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협곡(峽谷)
호남성의 성도(省都)인 장사(長沙)는 비가 자주 내리고 하천도 많아 토지가 매우 비옥했다.
이렇다 보니 사람이 계속 몰려 나날이 번성할 수밖에.
반점, 주루, 객잔 등 무엇이든 간에 없는 게 없는 곳이었으나…….
현실은 이랬다.
“다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성안에 들어가 편히 쉬면 좋겠지만 외곽으로 가야 합니다! 너른 곳에서 노숙할 테니 양해해 주십시오!”
제갈문형의 외침에 사람들은 인상을 찡그렸다.
‘겨우 뭍을 밟았는데.’
‘언제 제대로 쉬어보나.’
‘장강수로연맹이 없으니 또 건량과 육포로 때우겠군.’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많은 인원이 한 번에 쏟아져 들어가면 어디에서 먹고 자겠는가?
괜한 소란만 일어날 터.
위험하기도 했다.
‘뿔뿔이 흩어져 자다가 사마련 놈들에게 칼침을 맞을지도 몰라.’
‘먹고 마시는 것에 수작을 부릴 수도 있고.’
‘됐다. 몸이 좀 불편하더라도 마음이 편한 게 낫지.’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정광은 담담한 얼굴로 그들과 함께 걷다가 성벽 쪽을 슬그머니 돌아봤다.
갑주를 입은 무관(武官)이 성벽 위에 서서 무림맹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정광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호북성이나 여기나. 황제가 단단히 주의를 줬나 보네.’
이렇게 많은 무림인들이 떼를 지어 움직이는데, 관(官)은 구경만 할 뿐 상관하지 않았다.
훼방 놓지 않을 테니 사마련과 마음껏 치고받고 빨리 죽으란 얘기.
‘그래도 추이를 지켜보기 위해 측근 한둘쯤은 내려보냈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성벽 위에 흑색 비단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났다.
눈처럼 하얀 피부에 붉은 입술을 지닌 사내였다.
정광은 감탄했다.
‘제법 생겼잖아.’
거리가 너무 멀어 무위를 짐작할 순 없었으나 외모만큼은 확실히 보였다.
‘흑색 비단옷에 수염 한 올 없는 사내라. 동창(東廠)의 내시인가?’
먼저 서 있던 무관이 극진히 맞이하는 모습을 보면 그럴지도.
‘약관인지 중년인지 나이를 알 수 없는 외모라니. 내시도 격이 있는 거겠지. 응삼(鷹三)이와는 달라.’
그때, 정광과 내시의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내시가 싱긋 웃었다.
정광도 씩 웃었다.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는 의미로.
알아들은 걸까?
내시의 미소가 더 커졌다.
‘싹싹한 녀석이네.’
아니면 웃는 게 습관일지도.
재수 없긴 매한가지였지만.
정광은 내시에게서 신경을 끊고 걸음을 서둘렀다.
잠시 뒤.
무림맹은 한적한 들판에 천막을 세웠다.
정광은 건량과 육포로 배를 채운 뒤 제갈문형을 찾아갔다.
“그래, 무슨 일인가?”
“혹시 이런 거 보신 적 있나요?”
쇠기둥 조각들을 내밀자 제갈문형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흐음. 천하에 이런 문자도 있었던가?”
“그럼 이만.”
“아, 아니. 어딜 가나? 머리를 맞대면…….”
“혼자 하는 게 빠를 것 같아서요.”
제갈문형은 무인이자 문인인 자.
정확히는 문인에 더 가까웠다.
생소한 문자를 본 문인이 쉽게 포기할 리 있나.
어떻게든 붙잡으려 했으나 정광은 신법을 펼쳐 도주했다.
군사께서 지금 이럴 시간이 있냐고 꾸짖으며.
‘천막에서 찬찬히 보자.’
무혈단 천막에 들어가 보니 단원들은 모두 운기조식 중이었다.
위진홍만 빼고.
‘이놈은 또 왜 이래?’
항상 그랬듯이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으나.
퀭한 눈이 번쩍거렸다.
‘뭔가 깨달은 건가?’
문자에 대해 물어보려고 했는데 생각을 깨기 싫어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 뭐라도 건져라.’
깊이 궁리해 왔던 만큼 얻는 것도 많으리라.
‘아니면 할 수 없고.’
정광은 위진홍을 응원하며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쇠기둥 조각들을 꺼내 죽 늘어놨다.
‘일단 암기부터.’
그 복잡한 형상들을 모조리 머릿속에 새겼다.
‘이제 이해해 볼까.’
전혀 모르는 문자라고 해독할 수 없는 건 아니다.
겹치는 단어가 나올 수밖에 없고 일정한 법칙을 가지기 마련.
수많은 뜻을 대입하다 보면 언젠간 답이 나오는 것이다.
무척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일이었으나 정광은 자신 있었다.
