지나야 하는 길이다.

먼저 쳐서 제거하면 좋고, 실패해도 피해가 적을 거란 얘기.

남궁학이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나는 찬성이다.”

“역시 새로운 검존(劍尊)이 되실 분다우시네요.”

창존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말이냐? 새로운 검존이라니.”

“자격이 충분하신 분이 계시니 빈자리를 채워야죠.”

“그걸 네가 정한다고?”

“문제 있나요?”

“아니, 네가 강한 건 인정한다만 아무리 그래도…….”

남궁학이 오만한 눈으로 창존을 노려봤다.

“불만이 있으면 내게 말해라.”

“……자네, 많이 변했군.”

“어떤 점이?”

창존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원래부터 건방졌지만, 더 건방져졌다는 말일세.”

“변한 건 너야.”

“내가? 궁금하군. 말해보게나.”

남궁학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원래 약했지만, 더 약해졌다는 말이지.”

“…….”

“못 믿겠다는 표정이군. 한번 해볼까?”

“……바라던 바다!”

창존이 창을 뽑으려는 순간.

정광이 끼어들었다.

“왜 같은 식구끼리 피를 보려고 하세요? 적부터 해치우고 천천히 하시죠.”

두 사람이 뭐라 대꾸하려 했으나 정광의 말이 더 빨랐다.

“어르신들께서 왜 적들의 기를 못 느끼시는지 아세요?”

안 그래도 궁금하던 참이었다.

권존이 협곡을 주시하며 물었다.

“거리가 좀 있긴 하나 이해가 안 된다. 얼마나 대단한 고수가 은신해 있길래?”

“고수도 있겠지만, 진 속에 숨어 있어서죠.”

“진이라?”

“네. 여기저기 많이도 깔아놨네요.”

그제야 노인들은 납득할 수 있었다.

“진이라면 그럴 만하지.”

“헌데 너는 어떻게 아는 것이냐?”

정광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저니까요.”

“…….”

“아. 오해하지는 마세요. 진 때문에 어색하게 뒤틀린 자연지기(自然之氣)를 읽었을 뿐이에요. 가까이 가서 봐야 파훼법이 보일걸요.”

“…….”

“이해하셨죠?”

아무도 고개를 끄덕이진 않았으나.

젓지도 않았다.

혼자 모른다고 할 수는 없기에 서로의 눈치를 본 결과였다.

“이제 설명은 다 드렸고. 깨러 가죠.”

정광은 말을 끝내자마자 협곡을 향해 달렸다.

네 노인의 눈이 커졌다.

‘이놈이!’

‘이러면 따라갈 수밖에 없잖아!’

정광의 말대로라면 사마련이 준비를 단단히 해놓은 곳이었다.

그런 곳에 정광 홀로 보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네 노인도 즉시 신법을 펼쳤다.

정광은 그들이 바짝 따라붙는 걸 느끼며 피식 웃었다.

‘이럴 땐 제법 정파답단 말이지.’

그건 그거고.

협곡이 급속도로 확대됐다.

‘어디부터 확인해 볼까.’

절벽들 사이로 나 있는 길을 달릴 생각 따윈 없었다.

그러다 위에서 뭐가 쏟아져 내릴 줄 알고?

정광은 다전음을 펼쳤다.

-절벽 위로 갈 겁니다! 십자진(十字陣)을 펼쳐주세요!

-……!

척후조를 만들며 정광이 설명했던 진형 중 하나!

네 노인은 즉시 정해진 자리로 움직였다.

선두야 당연히 정광.

창존이 좌측, 남궁학이 우측.

당기황이 중앙, 권존이 후위를 맡았다.

그야말로 완벽한 십자진!

정광은 마음이 든든해졌다.

‘아니다 싶으면 튀자. 넷이면 시간은 충분히 벌어주겠지.’

하지만 그건 최악의 상황이 됐을 때 얘기고.

지금은 전력을 아끼며 싸워야 했다.

-이쪽요!

정광의 신형이 솟구쳤다.

네 노인도 동시에 날아올랐다.

순간, 그들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잠깐. 우리는 적들 한가운데 떨어지게 하고, 혼자 천근추(千斤錘)를 펼쳐 안전한 중간에 떨어지는 거 아니야?’

그럴 리가 있나.

정광은 그렇게 후안무치한 사내가 아니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지금은 아니었다.

가파른 절벽을 밟고 또 위로 솟아올랐다.

노인들도 뒤를 따랐다.

그러길 몇 차례.

드디어 절벽 위에 착지했는데.

좌측 허공에서 화살들이 날아왔다.

쐐애액-

정말 놀라운 일이었으나 정광은 물론이요,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거리가 멀었을 때였다면 모를까, 지척에 펼쳐져 있는 진을 왜 못 느끼겠는가?

하물며 그 속에 몸을 숨긴 채 쏘아내는 화살 정도야.

“겨우 이거냐!”

창존의 창이 광풍을 일으키며 휘돌았다.

그 바람에 휩쓸린 화살들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흥.”

중앙에 있던 당기황이 손을 떨쳤다.

손톱 크기의 철환(鐵丸)들이 화살이 날아온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빠각!

“컥!”

허공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의 것이었다.

정광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소리쳤다.

“우측이요!”

“알고 있다!”

남궁학의 검이 전방을 갈랐다.

말라죽은 아름드리나무가 반으로 갈라지며 그 속에 은신해 있던 사내의 가슴에서 피가 튀어 올랐다.

‘피해?’

남궁학의 눈썹이 꿈틀했다.

양단하려고 했건만 베는 것으로 끝나다니?

‘제법 하는구나.’

분노와 흡족함이 뒤섞였다.

다시 검을 떨치려고 했으나.

늦었다.

권존이 순식간에 신형을 날려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다.

퍼엉!

“끄악!”

깔끔한 붕권(崩拳)에 맞은 사내는 고깃덩어리가 되어 날아갔다.

‘내 것이었거늘.’

남궁학과 권존의 시선이 부딪혔다가 떨어졌다.

다툴 만한 상황이 아니어서였다.

‘평범한 진들이 아니야.’

아까의 것처럼 몸을 숨기는 진만 있는 게 아니었다.

착시를 일으키는 건 기본이요.

방향감각에 혼란을 주는 것들도 있었다.

심지어 환각에 빠뜨리는 것까지.

아무리 십존이라 해도 쉽게 파괴할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무식하게 많이 깔아놨구나! 다 힘으로 부술 것이냐?”

당기황이 안 그래도 흉측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묻자 주위를 둘러보고 있던 정광이 웃었다.

“설마요. 머리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죠.”

정광은 머리뿐만 아니라 손도 사용했다.

손으로 십장 앞에 있는 큰 바위를 가리킨 것이다.

“창존 어르신, 저거 부숴주세요. 가까이 가진 마시고요.”

창존의 눈이 밝게 빛났다.

자꾸 눈을 가리려는 환각을 밀어내며 들고 있던 창을 세차게 던졌다.

맹렬히 회전하며 날아간 창이 바위에 박히는가 싶더니.

콰아앙!

바위가 폭발하며 산산이 조각났다.

그러자 바위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던 두 개의 진이 뒤틀렸고.

창존을 비롯한 노인들의 눈이 커졌다.

“큭.”

“환각이 더 심해졌잖아!”

“어떻게 된 것이냐?”

정광은 가볍게 대꾸했다.

“원래 날이 밝기 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죠. 창존 어르신, 저기 저 나무도 박살 내주세요.”

“또 던지면 창이 한 자루밖에 안 남는다!”

“다시 회수하시면 되잖아요.”

창존의 창이 다시 날았다.

콰지직!

나무가 터져 나가며 근처의 진이 흔들렸다.

그리고 절벽 위에 있던 대부분의 진들이 힘을 잃기 시작했다.

“감각을 속이는 진들은 이제 문제없죠?”

정광의 물음에 네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 해치우죠.”

“잠깐! 창부터 회수하고!”

정광과 네 노인은 진을 부수고 적을 죽였다.

이렇게 한쪽 절벽 위를 거의 다 정리해가던 중.

정광이 인상을 찡그렸다.

소름 끼치는 기운이 느껴져서였다.

‘어떤 놈이길래?’

앞에 있던 자의 목을 날리며 건너편 절벽을 바라봤다.

화려한 장포를 걸친 중년인이 서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중년인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무척 잔혹하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정광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사마련주 사지환?’

확실했다.

저렇게 기분 나쁜 기운을 풍기는 대단한 고수가 그 말고 또 있을까?

‘왜 저쪽에? 아!’

정광은 재빨리 외쳤다.

“반대쪽 절벽으로 뛰세요!”

“……?”

“어서…….”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콰아아아앙!

그들이 디디고 있던 절벽 끝이 터졌다.

그 폭발에서 일어난 화염은 또 다른 폭발을 일으켰고 절벽 전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마련이 숨겨놓은 진천뢰(震天雷)가 연쇄 폭발한 것이다!

‘진천뢰인가!’

‘정광이 빼앗았던 게 다가 아니었구나!’

혹시 그럴지 몰라 충분히 주의했거늘.

절벽 하나를 통째로 날려 버릴 정도로 쓸 줄이야!

하지만 그들은 고수 중의 고수.

이미 정광을 따라 반대편 절벽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피하는가 싶었는데.

정광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절벽에 서 있던 사마련주의 모습이 사라져서였다.

‘반대편으로 뛰어내린 건가? 그렇다면!’

정광이 크게 외쳤다.

“천근추요!”

“……!”

절벽을 향해 날아가던 정광의 신형이 중간에 뚝 떨어졌다.

다른 노인들도 마찬가지.

그 순간, 그들이 내려서려던 절벽도 폭발했다.

콰아아아앙!

“망할! 이런 미친 새끼들을 봤나!”

“절벽을 모조리 무너뜨리다니!”

당기황과 창존이 분노하여 외쳤으나.

끝이 아니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바위만 해도 정신이 없거늘.

정광의 다급한 목소리가 그들의 귀를 울렸다.

“호신강기(護身罡氣)!”

동시에.

콰아아아앙!

그들이 내려서려던 협곡 사이의 길도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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