하지만.
‘부족해. 남은 게 좀 더 많았으면 좋았을 것을.’
조각이 너무 적었다.
표본이 이렇게 적어서야 뭐가 되겠는가?
‘상당히 오래 걸리겠는데.’
그것도 운이 좋았을 경우다.
정광은 눈살을 찌푸리며 조각들을 한데 모았다.
그리고 손으로 우그려 철구(鐵球)로 만들었다.
재질이 제법 단단했기에 그냥 버리긴 아까웠다.
‘묵직하니 던질 만하네. 내용은 다 외었겠다, 암기로라도 써야지.’
위로 살짝 던져 올렸다가 받는 걸 반복하며, 이걸로 누구의 머리를 깰까 고민하는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사마련에서 사신이 왔소!”
“홑몸이라 합니다!”
“어서 맹주와 군사께 알리시오!”
정광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신의 면상이 궁금했다.
뭐라고 떠들지도.
* * *
사마련 사신은 기골이 장대한 중년인이었는데, 팽수관을 만나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만 돌아가시오.”
“불가하오.”
팽수관이 일고의 여지도 없이 거절하자 사신이 힘주어 말했다.
“총단 앞 평야에서 기다리고 있겠소. 각오 단단히 하고 오시오.”
“……!”
혈혈단신으로 온 주제에 이리도 당당하다니.
무림맹 무인들은 내심 감탄했다.
‘배포가 대단하구나.’
정광은 양손을 매만졌다.
‘건방진 놈. 두들겨 패서 기분이나 풀까.’
문초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만약을 대비해 아무것도 모르는 놈을 보냈을 테니까.
하지만 팰 틈이 없었다.
팽수관은 사신을 그대로 보낸 뒤 회의를 소집했다.
“무혈단주. 어디를 가는가? 이리 오게.”
“저분 좀 배웅해 드리고 오면 안 될까요?”
“어디로 보내려고? 무간지옥(無間地獄)?”
“어? 그새 도를 닦으셨나 봐요.”
“흰소리 그만하고 빨리 오게나.”
주요 인물들이 모이자 제갈문형이 입을 열었다.
“장사에서 사마련 총단이 있는 형양(衡陽)까지는 대략 사백리(四百里)쯤 됩니다. 무리하지 않고 가도 며칠 안 걸리는 거리지요.”
“군사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사마련이 정말 총단 앞에서 결전을 벌일 것 같소?”
팽수관의 물음에 제갈문형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렇다면?”
제갈문형이 큰 지도를 펼친 뒤 몇 군데를 짚었다.
“거리는 짧으나 험지가 제법 있습니다. 저라면 이곳들 중 몇 곳에 함정을 팔 겁니다. 본맹의 전력을 조금씩 깎는 것이지요.”
“하긴. 나라도 그러겠소. 무혈단주, 자네 생각은 어떤가?”
“비슷한데요.”
“다른 점이 있다는 얘기군. 말해보게.”
정광은 간단히 답했다.
“함정을 파긴 할 건데, 크게 팔 거예요.”
“단숨에 전세를 뒤집으려고 할 것이다?”
“네.”
“허어.”
놀라는 팽수관과 달리 제갈문형은 동의했다.
“그럴 가능성도 큽니다. 한 번에 큰 타격을 줘서 물러나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니까요.”
무림맹이나 사마련이나 어느 한쪽이 전멸할 때까지 싸울 수는 없다.
그래 봐야 황제만 좋을 터.
상대에게 어느 정도의 타격을 주고 항복을 받아내야 했다.
“조금씩 갉아먹어 균형을 맞춘 뒤 물러나게 하느냐, 한 번에 크게 씹어 먹어 쫓아내느냐, 그 차이란 말이군.”
팽수관이 중얼거리자 당기황이 코웃음 쳤다.
“흥. 탁상공론을 해서 뭐할까. 오면 오는 대로 해치우면 돼.”
“노선배께는 발언권을 안 드렸습니다만.”
“맹주. 이렇게 자꾸 무시할 건가?”
“무시라니요. 제대로 된 회의를 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럼 발언권을 주게나!”
“벌써 다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이익!”
“아. 노선배께 꼭 부탁드릴 역할이 있습니다.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지요.”
“……무엇이길래?”
“조용히, 가만히 듣고만 계셔주시는 겁니다.”
당기황이 버럭 화를 내려 했으나 팽수관이 더 빨랐다.
“끝까지 들어주십시오. 선봉에 서 주시겠습니까?”
“……내, 내가?”
“네. 노선배의 힘이 필요합니다.”
당기황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허구한 날 사고만 친다고 아들에게도 구박받는 처지이거늘, 자신의 힘이 필요하니 선봉에 서달라니!
“자, 자세히 말해주겠나?”
“실은…….”
팽수관은 능구렁이처럼 당기황을 상대했다.
다른 이들이 상식적인 의문을 제시하면 제갈문형이 나섰다.
회의는 제대로 굴러갔고 몇 가지 방침을 정하게 됐다.
“그럼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출발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팽수관이 회의를 파하자 사람들이 흩어졌다.
-무혈단주, 자네는 잠시 남게나.
-왜요?
-잠시면 되네.
팽수관은 제갈문형과 정광만 남게 되자 입을 열었다.
“맹원들의 사기가 보통이 아니네.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기세지.”
“그렇더라고요.”
“자네는 그러지 말게나.”
“네?”
“몸을 보중하란 말일세.”
제갈문형도 합세했다.
“자네는 본맹의 상징이요, 맹원들의 우상이네. 혹시라도 잘못되면 사기가 엉망이 될 게야.”
정광이 황당한 얼굴로 대답했다.
“잘못될 리 없는데요.”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일세. 난전이 될 텐데 어찌 확신하는가?”
“당연하니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제발 조심하게나.”
정광은 또 부정하려다 말았다.
괜히 얘기만 길어질 게 뻔하지 않은가.
“그럴게요.”
“믿겠네.”
“가도 되죠?”
“믿겠다니까.”
“네. 그러시죠.”
정광은 그들에게 포권한 뒤 천막을 나왔다.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쓸데없는 걱정이었으나 기분이 나쁘진 않아서였다.
‘다들 사기가 높긴 높아.’
주위를 둘러봤다.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무혈단 역시 마찬가지.
본격적인 수련을 하기 전에 몸을 풀려는 걸까?
배정된 천막 앞에서 체조법을 행하고 있었다.
‘흐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같이 할까?’
정광은 단원들과 함께 몸을 움직였다.
힐끔거리던 맹원들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그리고 똑같은 체조법을 펼쳤다.
맹에 퍼질 대로 퍼진, 정광이 만든 체조법의 전팔식(前八式)이었다.
체조법이 품고 있는 선기(仙氣) 때문일까.
숙영지인 너른 들판에 부드러운 기운이 퍼졌다.
그 기운에 이끌려 천막에서 나온 불존이 미소지었다.
“선재(善哉), 선재로다. 따스하기 그지없구나.”
근처에 있던 환존이 그 말을 받았다.
“도기(道器)가 아닌 녀석이 현기(玄機)가 담긴 수련법을 만들다니. 이해가 가지 않소.”
“이해하면 어떻고 못 하면 어떻소.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을.”
불존의 말처럼 맹원들은 부드러운 기운을 의문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점점 많은 이들이 체조법을 펼쳤고, 얼마 안 가 모든 맹원들이 하게 됐다.
그렇게 무림맹은 하나가 되었다.
불존은 반장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미타불.”
* * *
다음 날 아침, 무림맹은 식사를 마친 뒤 출발 준비를 했다.
정광은 척후조를 이끌고 먼저 떠났다.
척후조는 고수 중의 고수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라 무척 든든했으나.
아주 시끄러웠다.
“제자야. 쥐새끼처럼 염탐해 봐야 뭐 하겠느냐? 이대로 달려서 총단을 치자.”
패기 넘치는 당기황의 말에 남궁학이 반박했다.
“죽으려면 혼자 죽어라.”
“뭣이?”
“네 녀석은 손이 천 개라도 되느냐? 그 많은 놈들을 어떻게 상대하려고?”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자 다른 이들도 끼어들었다.
정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달리다 나직이 말했다.
“척후 중인데 정숙하셔야죠. 계속 떠드시는 분은 돌려보낼 거예요.”
정광은 한다면 하는 사내.
척후조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이제야 좀 살 만하네.’
정광은 주변을 살피며 계속 달렸다.
제갈문형이 짚었던 곳이 나왔으나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일단 하나는 됐고.’
본대를 기다려 합류했다.
식사를 마친 뒤 다시 달렸다.
이렇게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이틀을 달렸다.
‘꽤 걸리네.’
안전을 최우선으로 했기에 무인들치곤 느린 속도였다.
그래도 별수 있나.
이대로 가야지.
척후조가 다시 출발했다.
정광은 신법을 펼치며 고개를 갸웃했다.
‘습격하기 좋은 곳을 벌써 몇 번이나 지났는데. 사마련주의 인내심이 생각보다 깊은 건가?’
얼마나 달렸을까.
저 멀리 중원 오악(五岳) 중 남악(南岳)으로 꼽히는 형산(衡山)이 보였다.
하지만 정광의 시선은 다른 곳에 있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는 협곡이었다.
‘이것 봐라?’
정광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희미한 기가 느껴져서였다.
그것도 아주 많이.
‘어쩐다.’
정광은 살짝 고민했다.
확인을 해보는 건 당연한 거고.
그다음 조치까지 취할까 말까?
답은 정해져 있었다.
정광의 눈이 빛났다.